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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반의 지리산 개척사-1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5.06.18|조회수197 목록 댓글 2

        1955년 5월 지리산 노고단 등반을 위하여 서시천 징검다리를 건너는 연하반원(구례중학교 교사분들)들(앞, 우종수)

        (두번째 윤승호) (세번째 이규종)

연하반의 지리산개척사-1

 

어깨에 다래끼(아가리가 좁고 바닥이 넓은 작은 바구니)를 멘 소년은 요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으나 동남쪽 멀리 지리산 마루는 구름에 가려 있었다. 요천(蓼川)은 섬진강 상류로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의 경계에 있는 백운산(白雲山:1,278m)에서 발원, 남쪽으로 흘러 남원시의 동쪽 변두리를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전남 곡성군과의 접경지역에서 섬진강에 합류한다. 섬진강 유역 중 가장 넓은 분지인 남원분지를 관통하여 흐르는 하천이다.

소년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요천으로 가고 있었다. 요천은 물이 매우 맑아 고기들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수초가 우거진 하천 가장자리에서는 수초 밑을 손으로 더듬어 메기나 붕어를 잡을 수 있었고, 모래가 깔린 곳을 걸어가면 모래 속에 숨어있던  모래무지나 지름장어(기름종개) 등이 모래에서 튀어나와 도망가는데 다시 모래를 파고 숨으면 가만가만 접근하여 재빨리 발로 밟고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발에 밟힌 고기를 잡는다. 은어는 한 마리를 겨냥하여 집요하게 쫒으면 도망가다, 호박돌(호박만한 크기의 돌)밑으로 숨는데 급하면 머리만 들이밀고 몸통은 내 놓은 채 숨기도 한다. 접근하여 쉽게 손으로 잡을 수 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요천에서 물놀이도 하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이 요천에 도착하니 요천은 붉은물이 흐르고 있었다. 남원에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웃비가 와서 붉덩물(홍수)이 흐르고 있었다. 물이 맑아야 고기를 잡을 수 있을 텐데 난감했다. 몸이 아프셔서 식사를 잘못하시는 할아버님께서 물고기가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약 2km를 걸어 고기를 잡으러 요천으로 나왔는데 남원에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위 지방에서 비가 와서 요천물이 붉게 흐르니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소년은 요천 옆 논둑에 앉아 쉬다가 요천을 따라 남으로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물이 빠지면서 만들어진 물웅덩이가 있었다. 웅덩이의 수심은 깊은 곳이 30cm쯤 되었으며 폭이 넓은 곳은 2m ,길이가 5m쯤 되어보였다. 물빛은 탁해서 고기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물웅덩이 에는 물이 빠질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갇혀 있을 것이다. 소년은 옷을 벗고 막대기를 주어  물웅덩이 아래로 물이 빠져 나가도록 수로를 만들기 위해 흙을 파기 시작했다.  수로가 시작되는 부분에는 작은 돌로 쌓아 놓아 물만 빠져 나가고 물고기는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길이 약 3m 깊이 약 30cm를 파서 수로를 만들면, 웅덩이의 물이 절반은 빠져 나갈 것 같았다. 햇볕이 뜨거웠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땅을 팠다. 자갈이 맞물려 파기가 쉽지 않았다.먼저 큰 돌의 주위를 나무 막대기로 파고 돌을 파내면 좀 더 쉽게 파낼 수 있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먹기 위해 모래가 많은 곳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부유물이 가라앉으니 물의 윗부분은 맑았다. 엎드려서 입을 대고 천천히 물을 마셔야 그나마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 배가 고파 다래끼에 담아온 삶은 감자 몇 개를 소금에 찍어 먹었다. 약 3시간 후에 수로를 만들 수 있었다. 웅덩이의 물은 순식간에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자갈을 쌓아 만들어 놓은 곳에 물고기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피리(피라미)들이 몰려들었다. 손으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물이 절반이나 빠져 나간 물웅덩이에서 물고기들은 돌 사이나 밑에 숨었다. 소년은 손으로 더듬어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징거미 피리(피라미) 붕어 멍청이(동사리) 자가사리 메기 등을 잡을 수 있었다. 물웅덩이에는 많은 고기들이 갇혀 있었다. 작은 고기들을 잡으면 보릿대 모자를 뒤집어 물에 띄워 놓고 그곳에 모았다가 본류에 풀어주어 살려주고 비교적 큰 고기만 다래끼에 담았다. 곧 작은 호박만한 다래끼에 가득 고기를 잡았다. 아직도 물웅덩이에는 많은 고기들이 있었다. 2~3일 안에 비가 오지 않으면 물웅덩이는 마를 것이고 고기들은 모두 죽을 것이었다. 감자 몇 개를 먹은 것으로는 허기를 면할 수 없었다. 배가 고파 왔다. 물웅덩이의 고기를 잡아 강에 살려주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텐데 배가 고파 문제였다. 소년은 나무를 하러 산에 가거나 강에 고기를 잡으러 갈 때는 기름종이에 성냥을 꼭 싸서 가지고 다녔다. 강가에는 큰 홍수가 났을 때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이 흔했다. 소년은 두 아름 정도의 나뭇가지들을 주워 자갈밭에 쌓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물웅덩이의 고기들을 잡아 살려주기 시작했다. 작은 물고기는 살려주고 큰 물고기는 구워먹기 위해 모았다. 소년은 주먹만 한 하얀 차돌(규석)을 주어 큰 돌에다 힘껏 던졌다. 차돌은 쉽게 깨졌고 깨진 차돌은 날카로워 칼을 대신할 수 있었다. 깨진 차돌로 고기를 다듬어, 모닥불로 달구어진 자갈에 올려놓고 구웠다. 노릿노릿 구워진 고기를 소금에 찍어 먹고 물을 마신 후에야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다시 물웅덩이에서 고기를 잡아 살려주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왔으니 7시간쯤 강에서 보낸 것 같았다. 물웅덩이에서 많은 고기들을 잡아서 살려주었지만 다 살려줄 수는 없었다. 다행이 비가 와서 그 고기들이 살아나기를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물에 몸을 씻고 몸을 말렸다. 잠자리들이 강바람을 타고 하루살이를 사냥하느라 분주히 날고, 서쪽하늘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동남쪽 멀리 지리산 마루엔 구름이 걷혀 있었다. 


              1955년 5월   반야봉을 뒷배경으로. 왼쪽 우종수, 안경쓰신분 강기중, 맨뒤 이규종

 

 

윗글은 아버님께서 해주신 얘기를 정리해본 글이다.

필자의 아버님은 1921년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공립보통학교를 다니셨다. 아버님은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상업학교를 다녔으며 동경에 있는 대동아학원 전문부 사학과를 3년 수료 하셨다.(학도병을 피하느라 졸업장을 받지 못하셨음). 당시 대동아학원의 강사로 있었던 김종백선생이 조직한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학도병으로 전장에 나가는 것을 피해 친구들과 함께 한국으로 잠입하셨다. 먼저 귀국하여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종백 선생님을 찾아가  일본 유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나가지 않고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은 곧 해방이 될 텐데 젊은 지식인들을 보호하여 독립국가 건설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는 강원도와 금강산 일대의 광산에 일꾼으로 취직을 하여 열심히 일하시다 신임을 얻고, 일자리가 나면 학도병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추천을 하여 일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다니셨다고 한다. 1944년 여름부터는 금강산에 있는 미쓰비시 회사에서 운영하는 중석광산에서 일하셨다. 1944년 12월 김종백선생이 조직한 ‘조선해방협동당’이 탄로가나 김종백선생과 수십명이 체포되었고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두 명이 금강산까지 잡으러 왔으나, 다행히 먼저 알고  탄약고에 숨어 있다가 밤에 눈 쌓인 금강산을 넘어 강원도 인제 진동계곡으로 피하셨다고 한다. 김종백 선생님은 해방되기 전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금강산에 있을 때 유점사에 놀러 갔는데 전북 남원이 고향이라고 하니, 주지스님이 서산대사의 ‘사산평(’(四山評)을 들려주면서 지리산은 넓고 장엄한 산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쉬는 날이면  금강산 이곳저곳을 올라보았는데,  친구와 둘이 비로봉에 올라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부둥켜안고 우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산평에서 ‘금강산은 빼어났으나 장엄하지 않고’ 지리산은 ‘장엄하나 빼어나지 않았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지리산을 꼭 오르리라 생각하셨다고 한다.(금강산에서 생활한 경험을 살려 1992년 수문출판사에서 발행한 ‘금강산가이드’를 쓰셨다)


해방 후 충남 대전에서 집안 어른과 함께 교육 사업을 하시다 5.25를 만나 처가인 구례로 피난을 오게 되었고, 부역을 하기 싫어 1951년부터 ‘구례중학교 교사로 근무를 하셨다. 구례에 살게 되니 지리산을 오르고 싶었으나 혼란기라 입산이 금지되어 오를 수 없었다. 1955년 4월 구례중학교 교사 여덟 분이 처음으로 구례경찰서에 입산을 신고하여 허락을 받고 노고단을 오르려 시도 하셨다. 일행 중에는 노고단을 올라본 경험이 있는 분도 없었고, 빨치산과 군경이 다니면서 수많은 길이 나 있어 노고단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하산했다고 한다. 1955년 5월 5일  구례중학교 교사들과 일반인들을 규합하여 ‘연하반’을 조직하고(회장 손재훈, 총무 우종수) 노고단 등반을 재도전했으나 또 실패하셨다. 1955년 5월말 마침내 노고단을 올랐는데, 장엄한 지리산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셨다고 한다. 날씨가 매우 좋아 반야봉 세석평전, 천왕봉이 뚜렷하게 보였는데 천왕봉을 올라보고 싶은 강열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셨다. 하산한 후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가 보신 분이 있는지 탐문해 보셨다고 한다. 아무도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오른분이 없었다고 한다. 화엄사~노고단~반야봉~벽소령~세석평전~천왕봉을 올라보고 싶으셔서 사냥꾼, 약초꾼, 빨치산 부역자들을 수소문하여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길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당시에는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는 오른 사람들이 많이 있어 문제가 없었고 반야봉에서 벽소령, 세석평전까지가 문제 였다. 옛 부터 세석평전에서 천왕봉을 다녔던 사람들의 기록은 많이 있었다. 아버님은 틈만 나면 봉우리에서 봉우리를 연결하는 등산로를 알기 위하여 화개 골짜기를 방문하는 등 집요하게 노력하셨다고 한다. 당시까지는 노고단에서 주능을 타고 천왕봉을 오르는 종주등반의 개념이 없었다. 


                                                                         길상봉에 올라 환호하는 연하반

 

 

아래 연하반 반지문은 1955년에 아버님께서 쓰신 것으로 정부에서 1978년에 발표한 ‘자연보호헌장’보다 23년이 빠르다.

  

                                                      烟霞伴 趣旨文


太古적 먼 옛날에 白頭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白頭大幹의 큰 물줄기가 南쪽바다 푸른 물결이 그리워 南으로 南으로 向해 힘차게 뻗어 내리다가 굽이쳐 흐르는 蟾津江 푸른 가람에 가로막혀, 그 精氣가 우뚝 솟아 멈추어 섰다는, 由緖깊고  傳設어린 智異山南麓, 三大三美의 天符地에 자리 잡은 風光明媚하고 山紫水明한 烟霞鄕 求禮! 여기 烟霞人들의 모임이 있으니 “烟霞伴”이라 부른다.

“烟霞”는 元來 山水 卽 自然을 뜻하는 말이고 보니, 自古로 世俗的 富貴와 功名을 浮雲처럼 여기고 俗塵을 떠나서 閑雲野鶴을 벗 삼아 樂山樂水 鴉遊養氣하는 賢人達士를 烟霞人이라 불렀다. 이에 옛 烟霞人들의 鴉趣를 동경하고 또한 아름다운 眞善美의 淸淨自然과 짝한다는 뜻으로 “烟霞伴”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러므로 “烟霞伴”은 情緖的 自然을 愛護憧憬하는 이 고장 山岳人들의 自生和同의 모임인 것이다.

우리 “烟霞伴”은 끝없는 대지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山水自然을 向하여 젊음의 浪漫과 情熱을 한껏 쏟아 삶의 보람을 찾아보자는 것이며, 淸淨無垢한 大自然의 純潔한 廣場에서 無言의 感化속에 天地浩然의 英氣와 高邁한 人間精緖를 길러 心身의 修養을 닦아보자는 것이며, 또한 날로 荒廢化 되어가는 조국강토의 自然을 愛護하여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보자는 것이니.

大地를 맑게 누비며 흐르는 맑은 물줄기와, 山野를 곱게 덮은 原始林의 푸른 숲은 人類發祥의 源泉이요 原始文化의 搖籃地이며, 또한 人類의 唯一한 꿈이요 마음의 故鄕임을 想起할 때, 오늘날의 우리 民族은 祖國江山의 荒廢로 因하여 마음둘 곳 없는 精神的 失鄕民이 되어가고 있음을 自覺하고 痛歎하는 바, 이에 우리 “烟霞伴”은 잃어가는 綠地帶 마음의 푸른 故鄕을 다시 찾으려는 自然愛護運動의 先驅者되어 一草一木에 대한 愛育之情과 一毫一鱗에 대한 惻隱之心으로 祖國江土를 사랑하는 民族的 情緖運動의 줄기찬 噴水가 되고저 自負하고 이 땅위에 自然愛護의 烟霞運動을 저마다 고장마다 일으켜 이름 그대로 地上의 樂園! 錦繡江山을 이룩하는데 寄與하고져 함이니. 이 江土 위에 아름다운 自然이 다시 蘇生하여 우리 겨레가 마음의 故鄕을 다시 찾게 되는 날 祖國江土의 삶 위에 보람의 瑞光은 더욱 빛나리.


                                    1955年 5月 5日  求禮ㆍ“烟霞伴” 會員一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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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jiris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6.19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자는 정신이 담긴글이라는걸 느끼면 족합니다 ㅎㅎ
  • 작성자jiris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6.21 주둥이가 작고 아래는 넓은 대나무나 싸리나무등으로 만든 고기등을 담는 바구니를 다래끼라고 한답니다.
    멍청이는 보호색을 믿고 손으로 잡으려해도 멍청히 가만히 있다가 잡히곤 한답니다.
    손이 닫는 순간, 순간 동작이 빨라서 잘 도망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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