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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회) 동북아 ⑨ - 선종과 신 유교

작성자아프로만|작성시간11.05.07|조회수791 목록 댓글 0

문화평론 - 류가미 의 환상여행

<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보편사'속의 신화 와 의식>


 

(32) 동북아 ⑨ - 선종과 신 유교  /  2005-08-12

 

 

오늘은 선종과 신유교를 다루는 것으로 동북아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잠시 레반트로 돌아가 이슬람교를 잠시 살펴보고 유럽으로 가 르네상스 이후 근대까지의 사상사를 다룰 작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의 정체성을 묻는 것으로 끝내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연재를 시작한 후 꽤 멀리 왔지만 아직도 목적지까지는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연재를 끝내려면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왜 그리 서둘러 연재를 끝내려 하느냐고 묻는 분 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빨리 책과 컴퓨터 자판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복닥거리는 거리 한복판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역시 쓰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거기다가 저는 그리 관념적인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그러나 오늘 다룰 선종과 신유교는 상당히 관념적인 내용입니다.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 http://home. comcast .net

 

 

저는 오늘 이야기를 관념론의 수괴인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 시작할까 합니다. 사실 관념론 (idealism)이라는 말도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idealism은 이상주의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개념으로써는 관념론과 이상주의는 서로 다른 말인데, 서구에서는 이 두 개념이 같은 말로 쓰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동굴의 비유는 대충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 노예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을 동굴 입구를 등진 채, 동굴 벽만 바라보고 삽니다. 덕분에 그는 자기가 사는 동굴에 입구가 있고 그 입구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동굴 입구 쪽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세워놓고 불빛을 비춥니다. 당연히 동굴 안 벽 쪽에 여러 가지 물건들의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러나 한 평생 동굴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노예는 동굴 벽에 비춰진 그림자가 빛의 장난으로 생긴 환영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실재라고 착각합니다.

 

이 비유에서 동굴은 시간과 공간이 제한된 물질세계를 말합니다. 사실 물질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을 감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물질세계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 비유에서,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시공간에 묶인 물질세계는 참다운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물질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다 근원적인 세계의 환영에 불과합니다. 이 근원적인 세계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이성(로고스)만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세계를 이데아라고 불렀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 인간의 이성(로고스), 그리고 참다운 실재인 이데아라는 세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에서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로고스)은 이데아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게 서양 철학에서는 눈에 보이고 만져 지는 물질세계와 정신(로고스와 이데아)의 세계가 분리됩니다. 그리고 내재적인 물질세계와 초월적인 정신의 세계 중 참된 실재는 바로 초월적 정신의 세계가 됩니다.

 

흔히들 서양 철학은 결국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정신을 물질 위에 두는 플라톤의 사고방식을 서구 철학의 전통으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에서 비롯된 이러한 전통은 19세기에 들어서 도이치 삼총사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에 의해서 비로소 깨집니다.

 

사실 초월적인 정신과 내재적인 물질을 구분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이 그렇게 오랫동안 서구 사상계를 지배했던 것은 그의 사상이 아리안의 고유의 사고방식과 닮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증거로 유럽 아리안과 사는 곳도 종교도 달랐던 인도 아리안도 플라톤과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인도 아리안도 플라톤처럼, 시공간 안에 제한을 받는 물질세계를 마야(환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초월적인 실재는 브라흐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아트만)은 마야를 초월해 브라흐만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 바로 브라흐만 이기 때문입니다.

 

힌두교의 브라흐만, 아트만(개인의 정신), 환상에 불과한 프라크리티 (물질세계)는 정확하게 이데아, 로고스(개인의 이성), 이데아의 그림자로서의 물질세계와 맞아 떨어집니다. 그리고 유럽 철학이나 힌두교에서는 초월적 원리(브라흐만과 이데아)가 개인의 정신(아트만, 로고스)과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나온 종교인 불교는 정신과 물질을 엄격하게 분리시키는 아리안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립니다.

 

전 아무래도 불교가 아리안의 종교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불교는 아리안과 전혀 다른 사유의 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초월적 실재를 ‘규정할 수 없다’는 뜻에서 공 (, sunya)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재적 물질세계를 색 (, rupa)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타자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교에서 인간의 정신, 다른 말로 자아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는 인식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세계인) 색이 (규정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실재인) 공과 같은 것이며 수상행식으로 생기는 자아 또한 공과 같다고 말합니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그리고 진정한 지혜(반야)는 물질세계()와 인식작용(受想行識)으로 생기는 자아가 곧 ‘규정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실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불교는 유럽과 인도의 아리안과의 사유와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동북아에서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물질세계와 인간의 정신과 시공을 초월한 실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실재는 하늘()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상나라가 멸망한 이후로 중국 대륙에서는 이러한 하늘의 개념이 점점 약해집니다. 그리고 하늘이라는 개념 대신, ()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도()라는 개념은 하늘()과 달리, 시공을 초월한 실재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도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원한 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도는 초월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사실 도는 만물이 위대한 어머니에게 태어났다 다시 죽어 위대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영원히 반복되는 순환 과정을 나타냅니다. 도덕경에서는 이렇게 만물을 낳고 다시 만물을 귀속시키는 위대한 어머니를 현빈(玄牝)이라고 합니다. 현빈은 말 그대로 하면 가물은 암컷이 됩니다. 가물다는 말은 형태가 분명하지 않고 가물가물 하다는 뜻입니다.

 

도덕경에서는 이러한 현빈을 문이라고 말합니다(玄牝之門). 사실 그것은 비존재가 존재로 나가는 문이며 다시 존재가 비존재로 돌아오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도덕경에는 형체가 형성되지 않아 타자와 구별되지 않는 비존재 상태를 무()라고 합니다. 반면 형체가 형성되어 타자와 구별되는 존재 상태를 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순환 과정(다시말해 도)의 양면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와 무()의 개념은 체()와 용()의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체는 만물의 본체를 뜻하고 용은 그 본체의 작용을 뜻합니다. 따라서 존재 형태를 지닌 유는 체()가 되고 존재 형태가 없는 무()는 용()이 됩니다. 무와 유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도의 양면을 나타내듯이, 체와 용도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도의 양면을 나타냅니다.

 

도가의 사상은 위대한 어머니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 서구의 철학과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는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신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위대한 아버지의 신화 속에서 궁극의 질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복되는 패턴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서 영속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서구의 이데아와 인도의 다르마(Dharma)는 모두 시간을 초월한 원리입니다. 반면 도는 철저하게 시간 안에 내재하는 원리입니다.

 

또한 힌두교의 브라흐만과 프라크리티(물질세계), 불교의 공()과 색()은 도가에서 말하는 무()와 유()와 다릅니다. 브라흐만과 공과 무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서로 같습니다. 그러나 브라흐만과 공이 시간을 초월한 것이라면 무는 시간 안에 내재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중국에서는 묵가가 세력을 잃은 후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원리인 천()이 위대한 어머니의 질서인 도()로 대치됩니다. 사실 한나라 때 국가유교주의가 수립된 이후, 중국에서는 초월적인 사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국가 유교주의가 힘을 잃게 되자, 낯선 이국의 초월적인 사상인 불교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인들은 불교를 원래 모습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도가의 개념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도가의 해석학적 틀을 입은 이러한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합니다.

 

  달마에게 도를 묻는 혜가, 달마는 선의 시조이고 혜가는 그의 법통을 2대 조사이다.

ⓒ  http:// www. zen-occidental. net

  선의 6대 조사이자, 중국화된 선불교를 완성한 혜능

 ⓒ http:// www. wcu. edu

 


격의불교에서는 불교의 공 ()의 개념을 도가의 무 ()의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공과 무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공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라면 무는 시간 안에 있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공을 무로 해석하게 되면 원래 불교가 가졌던 초월성이 박탈되고 맙니다.

 

이러한 격의불교의 전통은 선종에서 그대로 내려옵니다.

 

이제 공은 무이고 따라서 용()이 됩니다. 색은 유이며 따라서 체()입니다. 체는 본체이고 용은 체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체와 용 중 근본은 체이고 말엽은 용입니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색이 근본이 되고 공은 말엽이 됩니다. 색이 공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것 이지요. 다시 말해 물질세계()가 초월적인 세계() 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것입니다. 물질보다 초월적인 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서구와 인도의 철학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지요.

 

선불교에서 인식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자아는 심()이라고 합니다. 인도 불교에서 깨달음은 자아가 영원불멸하지 않다(anatman)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면 선불교에서 깨달음은 태어나기 전의 미음()의 순수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후쿠나가 미츠지’ 교수는 선불교는 인도 불교가 아니라 철저히 중국화된 격의불교의 소산이며 궁극적으로는 노장사상의 변용이라고 주장합니다.

 

풍우란 박사의 말대로, 중국 불교의 가장 큰 특색은 인도 불교가 가진 피안성(彼岸性)을 평가절하하는 것입니다. 인도 불교에서 깨달음은 피안(초월적인 세계)에 도달하려는 시도였다면 선불교에서 깨달음 차안(내재적인 세계)으로 내려오려는 노력입니다. 오죽하면 선사(禪師)들은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데 진정한 깨달음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교와 불교는 비슷한 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둘 다 명상 수행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내단(內丹)을 쌓고 있는 도교의 수행자  http:// www. kheper.net


선불교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도가의 체용론은 신유교에서도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신유교(新儒敎)란 불교와 도가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발전한 송과 명대의 유교를 말합니다. 사실 신유교는 한나라 때 동중서의 국가유교주의와 대비되는 말입니다.

 

신유교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유교는 사회질서를 잡고 국가기강을 세우는 학문이었지 인간의 심성론이나 우주론 그리고 수양론을 담고 있는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와 도가의 영향을 받은 신유교는 본격적으로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본성을 묻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도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지요.


북송오자(北宋五子) 중 한 사람인 주돈이의 태극도설

 ⓒ http: //  mahan. wonkwang. ac. kr

 

보통 신유교라고 하면 북송 시대 때 살았던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 다섯 사람(北宋五子)의 사상과 주희의 주자학과 왕수인의 양명학을 일컫습니다. 이들 중에서 신유교의 완성자는 바로 주희입니다.

 

주희는 도가와 불교와 북송오자(北宋五子)의 사상을 종합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기이원론 (理氣二元論) 입니다.

 

우선 주희는 형이상학적인 세계와 형이하학적 세계를 나눕니다. 형이상학의 세계는 형체를 초월한 세계입니다. 형이하학의 세계는 사물들이 다른 것과 자신을 변별해주는 형체를 입고 있는 세계입니다. 주희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만물의 본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존에 체용론을 통합해, 이기론을 완성시킨 주희

        http: // www2.  kenyon. edu 


또한 그는 형이하학적 세계를 기()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기는 항상 같은 것이 아니라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는 등 차별성(형체)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는 때론 모이고 때론 흩어짐으로써 세상의 만물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주희는 기를 본체인 리()의 작용()으로 보았습니다.

 

우주가 체용에 따라 리()와 기()로 나뉘듯이, 인간의 마음도 체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인간의 마음의 체는 바로 ‘도덕적 본성’()입니다. 반면 인간의 마음의 용은 바로 ‘인간의 감정’()입니다. 도덕적 본성은 형이상학적인 리()이기 때문에 타락할 수도 악할 수도 없지만 인간의 감정은 형이하학적인 기()이기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본성에 따라 타락하기 쉬운 인간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수행의 목표가 됩니다.

  

사실 주희의 리()의 개념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냐 아니면 시간과 공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주희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은 그의 전에 있었던 북송오자(北宋五子)나 그의 후에 있었던 양수인의 양명학 보다 초월과 내재, 피안과 차안을 나누는 이원론에 더 가깝습니다.

 

사실 주자학은 유가의 여러 학파 중 가장 초월성이 강한 학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주자학입니다.

 

공자가 활동했던 것은 기원전 6세기경입니다. 동중서의 국가유교주의가 수립된 것은 기원전 2세기 경의 일입니다. 주자가 활동했던 것은 12세기의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주자학을 건국이념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세운 것은 1392년의 일입니다. 다시 말해 공자가 활동한 시기로부터 거의 2000년 뒤의 일이고 국가유교주의가 수립한지 1600년 후의 일입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자학을 제외한 유학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중국에서는 주자학과 함께 신유교라고 묶여진 양명학도 조선시대에는 이단으로 배척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대답은 우리는 동북아 삼국 중에서 가장 초월성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민중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은 초월적인 원리인 하늘()이지 내재적인 원리인 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최초의 고대국가였던 고조선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최고신은 바로 하늘()입니다. 샤머니즘은 삼국 시대 때 불교가 들어오면서 차츰 몰락해갑니다. 그 후 삼국 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사상은 바로 불교였습니다.

 

원래 불교는 초월적인 종교입니다. 중국화된 선불교가 불교가 가진 원래 초월성을 퇴색시켰지만요.

 

그리고 조선이 건국이념으로 택한 것은 유학 중에서도 가장 초월성이 강한 주자학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대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원리와 접촉하기를 바랍니다. 그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원리가 하늘()이라고 불리든, ()이라고 불리든, ()라고 불리든 말이죠.

 

조선 말기 최제우는 이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인 하느님과 만납니다. 최제우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비전을 믿고 따랐던 동학도에 의해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원리는 요즘 상식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고 길었던 동북아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다음 시간에는 레반트로 가 이슬람교를 다루어볼까 합니다.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류가미 ⓒ

원문 출처: 연재 시리즈 - 데일리 서프라이즈

이미지 복원: 노하우업 (Knowhow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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