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말, 안되는 썰- 피콜로의 영화속 신화이야기> - 김기덕의 영화

작성자피콜로|작성시간11.05.15|조회수743 목록 댓글 1

언제나 화제를 몰고 다니는 영화감독, 김기덕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에는 자전적인 영화 "아리랑"을 들고 말이다.  아직은 그 영화 자체를 보기 전이라 뭐라고 평하기는 시기상조이다. 하지만 매스컴의 보도를 보니 이번에도 꽤나 시끄러울 것 같다. 그는 한때 거의 매년마다 작품을 내놓던 다작의 감독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슬럼프를 겪다가 이번에 어렵게 새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 그가 왜 슬럼프를 겪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영화 <나쁜 남자>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김기덕을 복잡한 내면을 가진 악동 쯤으로 기억하겠지만, 그가 꽤 큰 규모의 과수원을 운영할 정도로 넉넉한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그는 원래 부터 순정을 믿었던 악동이었던 같다. 하지만 지난 몇년동안에 슬럼프를 겪으면서 달라졌을 김기덕의 내면을 확인해 보는 영화가 바로 이번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 세 개의 글은 예전에 써 둔 글이다. 신화풀이를 통해서 김기덕의 작품들을 이해할려고 했다. 세 개의 글을 읽고 나면 김기덕과 이번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섬] 초라하고 무기력한 개인들이 되어 섬처럼 물위에 떠 있다


우선 김기덕의 영화들은 불온하거나 위험한 영화가 아니다. 다만, 우리네 평범한 인생들의 “아픈 곳”을 제법 정확하게 건드린다는 점에서 미간을 약간 찌쁘리게 하는 불편함이 영화속에 있다고 본다. 그는 카메라를 잘 다룰 줄 아는 개구장이 악동같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의 영화들은 색감과 화면빨이 좋았다. 영화들을 디비디로 본 덕을 마음껏 느끼게 해 주었다. 다만 색감과 영상은 너무 선명하고 정직했다. 그에 비해 메세지는 몽환적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외면과 내면의 밀도가 잘 조화가 안되는 느낌이었다. 즉,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이는데 들이는 공에 비해서 이야기의 깊이가 좀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각 장면들을 새롭게 만들어 보려는 영화적 상상력은 풍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속에서 신화적인 모티프나 페이소스를 찾는 것이 영화를 보는 주목적인 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김기덕의 영화들은 신화적인 틀에서 분석하기가 난감한 영화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읽기는 한번 시도해 보겠다. 문학작품들이 작가의 “쓰기”와 독자들의 “읽기”가 각각 다른 영역이듯이, 영화감독의 영화 “만들기”와 관객들의 영화 “보기”는 각각 다른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즉, 한 편의 영화가 아주 말도 안되는 졸작이 아니라면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모든 영화속에는 나름대로의 완결성을 갖춘 “질서”가 있고, 신화적인 상상력 내지는 무의식성은 이 “질서”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필자는 이런 믿음위에서, 신화읽기를 한 번 시도해 보겠다.


처음으로 고른 작품은 “섬”이다. 이 영화의 주무대는 숲속의 외진 길을 지나야 다가갈 수 있는 낚시터이다. 이 낚시터는 낚시에 필요한 여러 도구나 미끼 그리고 간단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가게를 중심으로 물위에 떠 있는 낚시용 방갈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세상과 완전히 떨어진채 살아가는 낚시터 주인 희진이 있다. 이 여주인공은 낚시꾼들에게 음식을 팔고, 때로는 몸을 팔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애인을 살해한 전직경찰 현식이 낚시터로 찾아오게 되고 영화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김기덕의 영화에는“물”이 자주 등장한다. 낚시터의 구조는 뭍과 물의 경계선에 희진의 가게이자 자신만의 성이 있고, 수심이 깊은 물위에 낚시용 방갈로들이 둥둥 떠 있는 형태로 되어있다. 희진의 낡은 모터보트가 방갈로들과 뭍을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신화적으로 물의 이미지는 여신이 지배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과연 낚시꾼들에게 음식을 팔고, 때로는 몸을 파는 희진은 이 낚시터라는 세계에선 가히 “여신”급의 존재이다. 희진은 이 낚시터에선 가장 물을 잘 알며, 수영도 잘 하며, 모터보트를 가장 잘 다룰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희진은 이 낚시터에선 모든 낚시꾼들이나 방문객들의 목줄을 꽉 움켜 쥐고 있는 여신이다. 


문제는 이 낚시터를 찾는 낚시꾼들이나 창녀들과 그 포주를 비롯한 방문객들이 방갈로들을 뭍의 연장으로 착각한다는데 있다. 그들은 희진의 배를 타고 방갈로들로 날라지는 순간, 희진이 만들어 놓은 “질서”속에 완전히 빠져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뭍에서 짊어지고 온 뭍의 질서가 이 낚시터에서도 통할 것으로 생각한다는데 있다. 그들은 마초성이 아주 짙은 뭍의 몸짓대로, 뭍의 말투대로, 뭍의 욕망대로 희진을 대하다가 봉변을 당한다. 때로는 죽음을 당한다. 그들은 초라하고 빈약해 보이기가 이를데 없는 방갈로들 처럼 초라하고 무기력한 개인들이 되어 섬처럼 물위에 떠 있다. 또는 물에 잠기게 된다.


살인을 저지르고 뭍에서 도망쳐온 현식에겐 낚시터는 피신처이자 소도와 같은 곳이었다. 현식은 살인에 대한 고뇌끝에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희진이 이를 막는다. 이는 현식의 재생과 부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후에 가진 둘만의 섹스는, 마치 여신의 사원에서 여사제들이 행했던 그것처럼, 일종의 치료와 정화의 과정이었다. 희진과의 섹스는 현식에게 있어 불안과 육체적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같은 것이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지지만 뭍의 그림자가 아직도 잔뜩 남은 현식은 희진의 집착과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떠날 결심을 한다. 하지만 현식은 희진의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결국 이 세상에 비밀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밝혀지기 시작한다는 진부한 결말로 영화는 끝난다. 


김기덕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실과는 살짝 틀어진 다른 현실의 세계를 포착해내고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아주 많은 재능을 가진것 같다. 일반 사람들이 잘 생각해내지 못하는 영화적 상황설정과 이야기의 전개는 그만의 능력이다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설정과 이야기의 전개는 현실감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것 같다. 마치 한 편의 꿈을 엿본 것 같다고나 할까?




[해안선] 밀물과 썰물이 오고가는 바다는 여자의 몸의 상징이다.

아주 먼 옛날 고대에는 “신화”가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문자는 대중화되지 않았고, 출판기술은 아예 없던 시절에, 이야기꾼들은 각지방의 장터마다 돌며 “이야기”를 구연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었다. 이들이 주로 다룬 이야기는 신화이거나, 민담이거나 삼국지 같은 역사이야기가 되겠다. 그 유명한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등도 이렇게 “이야기품”을 팔던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때문에 신화는 고대의 시대마다 당대의 권력을 잡았던 지배계층의 “선전물”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신화의 내용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허황되고 황당한 이야기같을지는 몰라도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무슨 메세지를 담은 고도의 비유라는 느낌이 강하다. 인간의 문명이 조금씩 흐름을 꺽을 때마다 신화의 바다에도 물러가는 썰물과 밀려오는 밀물이 교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대의 희랍사회에서 “양치기”는 현대의 관점에선 별볼일 없는 직업같다. 하지만, 목양산업이 고대의 희랍사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기간산업”이었다는 점에서, 양치기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그들은 귀족계급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양치기는 목장주쯤이 되겠다. 희랍신화에는 무수한 양치기가 등장한다. 이들은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고, 신의 노여움을 산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기도 한다. 

이들 양치기들은 당대의 지배계층의 일원으로서 또는 반역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 지배계급에 의해 징벌을 받은 사람들의 다른 모습이다. 즉, 신화속에는 지배층에 도전하지 말라는 명확한 경고가 숨겨져 있다. 또한 이들 신화들이 담고 있는 교훈들은 기왕에 있는 기존질서에 순응하라는 은근한 압력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신화나 민담에 더러 등장하는 괴물들은 중앙의 권력에 도전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이야기속에 다시 등장한 경우가 많다. 이런 신화이야기를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퍼뜨렸던 이들 “이야기꾼”들은 어용이지 않았을까?

김기덕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화속에 등장하는 용이나 가물치나 큰 뱀이나 괴물들 같이 권력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그래서 김기덕의 영화들이 담고 있는 메세지는 큰 울림이 없고 결코 위험하지 않다. 최소한 타락한 지배계급에겐 말이다.

김기덕의 “해안선”에 대한 평을 읽어보니 별로 좋은 평이 없다. 이렇게 영화가 졸평을 받게된건 필시 장동건이라는 메이저 중의 메이저급 배우가 출연을 해서 감독이 자신의 페이스를 잃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영화는 엉망이었지만, 이런 엉망인 영화에서도 건질건 건져내는 것이 성실한 관객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의 실패도 유효한게 세상의 일이니 말이다.

신화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해안선”을 기어이 해석해 보자면, 한마디로 역설적인 “야수 (Beast) 콤플렉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밀물과 썰물이 오고가는 바다는 여자의 몸의 상징이다. 생명을 가지고선 영원히 머물 수 없는그 바다를 나와 생사를 걸고 갯벌을 건너와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생명이거나 (해안선의 경우) 간첩이다. 하지만 해안선에는 칠흑같은 밤에도 앞이 아주 잘 보이는 적외선 망원경을 쓰고 온갖 흉기들로 무장하고 있는 군인들의 총부리가 있다. 폭압적인 마초들의 핏발선 남근들이 있다.

그러한 바다와 뭍이 닿은, 여성과 남성의 신화적인 상징이 만나는 접경인 해안에서 민간인 둘은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간 그곳은 아주 폭력적인 세상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인지 “민간인 접근금지 구역”이었다. 칠흑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전방의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아야 할, 그래서 아주 조용해야할 이 “접근금지구역”에서 움직인다는 이유 단 하나로, 생명이 있다는 이유 단 하나로 그 민간인 남자는 육체가 산산이 부서진채 죽어간다. 이 어둠의 상황에 가장 충실했던 한 군인의 무기들에 의해서…

이제 이 바다는 미쳐가는 여인으로 대체된다. 여성이 접근하지 말아야 할 남성들만의 세계인 군부대안에 이 여인은 종횡무진으로 누빈다. 마치 황량한 갯벌에 서있던 장승들 사이를 누비던 그 모습처럼… 하지만 삶의 핏기를 잃은 이 여인은 온전치 못하다. 이 여인은 반성하지 못하는 또다른 남근들에 노출이 된다. 그리고 해안가에서 잃은 애인의 운명처럼, 이 여인은 자신의 분신을 해안가에서 우악스런 마초들의 손에 의해서 또다시 피로 잃어버린다. 뭍으로 (아니 생명의 세계로) 발을 한발짝도 제대로 디디지 못한채, 생명의 요람인 물에서 역설적으로 죽어가는 숨막히는 장면이다.

밤에 해안초소를 지키는 군인들의 입장에선 해안가에 있는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모든 것이 심지어는 바람이나 파도조차도 조용하게 죽어있는 것이 그들에겐 아름다운 것이다. 거기에다가 폭력적인 마초들의 폭력에 간단하게 노출된 곳, 이런 정상이 비정상으로 역전된 숨막히는 곳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려면, 그들은 움직이는 것, 생명이 있는 것을 쏘지 않으면 안된다. 조기전역을 할려면 간첩을 때려 잡아야 하는 곳이다. 이것은 비극이다. 분단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허리에 묵직하게 걸쳐준 비극이다. 

전국의 바닷가 그 어느곳이든지, 목덜미에 척척 감기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부드러운 모래위를 연인과 함께 걸으며 한 밤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끽해야할 곳이 총부리가 번뜩이는 살벌한 곳으로 변한다는 것이 비극이다. 거기에다가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젊음의 한 때를 보내야 할 , 그래서 “과거”를 벌써 그리워하며 빨리 늙어가는 무수한 젊음들이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이런 곳에선 야수와 같이 사는 것이 삶에 꼭 필요한 조건이다.

김기덕은 해병대에서 단기하사로 7년이나 복무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마초의 상징인 해병대에서 5년이나 복무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 “해안선”에 나오는 몇가지 에피소드들은 믿기기가 힘들 정도로 극단적인 사건들로 보여지지만, 그렇다고 생기지 못할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극단적인 에피소드들로 관객들에게 영화의 메세지가 곧바로 전해지기는 힘들다고 본다. 노련함이 아쉬운 대목이다. 아주 많이…




[빈 집]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에 없는 사회, 마치 빈집같은 이 공동체이다.


골프는 소위 신사의 스포츠이다. 넓디 넓은 골프장의 필드에서 공은 어느 곳이나 떨어질 수 있고, 그래서 감시의 눈은 엷고 희미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경기에서 타인을 속이지 않으며 페어-플레이를 할 수 있을려면 골프를 치는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또한 골프는 룰의 게임이다. 골프의 룰을 죄다 모은다면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이다.


만일 어느 인간이 아주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룰을 무시하기를 밥먹듯 하는 사람인데, 아주 비싸고 폼나는 골프채를 휘두르며 골프장 드나들기를 제집 드나들듯이 한다면,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돈은 많아서 대형차를 굴리고 다니며, 으리으리한 집에 살며 그럴싸한 허우대에 멀쑥한 차림으로 목에 힘주고 잘 다니는데, 집에만 돌아오면 아내를 의심하고 폭력을 일삼으며 욕정을 주체할길 없어 허튼 짓이나 한다면 이런 위선적인 인간이 어디 있을까?


번듯번듯하고 깨끗하게 잘 정돈된 주택가에 사는 한국형 브루주아지의 위선에 대해서 조용한 호통을 치는 영화가 바로 김기덕의 "빈집"이 되겠다. 이 영화는 아주 멀쑥한 도심지를 무대로 삼고 있어서인지 예의 김기덕 특유의 난폭성이나 기괴함은 잘 보여지지 않는다. 다만, 환상속에서나마 여주인공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3자동거를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 엽기적이긴 하다.


"빈집"의 영어제목은 3-iron이다. 골프를 아주 잘치는 프로는 몰라도, 아마츄어들은 잘 다루기가 어려운 골프채가 이 3-iron이다. 대개 이 골프채 대신에 fairway-wood로 친다. 하지만, 골프가방 안에 없어서는 안되는게 이 3-iron이다. 말하자면 개점휴업인 골프채인 셈이다. 이것은 여자주인공-남편-남자주인공을 잇는 삼각관계를 절묘하게 표현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며, 영화의 주제를 역설적으로 잘 나타내는 도구라고 하겠다.


재희가 맡은 남자주인공은 갈곳도 없이 도시를 떠도는 백수이다. 그는 식당에서 나오는 광고전단을 각 집의 문마다 걸어두고 한나절이 지나서 (전단지가 아직도 걸려있는) 빈집으로 들어가 실제주인처럼 행세하며 자고 먹고 심지어는 빨래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느날 이렇게 슬쩍 들어가 임시로 지내던 집들 중에 이승연(선화역)이 사는 집에서 주인이 있는줄도 모르고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물론 선화는 남편에게 얻어맞고 얼굴이 퍼렇게 멍든 상태였기 때문에 재희의 침입에 맞닥뜨릴 수도 없었고, 선화가 재희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에는 재희는 이미 이 집에 들어온지가 한참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이 둘의 기묘한 인연은 쉽게 가까워 질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선화는 재희의 기묘한 빈집살이 행각에 동행하게 된다. 여러 빈집들에 들어가 며칠밤을 (문자 그대로) 같이 지내던 이들은, 하루는 어느 인기척 없는 누추한 아파트에 들어갔다가 뇌출혈로 죽어있는 노인을 발견한다. 이들은 차마 그냥 나올 수는 없어서 둘이서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준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버지의 집을 불쑥 찾아온 아들 부부에 의해서 재희와 선화의 빈집살이 행각은 꼬리를 잡히게 된다. 선화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고 재희는 감방에 들어가 몇년간의 형을 살고 나온다.


하지만, 재희는 실제인물이 아니라 환상속의 인물이라는 것이 나중에 드러난다. 선화 자신이 빈집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자본주의 신화의 맹점을 드러낸 것이 빈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양심과 도덕이 걸핏하면 어디로 출장가고 없으며,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에 없는 사회, 마치 빈집같은 이 공동체이다. 여성에게 폭압적이며 그것이 정상으로 치부되는 사회, 공권력이 부패하여 스스로의 권위를 갉아먹는 사회, 가족간의 핵분화로 생사도 모르고 지내는 가족들이 사는 사회... 빈집이다. 사상누각이다.


"빈집"의 결말에서 선화는 드디어 행복의 평온함을 찾게 된다. 남편 뒤에 재희가 있다는 환상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행복한 선화를 보고 폭력적이었던 남편 역시 행복을 찾게 된다. 하나의 환상 덕분에 부부 모두가 구원 받은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하나 꼽으라면, 지나가는 "떠돌이"를 하나의 "공동체"가 포섭하여 삼켜버린다는데 있다. 헐리우드 영화들 같으면 이 "떠돌이"가 포섭되어 들어가는 "공동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영화들이 많을 것이나, 김기덕의 영화에선 공동체는 떠돌이에 의해서 쉬이 와해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영화가 한국영화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한국영화에서 아니 김기덕 영화에서 공동체가 쉬이 와해되지 않는 건 우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기 보다는 김기덕 감독 자신이 공동체 와해를 원치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기덕 감독은 기존 사회규범을 깨뜨려 버리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의 관심과 관용을 바라는 것 같다. 그래서 김기덕은 불온하거나 위험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오랜 슬럼프를 겪고 나온 지금 그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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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노하우업|작성시간11.05.17 걍 넘사벽의 쵝오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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