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생각] 철이 든다는 것은...

작성자고미생각|작성시간13.06.17|조회수80 목록 댓글 1

안녕하세요? 고미생각입니다. ^^;;



일단 지난주 불후의 명곡2 를 통해 새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조덕배의 노래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거야'를 잠깐 감상해보자. 1988년 작품이니 꽤 오래된 곡이다.





가사를 찬찬히 음미하고 있자니 언젠가 미투 포스팅에 이런 얘기를 쓴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둘 중의 하나다. 나와 달라서, 아니면 나와 같아서…”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라는 건 어쩌면 '신기루',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고백은 함부로 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놓고 보면 고백이 아니라 실은 '폭력'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덕배는 가슴에 몸부림치고 회오리치는 추억도 미련도 사랑도 모두 묻어두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더이상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사실 그녀는 슬픈 노래도, 슬픈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왜일까? 사실 그녀라는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착각하는) 슬픈 노래나 슬픈 사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헌데 내가 그녀를 슬픈 노래슬픈 사람이라서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과연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까? 단지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기 때문에 <진심>이라는 단어 하나 만으로 모든 것이 다 통용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어떻게 보면 <폭력>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수도 있음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과연 짚신도 짝이 있다는 우리 속담은 정말 옳은 말이지 싶다. 내가 줄 수 있는 것, 내가 주고 싶은 것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상대방과 같을 때 아니 최소한 상대방도 그렇다고 수긍할 때 사랑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틀어지는 건 그게 다르다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을 때이며, 헤어지게 되는 건 그것이 의심이 아닌 사실로 결론이 났을 때다.

 

짝사랑에 아파하는 사람, 짝사랑 외엔 아무 것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주려고 했던 것이 '나만의 것',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는지를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을 주겠다고 덤벼드는 건 결국 폭력이라는 사실을 납득해야 한다.

 

그렇다. 이 노래를 접한 지.. 25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 노래가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다니… ㅎㅎ 왜 슬픈 노래는 더 이상 부르지 않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니 이 노래가 정말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사랑으로 사람으로 상처받는다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일 때가 많다. 내가 놓쳤던 것,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것을 깨닫게 되면 내가 용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서야 사람은 철이 든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철이 든다는 말을 세상에 익숙해지고 눈치껏 묻어간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세태와 통념에 나는 반대한다. 그건 어느 일본 노래의 가사처럼 먼저 걷는 어린애가 어른인 척 하는 것일 뿐이다.

 

쉽게 포기하는 것, 쉽게 타협하는 것, 쉽게 머리를 숙이는 것을 남에 대한 <배려>이자 <에티켓>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철듦이 아니다. 내가 좋은 평판을 듣기 위해서, 규칙이기 때문에 준수하는 것이 마땅해서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사실은 철듦과 별 상관이 없다.

 

내가 놓치고 지나갔던 것, 내가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것, 관성적으로 그렇게 쉽사리 넘겨왔던 것들을 더이상 흘려 넘기지 않게 되는 것.. 그렇게 새로운 시선과 자세와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달라진 생각으로 달라진 행동을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철듦이다.


그래서 철든다는 말은 <내적변화>라는 말로 바꿔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내적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 <부활의 삶>이다.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라고 설파한 것은 부활의 삶을 더이상 죽음 이후로 가두어두지 말라는 선언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지금 이 곳에서 지금 이 삶에서 <변화>를 살아내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변화란 다시 말하자면 <진보>와 다름없는 말이다. 진보라는 말 자체가 <관성의 극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과 진보의 올바른 관계설정이다.

 

출동 119 구조대의 아사히나 다이고가 '쉽게 포기하는 어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한 것, 그리고 나루토의 멘토 지라이야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 것.. 그렇게 담담하지만 당당하게 앞으로 가는 것 그것이 진짜 철듦이 아닐까?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지라도 '다가오라! 지나온 시간처럼'이라고 담담하지만 당당하게 말하게 될 수 있게 되는 것이 '철이 든 어른'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따지고 보니 지금 이 세상에는 진짜 어른은 별로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 같아 씁쓸하다.

 

어쩌면 진짜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가 아닐까 싶다. 지금의 이 마음과 이 생각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이 내가 매 순간을 미투에 그리고 노하우업에 기록하는 이유다.

 

 

추신.

 

노파심에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해석은 오롯이 내 인생과 결합해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책임은 조덕배가 아닌 내가 짊어져야 할 몫임을 분명히 밝힌다.



 고미생각 드림 / 2013년 6월 17일

■ 다음 노하우업 카페 (http://cafe.daum.net/knowhowup/Dnrx/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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