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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이야기-1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2.10.08|조회수243 목록 댓글 0

피아골이야기-1

 

                                           왼편부터 우종수님,손명수님,고재원님,이재연님, 함태주님

 

피아골 


 노고단에서 임걸령 가는 길로 20분쯤 가면 등산로 오른편으로 비목이 있다. 1982년 5월 23일 지리산악회에서 지리산에서 숨져간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밤나무로 만들어 세웠다, 현재 나무에 가리고 등산인 들이 돌을 쌓아 비목 상부만 보이지만, 세울 때만 해도 지리산악회 회원들이 격식을 갖추어 세웠다. 이 비목을 세운 것은 1970년대 초(69년?)초겨울에 고흥(?)에서온 고등학교 3학년 학생 3명이 세석쪽에서 노고단으로 오다가 폭설을 만났다. 바람도 심하게 불고 기온이 크게 떨어져 시간이 지체되어 밤이 되었다. 기진맥진하여 돼지평전에서 능선을 타고 오다 현재 비목이 서있는 곳에서 노고단 쪽으로 100m쯤 오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노고단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 이 학생들은 담요를 둘러쓰고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데 그 중 한 학생이 친구들에게 이대로 있으면 모두 죽게 생겼으니 내가 노고단에 가서 도움을 요청 할 테니 이 자리에서 떠나지 말고 있으라고 당부를 하고 혼자 노고단을 찾아 떠났다. 이 학생은 천신만고 끝에 노고단 이 영감님 초가집에 도착하여 문을 한 번 때리고는 쓰러졌다. 당시 이 영감님은 밤에 집 밖 처마 끝에 항상 석유램프를 켜놓았었다. 이 영감님은 잠결에 문을 할퀴는 듯한 소리가 나서 잠을 깨어 짐승이 문을 할퀴었는지 생각하면서 귀를 기울이니 문밖에서 사람의 신음 소리가 나는지라 나가보니 학생이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방으로 떠메어 들여놓고 보니 의식이 없어 온몸을 주무르고 이불로 덮어주니 학생은 깊이 잠이 들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난 학생은 친구들을 찾는 것이었다  친구들을 두고 왔는데 그만 잠들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노고단에 주둔했던 군인들에게 연락하여 현지로 달려가 보니 한  학생이 담요를 둘러 쓴 채로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구조되었으나 한 학생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가 없었다. 다음 해 봄 눈이 녹은 뒤에 이학생의 시신이 돼지평전에서 발견되었다. 방향감각을 잃어 다시 오던 길로 갔던 것이다. 다시 바람이 세찬 눈보라가 날리는 능선으로 되돌아간 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고산에서 눈보라를 만나면 눈을 뜰 수 없고 숨쉬기도 어렵다. 1970대 초에 노고단 산장에서 함태식씨를 도와주고 있었던 김주완씨는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오다 눈보라를 만나 얼마나 힘들었던지 치아가 솟아버려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남아 있었던 학생에게 왜 혼자 나서는 학생을 말리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말릴 힘만 있어도 같이 나섰을 텐데 힘이 없어 남게 되었으며 나선 학생은 ‘엄마~ 엄마~’를 부르며 갔다는 것이다. 눈이 없다면 초가집을 30분 남겨놓은 곳이었다. 후일 지리산악회에서는 이 학생이 숨진 지점에  비목을 세우고 이학생의 영혼과 지리산에서 숨져간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목을 세웠다. 현재 비목은 등산인들이 하나 둘 놓은 돌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비목을 지나면 남쪽으로 시야가 터지는 골짜기가 피아골이다, 위에서 보면 피아골 오른쪽 경계는 노고단에서 질매재-문바위등-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며, 좌측은 삼도봉(날라리봉)-불무장등- 통꼭봉-황장산으로 이어지는 불무장등 능선이다.

 

 

                          철다리 왼편 아래 바위에 지리산악회에서 쓴 삼홍쏘 표시가 있음

 

아~~~~피아골!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골짜기


 피아골은 단풍이 아름다운 계곡이다.  피아골의 아름다움은 봄에 수달래, 여름의 신록, 가을 단풍, 겨울 설화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가을의 단풍은 지리산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단풍은 매년 좋은 것은 아니고 기후에 따라 특히 좋을 때가 있다, 또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이다. 가을에 비가 적절히 오면 지리산 남사면인 피아골 등의 단풍이 좋고 건조하면 지리산 북사면인 뱀사골 등이 좋다, 불꽃처럼 붉은 붉나무(오배자나무)와 개옻나무, 단풍나무의 선명한 색과  우윳빛 구절초, 샛노란 산국꽃, 남색 지리바꽃, 숨어있는 자주색 좀작살나무 열매라도 찾아볼 수 있으면 더 아름답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 실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소리, 숲에서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를 듣고 무슨 새인지 알 수 있다면 더 정겹다,  피아골의 단풍은 우리가 반만년 동안 익숙했던 다양한 빛깔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역어낸 교향악처럼 어울려 한번 경험한 사람들의 가슴에 언제나 큰 울림으로 기억된다.


 피아골의 단풍은 산이 붉게 불타는 산홍(山紅), 붉은 나뭇잎이 맑은 계류에 비치는 수홍(水紅), 사람이 들어서면 사람도 붉게 물드는 인홍(人紅) 그래서 삼홍(三紅)이라 한다. 지리산악회  우종수회장님은  표고막터에서 1km쯤 오르면 계류를 건너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담소를 남명 조식 처사의 시구에서 빌려와 삼홍소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삼홍소는 탁족을 하기에 좋은 장소로(지금은 철다리가 놓여있음) 물이 너무 차가워서 무더운 여름에도 물에 들어가 30초를 견디기가 어렵다. 연하반 원로 고 함태주씨는 삼홍소에서 30분이 넘게 목까지 잠겨서 목욕을 하신 일화로 명성을 얻을 만큼 건강한 분이셨다,


 이분은 우리나라 군악대 창설에 참여하신 분인데 색스폰 연주를 잘하신 분으로  지리산과 섬진강을 좋아하여 집을 구례읍 원방리 섬진강변에 지으시고 등산을 항상 부인과 함께 다니셨는데 자연보호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있었던 분으로 산악회 젊은 회원들에게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강조하시곤 하셨다. 1978년 노고단~만복대 등산 중 필자가 후미에서 가다 에델바이스꽃(솜다리) 다섯 송이를 발견하였다. 지리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에델바이스를 혼자 보았으니, 순간 뽑아서 앞에 가는 분들에게  보여줄 마음도 있었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쉬는 시간에 일행들에게 에델바이스를 봤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함태주 원로께서는 당신도 보셨는데 귀한 꽃이라 젊은 사람들이 애인 주려고 뽑아 갈까봐 말씀 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이분은 저에게 젊었을 때 여행을 많이 다니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이 들면 좋은 경관과 역사현장을 봐도 감동이 적다고 하시면서……. 피아골의 깊은 숲처럼 조용한 성품과 지리산의 튼튼함을 타고나셨던 고 함태주 원로님은 진정한 연하인(烟霞人)이셨다.


피아골의 어원에 두 가지 설이 있다. 피아골에서 내려가면 첫 동네인  직전(稷田)마을이있다. 

 피(稷)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옛날부터 이곳에서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다는 의미가 바로 피아골의 어원이라고 한다. 또 정유재란 당시 석주관을 지키던 왕득인을 비롯한 구례의 의병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고, 구한말 고광순의병장등이 연곡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했는데, 이분들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많이 희생 되었을 때 피가 내를(血川) 이루어 피내골이라고 불렸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도올 김용옥씨는 2006년 8월 구례 실내체육관에서 “구례 문화의 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피아골의 어원은 임진란과 정유재란때 의병들이 희생되어 피가 내를 이룬 연유로 피아골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지리산 깊은 계곡에는 많은 곳에서 아픈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정유재란 당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의병장 왕득인 등 칠의사들이 구례군 토지면 석주관이라는 산성에 주둔하면서 전투를 치뤘는데,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는 지점에 있어 협곡이 좁아 가야 시대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는 군사  요충지였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칠의사 중 한분인 왕의성의사가 패퇴한 후 불무장등 능선에서 통곡을 하였다는 유래의  통꼭봉이 있으며, 황왜(抗倭)의 역사 현장인 연곡사가 있다,   여순 사건과 5.25를 거치며 좌우의 대립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1984년 현 피아골 산장을 건립할 당시 터를 고르면서 한 트럭 분의 인골이 출토되었다고 산장지기 함태식씨는 증언하고 있다.


피아골에는 무수히 많은 지 계곡이 있다, 지 계곡에 들어가면  빨치산들이나 산에 숨어서 살았을 사람들의 근거지를 가끔 만난다, 이런 곳에서는 주인 잃은 찌그러진 양은 그릇이나 다 썩은 고무신, 깨어진 옹기 조각들이 보이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나 동물이 사는 곳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근거지에는 먹을 수 있는 물이 가까이 있으며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안온한 지역으로, 좌 우는 작은 골짜기들이 겹쳐 있어 외적이 침입했을 시 도망을 갈 때 뒷모습이 상대에게 노출되는 시간이 짧은 지역이다, 큰 골짜기에서는 추적자에게 잘 보이게 되니 공격을 더 받을 수 있다. 그러한 근거지 에서는 흔히  멧돼지의 겨울 잠자리 흔적이 보인다. 우리 인간들도 자연의 일부로 살았을 때 동물의 본능과 학습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동물적 감각으로 먹이를 취하며 생명을 유지 했으리라. 산행중 배가 고프고 지치면 걸을 수 도 없다. 필자도 1970년대 초 세석산장에 짐을 두고 천왕봉을 가볍게 다녀올 생각으로 빵 몇 개를 들고 나섰다가 천왕봉에서 시간을 지체하여 돌아오는 길에 너무 지쳐 흐느적거리며 걷다가. 촛대봉을 지나 내리막 길을 바지가 헤어지든 말든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미끄럼을 타면서 내려온 경험이 있다.    동물들은 먹이에 생명을 걸고 집착한다. 멧돼지는 늦은 겨울에 약14시간을 노력해야 배를 불린다고 한다. 먹이가 없는 1월부터 침엽수림 아래 낙엽 속에 있는 손가락 절반 크기의 버섯을 찾아 먹거나 칡을 캐어 먹는다. 칡을 캐어 배를 채워야 하니 그 노력이 얼마나 처절한가?

동물을 생포할 때 특정한 먹이로 유인하면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포획되고 만다. 불과 60여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가? 운조루의 일기를 보면 “마을 주민들이 소나무 속껍질(송쿠.송키)을 벗겨 먹기  위해 운조루 뒷산의 소나무를 벨 것을 허락했더니 나무 찍는 도끼소리가 쩡쩡 울려 마음이 아프다”고 기록하였다. 현시대의 사람들은 배불리 먹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식물들은 생존을 위하여 독성물질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떫은맛, 쓴맛, 신맛, 매운맛등 자극성 맛이 나는 것은 독성물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이나 나물 등을 채취하여 식재료로 쓸 때는 이제 막 피어나 부드럽고 독성물질이 덜 증가 했을 때 채취하여 활용한다.  도토리, 밤, 덜 익은  과일 등에는 떫은 맛이 나는 탄닌을 함유하고 있다. 동물이 탄닌을 많이 먹게 되면 잘 소화되지 않고 배앓이를 하게 된다, 야생동물들은 탄닌을 섭취하게 되면 그것을 중화시킬 수 있는 적정한 양의 사포닌을 함유한 식물을 먹는다고 한다. 야생동물은 산에 불이 나면 유독 물질을 흡수하는 해독제로 숯을 섭취하려고 모여들고, 독성물질을 중화 시키거나 유용한 물질을 취하려고 흙을 먹는다고 한다.

지리산 도처에는 혹독한 자연에서 살아 남으려는 빨치산들의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이 남아있다. 빨치산들도 설사를 하면 이질풀을 다려먹거나 숯을 먹었다고 한다.  빨치산들은 야생동물이 먹는 도토리, 딸기, 나물, 나무 새순등 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따먹었다. 정지아씨의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 1990)에는 ‘야산엔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고 노곤 노곤한 봄볕에 새 생명이 움터오는 아름다운 봄이었지만 빨치산 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춘궁기의 시작이었다……. 식량이 바닥나 하루를 굶은 채 야산으로 내려오자 취와 쑥이 제법 먹을 만하게 자라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쑥과 취를 뜯어 소금만 넣고 항고에 삶아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고 쓰여 있는데,  빨치산들이 극한 상황에서 무었을 먹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빨치산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연기가 가장 적게 나는 곰삭은 청미래 덩굴(맹감나무)과 싸리나무로 불을 피우는 등 자연물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피아골은 인간이 자연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흔적이 곳곳에 있다.


-피아골 계속-


*첫번째 글이 너무 길어 이번엔 짧게 올렸습니다. 글을 올리는 것을 당겨보려합니다. 몇일 후 에 올리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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