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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이야기-3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2.11.10|조회수120 목록 댓글 0

피아골 연곡사

 

연곡사는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서 가장먼저 들어선 절로 알려져 있다.

8세기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물로 보면 통일신라 말에 창건되어 고려 초에 번창한 절로 보인다고 한다. 연곡사에 남아있는 유물인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 삼층석탑 등은 선종계통의 문화유산으로 특히 동부도(국보 제53호)는 “부도중의 부도”라 할 만큼 단아한 기품을 지닌 최고의 걸작품이라 한다. 유홍준의 “3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는 “연곡사의 역사를 살피면서 나는 우리나라 돌문화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새겨보게 된다. ‘연곡사 사적기’라는 것이 제대로 전하는 것이 없어도 통일신라 동부도로부터 조선말기 부도까지 시대를 점철하는 석조물이 있어서 그 면면한 역사를 읽어낼 수 있으니 그것이 돌의 위대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연곡사는 저 아름다운 동부도가 있어 연곡사의 이름도 빛내고 피아골의 역사적 인문적, 예술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아무리 문화유산이 많아도 뛰어난 작품 하나가 없으면 어딘지 허전하지만, 모든 게 사라진 폐허라 해도 그 속에 천하의 명품 하나가 있으면 축복받을 수 있는 법이다. 연곡사 부도가 있는 피아골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연곡사 부도가 없는 피아골 이라면 얼마나 쓸쓸할 것이며, 변변한 문화유산을 간직치 못한 태백산, 설악산, 소백산 어느 골짜기에 이런 명품 하나가 있을 경우 그 산과 계곡이 얻었을 명성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돌문화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연곡사 동부도는 완벽한 형태미와 섬세한 조각 장식의 아름다움으로 부도중의 꽃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동부도는 도선 국사(827~898)의 부도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으며 안타깝게도 주인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동부도

 

 

                                                   동부도 하단의 조각상

 

피아골의 자연이 아름다움의 극치라면 연곡사의 동부도는 사람이 이룩한 아름다움의 극치가 아닐까? 이 동부도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가져가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나는 얘기다. 피아골을 오시는 분이면 연곡사의 부도들을 꼭 한번 만나시길 바란다. 연곡사는 정유 재란 때 1598년 4월 10일 일본군들이 불을 지르고 유물을 약탈해갔으며, 조선 인조 5년(1627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대사 태능(1562~1649)이 다시 복구하였다 한다. 영조 21년(1745년) 무렵의 연곡사는 왕가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어 있었다. 연곡사는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1907년 음력 9월 11일 밤에 일본군이 화개에서 당재를 넘어 습격하여 고광순이 순절하고 다시 일본 놈들에 의해 불타는 통한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고경명의병장의 후손으로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활동을 하다 연곡사에서 순절하였다. 고광순 의병장이 순절했을 때 구례의 선비인 박태현과 매천 황현은 연곡사까지 걸어가서 고광순의 시신을 수습하고 일꾼을 사서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고광순이 순절한 곳에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서 있다. (의병의 이야기는 구례역사의 석주관 칠의사 등 의병에 관한 역사의 이야기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연곡사 아래는 평도 마을이 있고 평도 마을에서 서쪽으로 계곡건너 남산마을이 있다. 남산 마을 노인 분들이 그분의 할아버지에게 들었는데, 1907년 연곡사전투 당시 총소리가 콩을 볶듯 하고 연곡사가 불타면서 엄청난 굉음이 좁은 골짜기에서 울리는데 지리산이 울부짖는 것처럼 느꼈으며 남산마을 북동쪽 산마루에 올라 엎드려서 그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고 하였다.

 

연곡사는 “율목봉산지소”로 지정이 될 만큼 옛날부터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때의 밤나무는 밤이 도토리보다 약간 큰 밤이 열리는 나무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지리산 곳곳에서 가끔 만나는 산밤나무는 밤나무의 원종인지는 잘 모르지만 손톱 크기의 밤이 열리며 당도가 뛰어나 사탕처럼 맛이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화엄사 금정암 여 스님들이 매년 밤쌀(밤을 말려서 껍질을 깐 것)을 가지고 왔었는데, 많이 열리는 해에는 한말씩 가지고 왔었다. 필자의 할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같은 부피의 쌀과 함께 콩, 팥, 들기름, 참기름을 챙겨 주시곤 하셨다. 밤쌀은 약밥을 지을 때 사용할 뿐만 아니라 밤에 화롯가에서 할아버님께 옛 얘기를 들을 때 몇 개씩 나누어 주어 사탕처럼 먹기도 하였다. 1970년대 피아골 단풍제를 치를 때만 해도 피아골 주민들이 그 토종밤으로 밤쌀을 만들어 노상에서 팔았었는데 요즘엔 볼 수가 없다. 필자는 화엄사 연기암 부근에 그 밤나무가 몇 그루 있어서 가끔 맛을 보고 있다.

 

 

 

                                                 홍류동

홍류동(紅流洞)

 

남산마을에서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200m쯤 따라가면 넓은 반석이 아름다운 지 계곡이 있다. 현재는 등산로가 폐쇄되어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호젓한 계곡이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을 홍골이라 불렀다. 피아골에서도 단풍이 제일 붉은 골짜기 였다는 얘기다. 피아골은 예로부터 연곡사가 있어 당시의 지식인들이 있었고 특히 구례의 역사상 가장 큰 스승인 천사 왕석보(1816~1868)선생님께서 잠깐 생활하기도 하였다. 천사 왕석보는 매천 황현의 스승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대학자셨다. 남산마을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서당이 있었고 어른들은 선비의 풍모를 갖추고 생활하셨다고 한다. 일제 초기 남산마을의 세분의 선비들이 평생 사이좋게 지냈는데, 홍골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분들이 이름을 남겨두고 싶었는지 남산마을 서쪽 홍골계곡 암석에 “紅流洞”이라고 음각을 하면서 그 아래 세분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지금도 남산마을 주민들은 이 고사를 떠올리며 서로 양보하여 다툼이 없는 마을로 이름이 높다.

 

옛날 큰길(신작로)이 뚫리기 전에는 구례에서 외곡리 목아재를 넘어 평도롤 거쳐 당재(당치마을 위 고개)를 넘어 화개면 범왕리 목통마을을 거쳐 범왕으로 또는 신흥, 의신으로 쌍계사로 통행을 하였다. 연곡골과 화개골의 통로인 당재(당치)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이었다. 지리산 둘레길은 목아재~당재~목통을 연결하는 옛길로 확정되었다 한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피아골 이 곳 저 곳을 찾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당치마을은 평도 마을에서 연곡사 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데 불무장등으로 오르는 등산로이기도 하다. 당치마을 위 농평마을까지는 승용차가 올라갈 수 있고 농평마을에서 통꼭봉을 거쳐 불무장등으로 삼도봉으로 오를 수 있다. 농평마을은 해발 800m에 있는 “높은 곳의 평평한 곳”이 와전되어 농평이라고 하는데, 풍수 지리적으로 “노호농골(老虎弄骨)이라는 명당터로 이름이 높다. 풍수지리 연구가 들이 구례에 오면 꼭 들렸다가는 유명한 마을이다. 산이나 들 또는 마을에 들어서면 어쩐지 아늑하고 평안한 기분이 드는 곳이 있다, 농평마을은 언제 가보아도 기분이 좋은 마을이다.

 

피아골은 골짜기가 깊고 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비탈진 땅에 석축을 쌓아 많은 농토를 일구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여순 사건 때 피아골에 사는 인구가 1,200 여명이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마을들은 여순사건과 6,25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곳 피아골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피아골의 마을들은 불태워졌고 주민들은 피아골 입구인 외곡리, 중기, 조동, 기촌 마을 등으로 피난을 하였다. 이주민들은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군,경에서는 피아골에서 농사를 지을 사람들은 매일 아침 8시까지 목장거리라는 곳으로 오면 팔뚝에다 도장을 찍어주고 군,경에서 총을메고 경계를 서주면서 농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소는 반란군에게 다 빼앗겨서 몇 사람이 함께 소 대신 쟁기를 끌어 농사를 지었는데 어렵게 수확한 농산물을 산사람들에게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다.

 

 

피아골에는 옛날 자식을 원하는 사람에게 자식을 낳아주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종녀(種女)들이 살았다고 한다, 종녀촌에는 성신(性神)어머니가 절대자로서 많은 종녀들과 시동을 거느리고 종녀들에게 순종과 희생을 강요했단다. 성신 어머니의 지배아래 씨받이 종녀들은 팔려가서 아들을 낳아주고 다시 종녀촌으로 돌아왔는데, 딸을 낳으면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그 딸을 종녀로 키워야 했단다, 어머니의 대를 이어 종녀로 살아가야 했던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성신 어머니는 자주 성신굴(性神窟)에서 성신(性神)에게 기원제를 지냈는데 시동과 종녀들을 거느리고 제단에 올라 주문을 올리고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며 성신가를 부르며 요염한 자태로 성신춤을 추었는데, 흥분이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욕정을 불태웠단다. 종녀촌은 사라졌지만 그렇게 살다 간 종녀들의 외로운 넋이 파랑새가 되어 지금도 슬픈 노래를 부른단다.(1974.4 월간 산 56호에 우종수회장님 발표문을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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