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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하루

수행자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작성자자연|작성시간21.08.13|조회수21 목록 댓글 0

그래서 여러분들의 지금 상태를 정의하면 ‘좋은 일을 하는 일꾼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선 사업가가 불쌍한 고아들을 돕고, 노인들을 돕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그걸 운영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울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수행자는 아닙니다. 결국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 될 뿐이에요.

수행자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헌신적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일이 괴로움으로 쌓이지 않도록 늘 마음관리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정토회 일을 하면서 마음이 지치고 원망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고 수행적 관점을 놓친 거예요. 물론 이것은 저를 비롯해서 누구에게나 다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관점을 상당기간 놓쳤더라도 오뚝이처럼 다시 관점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중심이 잡혀 있어야 해요. 법문을 듣거나 상담을 하거나 명상이나 산책을 하다가 관점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심이 잡히면 몸이 아파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몸이 아프면 약 먹으면 되잖아요. 우울증에 걸리면 치료를 받으면 되잖아요. 다리가 아프면 지팡이를 짚으면 되잖아요. 못 걸으면 휠체어를 타면 되잖아요. 못 일어나면 누워서 하면 되잖아요. 수행적 관점을 놓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더 이상 괴로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괴롭다는 것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만약 수행적 관점을 놓치고 문제를 비수행적인 방법으로 푼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인 수행공동체의 정체성이 없어져 버립니다. 정토회의 모토는 ‘수행’이에요. 정토회가 만들어지고 나서 여러분들이 여기에 참여한 핵심 이유는 바로 수행입니다. 물론 그 취지에 대해 여러분들이 잘 모르고 참여했을 수도 있고, 취지는 원래 알고 왔지만 살다 보니 놓쳐버렸을 수도 있어요. 마치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목표가 있지만, 명상을 하다 보면 졸음이나 망상에 빠지거나 혹은 망상이 재미있어서 망상으로 큰 건물 한 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상한다고 앉아 있는 이유는 깨어 있기 위해서지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명상의 과정에서 어떤 연구를 하게 될 수도 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소득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행의 부수입일 뿐입니다.

수행적 관점을 지켰느냐, 놓쳤느냐?

정토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관심을 받았다’,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다’, ‘정토회의 재산이 늘어났다’ 이런 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부수입일 뿐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살다 보니 지은 인연의 과보로 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건 복에 불과하지 해탈은 아닙니다. 해탈은 그런 복이 있든지 없든지 아무 관계가 없어요. 만약 우리가 10년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안 알아주고 심지어 탄압을 하고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평가이지 수행자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세상이 이렇게 평가한다고 성공이고, 세상이 저렇게 평가한다고 실패이면, 우리가 어떻게 해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 놀음에 놀아나는 것일 뿐입니다.

‘수행적 관점을 지켰느냐, 수행적 관점을 놓쳤느냐?’

우리는 이것을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수행적 관점을 지켰으면 성공이고, 수행적 관점을 놓치면 실패이다’ 이렇게만 평가해야 합니다. 정토회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 좋을지 몰라도 그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복일뿐이에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복은 얼마 있으면 다 걷어가고 또다시 비난을 주게 됩니다. 그러니 비난을 준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어요. 또 조금 있으면 비난이 거꾸로 복이 되어 돌아옵니다. 고(苦)와 락(樂)은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찬받는다고 들뜨지도 말고, 비난받는다고 기죽지도 마세요.

출처
https://m.jungto.org/pomnyun/view/83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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