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절대로 첼로를 연주하지 않겠다 / muse

작성자아프로만|작성시간11.05.06|조회수64 목록 댓글 0

 

[12 29]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절대로 첼로를 연주하지 않겠다

 

필명 : muse  /  2008-12-29

원문출처 - http://www.moveon21.com/bbs/tb.php?id=main0&no=34389

 

나는 오늘 태어난 카잘스를 소개하면서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정명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 총감독과 상임지휘를 역임했고 피아노로는 국내최초로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입상했던 그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정치적 선택이 이명박임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음악가와 예술가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생명이 남아있는 분들을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예술이 아직도 생명력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늘 정치적 선택에 있어 적극적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대를 선취하고 끊임없는 기존 질서에 대한 거절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 세상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같은 정치적 선택이 그들의 음악을 길이 남게 했던 원동력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예술가들은 정치적이지 않았을까? 아닙니다. 그들 역시 정치적이었지요. 정치적으로 침묵을 선택했을 따름입니다.

 

 

 

 

“첼로의 왕”이라 불리는 파블로 카잘스는 “카탈로니아 새들은 ‘피스(Peace), 피스(Peace)’ 하고 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잘스는 자신에게 있어 음악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먼저 한 인간이고, 두 번째로 음악가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나의 첫 번째 의무는..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첼로 연주의 대가인 파블로 카잘스가 1876년 스페인 카탈루니아에서 태어난 날입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첼로를 연주했다고 합니다. “내가 처음 첼로 소리를 들은 것은 호세 가르시아의 연주를 들은 당시였다. 그 이전에는 그런 악기를 본 적도 없었다. 첫 악장 첫 번째 음이 나오는 순간 나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 그야말로 인간적인 소리였다.” 그리고 몇 해 후 1889, 그는 한 허름한 바닷가 악보 점에서 유난히 낡은 스코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였습니다. 그 후 열 세 살의 카잘스가 그 곡을 대중들 앞에서 연주하기에는 13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명곡이라고 듣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은 이렇게 카잘스의 첼로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20년부터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연주 활동을 하면서 관현악단을 조직해서 활동하다가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1936년에 해산하게 됩니다. 스페인 내전은 당신 공화제를 이루고 살던 스페인에 1936년 7월 17, 이태리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로부터 물자와 군대를 대량으로 지원받은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에 의해 발발합니다. 내란은 3년 동안 계속되었고, 스페인 국토는 황폐화되었습니다. '국토는 피로 물들었다. 1936년 7월 18부터 9 1일까지의 6주 동안 공화제가 시행되고 있던 지역을 점령한 군대에 의해 대략 7 만 명의 시민들이 학살되었고, 반란군들이 내륙으로 이동함에 따라 희생자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1939, 마침내 프랑코는 피로 물든 전체주의 국가의 총통이 됩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군이 바르셀로나를 점령할 때 그는 단원들과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습 중이었다고 합니다. 1939년 그는 스페인과 국경이 맞닿는 프랑스의 프라데로 망명합니다. 그리곤 "프랑코 정권이 존속하는 한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대해 프랑코는 이렇게 응답했고 하지요. "파블로 카잘스! 잡기만 하면 당신의 선동행위를 끝장내겠어. 그리고 팔꿈치에서부터 팔을 잘라 버릴거야. 양쪽 팔 모두." 그러나 카발스의 답은 명쾌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정치에 대해 말하고, 나는 원칙에 대해 말하니까요."

 

결국 카잘스는 1947년 자신의 생명과도 같던 첼로 연주에 대해 또다시 선언합니다.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절대로 첼로를 연주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선언은 카잘스를 위해 모인 다른 음악인들이 카잘스의 망명지인 프라데에서 바흐 사망 200주기 음악제를 개최한 1950년에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카잘스는 “프랑코의 스페인을 승인한 나라에서는 일체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되고 그 약속을 지켜나갔지요. 그는 그 후 1956년 어머니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로 이주하여 만년을 그곳에서 보냅니다. 푸에르토리코 카잘스 페스티벌을 만들어 젊은 음악인들을 발굴하다가 1973년 그 곳에서 타계하게 됩니다.

 

이런 말도 있군요. 카잘스가 아흔 다섯 살이었을 때 기자가 물었답니다.“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는 활을 내려놓고 “왜냐 하면 지금도 제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군요.

 

아래는 카잘스가 찾아내서 세상에 알린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1번 전악장 이어듣기입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카잘스와 이 첼로 조곡 악보의 우연한 만남은 실로 대단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카잘스는 자서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작품을 연주하며 형언하기 어려운 희열에 빠지곤 했다. 거의 1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을 할 만큼 이 작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곡이 되었다.12년 그렇다. 12년이 되서야 나는 그 곡들 중에서 단 한곡을 청중 앞에서 선보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Suite for Cello Solo, No. 1, Cello Pablo Casals

 

위 글의 모든 인용은 파블로 카잘스 자서전 “A.E.칸에게 들려준 나의 인생” 1970년의 인용입니다.

 

 

 

땡순이    2008-12-30

음악링크가 끊긴 것같습니다. 여기 근사한 게 있네요. 음질도 좋아요.

http://kr.youtube.com/watch?v=rIzKdmDxdD0

 

연주하는 모습까지 담긴 것은,

http://kr.youtube.com/watch?v=VhcjeZ3o5us

 

 

우리예리    2008-12-30

영혼 없는 음악가가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니,

정명훈의 음악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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