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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그림책 22] 생활의 언어를 문학의 언어와 일치시킨다면

작성자시몽|작성시간11.09.02|조회수61 목록 댓글 1

  요즘 어른들은 '이야기하기'를 하지 않습니다. 옛이야기를 자신의 말로 이야기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기'를 잊어가면서 언어의 귀중한 기능도 함께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귀로 듣는 언어 체험은 중요하다

 

  귀를 통해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언어의 본래 모습으로, 들음과 동시에 마음 속 영상도 그려집니다. 청각적 언어 체험을 유아기에 충분히 경험해야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신뢰감이 생깁니다. 소리, 음성, 이미지, 의미 등 언어의 여러 요소중에서,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소리와 음성 부분을 빼버린다면 언어는 변질되어 버립니다.

  때문에 나는 요즘의 국어 교육이 상당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유아기 언어를 배려하지 않은 채 다음 단계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유아기에는 대체로 이야기를 귀로 듣습니다. 소리를 통해 언어를 획득한다는 뜻입니다.

  TV나 라디오를 듣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린이는 보다 순수하게 언어의 소리 부분에 의지하여 언어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아주 어린 유아들에게 자장가나 동요를, 어린이들에게 시를 들려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뜻을 모르더라도 언어의 즐거움, 리듬, 소리의 재미를 맛보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좋은 그림책은 귀로 고른다

 

  귀로 들어라! 내가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늘 편집부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원고를 눈으로만 훑어보고 '좋은지 나쁜지' 알 순 없습니다. 그림책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려면 반드시 귀로 들어야 하기 때문에 작가의 원고를 누군가 소리내어 읽도록 하지요.

  여러분도 한번 해보십시오. 그림책을 선택할 때에는 그 문장을 귀로 들으십시오. 줄거리는 서점에서 대충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이 얼마나 훌륭한가, 잘 알 수 있는가, 이미지가 풍부하게 나타날 수 있는가응 귀로 들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스스로 그림책을 읽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귀를 통해 듣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선별하는 우리도 당연히 어린이처럼 귀로 들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귀로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옛이야기가 가장 좋습니다. 옛이야기는 오랜 세원 '소리'로, 귀로 전해준 전달되어 살아남은 것이지요. 그래서 들려주는 어른 스스로가 먼저, 이야기에 대한 풍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재미있어하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마 어린이가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어린이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소음어가 넘쳐나는 언어 생활

 

  나는 그림책에 대해, 그림도 중요하지만 언어도 신중하게 살펴봐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언어 생활에 존재감이나 실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현재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멕스 피커드라는 철학자는 자신의 책<소음과 원자화의 세계>에서, 현대인이 지껄이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소음어라고 했습니다. 소음어라는 표현이 정말 실감납니다. 우리는 소음어의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지요. 어린이를 둘러싼 언어 문제를 우리가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어 없이 생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말들을 생각없이 내뱉고, 말들은 입에서 나옴과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는 수도승처럼 몇 시간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는 상태로 있으면, 차츰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며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지고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를 기울이고 차라리 자동차 소음이라도 나면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재의 언어생활을 직시하면서, 어린이들을 위한 책 속에 담긴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른들, 선생님, 아버지, 어머니, 그 밖에 어린이들에게 무엇인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요.

 

  우리의 언어는 문학의 언어와 일치하는가

 

  읽는 이의 언어 문제를 제쳐놓고 어린이 문제, 어린이책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어린이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교육은 어린이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의 문제'이니까요.

  어린이가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어린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어른이 나쁘며, 책이 나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린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 읽어주는 이의 언어와 책 속의 언어가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가 문제입니다. 만약 일치한다면 읽는 이는 마음을 기울여 그 책을 읽어줄 수 있을 테지요. 책을 읽어줄때는 어떤 다른 기교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됩니다.

  현대는 소음어가 넘치는 시대라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는 일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책을 읽어주는 일은 우리가 말하는 언어를 획득하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됩니다. 책이나 그림책을 읽어줄 떄, 그 책 속의 언어를 자기 것으로 읽어준다면, 작가와 같은 수준의 언어의 질 또는 그 이상의 풍부한 것을 전달할 수 있겟지요. 그러면 언어로 성립된 예술인 문학도 어린이 생활에 중요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문학은 언어를 치밀하게 구성하는 것입니다. 언어를 짜맞추어 실감나는, 즉 현실감있는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언어에 의해 연결되고 구성되고 짜여지며, 나아가서 세련되게 다듬어진 예술'입니다. 어릴때부터 그와같은 언어의 세계를 접하는 것은 어린이의 언어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적인 언어로

 

  한 유치원 선생님이 어느 날인가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집 안으로 참개 두 마리가 날아들었는데, 어미로 보이는 큰 참새가 아기 참새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감동했습니다.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아주 열심히 이야기해 주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전혀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고민하던 선생님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언어'때문일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갖가지의 주관적인 체험을 하는데, 그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는 객관적 존재인 언어를 이용합니다. 때문에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적인 언어로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언어의 연결이나 짜임새가 객관적이고 명확해야만 제 3자가 그것을 듣거나 읽었을 때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자기 중심적이어서 객관화되지 못했을 때 직접 체험하지 않았던 상대방에게 전달이 안 되지요. 유치원 어린이들은 직접 그 장면을 보지 못했는데, 선생님의 표현은 주관적이었던 것이지요. 아이들은 덜 객관화된 불충분한 언어표현을 보충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냥 말만 해도 상대방이 이해할 것이라고 간단히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개를 멍멍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흔히들 유아어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다양한 의성어를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을까 하고요. 의성어에는 언어가 쓰이는 풍토, 그 시대의 언어 감각이 묻어있으니까요.

  소는 음 메 - 염소는 메에메에 - 냇물은 졸 졸 - 같은 바람이라도 휑휑 불기도 하고, 솔솔 불기도 하고, 살랑살랑 불기도 하고.....참 다양합니다. 그러니 멍멍, 또는 멍멍이 왔다 들의 표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의성어를 되도록 배제하려 했던 내 생각을 수정해볼까 합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말 못하는 농아를 훈련할 떄 멍멍이나 음메 같은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음성 언어를 배울때도 똑같지 않을까요? 이런 언어만 모아서 그림책을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고 의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린이와 그림책, 마쓰이 다다시 지음, 115p~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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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책읽어주는아빠 | 작성시간 11.09.03 잘 배웠슴닷. 시몽님^^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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