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어린이와 그림책 33] 옛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

작성자시몽|작성시간12.05.18|조회수50 목록 댓글 0

  옛이야기는 조상 대대로 수백 년동안 전해 내려온 문학 형식입니다. 때문에 언어가 군더더기없이 간결하고 구체적이어서, 듣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의 마음에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줄거리는 분명하고 이야기가 흐르는 속도는 쾌적합니다. 또한 반복을 여러 차례 사용함으로써 이야기가 비약하지 않도록 하면서, 조금씩 전개시키는 궁리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이야기는 아직 경험이 얕은 아이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권선징악의 확신은 인간을 성장시킨다

 

  옛이야기에는 많은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권선징악'이란 주제입니다. 어린이는 옛이야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듣고 싶어합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한데, 아무리 주인공이 괴로움을 당하고 시련을 겪더라도 마지막에는 착한 사람이 반드시 이긴하는 안도감이 있기 때문에 어린이는 안심하고 듣습니다.

  이따금 젊은 엄마들에게서 옛이야기의 단순한 권선징악 사상에 저항감을 느낀다는 의견을 듣습니다. 이 때 권선징악이 나쁜 것이냐고 되물으면, 나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대답합니다. 이 의견에는 옳은 점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른의 감각이며 어른의 분별입니다. 어른들이 다각적으로 굴절된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별도의 가치판단이 존재하지요. 중요한 것은 그렇게 굴절되기 이전의 가치체계, 즉 '선'입니다.

  선한 것이 승리한다는 법칙을 옛이야기 속에서 확인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에 매우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요? 이 감각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근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련을 겪으며 성장하고 살아가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길 거사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권선징악. 곰팡내 나는 낡은 말일지 모르지만 어린이의 세계에 더욱더 생생한 생명을 가져다 주었으면 합니다. 착하고 바른것이 최후의 승리를 얻는다는 감각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지혜라고 믿습니다.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은 주로 노인들이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인생의 황혼을 맞은 노인이 이제부터 피어나는 어린이에게 들려준 이야기 속에 선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강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의 꺼지지 않는 소망이었다고 할까요. 겹겹이 쌓인 삶의 무게가 묵직하게 담겨 있기에, 옛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기본적인 법칙을 깨닫는 것은 소중합니다.

  그렇다고 권선징악을 가르치려 하거나 설교하려 들지 마세요. 스스로 깨닫고 느낄 수 있도록 구수하게 들려주기만 하세요. 옛이야기는 순수하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늑대를 보글보글 끓여서 저녁밥으로 먹었습니다'

 

  작자 미상의 전승문학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구성이나 표현이 다듬어지기도 했지만, 원래 어린이를 대상으로 지어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어린 이용으로 재화한 것이 많습니다. 이때 원래의 주제에 사탕발림을 해서 변형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지요. 많은 어린이가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은 경험이 있을 '아기돼지 삼형제'입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옛이야기인데 여러 가지로 재화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변형은 이야기 끝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돼지와 늑대가 사이좋게 되는 것, 늑대가 불에 데어 달아나는 것, 늑대가 죽어버리는 것.

  첫번째 결말은 싸움을 해도 마지막에는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교육적인 입장에서 나왔을 겁니다. 늑대를 달아나게 하는 것은 죽게 하는 것이 불쌍하고 잔인한 일이라고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늑대를 죽게 하는 것은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 이야기의 원형을 한 번 살펴봅시다. 영국의 제이콥스는 <영국 옛이야기집>을 펴낸 사람으로, 그의 재화는 영구에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정평 있는 작가입니다. 그런데 제이콥스의 '아기돼지 삼형제'는 늑대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것도 늑대가 그냥 죽는 것이 아닙니다.

 

  [지푸라기로 집을 지은 첫째 돼지와 나뭇가지로 집을 지은 둘째 돼지가 차례차례 늑대에게 잡아먹히자, 셋째 돼지는 있는 힘을 다해 지혜를 짜내고 늑대와 싸웁니다. 마침내 늑대는 지분 위에 올라가 굴뚝을 타고 집 안에 들어오려 합니다. 일단 집에 들어오면 늑대를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어린이들은 손에 땀을 쥐고 긴장합니다. 아아, 이제 끝장이구나! 하지만 셋째 돼지는 냉정을 찾고 늑대가 내려오는 굴뚝 아래 큰 냄비를 놓습니다. 그리고 물을 끓입니다. 늑대가 굴뚝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자 셋째 돼지가 재빨리 냄비 뚜껑을 열어 늑대를 끓는 물 속에 빠뜨리고는 얼른 뚜껑을 닫고 보글보글 끓여서 저녁밥으로 먹어버립니다.

  늑대는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돼지가 늑대를 보글보글 끓여서 먹어버린다는 기상천외한 결말이 되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유머를 이해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결말대로 어린이에게 이야기해 주었을 때 모두 깔깔대고 웃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결코 슬픈 표정이나 무서운 표정을 짓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유머'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재화는 이 점을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늑대가 그냥 죽어버리거나 도망하는 것으로는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늑대와 돼지가 사이좋게 지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것은 어린이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어린이를 신뢰하지 않는 처사입니다.

  늑대를 먹는 것이 잔인하다고 느낀다면 어린이는 결코 웃지 않을 것입니다.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고 밝게 유머를 이해하고 느꼈다는 의미입니다. 잔인하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입니다.

   교육적이라는 명분으로 사탕발림을 한 옛이야기는 그 가치를 잃습니다. 인간을 신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마리 아기돼지'의 문학적 가치는 결말의 건강한 웃음과 유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린이와 그림책, 마쓰이 다다시 지음, 172p~175p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