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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 이야기-2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3.02.02|조회수150 목록 댓글 0

화담 서경덕(1489~1546)은 반야봉을 올라보고 지리산 반야봉에 묵다"라는 글과 詩를 남겼다.


"반야봉은 지리산의 최고봉이다. 이 날은 청명하여

엷은 구름까지도 모두 씻은듯하여 만리가 탁 틔었는데,

 해는 저물고 길은 멀어서 마침내 봉우리 위에

묵게 되었다. 밤에는 은하수가 깨끗하고 맑았으며

조각달이 밝아 나무 우거진 골짜기를 맑게 비치어

자욱이 솟아나는 듯 하였다.

동편에 아침 해가 뜰 무렵이 되자 희미하게 여러 산

봉우리들이 점점 모두 드러나서, 태초에 자욱하던

기운에서 천지 만물이 생겨나던 때도 반드시 이와

같았을 것 이라 생각되어 詩 한수를 지었다.


지리산은 우뚝 솟아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네

(지리외외진해동 智異巍巍鎭海東)

산에 올라가 보매 마음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등림심안호무궁 登臨心眼浩無窮)

벼랑의 바위는 장난치듯 솟아 더욱 빼어났으니 

(참암지완봉만수 巉巖只玩峯巒秀)

충만하기만 한 조물주의 조화를 그 누가 알랴. 

(방박수지조화공 磅礴誰知造化功)

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

(축지현정흥우로 蓄地玄精興雨露)

하늘이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함천수기산영웅 含天粹氣產英雄)

산은 오직 나를 위하여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

(악지위아청연무 嶽祗爲我淸煙霧)

천리 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이려니.

(천리래심성소통 千里來尋誠所通)

 

옛 부터 반야봉은 많은 사람들이 순례자처럼 오르던 곳이다.

지금처럼 길이 지리산을 파고 들지 않았던 시절에는 지리산에서 반야봉이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화담 서경덕 사후에 황진이는 서경덕이 주유했던 곳을 찾아가서 서경덕을 회상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황진이가 혹 지리산 또는 반야봉에 대한 글이나 시를 남겨두었을까 몹시 궁금하다.


반야낙조를 보려고 많은 분들이 반야봉에서 야영을 한다, 지금은 야영을 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날씨가 좋은날은 반야봉 언저리에서 몰래 야영을 하거나 텐트를 치지 않고 비박을 해 가면서 낙조를 보려한다.


지리산의 봄 2

               고정희


-반야봉 부근에서 일박-


지리산 반야봉에 달 떴다 

푸른 보름달 떴다

서천 서역국까지

달빛 가득하니

술잔 속에 따라붓는 그리움도 뜨고

지나온 길에 누운 슬픔도 뜨고

내 가슴속에 든

망망대해 눈물도 뜨고

체념한 사람들의 몸속에 흐르는

무서운 시장기도 뜨고

창공에 오천만 혼불 떴다

산이슬 털고 일어서는 바람이여

어디로 가는가

그 한 가닥은 하동포구로 내려가고

그 한 가닥은 광주로 내려가고

그 한 가닥은 수원으로 내려가는 바람이여

 때는 오월, 너 가는 곳마다

무성한 신록들 크게 울겠구나

뿌리 없는 것들 다 쓰러지겠구나


1991년 뱀사골에서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고정희 시인의 시다

1980년 광주의 봄을 격으며 절망한 고 시인은 민주와 자유,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등을 꿈꾸며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고 다녔다, 고 시인은 지리산에서 절망을 넘어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지리산의 봄 4

                 고정희


-세석고원을 넘으며-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 분노로 가득차 절망하는자. 이념의 차이로 쫓겨온 사람들을 차별 없이  누구나 품에 안아주는 산이다. 고정희 시인은 갈등 없고 차별 없는 지리산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리라. 지리산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쓴 고정희 시인은 1991년 뱀사골 등반도중 불의의 사고로 지리산의 품에 잠들고 말았다. 

고정희 시인이 살아 계셨으면 이땅에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7년 이후 10여 년 동안에 아픈 지리산이 아닌 밝고 아름다운 지리산을 그려 주셨을 텐데, 뱀사골을 가거나 화개재를 지나칠 때면 마음이 아프다.


                                               반야봉에서 묘향대로 내려가는 곳의 주목 군락지

 

2004년 3월1일 도법스님, 수경스님, 이원규, 박남준시인은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지리산에서 시작하였다.  

뭇 생명들의 평화를 위한 삶의 문화를 확인하기 위해서 3년 기한으로 남한의 산천과 인간이 사는 마을을 돌아보는 대장정이었다.

뭇 생명들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출발이 지리산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년 500만 명의 탐방객이 찾는 평화로워 보이는 지리산은 역사의 굽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들어 살려고 몸부림쳤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만은 자제되는 평화세상은 없는 것일까?.

실상사 주지스님이셨으며 귀농학교를 열어 유기농법을 가르치셨고,  “지리산생명연대”라는 환경단체의 상임대표를 지낸 도법스님. 불교환경연대 대표이며 “새만금 삼보일배”의 주역이신 수경스님,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지리산 품속에서 살고 있는 이원규시인은 지리산을 가장 잘 아는 분들이다. 이분들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갈등의 현장인 지리산자락에 살면서 우리민족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았고, 그러한 상처들을 자연의 질서 속에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이분들은 우리의 요람인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지리산의 자연을 보전하기 위한 행동을 서슴치 않으셨다. 이 땅의 뭇 생명들이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꿈꾸는 이분들은 모든 갈등의 주역인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는 “생명평화”를 외치며  길로 나섰다. 필자는 “지리산생명연대”의 공동대표로서 구례를 걷는 첫날 함께 하였는데,  평화로운 삶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야봉은 지리산중 에서도 자연생태계가 가장 우수한 지역 중 하나이다, 반야봉 서사면인 심원 골짜기에는 아름드리 신갈나무가 많으며 반야봉 주변 표고 1,200~1,400m 에는 우리나라 특산종인 구상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북서 사면 1,600m 지점에는 주목과 잣나무 군락지를 볼 수 있다. 이곳엔 주민들이 개발딱지(취)라고 부르는 단풍취가 많다. 단풍취의 줄거리는  단백질이 많아 지리산에서 최고의 나물로 치는데 맛 또한 일품이며 반달곰도 이 단풍취를 많이 먹는다. 단풍취는 줄거리가 올라와 잎이 어린아이 주먹처럼 피기 시작하는 것을 채취하는데 잎이 단풍잎처럼 활짝 피면 줄거리도 질겨져 먹을 수 없게 된다, 단풍취가 제철인 5월 중순에는 많은 사람들이 단풍취를 채취하기 위해 반야봉 일대에 몰려들고 곰도 모여든다, 사람은 단풍취 줄거리를 손으로 뜯으니 지면 가까이에서 뜯고, 곰은 입으로 뜯으니 지표에서 약 2-3cm 위에서 뜯어진다, 따라서 단풍취 줄거리가 뜯어진 상태를 보고 곰이 뜯어 먹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른 아침에는 곰이 단풍취를 먹다가 사람들이 올라오면 자리를 피해준다, 주민들은 나물을 채취하러 산에 .오를 때 노래를 부르거나 어~이 어~이하는 소리를 치고 막대기로 바위나 큰 나무를 두드려서 곰이나 멧돼지등 야생동물들에게 사람이 가고 있음을 알려 미리 도망가도록 유도한다.


                                                      반야봉 주변의  개발딱지(단풍취) 군락지

 

반야봉 일대에는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하늘다람쥐, 담비, 멧돼지, 노루, 고라니, 오소리등 많은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심원 마을 주변 계곡에는 수달이 서식하고 있다. 심원 마을의 송어 양식장에는(2002년 폐쇄) 수달이 송어를 잡아먹으러 자주 나타났었으며, 2004년에는 식당의 수족관에 침입하여 송어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심원 계곡에는 식당에서 파는 송어와 산천어를 풀어주기도 하여 외래종인 송어와 산천어가 서식하고 있다.


반야봉 일대에는 곰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지리산 빨치산의 남부군이 반야봉 부근에 주둔했을 때  쌀을 가마니채 쌓아 놓았는데  하루에 한가마니씩 없어졌다고 한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보초를 세웠더니 밤에 곰이 나타나 쌀가마니를 등에 지고 갔다고 한다. 보초를 선 사람이 총을 쏘아 곰을 잡아서 고기는 삶아먹고 쓸개는 부산으로 선을 대서 팔아 활동비로 썼다고 한다.


1960년대 심원 마을에는 곰 박센이라는 분이 사셨다. 이분은 반야봉 일대에 곰잡이용 덫을 설치하고 긴 대에 하얀 천을 달아 깃발처럼 만들어 덫과 연결시켜 마을에서 잘 보이도록 세워 놓았다, 곰이 덫에 걸리면 세워놓은 깃발이 펄럭이거나 넘어져 보이지 않게 되니 고생을 덜하고 곰을 많이 잡았다고 한다. 6,25이후 사회 혼란기때 표범, 사향노루, 반달가슴곰등 야생동물들의 수난기 였다. 누구든 닥치는 대로 잡아도 되는 시절이었다. 70년대 초까지 구례 오일시장에서는 곰고기와 곰기름, 웅담을 노점에서 팔았다.


1968년 8월초에 필자와 친구 5명이 지리산 종주에 나서 임걸령에서 일박을 하였다, 군용텐트 2개를 치고 저녁밥을 해먹고 잠을 자려는데 반야봉 서사면에서 곰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하는 곰의 소리는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다른 텐트에서 잠을 청하던 일행들도 일어나 이게 무슨 소리냐고 겁에 질려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필자는 모두다 항고(군용 밥 짓는 그릇)와 냄비를 들고 수저로 두들겨 소리를 내어 곰을 쫒자고 하였다, 하나 둘 셋을 구령하고 야~~~~하고 모두 소리를 지르며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리고 나서 가만히 있으니 이후 곰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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