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반야봉 이야기-1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3.02.02|조회수133 목록 댓글 0

                                                 천왕봉쪽에서 바라본 반야봉-하성목님 사진-

반야낙조(1) 


 반야봉(1732m)은 노고단에서 약 3시간 거리에 있다. 지리산의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3대 주봉이라고 한다.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왕봉이며 두 번째 높은 봉은 천왕봉 동북쪽 봉우리인 중봉(1875m), 세 번째 고봉은 제석봉(1806m)이다. 네 번째 고봉은 하봉(1746m)이며, 반야봉(1732m)은 지리산에서 다섯 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반야봉은 북쪽 가까이 중봉이 있는데, 중봉도 높이가 1732m로 반야봉과 같다. 두 개의 같은 높이의 봉우리가 조화롭게 솟아 여인의 둔부처럼 보인다는 얘기들을 한다.

 

 반야봉은 지리산에서  비록 다섯 번째 높은 봉우리이지만 지리산의 중심부에 우뚝 솟아 사방의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있는 형상이다, 지금의 지리산은 국립공원 지정 면적 내의 지리산을 생각하지만 지리산맥 또는 지리산궤라고 불리는 경계는 지리산의 서남부를 감싸 흐르는 섬진강과 북동부를 안고 흐르는 임천-경호강을 경계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반야봉은 지리산의 중심부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겠다. 화담 서경덕은 반야봉을 지리산 최고봉이라고 하였는데 당시엔 반야봉을 지리산의 최고봉으로 여겼음 직 하다. 지리산 어느 봉우리에 올라서 바라봐도 반야봉의 빼어난 자태는 우뚝하다.


 필자는 초등학교 6년 때인 1964년 노고단 첫 등정 이후 반야봉의 웅자에 반해 몸살을 앓다가 1968년 여름 천왕봉 종주에 나섰으나 계속 비가 오는 상황에서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일행들의 반대로 반야봉을 오르지 못하고 지나치고는 더욱 더 몸살을 앓았다. 마침내 1971년 여름 반야봉을 올랐다. 당시에는 구례읍에서 화엄사까지도 교통편이 쉽지 않아, 반야봉을 하루에 다녀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임걸령에서 일박을 하였다. 반야봉 정상부 가파른 산행 길 옆으로 샛노란 원추리, 분홍 빛 산오이풀꽃, 주홍 빛 동자꽃, 둥근이질풀 등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매우 아름다웠다. 정상 가까이 직벽에 가까운 암벽이 있어 왼쪽 옆으로 돌아 나무를 붙잡고 어렵게 올랐다. 지금은 철다리가 놓여 있어 오르기가 쉽지만 당시엔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등정을 포기하는 분도 있었다.  정상이 가까울수록 영봉의 기운이 느껴져 엄숙하며 경외(敬畏)로웠다.


                                     반야봉에서 남쪽 불무장등 능선을 바라본 풍경-하성목님 사진-

 

반야봉은 행정 구역상 전라북도 남원군과 전라남도 구례군의 경계다. 노고단에서 보나 천왕봉에서 보나 중봉과 함께 완만한 쌍봉의 곡선을 그려 혹자는 여인의 둔부처럼 보인다고 표현한다. 종주 등반 중에는 반야봉을 쳐다보거나 뒤돌아보는 눈 맛이 산행 중 큰  즐거움이다.


 반야봉은 많은 사진작가들을 몸살 나게 한 지리산 최고의 촬영 소재였다. 필자는 1970년대 초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을 소재로 처음으로 전문적인 산악 사진을  촬영하여 지리산을 알린 김근원 선생님을 노고단 산장에서 뵈었다. 음력 초이튿날 겨울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다음날 눈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상 예보를 믿고 산행을 강행하였다. 언제나처럼 너털웃음으로 반겨주신 함선생님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조그마한 체구의 김근원 선생님이 한 배낭 가득히 카메라 장비를  메고서 산장으로 들어서셨다. 눈 쌓인 지리산을 담아보려고 홀로 노고단을 올라오신 것이었다.


 밤이 되면서 기온이 급강하하여 노고단 산장의  판자 마루인 바닥에선 살인적인 추위가 몰려왔고 유리가 깨져 비닐로 대처해 놓은 창에는 비가 눈으로 바뀌어 눈가루가 조금씩  섞인 칼바람이 불었다. 넓은 산장 한편에 등유 난로가 있었으나 너무 추워서 미군용 오리털 침낭을 가진 사람은 견딜만 했지만 군용 담요만으로 견디는 사람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모두 잠 한숨 못자고 새벽 동이 터왔다. 커피를 끓여 한잔씩 마신 후 밖을 나서니 눈은 그쳤으나 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고 기온은 영하 21도로 기록적인 맹 추위였다. 선도샘(지금은 없어졌지만 구 산장 오른편에 지리 산악회에서 정비한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었음)은  꽁꽁 얼어 있었다. 호기 좋은 일행이 얼음을 깨고 머리를 감고는 말리려고 손으로 터니 머리카락이 커트를 치듯이 부러져 나갔다. 일행은 해돋이를 보려고 반야봉이 보이는 산마루를 올랐다. 올라보니 김근원 선생님이 먼저 올라와 오리털 파카 지퍼를 열고 카메라를 품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서 계셨다, 산장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는데 함선생님이 거처하시는 방과 서울대 연습림관리 직원들이 쓰는 방이 있었다. 연습림 관리 직원들 방은 비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주무신 선생님은 일찍 나섰던 것이었다. 카메라 셔터가 얼면 작동이 안 되니 품에 안고 추위와 싸우고 계신 것이었다. 하늘은 찌푸렸지만 반야봉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곧 해가 떠올랐으나 구름에 가려 노을처럼 보일 뿐 이었다. 김근원 선생님은 콧물을 눈물처럼 흘리시며 몇 장 촬영을 하시곤 우리와 함께 하산하시는 수 밖에 없었다.



 지리산 풍경 사진 작품 중에는 제석봉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는 풍경을 촬영한 것이 가장 많을 것이다. 제석봉의 고사목과 철쭉을 곁들인 봄풍경, 반야봉 오른쪽 어깨위로 넘어가는 해와 붉게 타는 하늘의 여름 풍경, 좌측으로 주릉이 운해 위에서 용의 등처럼 꿈틀대고 반야봉이 용의 머리가 되어 뒤돌아보는 형상의 풍경, 눈 쌓여 처연한데 고사목에 핀 빙화에 사선으로 빛이 비추어 영롱한 반사광이 보석처럼 빛나는 이른 아침 정경 등 어느 것 하나 장엄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지리산 관통도로가 개설되지 않았을 때는 노고단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며 촬영한 작품 역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도로 개설로 접근이 용이한 노고단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는 풍경 작품은 작가의 노고 역시 반감된 것으로 느껴져 감동을 덜 준다.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풍경이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이다. 또 아무리 좋은 풍경 사진을 본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지 않은 곳의 사진에서는 큰 감동을 받을 수 없다. 자신이 흘린 땀이야말로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원천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진 작품이라 하더라도 현장의 분위기를 다 담을 수 는 없다. 보는 이의 정서에 따라 다르게 보일 정경의 느낌을 어떻게 담을 수 있겠는가?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이후 달의 신비감을 잃은 것처럼 차를 타고 쉽게 오르는 지리산, 자연이 훼손된 지리산이 되어서는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지리산 겨드랑이 깊이 날로 파고드는 도로와 현재 추진되고 있는 케이블카 등 각종 개발 행위는 지리산을 파괴하고 있다. 감동을 주지 못할 지리산을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하고 두렵다.


                                              제석봉부근에서 바라본 반야봉 -하성목님 사진-

 

반야봉 서북으로 백두대간으로 달리는 노고단~차일봉~만복대~바래봉 능선이 이어진다. 그 사이로 시야가 넓고 깊으니 지는 해 또한 쟁반 같이 커 보인다. 지리산 어느 곳보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정경이  빼어난 반야낙조다. 필자는 1975년에 연하천에서 장터목까지 가는데 세석평전에서 시간을 지체하여 오후 늦게 출발하였다. 촛대봉을 지나 삼신봉 연하봉 장터목으로 가는 길에 반야봉 머리 위로 지는 해와 붉게 타는 노을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산행을 한 경험이 있다. 지리산 동부 주능에서 반야봉 머리위로 넘어가는 해와 노을을 바라보는 정경 또한 빼어나다. 


 반야봉(般若峰)의 반야는 불교 용어로 지혜를 뜻한다고 한다, 지리산을 지혜로운 산 또는 지혜를 주는 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야에서 연유한다.

 반야봉에는 지리산 산신 중 女神인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마고(麻古)할미,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그 천신의 딸인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서  반야봉 암벽에 걸려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봉은 지리산 3대 주봉중 男神이 주재하는 봉우리이며, 따라서 女神이 주재하는 천왕봉보다 비록 높이는 낮으나 지리산의 주봉임을 말하고 있다.


         반야봉 왼쪽 뾰쪽한 봉우리가 노고단이며 사진의 왼쪽 멀리보이는 봉우리는 광주 무등산임-하성목님사진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