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생각] 2014년 5월 27일 트위터 논평.. (2)

작성자고미생각|작성시간14.05.27|조회수63 목록 댓글 0
고미생각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대책에 대한 이야기는 방금 올린 글로 갈음하고 이번에는 6.4 지방선거와 관련된 트위터 논평을 이어보도록 하자.

천호선 정의당 대표가 이번 지선과 관련하여 정당투표를 '정의당'으로 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논리적, 도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호소'는 옳다. 양당구조가 '담합 관계'로 변질되어 버린 지금 상황에서는 힘이 있는 '제 3 당'을 양성하여 이에 대항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대표의 호소에는 어딘지 모를 '찜찜함'이 남아있다. 사실 이런 얘기는 지방선거를 코 앞에 둔 지금 시점에서는 '쓸데없는' 얘기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른척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기록 차원에서 이 부분에 대한 숨겨진 '1%'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천 대표의 호소에 '찜찜함'이 남는다고 표현한 이유는 지난 총선과 대선을 통해 우리나라 정당 구조의 한계점을 여실히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자세히 풀기 전에 일단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바로 '정치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상기하는 것이다.

정치란 아주 간단한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공동체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공동체가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공권력'이라는 강제수단을 사용할 때는 그만큼의 '책임과 신뢰'가 필요하다는 점 또한 아울러 살펴볼 수 있다. 그게 정치의 또 다른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가 마비된 이유는 첫째, 정당 구조의 의사 결정 절차가 민의와는 다르게 동작한다는 점 둘째, 고비용 정치 구조의 악순환 때문에 '이권'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정치 '세력' 형성이 안된다는 점 셋째, 국민 의식 수준이 정치권의 변화를 '강제'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어떻게 보면 노하우업에서 차고 넘치게 들었음직한 이런 얘기들을 또 다시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어떻게 정치를 바꿀 것인가?' 라는 질문을 현실로 옮긴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서다.

혹시 앞에서 했던 얘기들이 장황하고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단 한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정치란 결국 '세력 싸움=쪽수 싸움'이다.  다수결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정 하에서는 이 정의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들과 천 대표의 호소에서 느끼는 '찜찜함'은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 

일단 현재 상황을 냉정히 살펴보자.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현실적인 기준과 선례를 놓고 보건대 대한민국에서 '집권세력으로서의 책임감'을 '신뢰'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이른바 '친노세력' 뿐이다. 

'친노세력'이라는 말이 뭔가 두루뭉수루하게 느껴진다면 참여정부에서 고위 공직을 맡았던 인사들이라는 말로 바꿔쓸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은 민주당과 정의당에 분포되어 있는 정치권 인사들이다. 편의상 이들을 '민주친노'와 '정의친노'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자.

어쨌든 문제는 이들이 당적은 다를 지언정 처해있는 현실 환경이 '샴쌍둥이'처럼 똑같다는 데 있다.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정당의 주류 다수를 차지하는 세력에 끼지 못한 채 주변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점도 똑같고, 그러다가 소속 정당 다수파들에 의해서 무늬만 <주류> 세력으로 포장되어 난타당한다는 점 마저도 똑같다. 

이 얘기는 다시 말해서 민주친노든 정의친노든 소속당의 체질을 바꾸어 놓는데는 한계점이 너무도 명확하다는 뜻이 된다. 주류 세력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본들 해당 정당 내에서는 그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이들의 노력을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들의 노고는 당연히 인정하고 지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과 공을 들여 끈질기게 당에 남아서 투쟁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정치적'으로 '승리'하여 당의 체질을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미래가 뻔히 보이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특히나 지금까지의 정치 흐름을 죽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쉽게 이해하시겠지만 이른바 '진보연' 세력들은 결코 친노들과 함께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를 그토록 떠받들던 진중권과 여전히 함께 방송하는 유시민을 보고 있으면 정의친노들의 신세도 민주친노와 별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민주당 뿐만 아니라 정의당의 세력 분포를 보더라도 이들을 '대안세력'으로 양성하는 것은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찜찜함'의 핵심 포인트이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아마도 내게 이렇게 반론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싫어한다는 정치혐오론자들의 의견과 당신의 의견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물론 표면적으로 놓고 봤을 때 이들의 의견과 접점이 많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당위적' 관점을 배제한 상태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인식'을 통해 내린 결론임을 강조하고 싶다. 정확한 현실 인식이 있어야 우리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아무리 '책임과 신뢰'를 강조하는 '친노세력'의 집권이 우리 정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현실로 구현해내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세력을 모아야 하는데 어떻게 세력을 모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음을 깨닫자는 뜻인 셈이다.

덧붙여 그 어떠한 정당도 세력과 조직의 논리에 휘말리면 결국 이념과 노선의 다름과는 관계없이 똑같은 전철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지금껏 말했던 의견을 '지선 투표와 정당 투표' 포기로 알아듣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앞에 놓인 현실적 장애물을 직시하자는 얘기이며 동시에 단 한 번의 투표로 세상이 확 바뀔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을 갖지 말자는 것이다. 

지난 대선 이후로 줄기차게 일관성있게 주장했던 포인트가 있다. 박근혜의 당선은 더이상 '정치로 정치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펼쳐 낸 의견들은 이런 포인트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정당의 주류 세력들이 변화하려면 정당 내부적 역량을 통한 변화 모색은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국민 여론이 이들을 강한 수준으로 압박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정치 운동이 아닌 문화 운동으로 국민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 외에는 정치를 바꿀 수 있는 방법도 정치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누히 말하지만 대선 이후로 지금까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 탓, 정치 탓을 하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어긋난 상식, 내팽개쳐진 공동선의 가치를 다시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그런 노력을 정치권 내부에서만 행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책임과 분별, 염치와 신뢰라는 가치를 되찾는 방법은 '존엄의 회복'에 있다. 더이상 남을 통해 얻으려는 어리석은 존엄의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세우는 '사회적 존엄'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이 죽기 직전까지 강조했던 <깨어있는 시민>의 원동력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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