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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막골 편지

단풍교향악

작성자소양강|작성시간12.10.31|조회수107 목록 댓글 5

엊그제 비가 내린 후 온 산야가 급속히 물들어가며 단풍이 절정을
향하고 있다. 산방 해우소 옆에 있는 반송을 닮은, 뿌리 쪽 부터
다섯 갈래로 제법 굵은 둥치가 나누어진 6~7미터 높이인 단풍나무는
비오기 전엔 마른 빛갈이 칙칙하더니 비온 후엔 선연한 빛이 잘
타오르는 불꽃으로 보인다. 큼직한 붉은 꽃송이로 보이기도 한다.
 
저 뿌리 밑엔 9년을 함께 했던 진도개 혈통의 또백이가 묻혀있다.
또백이는 세상에 없지만 나무 곁엔 또백이가 살던 집이 아직도 그냥 있다.
이미 5년 전이라 이제는 나무와 하나가 됐으리라. 해마다 더욱 짙어지는
핏빛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연유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또백이와
함께 한 시간들이 절절하게 떠오른다. 그립다.
자귀나무와 허공에서 영역다툼도 치열한 편이다.
 
어제가 상강[霜降]이었다. 서리가 내린다는 절기다.
절정이란 매사 그리 길지가 않다. 때를 놓치면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
요즘 작업에 집중하느라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여서 승호대를 다녀온지
꽤 되는 편이다. 하늘은 흐려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면서 햇볕이 구름사이
로 잠깐씩 얼굴을 내밀면 단풍빛이 무대위에서 조명을 받듯 화려해지는
모습이 장쾌하다. 반찬을 푸짐하게 만들어 놓고 나가는 집사람 차에 동승해
3킬로 지점에서 내려 작별을 하고 걸어왔다. 오후 4시다.
 
산막골은 천연수목원이다. 나무 종류가 꽤 다양하다. 참나무만 해도
떡갈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등 각 종류가 다 있고, 자작나무, 진달래, 가래
나무, 철쭉, 산목련, 은사시나무, 층층나무, 엄나무, 산벚나무, 노간주나무, 소나무,
잣나무, 낙엽송, 박달나무, 느릅나무, 생강나무라 부르는 산동백이며, 고백하
건데 나무 이름을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이런 다양한 나무들이 골고루 뒤섞여
있으니 단풍의 빛갈들이 나무만큼이나 다채로워 단풍의 교향악을 음이
아니라 색감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화려함에도 들뜨지 않게 만들며 영혼을
울리는 화음과 화색에 그냥 도취되어 버린다. 몰아의 세계가 펼쳐저 있어서다.
 
어우러짐과  조화가 탁월한 자연이다. 원융의 세계다.
봄엔 꽃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 여름은 그냥 초록이
동색이고 겨울도 개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사계 중 압권은 단연 가을이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은 다 표출되지 않던가. 요즘 계속된 아청빛 하늘과 대비되면
황홀해진다. 맑은 소양호엔 더 맑고 푸른 하늘이 내려앉아 하나가 되는 걸 본다.
거대한 거울이 거기 있다. 수면에 조각구름이 떠 있는가 하면. 단풍이 제 어여쁨
을 비춰보며 심취한 모습도 있다. 어디 천국이 따로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 속에서 나란 존재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녹아들어 혼연일체가 돼서다.
 
경계선없이 뒤범벅되었어도 각자의 고유색을 잃지 않는다.
유난히 붉은 색이 황색나라에 있다고 튀지않는 것도 신기하다. 서로 스며들듯 융합된다.
떡갈나무 한 그루, 산동백 나무 한 그루에도 똑같은 색은 없이 조금씩은 농도가 다
다른 색갈로 하나를 이룬다. 개성이 다른 이웃끼리 서로 보듬는다. 이제 소수자가 되었지만
버팅기며 녹색을 고집한다고 타박하지 않는다. 좀 빠르고 늦고가 있을 뿐임을 알아서다.
어차피 조락의 길로 가는 도반들 아닌가. 이런 대동세계가 사람사는 세상에 전염되어 물이
든다면 좋으련만 소박한 바람일 뿐일까.
 
40분 정도면 오는 거리를 한시간 반 이상이나 걸려서 왔다.
그 시간은 진공의 공간이었고 영원과 맞닿아 있었다. 걸어서 온 것 같지가 않다.
부유해서 온듯한 이 느낌은 뭐란 말인가. 순간이동을 했나싶고 극락세계에 길게
머물다 온 것 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산방에서 다녀온 곳을 바라봐도 환각만 같다.
단풍이 절정에 이른 정점속을 유영하고 난 감회는 가을을 맘껏 향유했다는 것이다.
내일이면 빛바랜 모습일지라도 아쉬움이 적을 듯 하다. 한 껏 누렸기 때문이다.
해마다 이렇게 만족한 가을누림을 체험하지는 못한다. 모든 여건이 맞아야 해서다.
 
달이 떠오르고 어느새 반달이다.
가을 달이 주는 저 청명한 밝음은 계절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달도 별도 이제는 생활에서 벗어나 잊고 살아간다. 시인도 노래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인간이 만들어낸 불빛에 푹 빠졌고 농사를 지어도 일기예보에 매달리니
하늘 볼 일이 없다. 노을이 지면 내일 비가 내릴 것을 알고 달무리가 보여도 날씨를
점쳤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계절이 바뀜을 분별해 내는 감성이 있었다. 별을
보며 국가와 개인의 흥망과 길흉을 점치고 큰 인물이 태어나고 세상 뜬 것을
알았던 전설같은 시대가 실제로 오랫동안 있었음에랴. 영성이 살아있던 삶이었다.
 
이런 것들이 짚혀지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연륜이 쌓였음을 실감한다. 젊어선 관심도
없던 분야가 아니든가. 산막골 새벽 하늘에 뜬 초롱초롱한 별밭을 우러르며 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명멸의 화음, 별들의 교향악이다. 화담선생의 무현금명[無絃琴銘]이란 
글이 있다. 줄없는 거문고가 들려주는 무음의 울림을 노래한 것이다. 글의 일부분이다.
 '그 줄은 쓰지 않고 / 그 줄의 줄소리 밖의 가락을 쓴다 / 나는 그 본연을 체득하고 /
소리로써 그것을 즐긴다 / 소리를 즐긴다지만 /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단풍교향악이 꼭 그렇다. 소리없는 연주지만 감동은 넘쳐났다.
그 울림의 여운은 내 가슴 속에서 두고두고 감돌며 앞으로 올 적막과 고적이 버무려진
긴 겨울을 견뎌내는 힘을 줄 것이다. 그 믿음의 뿌리를 심연으로 내리는 중이다.
 
 
 

 
 * 산막골 추색  ㅡ 이 산수화는 채색을 물감이 아닌 붉은먹을 사용한 작품입니다. 보통 주묵[朱墨]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가을산수화와 다른 느낌을 받는다면 주묵을 이용한 채색 때문일 겁니다. 아는 시인의 감상평이 특이합니다.

에로틱하다고 했습니다. 작가는 전혀 의도하지 안았던 평이었지요. 감상자는 자신의 눈과 생각으로 볼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헤아려줘도 좋고 무시해도 상관없습니다. 작품크기는 10호가 채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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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프로만 | 작성시간 12.11.01 본문에 작품 이미지 주소
    http://www.wooan.com/paintings/2000/002.jpg

    이미지 포스팅 아니라
    우안닷컴 에서 복사 > 후 게시판 붙이기 한것.

    * 단점 - 작품 백업 보존 기능 없음. 우안닷컴이 망실되면 카페에 복사 붙이기 된 이미지도 망실
    * 장점 - 카페 게시판 글을 마우스 긁기 복사 해서 외부 (예/ 무브온21) 에 펌 게시하여도 이미지가 '배꼽' 되지 않음

    장. 단점 참고 하시어 주안점을 두고 싶은 대로 쓰시면 됩니다

    복사 [펌] 으로 우선 글부터 쓰고, 작품 백업까지 하려면, 복사한 이미지 밑에 다시 [사진] 메뉴로 나중에 이미지를 1)포스팅 하시면. 장단점 모두 갖춤 - 시간 나시는 대로 수정 추가 하시면 됩니다.

  • 작성자아프로만 | 작성시간 12.11.01 내 PC로 다운받아서, 다시 이렇게 댓글칸에다 이미지 원본을 포스팅 업 - 저장해도 됩니다

    - 작품보존= [백업 기능] 까지 완벽 ^^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아프로만 | 작성시간 12.11.01 붓이 아닌 먹을 사용하면 느낌이 '에로틱' 하다?
    '울끈~ 불끈~' 해 져서 ㅋ흐~
  • 작성자소금인형 | 작성시간 12.11.01 안녕하세요 소양강님
    감상자는 자신의 눈과 생각으로 작품을 볼 자유와 권리가 있단 말에 위안을 느끼며
    소양강님 작품 잘 감상하고 있답니다
    쌀쌀한 날씨에 건강 유의하세요
    다시 산막골에 가길 염원하는 소금인형이 ... ^^**^^
  • 작성자소양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1.04 소금인형님 반갑습니다. 여기서도 뵙네요.
    변함없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산막골은 변함이 없구요. 다시 방문하실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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