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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5월 12일

작성자구름위집|작성시간10.05.12|조회수285 목록 댓글 0
[2007년] 보복폭행 혐의 김승연 한화회장 구속, 수감
아들을 때린 술집 종업원들을 보복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화그룹 김승연(55) 회장이 12일 새벽 구속, 수감됐다. 재벌 총수가 폭행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이다.
서울중앙지법은 11일 밤 11시쯤 김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김 회장은 자정을 넘겨 서울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8일 자신의 아들과 몸싸움을 했던 서울 북창동 S유흥주점 종업원 4명을 경기도 성남시 청계산 인근 신축 건물 공사장에 감금한 뒤 쇠파이프 등으로 폭행하고, S유흥주점에 찾아가 다른 종업원 2명을 손과 발로 폭행한 혐의다. 김 회장 구속은 사건 발생 64일만이다./조선

[2007년] 국내 한정식집 원조 '장원' 여주인 주정순씨 별세
← 한정식집 '장원' 주정순씨

한국 한정식집의 원조 격인 서울 종로구 필운동 ‘장원(莊園)’의 주인 주정순(朱貞順· 86)씨가 1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유족으론 국내 금융시장에서 M&A(기업 인수·합병)와 펀드투자 전문가로 이름난 아들 이재우(50) 보고펀드 공동대표, 딸 수정(54·현 장원 대표), 윤미(48·미국거주)씨가 있다.
광주 태생으로 목포 부잣집에 시집가 음식 솜씨를 익힌 주씨는 서른둘이던 1953년 광주에서 처음 장원을 열었다. 이후 서울로 이전개업하면서 정·관계 실력자들이 모여들어, 금세 장안의 명소가 됐다. 내부 구조가 복잡하고 입구가 여럿으로 손님끼리 마주칠 일이 적어, 정치인들 ‘비밀 모임’에도 적합했다./조선

[2001년] 여류 문학가 강신재 별세
← 남녀 사이의 현대적 애정 모럴을 추구, 한국문단에 새로운 장을 열어 보인 작가 강신재.

여류문학가 강신재씨가 2001년 5월 12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였다. 그는 6·25 전쟁 이후 한국문단에서 남녀 사이의 현대적 애정 모럴을 추구,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어 보인 여성 작가였다.

특히 1960년작 `젊은 느티나무`는 계부의 아들인 이복 오빠와 손아래 누이가 가족 아닌 순수한 남녀 사이로 돌아가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고 리얼한 필치로 그려내 당시 독서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40년 전 이 작품은 월간 ‘사상계’에 전격 발표되면서, "본연한 인간성과 순수한 경지를 추구하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경기고녀(현 경기여고)와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1949년 등단한 강씨는 ‘임진강의 민들레’, ‘명성황후’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중앙문화대상(1984) 등을 수상했다. 1960년대 말부터 한국문인협회 PEN 이사, 여류문학인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83년부터 예술원 정회원으로 활동했다./조선

[1994년]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 사망
← 독일 태생의 미국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

프로이트 심리학 이론을 청년기와 성년기에 적용시킨 정신분석학자로 ‘정체성 위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던 에릭 에릭슨이 1994년 5월 12일 미국 일 하리치의 한 양로원에서 9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0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난 에릭 에릭슨은 정규대학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한때 화가를 지망하며 유럽을 방랑했으나 빈의 정신분석원에서 만난 안나 프로이트에게서 정신분석학 훈련을 받았다. 31세에 미국으로 이주, 미국 각지에서 임상연구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정신분석학 체계를 잡아갔다. 비록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예일 버클리 하버드 등의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쳐 20세기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자아의 성장에 초점을 둔 에릭슨의 이론은 흔히 ‘자아 심리학’으로 불리운다.
프로이트에게서 배웠지만 그의 이론은 프로이트와 몇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에릭슨은 인간행동의 기초로서 이드보다는 자아를 더 강조했다. 그는 프로이트와 달리 자아를 성격의 자율적 구조로 간주했다. 주요저서로는 발달의 사회성을 주창하는 ‘유아기와 사회’(1950) ‘정체성과 생활주기’(1959), 개인생활사와 역사의 만남을 예증하는 ‘청년 루터’(1958) ‘간디의 진리’(1969) 등이 있다./조선

[1962년] 남산 케이블카 개통
← 1962년 5월 12일 남산의 새 명물로 등장한 남산 케이블카. 이름은 삭도차(索道車-a cable car)였다.

1962년 5월 12일 서울남산에 우리나라 최초 여객삭도(索道ㆍa cable car)인 남산 케이블카 ‘은하수’와 ‘무지개’가 개통됐다. 남산 케이블카는 이날 개통된 후 하루도 쉬지 않고 운행돼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로 서울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한국삭도공업주식회사가 1961년 9월에 착공해 당시 2억9천여만환을 들여 준공됐다. 남산 케이블카는 그 운행거리가 회현동 승강장에서 남산 꼭대기에 있는 예장동 승강장까지 약 600m 이며 평균 초속 3.2m로 운행, 편도 운행 시간은 약 3분 정도이다. 지상과의 고저차는 약 138m로 올라가는 것과 본관 승강장을 향해 내려오는 것 두 대가 동시에 운행되며 이 두 대의 케이블카는 중간지점에서 정확히 마주쳐 지나가도록 설계됐다. 케이블카의 수용 정원은 38명으로, 개통 후 이틀 후인 5월 14일 운행을 시작해 오전 10시에서 오후 11시까지 연중무휴로 운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삭도 산업의 선두주자로 제 몫을 해온 남산 케이블카이지만, 지난 2002년 7월 7일 상하행선 2대가 갑자기 멈춰서는 사고가 발생, 60여명의 탑승객들이 지상 40~50m 상공에 매달려 있다 1시간여 만에 구조되기도 했다./조선

[1962년] 제9회 아시아영화제 개최
← 최우수극영화상을 수상한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장면.

제9회 아시아영화제가 1962년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이번 영화제에는 한국을 비롯 일본, 대반, 홍콩, 싱가폴 등 6개국에서 극영화21편, 기록영화 15편을 출품했다. 극영화부문에서는 한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일본의 ‘위를 보고 걸어라’ 대만의 ‘태풍’ 등이 대상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모윤숙 영화제심사위원장은 3일부터 출품작을 심사해서 한 나라에서 한 작품씩 뽑아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시민회관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16일 저녁 7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내외와 많은 영화인이 모여 폐회식을 열고 우수작품에 시상을 했다. 22개 부문 상 가운데서 한국은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차지한 최우수극영화상을 비롯해, 7개 부문 상을 받았다. 일본은 8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기록영화 최우수작은 싱가폴이 차지했다./조선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 시작
←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의 TV방송이 시작됐다.

1956년 5월 12일 오후 7시30분,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 전파가 발사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일본·태국에 이어 4번째 TV방송국 보유국이 됐다. 방송국 이름은 코캐드(KORCAD). 미국 RCA사의 한국 대리점을 맡고 있던 황태영씨가 설립한 방송국이었다. 호출부호는 HLKZ였고 출력은 0.1㎾로 미약했다.

이날 서울 종각 건너편의 RCA 빌딩 3층 스튜디오에서 선보인 첫 시험방송은 궁중 연례악 ‘취타’와 국악 합주곡 ‘수제천’이었다.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백설희·현인 등 인기가수가 대거 출연한 쇼프로도 2시간 동안 방송됐다. 화신백화점 앞과 서울역 등에 설치된 TV를 처음 본 시민들은 한결같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1만8000환이던 시절에 14인치 TV 수상기 한 대값이 34만환이나 됐으니 TV 수상기 보급도 기대에 못 미쳤다. 300대뿐이었다. 결국 재정난으로 소유권이 대한방송(DBC)으로 넘어갔지만 이마저도 1959년 2월에 원인 모를 화재로 방송국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국영방송 KBS가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61년 12월이었다./조선

1956년 5월12일 한국 최초의 상업 텔레비전 방송국(HLKZ)이 개국했다. HLKZ는 미국의 아메리카라디오방송(RCA)과 제휴해 세운 출력 0.1kW의 소규모 방송국이었다. 이후 1961년 한국방송공사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되면서 텔레비전 방송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어 동양방송주식회사(TBC)와 문화방송(MBC)이 텔레비전 방송국을 설치함으로써 3대 텔레비전 네트워크 시대가 시작되었다. 1980년에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었다. 미국(1951)과 일본(1960)에 비해 상당히 늦었지만, 컬러 방송을 시작한 지 불과 7년 만에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대수가 1,000만 대를 넘어서는 등 빠르게 자리잡으면서 방송 발전에 기여했다./브리태니커

[1949년] 소련, ‘베를린 봉쇄’ 322일 만에 해제
← 서베를린 공항에 착륙하는 미국 물자소송기

소련이 베를린과 서방측을 연결하는 모든 교통로를 봉쇄했던 이른바 ‘베를린 봉쇄’가 1949년 5월 12일 해제됐다. 1948년 6월 24일 봉쇄 이후 322일 만이었다.

2차대전 후 독일은 미·영·불·소 4개국에 의해 분할점령됐으나 소련 점령지역 내에 있는 베를린만이 공동관리하에 있었다. 베를린 봉쇄는 미·영·불 서방 3개국이 자신의 점령지역을 통합해 단일 경제공동체로 하고 베를린을 포함한 통합 전 지역에 새로운 통화인 마르크화(貨)를 유통시키기로 한 것이 빌미가 됐다.

소련은 보복에 나서 육로·철로·수로를 봉쇄하고 식량수송까지 금지했다. 연합국은 250만 베를린 시민들을 돕기 위해 항공기를 이용한 식량·연료·의약품 공수작전으로 맞대응했다. 소련이 베를린 4개국 공동관리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베를린의 독점적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긴장도 더욱 고조됐다. 그러나 미국의 방침은 정면대응이었다. 공수는 예정대로 진행됐고 항공기가 3분마다 떴다. 수송 횟수만 약 20여만회, 공수물자도 약 232만t에 달했다. 봉쇄가 장기화하면서 식량은 배급제로 됐다. 전력소비도 제한됐으며 공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어느덧 동독 주둔 소련군은 40개 사단으로 증가했고, 미군은 원폭 탑재기를 영국에 배치했다. 다행히 양측의 자제로 무력충돌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독일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조선

[1905년] 주 영국공사서리 이한응 런던서 자결(구한말 첫 순국)
← 이한응

1905년 5월 12일 런던 주재 외교관 이한응이 일본의 국권박탈에 죽음으로 항쟁하기 위해 음독 자결했다. 그의 자결은 국권박탈에 대한 최초의 자결로,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에 불을 당겼다. 이한응은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런던에 부임했으며 다음해 서리공사가 되었다. 1904년 8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1905년 제2차 영일동맹을 맺으려는 영국과 일본 간의 비밀외교가 진행되자, 이한응은 침략적인 영일동맹 개정조약에 죽음으로써 항쟁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자결은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기관에 보도되었으며, 고종의 특명으로 시체를 국내로 옮겨 용인에 안장했다./브리태니커

[1905년] 문학평론가 이헌구(李軒求) 출생
← 이헌구

1905. 5. 12 함북 명천~1983. 1. 4.
한국문단에 해외문학이론을 소개하고 민족주의적 입장을 나타낸 평론을 발표했다. 호는 소천(宵泉)·이구(李求)·지산(芝山). 1916년 광진보통학교를 마치고 1920년 독학으로 중동학교에 입학, 그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1925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1고등학원 문과대학에 입학해 1931년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했다. 유학하는 동안 김진섭·이하윤·정인섭과 해외문학연구회를 만들었고, 귀국하여 함대훈·이홍종·이동석과 신흥문학연구회를 만들었다. 1931년 경성보육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36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냈으며, 1931~39년 극예술연구회 연구책임자로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붓을 꺾고 칩거했으며, 8·15해방이 되자 중앙문화협회 창립회원,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 창립회원,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창립회원, 〈민주일보〉 편집국장, 〈민중일보〉 부사장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1949년 공보처 차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창립동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1970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동대학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했다.
1931년 〈신생〉에 시 〈제야〉·〈회상곡〉·〈세기아(世紀兒)의 영탄〉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나 1931년 〈동아일보〉에 대학졸업논문인 〈사회학적 예술비평의 발전〉을 발표한 뒤로는 평론을 주로 썼다. 이듬해 발표한 〈조선에 있어서 해외문학인의 임무와 장래〉에서 조선의 폐쇄된 문학풍토를 비판하고 조선문학이 더욱 발전하려면 외국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진영의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특히 대표적 평론이라 할 수 있는 〈조선문학은 어디로〉(동아일보, 1934. 1. 1~12)에서 "문학인은 나날이 없어지려는 우리말을 중요시해야 하고 체험을 바탕으로 고민과 불안을 반영하는 문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불문단(佛文壇) 사조의 동태〉(조선일보, 1935. 1. 1~4)·〈대전과 불란서 문학〉(조광, 1939. 11) 등 외국문학이론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행동정신의 탐조〉(조선일보, 1935. 4. 12~19)에서는 문명을 지키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행동주의 문학이론을 소개했다. 평론집으로 〈문화와 자유〉(1952)·〈모색의 도전〉(1965)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02년] 시인 백기만(白基萬) 출생
1902. 5. 12 경북 대구~1967. 8. 7.
신선한 감각과 신비한 감성을 가지고 산문 형식의 시를 썼다. 호는 목우(牧牛)·백웅(白熊).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공부했다. 3·1운동 때 시인 이상화와 함께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었고 1923년 양주동·이장희·손진태·유엽 등과 함께 동인지 〈금성〉을 발행했으며 〈개벽〉·〈여명〉의 편집일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금성〉 11월호에 시 〈꿈의 예찬〉·〈내 살림〉·〈기쁨〉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그의 대표작인 서정적이고 신비한 〈은행나무 그늘〉(금성, 1924. 5)을 발표했다. 또한 〈금성〉에 타고르의 시를 번역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해방 후 이상화·이장희의 시를 정리하여 〈상화와 고월〉(1951)이라는 책을 펴냈고 1959년에는 죽은 예술가들의 평전인 〈씨 뿌린 사람들〉(1951)을 간행했다./브리태니커

[1895년] 소설가·언론인 이익상(李益相) 출생
1895. 5. 12 전북 전주~1935. 4. 19.
호는 성해(星海). 1921년 일본대학 사회과를 다닐 때 사회주의 단체인 '흑도회'에 가담해 민족해방운동을 펼쳤으며, 1922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계급투쟁을 선언한 '전국 노동자 제군에게 격함'을 발표했다. 1923년 박영희·김형원·김기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를 조직했으며, 1925년 이 모임이 조선 프롤레타리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통합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8년 〈동아일보〉 학예부장을 거쳐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 등을 역임했다. 1921년 평론 〈빙허(憑虛)군의 '빈처'와 목성(牧星)군의 '그날 밤'을 읽은 인상〉·〈예술적 양심이 결여한 우리 문단〉 등을 발표해 문단에 나온 이후, 단편 〈번뇌의 밤〉(학지광, 1921. 6)·〈생을 구하는 마음〉(신생활, 1922. 9)·〈위협의 채찍〉(문예운동, 1926. 1)·〈황원행 荒原行〉(동아일보, 1929. 6. 8~10. 21) 등을 발표했다. 독백형식으로 사치와 향락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 〈광란〉(개벽, 1925. 3)과 지식인 부부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짓는 어려움을 그린 〈흙의 세례〉(개벽, 1925. 5),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하고 도망치는 무산자의 딱한 사정을 그린 〈쫓기어가는 이들〉(개벽, 1926. 1) 등은 당시 신경향파 문학을 내세웠던 작가의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가난을 묘사하는 데 있어 절실하지 못하고, 구성도 치밀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884년]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 사망
← 연작교향곡 ‘나의 조국’을 작곡한 스메타나.

`체코 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가 1884년 5월 12일 사망했다. 이전 해 그는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프라하의 정신병원에 수용됐었다. 리스트는 "스메타나는 진정한 천재였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스메타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억압 아래 있던 체코인들의 민족운동을 격려하면서 체코 민족 특유의 근대음악을 수립한 체코의 국민음악가였다.

4세에 4중주곡의 제1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에는 프라하로 와서 음악에의 열정을 불태웠다.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프로크슈의 지도를 받아 19세에 페라디난도 황제의 궁전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행동하는 음악가 스메타나는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의 압정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혁명군을 위한 `국민의용군 행진곡`과 `자유의 노래`를 만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74년 11월 청력을 잃어 보청기를 사용하면서 작곡한 연작교향곡 `나의 조국`은 그를 상징하는 곡이 됐다. 체코 전설속의 공주 리부셰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리부셰`도 1881년 체코 국립극장 개관기념으로 올려져 그를 국민음악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의 50세가 넘은 노쇠한 몸은 심한 인후두통으로 점차 시들어갔고 대화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마침내 1884년 5월 12일 죽음을 맞았다./조선

[1877년] 독립운동가 이갑(李甲) 출생
1877. 5. 12 평남 숙천~1917. 4. 24.
본명은 휘선(彙璿). 호는 추정(秋汀). 아버지는 응오(膺五)이다. 1896년 서울로 올라와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그해말 독립협회가 고종의 명으로 강제 해산될 때 일시 구금되었다. 그뒤 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죠 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과에 입학했다. 1904년 졸업한 뒤 견습사관으로 일본 군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실전 경험을 얻기 위해 자진하여 만주전선으로 출전했다. 그해 9월 대한제국 정부의 소환으로 서울로 돌아와 육군 참위로 한국군에서 복무했다. 1905년 4월 부위로 승진해 육군무관학교 학도대부(學徒隊附)로 발령되었으며, 12월 군부대신 부관이 되었다.
1906년 10월 양기탁·박은식·유동열 등과 함께 계몽운동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여 학교설립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이동휘·전덕기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했다. 그해 7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고종 양위의 조칙이 내리자, 궁중 내의 양위반대세력과 손을 잡고 양위식에서 매국 대신들을 모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일본군이 출동함으로써 실패하고, 이도재(李道宰)·박영효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8년 1월 서우학회를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발전시켰다. 1909년 10월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자 안중근과 친분이 있다 하여 헌병대에 붙잡혀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와 무관학교를 건설하기로 한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서 1910년 4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둥 성[山東省] 칭다오[靑島]에서 안창호·신채호·유동열 등과 함께 독립군기지 창건의 구체적 실행책을 논의했다. 무관학교 설립이 여의치 않자 러시아의 상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이곳에서 전신불수의 병에 걸렸으나 독립군 양성에 대한 취지서를 만들어 해외의 동포들에게 재정적 원조를 촉구했다. 1911년 미국에 가 있던 안창호의 주선으로 〈신한민보 新韓民報〉의 주필로 초청되어 뉴욕에 도착했으나 이민국이 상륙허가를 해주지 않아 다시 시베리아의 치타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대한인국민회원동지방회(大韓人國民會遠東地方會)의 회장이 되고, 이강(李剛)과 함께 〈정교보 正敎報〉를 발행하여,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했다. 얼마 뒤 만주로 옮겨 밀산무관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뒤 지린 성[吉林省] 목릉현(穆陵縣)으로 옮겨 요양하다가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20년]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출생
← 나이팅게일 1820년 5월 12일 태어남 / 1910년 8월 13일 죽음

"등불을 든 여인이 서 있네
이땅의 위대한 역사 한가운데에
고귀한 미덕의 상징이며
영웅적인 여성이여."


- H. W. 롱펠로, <등불을 든 여인>

나이팅게일은 간호를 여성의 전문직업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한 영국의 간호사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픈 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1854년 크림 전쟁에 간호 책임자로 참전해 죽어가는 수많은 영국군 부상병을 살려냈으며, 비위생적인 야전병원을 과감히 개선했다. 매일 밤 등불을 들고 직접 회진을 돌면서 환자들을 돌봐주는 등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나이팅게일을 병사들은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불렀다. 크림 전쟁 때의 활동은 훗날 뒤낭이 적십자사를 창설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전후 영국에 돌아와 간호학교를 세운 나이팅게일은 간호교육을 체계화하고, 새로운 형태의 간호사를 양성하는 등 현대 간호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영국 육군의 개혁을 비롯해 간호·공중위생 등을 내용으로 한 저서 약 200여 편을 남겼다. 박애 정신과 자기 개척의 의지로 오늘날까지 '사랑의 천사', '백의의 천사'로 불리고 있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7년 한국 화물선 골든로즈호, 중국 해역서 침몰 16명 실종
199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유혈시위 발생
1998년 거평그룹 부도
1997년 LG화학, 차세대 ‘퀴놀론계 항생제’개발
1994년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 사망
1990년 청소년헌장 발표
1984년 교육부 고교국어 문법 통일안 마련
1981년 검찰 우편진술제 실시
1975년 캄보디아 미국 상선 ‘마야구에스’호 나포
1974년 이탈리아 국민투표로 이혼법존속 결정
1970년 한국등반대 히말라야 ‘추렌히말’봉 정복
1966년 미국-중공 공군기 중공-월맹 국경서 공중전, 미그기 1대 격추
1965년 서독, 이스라엘 외교관계 수립
1964년 대한상공회의서 상공인의 날 제정 첫 실시
1964년 서울 시내버스 총파업
1963년 미국 앨라배머주서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운동 격화
1962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 라오스정세에 대응 7함대 출동명령
1951년 국민방위군 해체
1943년 북아프리카 주둔 독일군, 이탈리아군에 항복
1939년 영국 터어키 상호원조조약 조인
1936년 사진미학의 이론을 정립한 영국의 사진가 에머슨 사망
1935년 폴란드 초대 대통령 피우수트스키 사망
1933년 소련의 시인 보즈네센스키 출생
1929년 독립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 누조마 출생
1925년 일제 한국서 치안유지법 공포
1922년 장작림 동삼성 독립선언
1919년 임시정부의 김규식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1910년 수리남의 초대 대통령(1975-1980) 페리에르 출생
1905년 주 영국공사서리 이한응 런던서 자결(구한말 첫 순국)
1884년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 사망
1871년 비스마르크 독일수상에 취임
1859년 러시아의 소설가 악사코프 사망
1856년 독일의 식물학자 심퍼 출생 - 최초로 대륙을 식물지리구로 나누는 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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