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논쟁에 즈음하여 -친일과 반공(경허와 효봉과 한용운)

작성자지여|작성시간15.11.06|조회수121 목록 댓글 0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했을 때, 전쟁중 자의든 타의든 나찌에 협력했던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해 나찌 소탕에 제일 앞장서 활동하며 반파시즘의 선봉장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 해방후 공산주의활동에 가담했던 박정희가 그 후 강력한 반공주의자, 반일 민족주의자로 선봉에 나서며 '나의 조국' 책을 쓰고 애국자로 자리매김하는 것도 역사아이러니의 한 단면이다.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남북통일을 이루고 베트남 전국민으로부터  '호아저씨' 로 불리며 진정한 존경을 받고 있는 호지민은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 평화주의자이었다. 미국 남북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역시,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애쓴 비둘기파이었다.

 

정작, 베트남에서 전쟁불사론을 외친 강경파들, 미국남북전쟁 불가피론을 외친 매파들일수록 전쟁 후, 평화주의자로 둔갑하며  진정한 평화주의자인 호치민이나 링컨의 피나는 반전노력은 덮어버리고 호치민이나 링컨을마치 '전쟁 영웅'  .  "남북전쟁의 선봉장' 으로 이미지를 덧칠하는 것이 왜곡된 이미지 역사의 대표적 사례이다

 

젊은 시절 호치민이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정약용이 사망한 날자를 알아내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그가 실용주의자이고 실학파이지,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신봉자가 아님을 알 수 있는 한가지 사례이다.

 

호치민이 미국담배인 <켄트>를 즐겨 피운 것이나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나는 장가 못  갔지만 너희들은 장가 꼭 가거라" 고 한 애교어린 모습도 극우파들이 주장하듯 호치민이 극좌파 가 아님을 엿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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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독립선언서 낭독 33인 중 1945년 해방까지 친일로 돌아서지 않은 유일한 한 사람이 만해 한용운이었다.

해방후, 사학자들이나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독립운동가 시인 한용운은 기억하지만, 만해 한용운이 불교에 대해서 <대처승 용인>의 중도교리를 주창한 스님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애써 입을 다문다.

 

비구파 = 반일,   대처승 =친일  이라는 2분법 흑백논리, 철저한 진영논리 탓이다.

 

반일 = 대처승, 일 수도 있는 만해 한용운의 제 3 의 길 은 원초적으로 차단해 버리는 것이 대한민국 친일/ 반공  진영논리의 현 주소이다.

 

(노무현의 대연정, 제 3의 길) 이 원초적으로 차단당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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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공  이데올로기 역사 논쟁을 보며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경허, 효봉

 

그 중에서도 판사 법관을 때려치운 효봉의 법관 엘리트로서의 길 과 불교 스님으로서의 길...

노무현 역시 판사직을 그만두고  최고의 돈벌이가 보장되었던 세무전담 변호사로서의 변신, 그리고 그 세무변호사 직까지 팽개쳤던.. 인권변호사 정치가로서의 길...

이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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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효봉과 경허  만해 관련 안터넷에서 펌. (참조)

 

 일제 강점기 한반도 최초의 조선인 판사가  해방후 대한민국 불교 통합종단 초대 종정이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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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8(고종 25), 평남 양덕
사망 1966
국적 한국

요약 한국 근대의 고승.

속성은 수안이씨(遂安李氏). 속명은 찬형(燦亨). 법호는 효봉. 어려서 사서삼경을 익혔으며, 1901년 평안감사가 개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6세에 귀국하여 10년간 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판사가 되었다.

그러나 1923년 한 피고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게 되자 심한 죄책감과 회의에 사로잡혀 마침내 판사직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1925년 금강산에 이르러 출가를 결심하고 신계사(神溪寺)에서 석두(石頭)에게 계를 받았다. 법명은 원명(元明)이었으며 38세에 출가했다. 간도까지 이르는 운수행각(雲水行脚) 끝에 1927년 다시 금강산에 돌아와 조주(趙州)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를 들고 참구(參究)를 시작했다. 토굴 속에서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용맹정진하다가 1931년 도를 깨닫고 벽을 발로 차고 밖으로 나왔다.

절구통처럼 좌선한 채 눕지 않고 정진한다 하여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37년 이후 10년간 송광사(松廣寺)에서 수행하고 많은 승려를 제접(提接)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구도관을 열어주었다. 1946년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되었고, 이후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했으며, 1954년 선학원(禪學院)에서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이 일어나자 이를 지도했다. 1957년 조계종 종무원장과 종정 취임, 1962년 통합조계종단 초대 종정 추대 등 후학의 지도와 정화불사운동에 전념했다. 특히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정혜쌍수를 강조하며 보조의 사상을 현대 한국불교에 다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경허(鏡虛, 1849년 ~ 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이다.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속명은 동욱(東旭)이다. - 한국 위키백과

 http://blog.daum.net/wongis/7091572

“돈오는 비록 부처와 같지만 다생의 습기는 깊어서 바람은 고요해도 파도는 용솟음치고,

이치는 분명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침노한다.”

(頓悟雖同佛, 多生習氣深, 風靜波尙湧, 理顯念猶侵).
- 보조국사의 <수심결> 가운데 일부이다.

 윤창화는 최근 <불교평론>에 ‘경허열반 100주년 특별기고,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에서

이 같은 내용을 소개했다.경허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오도가’  ‘참선곡’  ‘중노릇 하는 법’ 등 스님의 글에는 간절한 구도심이 넘쳐난다.

반면 깨달은 후의 삶은 파격이었다.

음주식육과 여색을 서슴치 않았다. 오늘날로 치면 룸살롱을 출입한 것과 같다. 

경허 스님의 주색은 불교사학자 이능화(1869~1943)도 <조선불교통사>에 언급할 정도였다.
<조선불교통사>는 “ ‘경허 화상은 변재(辯才, 말을 잘함)가 뛰어나고,
그가 설한 법은 옛조사라 할지라도 이를 뛰어넘는 이가 없다’고 한다.

… 음행과 투도를 범하는 일조차 꺼리지 않았다.

세상의 납자들은 다투어 이를 본받아 심지어는 음주식육이 깨달음과 무관하고,

행음행도(行淫行盜)가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외치며 이를 대승선이라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

윤 대표는 “경허 스님의 주색은 긍정적으로 보면 선승의 무애행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승가의 뿌리를 뒤흔드는 계율 파괴 행위였다”고 평가했다.

 

 

윤 대표는 경허 스님이 주색을 좋아한 것은 스님의 강건한 기질적인 바탕과 성격, 습관 때문이라고 봤다.
경허 스님이 구례 화엄사 강백이던 진진응 스님을 만났을 때에도 주색에 빠져 있자,

진진응 스님이 이를 나무랬다. 이때 경허 스님은 <수심결> 구절을 인용하며,

“습기(습관) 때문에 주색을 끊지 못하고 있지만, 성품은 공(空)이므로 거기에 걸리지는 않는다.”

자신을 변호한 내용이 김태흡의 <인간 경허>에 나온다.
이는 <능엄경>에 “이치로는 돈오했지만 현실적으로는 한번에 제거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이라고
설명했다.

경허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알아주는 이도, 그것을 전할 이도 없던 외로운 선지식이었다.

스님의 주색도 이와 전혀 무관치 않으나 자신의 무애행에 대한 후회도 적지 않았다.
윤창화 대표는 “경허 스님은 <취은화상행장> 끝에서 ‘나는 쓸모없는 존재로서 세상에 쓸데가 없고,

부처님 교화에도 폐단을 끼쳐 백가지 잘못을 함께 일으켜서 도덕으로는 구제할 수 없는데

문장으로 또 어떻게 구제할 수 있으리오?

그래서 비분강개하여 문묵(문장작성)을 놓아 버린지 수년이 되었다’고 적었다.

이는 자신의 행위가 불교의 폐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표는 경허 스님이 말년에 산수갑산에 은둔하다 열반한 것에 대해서도

“음주식육과 여색 등으로 비도덕적ㆍ비계율적 행위를 일삼은 것이 

대중들로부터 ‘악마’ ‘마종(魔種)’이라는 원색적인 비판ㆍ비난을 샀고

그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둔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경허 스님이 구례 화엄사 강백이던 진진응 스님을 만났을 때에도 주색에 빠져 있자,

진진응 스님이 이를 나무랬다. 이때 경허 스님은 <수심결> 구절을 인용하며,

“습기(습관) 때문에 주색을 끊지 못하고 있지만, 성품은 공(空)이므로 거기에 걸리지는 않는다.”

자신을 변호한 내용이 김태흡의 <인간 경허>에 나온다.
이는 <능엄경>에 “이치로는 돈오했지만 현실적으로는 한번에 제거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이라고
설명했다.

경허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알아주는 이도, 그것을 전할 이도 없던 외로운 선지식이었다.

스님의 주색도 이와 전혀 무관치 않으나 자신의 무애행에 대한 후회도 적지 않았다.

윤창화 대표는 “경허 스님은 <취은화상행장> 끝에서 ‘나는 쓸모없는 존재로서 세상에 쓸데가 없고,

부처님 교화에도 폐단을 끼쳐 백가지 잘못을 함께 일으켜서 도덕으로는 구제할 수 없는데

문장으로 또 어떻게 구제할 수 있으리오?

그래서 비분강개하여 문묵(문장작성)을 놓아 버린지 수년이 되었다’고 적었다.

이는 자신의 행위가 불교의 폐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표는 경허 스님이 말년에 산수갑산에 은둔하다 열반한 것에 대해서도

“음주식육과 여색 등으로 비도덕적ㆍ비계율적 행위를 일삼은 것이

대중들로부터 ‘악마’ ‘마종(魔種)’이라는 원색적인 비판ㆍ비난을 샀고

그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둔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만해 한용운 -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편집]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여 1910년 초에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09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5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을 청원서 형식으로 중추원한국통감부에 진정서로 올렸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근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2]
 
— 건백서 중에서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1월에 한용운은 다시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줄 것을 청하는 탄원서를 올렸으나 두 번째 탄원 역시 묵살당하고 만다.

한일합방 직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내지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상좌였던 춘성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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