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평화냐 세상의 정의냐 [길희성]

작성자아프로만|작성시간12.10.15|조회수161 목록 댓글 0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

 

 

 

개신교 은성수도원에서 묵상중인 청년   사진 조현

 

 

요즘 우리 사회에 '힐링'(치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 갈등이 심하고 사람들의 삶이 각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는 인생이 그렇지 않았는가 반문도 해보지만, 경제는 발전했다는데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지고 있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온 나라가 민주대 비민주, 노동대 자본의 극심한 대립 가운데 최루탄 가스 냄새를 맡으면서 뜨거운 시절을 보냈다.

 

요즈음 다시 우리사회에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면서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다가오는 대선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사회가 이런 문제를 공론의 장에서 다룰 수 있고 정치권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복지를 공약으로 내세울 정도로 민주화된 것은 지난날 뜨거운 투쟁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민주 대 비민주의 구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공정한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의 길이 열려 있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듯, 오늘 우리 사회의 관심은 경제는 성장에서 분배로, 정치는 갈등과 투쟁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내지 자영업, 그리고 노와 사도 상극보다는 상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중론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종교도 양적 성장에서 영적 성숙으로, 시민운동도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서 환경/생태계 살리기 쪽으로 무게 중심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재정위기 등 그치지 않는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이제 자본주의 시스템의 최전방에서 일하는 기업가들이나 경제학자들도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험한 것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뻔히 알지만 달리는 차를 멈추지도 못하고 뛰어내리지도 못하면서 불안 속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의 형국인 것 같다.

 

 


 교육방송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서당> 제공

 

 

   여하튼 국내외를 막론하고 현재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것을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넓은 의미의 <평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안의 평화뿐 아니라 사회의 평화, 세계의 평화, 그리고 인간의 탐욕으로 죽어가는 생명계와 인간의 평화이다. 문제는 이 평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과 접근방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평화는 나부터라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는 사회정의로부터라는 관점이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평화를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평화롭게 하는 일에 나서겠냐면서 사회 운동에 뛰어든 사람을 백안시하거나 조소하기도 한다. 반면에 후자는 사회란 개인의 도덕적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차원의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으며 정의가 없는 부조리한 사회에서는 평화가 요원할 뿐 아니라 어떤 개인도 도덕적으로 살기 어렵다고 하면서 개인의 도덕성과 영성에 치중하는 사람들을 도피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매도한다.

 

  극단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은 이 두 관점이 대립적일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의 성향과 관심에 따라 문제를 보는 시각과 접근방법이 차이가 있고 사회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개인의 삶의 태도를 보아도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기도 한다.

 

시민운동이나 공익을 위해 헌신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치고 이 문제를 안고 고심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이 문제를 단순히 관찰자적 입장이나 사회평론의 관점이 아니라 나 자신이 당면한 실존적 문제로 고심하고 있기에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여하튼 평화를 위한다면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가지고 다툰다면 큰 모순이다

 

  사실 이 문제는 내가 작년 강화도에서 심도학사라는 영성센터를 시작하려던 순간부터 직면했던 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나의 평생 학문 인생과 신앙생활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두 가지 회의가 나를 괴롭혔고 지금도 나의 관심을 떠나지 않고 있다. 하나는 우선 내가 무슨 영성의 대가도 아니고 선사나 인도의 구루 같은 존재도 아닌데, 과연 영성센터 같은 것을 운영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회의였다. 내 안에 평화도 확고하지 못한 주제에 감히 누구를 위해 평화 영성을 말하고 지도한단 말인가 하는 양심의 문제였다. 내 마음 하나 아직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공연히 영성센터 한다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남도 고달프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설령 내가 영성센터를 열어 기도와 명상에 힘쓰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자기 성찰과 휴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해도, 이는 세상의 고통에 눈을 감는 도피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외면한 채 조용한 곳에서 고전을 읽고 명상 수행을 하는 일이 행여 팔자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사치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사실 이 문제는 일찍이 종교는 아편이라고 갈파한 마르크스 같은 사람에 의해 제기된 지 오래다. 최근에 나는 주로 한국 종교계를 염두에 두면서 종교와 영성을 구별하는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실은 두 개가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종교든 영성이든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영성이 어떤 성격의 영성, 좀 더 정확히 말해 세상/세간이나 사회/역사, 그리고 물질과 육체를 폄하하고 도외시하는 영성인지, 아니면 둘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둘 다 변화시키려는 영성인지에 있다.

 

불행히도 마르크스가 접했던아편종교는 사회정의와 세상의 행복을 도외시하고 저 세상의 행복에만 매달렸던 종교, 사람들로 하여금 부조리한 사회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하늘의 위로만 구하게 했던 기독교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 이런 비판을 받을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성서에는 마르크스 자신이 보여준 비판정신의 원조와도 같은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거짓 평화를 외치는 기득권층을 신랄하게 고발한 예레미아 같은 예언자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 자신도 이런 예언자들의 정신을 물려받은 사람이었으며, 기독교 2,000년 역사가 다분히 권력층의 양심을 무디고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해주는 일도 해 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진 조계종 제공

 

 

1970-80년대의 우리사회만 해도 많은 신부님들과 목사님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성직자들이 절대 다수였지만, 그래도 소수의 예언자적 삶과 정의에 목말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용기 덕분에 우리가 이 정도나마 민주화된 사회에 살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비단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실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초월적 세계, 물질세계와 구별되는 영적 세계, 그리고 현세 너머의 내세를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가 아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 보면 이미 세계 도피라면 도피다.

 

세계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 하나 밖에 없는데 종교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으며, 인생은 단 한 번 살뿐인데 또 다른 삶이 있다고 말하며, 물질과 육체는 누가 보아도 엄청 중요한 것인데 무슨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나 영혼 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니, 종교는 현실도피, 인간소외, 심지어 성직자들의 사기극이라고 할만도 하다. 하지만 종교는 본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생겨났다. 현실을 알되 현실만으로는 문제가 안 풀리기에 초월적 세계에 눈을 떠서 그 시각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종교가 이렇게 초월적 세계를 추구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현실을 도피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현실에 집착해서 괴로워하기에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 물론 문제의 진단과 처방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 못 되었다고 세속주의자들을 말하겠지만 - 종교가 종종 현실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어떤 종교는 초월적 세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나 물질계를 아예 탈출해야 할 감옥으로 간주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종교가 사회와 역사의 문제를 외면하고 현실 도피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것이 아니며 항시 그런 것도 아니다

 

  종교는 아편일 수 있고 영성도 현실도피적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폄하하고 초월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실제로는 오히려 물질을 더 탐하고 세상 권력과 쉽게 타협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인간적 연약함이나 위선일 수도 있겠지만, 극단은 극단과 통하듯 물질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거나 현실세계를 사탄의 왕국처럼 악마화하는 것과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권력과의 손쉬운 타협 사이에는 본질적 연관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현대 종교는 현실 도피와는 정반대로 지나치게 현실 문제에 집착하면서 마치 시민운동 단체나 여느 사회단체처럼 사회 문제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둘 다 종교의 바른 모습은 아니다. 초월적 시각을 상실한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닐 것이며, 현실을 도외시하는 종교 역시 현실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과 초월 어느 하나도 무시하지 않고 양자 간의 긴장을 유지한 채 매개하는 자세가 종교와 영성에 요구된다. 각 종교가 이를 어떻게 자체의 교리와 사상에서 구체화하는가는 물론 각 종교 지도자들의 몫이다.    

 

 


 지난 2010 8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4대강 개발 반대시위를 하는 4대종교인들  사진 <한겨레> 자료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명상 내지 관상을 주로 하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과 수도원이나 교회 행정을 비롯해서 사회봉사를 중시하는 활동적 삶(vita activa)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하냐는 문제가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그의 발치를 떠나지 않았던 마리아의 자세로 대변되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접대하고자 부엌에서 바삐 움직였던 마르타의 행위로 대변되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마이스터 엑카르트 같은 신학과 영성의 대가는 이런 논란이 근본적으로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영성은 오히려 활동적 삶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봉사와 섬김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영성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영성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설교에서 마리아를 아직은 성속이원론을 넘어서는 원숙한 영성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여인으로 보고 있다.

 

  불교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대승불교는 출가승들이 사원에 안주하면서 자기들만의 수행과 학문에 집중하고 재가자들의 삶과 종교적 관심에는 무심했던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대승은 그래서 열반에 집착하는 아라한(阿羅漢)보다는 생사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중생 구제에 힘쓰는 보살(菩提薩陀)을 불자들이 추구해야 한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했다.

 

보살은 생사의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열반이 아니라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추구한다. 대승불교도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소승 계율을 여전히 중시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완전히 초월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도할 중생이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한 보살은 결코 먼저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정신, 수행과 성불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한 것이라는 정신은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대승불자들의 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대승의 정신을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로 요약하며, 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새의 양 날개 혹은 수레의 두 바퀴로 삼아 사는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스님들 가운데는 사찰이나 선방에서 수행에 전념할 것인지 아니면 중생 구제나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회봉사 활동에 힘쓸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불교가 심한 탄압을 받던 조선 시대에 스님들을 이판승(理判僧) 사판승(事判僧)으로 구분하던 관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

 

  평화는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자신이 평화롭지 못하면서 평화운동 한다는 것은 모순이고 사람들이 비웃음을 살 것이다.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은 우선 그의 언행과 성품에서 평화로운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분노할만한 상황을 맞는다 해도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은 분노에 사로잡혀서 냉철한 판단력을 상실하거나 타는 불에 기름을 퍼붓듯 사람들의 분노를 부추겨서도 안 될 것이다. 불의를 보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결코 분노로 날 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평소의 수행과 수련 없이는 힘든 일이다.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불러온다는 것이 부처님과 예수님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물론 유대 청년 예수에게는 부처님과 달리 성전의 장사꾼들을 몰아내는 예언자의 거룩한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분노에 지배당하거나 누구를 증오하지 않았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까지 용서하면서 돌아가셨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대학>의 구절은 누구나 한 번 쯤 들어 본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교 전통이 자기 자신을 닦는 수신(修身, 修己)을 근본()으로 삼고 가정과 나라를 다스려서(齊家治國平天下)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일(安人)을 지말(), 즉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직도 유교 전통이 강한 우리사회가 오늘날에도 포기할 수 없는 항구불변의 진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다스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학(儒學)에서는 따라서 불교와 마찬가지로 공부하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인격을 완성하는 마음 공부였다. 공자님의 말씀 - “옛날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했지만 오늘날 배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한다.” - 대로, 공부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배움(爲己之學)이어야 한다고 해서 남을 위한 배움(爲人之學)과 구별했다.

 

정자(程子)는 이를 해석하기를, “옛 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했지만 마침내 만물(혹은 만인)을 완성하는 데 이르렀고, 오늘날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한다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데 이르고 만다.”고 했다. 위기지학은 자기 자신의 문제로부터 고민하면서 시작하는 진실한 공부, ‘실존적공부이어야 하며, 결국 이를 통해 세상도 위하게 되지만, 위인지학은 남을 위한답시고 하지만 실은 남을 의식하고 보이기 위해 하는 위선적 학문이 되기 쉽고 명리를 추구하다가 세상을 이롭게 하기는커녕 참된 자기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위인지학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뿌리 깊은 이기심을 감안할 때 위기지학이 없는 위인지학은 자칫하면 허위가 된다는 경고이지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유교에서 학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기를 통해 안인을 이루려는 데 있다.

 

사실 유교는 항시 이 점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불교와 차별화했다. 사회과학이 발달한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위인지학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인격이 도덕성과 영성을 통해 완성된다 해서 반드시 사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데 일조하지 않고 나아가서 도덕적 감화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해도, 사회의 부조리는 개인의 도덕적/영적 차원을 넘어서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개개인의 인격이 성숙해지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크고 심각하다.

 

정치가 아무리 더럽다 해도 우리가 정치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정치가 가치를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일 수 있다고 믿는다. 오바마 행정부가 전력을 기울이다시피 해서 보수적 공화당의 저지를 뚫고 의료보험이 없는 약 400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에게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입법에 성공한 것은 좋은 예에 속한다. 선진국이라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보다도 열악한 의료 서비스 때문에 세계의 조롱을 사던 미국이 이제 간신히 수치를 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를 통한 제도적 변화 없이는 그 많은 사람들을 도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라는 한 사람의 집념이나 마르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사람이 주도한 비폭력 인권 운동 같은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개인의 높은 도덕성과 강한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도덕성이 정치화되고 제도화되지 않는 한 그 영향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필자 길희성 교수   사진  조현

 

 

  개인의 노력과 사회제도의 개혁은 결코 배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모두 성자가 아닌 이상, 아니 성자라 해도, 사회제도와 시스템 자체가 불합리한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살기 어렵고 위선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사회의 고질적 병인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렸다. 투기로 이익을 보는 사회에서는 투기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손해 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부동산투기가 망국병이라 외쳐대도 투기하지 않을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람을 빼놓고는 극소수일 것이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기가 하는 것은 투자이고 남이 하는 것은 투기라고 궤변을 부리면서 한다. 결국 손해를 보는 사람은 투자할 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기를 놓치고 막차를 탄 사람들뿐이다. 평화는 나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부도 먼저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도덕적 인간이 된다 해서 사회가 도덕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처럼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국제화된 시대에는 인문학 못지않게 사회과학적 위인지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제도개혁을 위해서는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날카로운 분석과 투명한 인식을 줄 수 있는 현대적 위인지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문만으로는 부족하다. 평화를 만들기 위한 운동 없이는 사회가 좀처럼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적 관심을 아예 접고서 나 혼자 평화롭게 살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굳이 어려운 명상이나 오랜 수행이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몸에 큰 병 없고 먹고 살만한 최소한의 수입, 그리고 어리석은 욕망을 자제할만한 최소한의 지혜와 외롭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만 있으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굳이 남의 행복까지 걱정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힐 이유가 없다. 텔레비전은 재미있는 프로그램만 골라 보고 뉴스는 되도록 보지 않고 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다. 더욱이 한 때는 사회 운동에 몸을 던졌다가 쓴맛단맛 다 보고서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가 텃밭이나 가꾸며 사는 사람도 제법 있다.  

    

  사회가 잘되어야 나도 잘된다는 것은 평범한 진리다. 그래서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로서현명한 이기주의에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간단히 말해,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사회에 해를 끼치고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결국 나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아무리현명한이기심이라 한들, 이렇게 이기심에 호소하는 타산적 도덕성이 과연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가 망가지는 것은 나중 일이고 내가 당장 이득을 보는 마당에 그런 논리가 얼마나 통할까? 그래서 유교 윤리는 의()와 인간의 본성적 덕성에 호소할지언정 이익()에 호소하지는 않으며, 의무의 윤리를 강조하는 칸트 같은 철학자도 그런 얄팍한 계산에 인간의 도덕적 삶을 걸지는 않는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는 불가분적이고 반드시 같이 가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어리석음으로 나와 남을 가르면서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에게 남을 위한 관심과 동체대비는 생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일과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구체적인 자비의 실천은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혜는 앎의 문제이지만 사랑과 자비는 의지와 감정의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혜와 의지, 앎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노는 것은 아니지만, 지혜가 훈련이 필요하듯이 자비행도 결단과 실천적 훈련이 필요하다.

 

  개인의 변화도 갑작스러운 깨달음(頓悟)만으로는 안 되고 점차적으로 닦아나가는 부단한 노력(漸修)이 필요한데, 하물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중생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일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눈물을 닦아 주는 평화 만들기는 아무래도 별개의 문제일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절에서 생활하시는 스님들로부터 흔히 듣는 말, 나 자신의 문제도 급한데 사회에 나가 남을 돌볼 자격이나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선 자기완성/후 자비행을 옹호하는 논리 또한 쉽게 수용하기 어렵다. 지혜와 자비 모두 훈련이 필요하며 선후를 확연히 구분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평화 되기 자체가 사랑과 별개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각고의 수행을 통해 내적 평화를 이루었다는 사람이 남에 대한 사랑이 없거나 남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나는 솔직히 말해 그런 평화는 준다 해도 사양하고 싶다. 가짜 수행, 거짓 평화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게 하는 힘은 사랑과 자비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수행을 해도 자기만족에 머물게 하고 자기를 탈피해서 남을 위해 헌신하려는 사랑의 마음과 실천의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런 수행을 해서 무엇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아무리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 해도, 그야말로 온 우주만물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배고픔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한 어린아이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준 일이 없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존경하겠는가?

 

  문제는 우리가 사랑을 너무 개인적 차원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사랑이 개인적 차원에만 머문다면 평화 만들기는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과 정의가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따뜻하고 정의는 차갑다고 생각하며, 사랑은 감싸는 것이지만 정의는 투쟁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정의란 다수를 위한 사랑이다. 오히려 진짜 사랑,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순수한 사랑, 불교에서 말하듯 베풀음이 없는 베풀음(無住相布施)은 사회정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누가 주었는지 모르기에 받는 자가 자존심 상하는 일 없고, 주는 자 역시 자기도 모르게 주었기에 우월감 같은 것이 생길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가 둘 다 필요하지만 동시에 추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만 선택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둘은 같이 가야만 한다. 사회정의를 외면한 영성은 도피적 영성이 되고 또 다른 형태의 이기적 삶으로 변하고 만다. 자기성찰의 지혜와 겸손 없이 사회를 위한답시고 함부로 날뛰는 사람도 문제지만, 뻔히 남의 도움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등지고 홀로 깨끗이 산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곤란하다.

 

사람은 아무리 혼자 있어도 사회성을 벗어날 수 없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고, 홀로 묵언수행을 해도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산다면 모르지만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살기 때문에 언어 속에 깃든 사회성은 피할 길이 없다. 또 설사 혼자서 아무리 깊은 체험을 하고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 한들, 남에게 전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교에서는 그런 사람을 독각승(獨覺乘)이라 해서 보살승보다 훨씬 낮게 여긴다. 반면에 도덕성을 겸비하지 못한 사회운동가는 운동 자체에 누가 되기 십상이고 자기도 쉽게 지치고 심성이 피폐하게 된다.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야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아무리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한다 한들 일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만 자기성찰과 성숙한 인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수신제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식을 키워 본 사람들은 마음이 뜨끔 한다. 부모 노릇 제대로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한 가정을 평화롭게 하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사회운동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또 항시 좋은 얘기 많이 하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가?

 

자기 비움 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은 매우 위험하며, 진정으로 세간을 포기할 마음 없이 출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위해서나 승가를 위해서나 불행한 일이다. 두 경우 모두 종교가 개인적 한풀이나 출세와 야망의 수단으로 화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나라 종교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한겨레신문 웹진 <휴심정>을 좋아해서 부족한 글이나마 꾸준히 기고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휴심정의 필자나 독자 모두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를 배타적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도피적 영성도 아니고 맹목적 행동주의도 아닌 제3의 성숙한 길을 찾아야 한다는 데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의 치유 뿐 아니라 사회의 치유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느껴지며, 세상의 아픔을 온몸으로 안고 평화를 위해 고민하는 소리도 들린다. 세상에 살 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산중에 있지만 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길, 악을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자들에게는 자신을 위한 분노는 없겠지만 남을 위한 분노는 없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자들의 눈에는 악은 보이지만 악인은 보이지 않을 것 같다.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의 일치를 몸소 실천하면서 악은 미워했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았던 현대 성자의 모습을 우리는 마하트마 간디에서 본다. 그는 인도 독립을 위해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끈질기게 비폭력 저항을 전개했지만 결코 영국인들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국주의라는 외부의 적 못지않게 증오라는 내면의 적과도 항시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위대한 영혼’(maha-atma)으로 부르게 만든 것이며, 반쯤 벌거벗은 탁발승’(처칠의 표현)으로 하여금 전 세계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간디들이 외부의 적과 내면의 적을 상대로 거룩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그들과 함께 하기를.

 

 

 

■길희성 / 2012. 09. 14  http://well.hani.co.kr/11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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