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비망록] 존엄으로 가는 길.. (고미생각 / 2013년 6월 6일)

작성자고미생각|작성시간13.06.06|조회수64 목록 댓글 2

안녕하세요? 고미생각입니다. ^^;;



현빈은 묻는다. “이게 최선입니까?” '최선'을 다한다…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정확한 기준은 무엇일까? 맡은 바의 책임을 다 하는 것?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것? 그냥 남들이 보기에 열심히 하는 척만 하는 것? 도대체 무엇이 최선일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최선'이라는 말을 다르게 해석하는데서 비극은 시작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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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고미생각


“The remedy should start with family education that forces children to care about only excelling ahead of all others in exams. This in turn is crucial to survive in this diploma- and degree-obsessed society, which compels students to regard even friends as rivals, or potential adversaries, they must beat.

 

다음 영어 사전에서 보았던 예문이다. 코리아 타임즈가 출처라는데 정확한 원문은 알 길이 없다. 이점 양해 부탁드린다.

 

어쨌거나 뜬금없는 영어가 나와서 당황하신 분들 계실지 모르겠다.. 예전에 공부했던 노트를 살펴보다가 맘에 와닿아서 적어두었던 예문이었는데 마침 눈에 띄어서 옮겨보았다. 오해없으시길.. :)

 

미투친구

 

ㅎㅎ… 제게 물으시는 질문인가요?^^ 최선과 성실은 양심에 꺼리길 것이 없이 열심히라는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은 다르게 해석하겠다면 할 말 없고..

 

고미생각

 

글쎄요. 요즘은 '양심'이 사라진 사회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그리고 또 한가지 '자신에게 떳떳한 것'보다 '남에게 떵떵거릴 수 있는 것', '남이 우러러 봐주는 것'을 더 우선시하는 요즘 분위기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로 더 토론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가치 기준에 대한 문제는 '토론'으로 결판을 낼 일이 아니죠. 다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첫째, '양심'이 사라진 사회에 대한 '개탄'이기도 하고요.

 

둘째, '최선'이라는 말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제 포스팅의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은 친구님께서도 이제는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만 세간에서 통용되고 저항없이 수긍하는 이른바 '통념'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가 주를 이룹니다. 이 점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필자 주석

 

이 글은 참을성이 없어진 요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세태에 개탄하며 최선과 성실을 깨우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고, - 그러니까 싫어도 억지로 참고 해야 하는 것도 공부의 과정이며 목적이다라고 본다는 뜻이다. - 이것이 <가정 교육>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글에 대한 반론으로 나온 포스팅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해당 글을 모두 다 퍼와야 할 정확한 이해가 가능할 터이지만  논쟁이 일어나 공방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미투의 시스템 상 차분한 토론이 가능한 시스템이 되지 못하다보니 정리가 안되고 난잡할 뿐만 아니라 특히 서로 다른 가치 기준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는 대화의 <맥>을 제대로 잡고 못하고 말꼬리를 잡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글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 글만을 <기록과 보관>의 차원에서 옮겼음을 밝힌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양심과 최선과 성실>을 배우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고 이것이 가정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미투 친구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퍼온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적어가는 와중에 우연히 <존엄>에 대한 내 자신의 기준과 관점을 새삼 재정립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해두기 위해 이 곳에 옮겨 놓았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이 점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리며, 이런 정황과 맥락을 살피신 뒤에 이 글을 읽어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또 한가지 내가 문제제기 하고 싶었던 포인트는 위에서도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지만 특히 양심과 최선, 성실이라는 말은 100퍼센트 당위성에 입각한 말일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무척 애매하고 모호한 포인트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임도 추가로 밝혀둔다.

 

 

고미생각

 

그렇다면 나 또한 '최선을 다한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게끔 매순간에 충실하는 것' 그렇게 해야 '지나간 시간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다.

 

내가 남의 시선에서 떳떳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지나온 시간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었기 때문...' 그것이 나 자신을 좋아하고 용서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근데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가지 아주 중요한 전제조건이 따라붙는다. 남들이 인정할만한 대단하고 가시적인 성과가 아니더라도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만족하는 것으로 충분히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말로는 참 쉽게 풀어쓸 수 있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내가 했던 이 말은 <가식>이나 <위선>으로 둔갑할 수 있다.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런 위험성은 훨씬 배가된다.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자기 만족>이라는 게 <공감>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말이다.

 

특히나  <공감> <인정>을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지 못하게 되면 절대로 사람은 <존엄>의 의미를 스스로 깨우칠 수 없게 된다. 정녕 사람은 고독한 존재이지만 그러면서도 절대로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한 법이다.

 

 

※ 필자 주석

 

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자세히 풀어쓰려면 자칫 <신상 간증>으로 흐를 수 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저 문장 자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맥락 설명을 하자면 대충 이렇게 풀어쓸 수 있다.

 

자신의 장점이나 가치에 대해서 아무리 스스로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이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것을 소신있게 간직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쉽지 않다는 뜻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남의 시선과 평가>에 무척이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외형적인 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 이에 초연하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위에서도 지적했듯 <가식이나 위선>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악순환으로 번져간다.

 

특히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이나 연인들에게 자신의 가치와 기준과 소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 기준과 판단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남의 평가와 기준에 의존하게 된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존엄>으로 가는 길은 바로 이런 부분들을 챙겨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얘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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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고미생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6.06 미투에서 우연히 발견한 포스팅 하나 - "여자가 외모를 신분상승의 도구나 밥벌이로 생각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상대 역시 상품으로 보게 됩니다. 마트에 진열된 상품처럼"
  • 작성자아프로만 작성시간 13.06.07 컬쳐클럽 > 토론광장 이동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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