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님의 하루

남편의 성기능 장애를 알게 된 후 충격을 받았어요

작성자자연|작성시간21.09.27|조회수48 목록 댓글 0

“부부로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가장 밑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서로에 대한 신뢰에 바탕이 되는 혼인의 약속을 어기고 외도를 했다면 이것은 이혼 사유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는 외국에서 생활 중이라고 하셨는데요. 전 남편은 외국인입니까? 한국 사람입니까?”

“어릴 때 부모님과 이민을 온 한국계 외국인입니다.”

“남편이 성기능 장애가 있다는 것을 언제 알았습니까?”

“신혼 초에 알았어요.”

“아이가 있다면서요?”

“아이가 생긴 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한 것은 아니었고요.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을 시도했었죠.”

“인공수정으로 아이가 생긴 것인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따로 상담을 받았는데요.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저에게는 너무 힘들었어요.”

“두 가지 길이 있어요. 첫째, 질문자가 원하는 남자를 만나서 부부생활을 영위하려는 관점에서 보면 성기능 장애가 있는 남자는 질문자를 괴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혼 사유가 될 수가 있어요. 둘째, 그런데 만약에 서로를 사랑한다면 어떨까요? 부부 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한 부분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부족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남편이 신체장애가 있어서 여러 가지 일을 혼자 감내해야 해서 부족하다고 하잖아요. 이런 것처럼 남편이 성기능 장애가 있어서 부부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결혼생활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이라고 보면 어떨까요?

물론 어떤 사람은 부부관계에서 성적인 만족이 경제적 풍요나 다른 어떤 것보다 삶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혼하고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든지 재혼을 하는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런데 비구니 스님이나 수녀님들을 보면 성생활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잖아요. 또 결혼을 안 하고도 오빠와 부모님 등 가족들과 한 집에서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요즘 비혼주의자들이 많다 보니 부모 형제들과 한 집에서 어울려 사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부부관계는 성적인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상대가 어떤 성적인 결함이 있을 때 배우자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가족을 유지하는 데는 무방하다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장애의 정도가 일시적 장애라면 질문자가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는 게 좋습니다. 좀 더 편안하게 협조해주면 성기능의 일부가 회복될 수도 있거든요. 진단 결과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그때 선택을 해도 됩니다. 그런 방법이 있는데 질문자는 신혼 때 그 사실을 알고 너무 놀랐다고 했잖아요. 만약 그때 전남편을 장애인 취급하고 내치는 마음으로 대했다면 전남편은 성기능이 더 제대로 작용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질문자와 전남편이 지금 한 집에 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오빠하고 부모님과 한 집에 살 듯이 그저 가족으로서 아이의 아빠와 엄마로서 한 집에서 생활하면 됩니다. 또한 이혼을 하고도 공동의 가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친구로든 재혼 상대로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 전남편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 길을 열기 위해서 이혼하고 남자 친구를 만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해요. 오빠와 부모님과 한 집에 살면서 남자 친구를 만나듯이, 아이의 엄마이고 아빠지만 법적으로는 남남이니까 질문자가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질문자가 전남편의 문제를 수용하게 되면 이혼을 안 하고 부부로 살아도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하지만 질문자의 가치관이 부부의 정을 누리는 것을 부부생활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이라면, 이혼을 하고 남자 친구를 만나든 재혼을 하든 그 길을 가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행복추구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이 세상에는 좋은 남자란 것이 없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그냥 한 사람일 뿐이에요. 내가 좋아하면 좋은 남자이고, 내가 싫어하면 나쁜 남자입니다. 좋은 남자라고 정해진 남자는 없어요. 또한 좋은 사람이라고 정해진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면 좋은 사람이고, 내가 싫어하면 나쁜 사람일 뿐이에요. 이러한 관점을 불교에서는 ‘제법이 공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질문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도 마음이 짓는 것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보는 것도 마음이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 그 자체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동네에서 주먹 쓰는 사람은 평화로운 시대에는 건달로 보여 별로 쓸모가 없지만 독립운동을 할 때는 선비보다 낫습니다. 착한 선비는 평화로운 시대에는 괜찮지만 농사를 짓거나 독립운동을 할 때에는 별로 쓸모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원래 좋고 나쁜 게 없어요. 다만 그 사람이 어떤 용도에 쓰이느냐에 따라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질문자의 남편 같은 사람이 신부가 되었다면 어떻겠어요? 아무런 사고도 안 치는 정말 훌륭한 신부가 될 수 있었겠죠. 그런 것처럼 성기능 장애는 결혼 생활에서는 장애지만 그것 때문에 그 사람 자체가 부족하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결혼 생활에 좀 문제가 있다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 정도는 감안하고 가족을 이루고 살 것인지, 아니면 질문자에게는 성적인 만족감이 굉장히 중요한 삶의 가치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부분을 양보하더라도 그 부분을 얻을 것인지, 이건 질문자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만나는 남자가 좋은 남자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내가 만족하면 좋은 남자이고,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나쁜 남자이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는 게 좋습니다.”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제가 그렇게 관점을 가지면 되는 건가요?”

“막연한 불안감이 생기는 이유는 지금처럼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성기능 장애를 가지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전혀 도움이 안 되며, 성격적으로 나빠서 폭행까지 일삼는다면, 이혼해 버리는 것이 훨씬 속이 시원할 텐데, 질문자는 지금 망설이고 있잖아요. 이 사람을 가지려고 하니까 성적인 만족감 부분이 도저히 해결이 안 되고, 이 사람을 버리려고 하니까 또 다른 좋은 점이 있고,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될까 봐 망설이게 되는 겁니다.

또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그 남자가 성적인 만족감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부분에서 고통을 주거나 성격적인 문제가 있어서 질문자를 굉장히 힘들게 할 수도 있어요.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게 다 좋기를 바라니까 불안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성적인 만족감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성격이 좀 더럽거나 경제적인 손해를 입더라도 성적인 만족감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은 감수한다는 관점을 가져야죠. 이것도 좋아야 하고 저것도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욕심을 부리니까 불안한 겁니다. 나중에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성적인 만족감을 위해서 돈이나 명예, 권력을 포기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죠. ‘그때는 다른 어떤 대가도 능히 지불할 용의가 있었고 지불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지금부터 불안이 싹 없어지는 겁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에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잘 되는 남자일지 걱정이 되어서요.”

“그런 사람이 질문자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마세요. 밥이 필요하면 밥을 만들어서 먹고, 죽이 필요하면 죽을 만들어서 먹듯이, 질문자가 그런 사람이 필요하면 질문자 스스로 그런 사람을 찾아야죠. 누가 딱 앉아서 질문자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건 굉장히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 어떤 면이 좋으면 다른 면이 나쁜 것처럼 이중적인 것이 존재의 본질입니다. 가령 솜이 부드러워서 좋으면 힘이 없고, 쇠가 단단해서 좋으면 날카롭고 부드러움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솜한테 부드럽기도 하면서 힘도 있으라고 하고, 칼한테 날카롭기도 하면서 부드럽기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계속 이렇게 생각한다면 질문자는 인생을 후회하고 고생하며 살 수밖에 없어요.

외국 생활에서 안정감이 중요하다면 성적인 만족감을 조금 포기하고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고 생활하고, 성적인 만족감을 중시한다면 자식과 남편을 포기하더라도 성적인 만족감을 추구하면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이후에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후회하지 말고 ‘그래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가치가 있었다’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방청객 중에서 소감을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쌍방향 소통을 위해 스님이 직접 발언 기회를 주었습니다.

“대화를 듣고 조언을 하거나 소감을 나눠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손들기를 누르고 말해 보세요.”

남편의 성기능 장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분을 위해 한 분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저도 노르웨이인 남편과 결혼해서 살다가 이혼한 지 2년 정도 됐는데요. 저도 결혼 생활 10년째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 저도 질문자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혼하고 나서 나중에 전남편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자신이 전립선암이라고 하더라고요. 뒤늦게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나니 전남편의 고마움을 좀 알겠더라고요. 질문하신 분도 조금 굳건하게 마음을 먹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당시 마음을 굳건하게 먹지 못했거든요. 이 세상에는 당신과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이 있다고 꼭 말해 주고 싶습니다.”

“네, 용기 내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자도 스님과 대화를 마치고 나서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 말씀을 듣고 나니 제가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앞으로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먹고, 아이한테 안정된 가정을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스님도 다시 한번 질문자를 격려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질문자가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죄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질문자에게는 아이를 안정감 있게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본인의 욕구가 중요해도 잠시 유보할 수가 있잖아요. 제가 북한 동포들에게 인도적 식량 지원을 하기 위해 단식을 했던 것처럼요. 사람들에게 이 문제의 절박함을 호소하려면 그 정도의 고통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남편에게 성기능 장애가 있어서 본인이 희생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 괴로워지는 거예요. 또한 질문자는 성적인 만족을 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혼해서 성적인 만족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 선택을 절대로 죄스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다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서 질문자가 그 권리를 유보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m.jungto.org/pomnyun/view/83431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