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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그림책17] 한겨울의 개구리가 보여주는 리얼리티 (에우게니 M. 라초프의 <장갑>)

작성자시몽|작성시간11.06.13|조회수91 목록 댓글 0

  어린이는 그림을 읽습니다.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를 읽어냅니다. 그러니 화면을 보면서 저절로 줄거리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좋은 그림책입니다. 여기서는 어린이가 그림을 읽어내는 방법에 있어서, 어린이는 그림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읽고 즐긴다는 사실을 지적하고다 합니다.

 

  그림의 세부적인 표현까지 읽어내는 아이들

 

  어린이는 한 장면의 그림속에서 여러가지 이야기와 뜻과 놀이를 읽어내는 독특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어린이가 그림의 세부를 읽어내는 능력은 어른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이 훌륭합니다. 그들은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읽어내고 이야기 세계에 몰입합니다.

  그러니 그림책의 그림만큼 세부를 소중히 하고, 구석구석까지 정확하게 이야기의 세계를 표현해야 하는 그림은 없습니다. 세부를 얼마만큼 그려낼 수 있는가, 또는 생략할 수 있는가가 그림책 화가로서의 자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건이 됩니다.

  그림의 세부적인 표현들은 그림책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세부를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얽어감으로꺼 언어 세계를 시각적 세계로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장애가 되어 작품 전체의 현실감을 약화시킬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그리지 않느냐의 문제로 화가가 이야기를 해석하고 참여하는 선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세부적인 것들을 명확히 볼 수 없으면 그려낼 수도 없고 생략할 수도 없습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많은 이미지가 감추어진 경우도 있고. 단순히 그것밖에는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린이들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이 점을 감지해 냅니다.

  최근 화면 가득 이것저것 그려넣은 그림책이 많아졌습니다. 대개는 과잉장식입낟. 그러나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이 분명하지 않으면 안일한 꾸미기에 그치고 맙니다. 주제가 엄격하게 추구되지 않은 채 표현되면, 당연히 그 밑바닥에 가라앉아 전체를 받쳐주어야 할 이미지까지 표면에 나타나 주제가 되는 이미지를 희석시켜 버립니다. 이것은 작가의 이미지가 천박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주제는 무엇인가,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할 표현은 무엇인가. 그 표현을 받쳐주는 세부는 무엇인가. 하나하나 짚어서 어린이가 진정 기뻐하는 그림책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옛이야기를 사실적인 그림으로

 

  내가 <장갑>을 처음 본 건 20여년전 어느 고서점에서였습니다. 러시아어로 쓰인 얄팍한 그림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아주 강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러시아어를 전혀 몰랐지만 그림을 보고 대강의 줄거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장갑속에 동물이 차례차례 들어가는 모양에 빙그레 미소지어졌고, 생생하고 기품있는 아름다움에 흙냄새 나는 소박함까지 있는 그림이 좋아졌습니다.

  책 이름도 화가 이름도 모른 채 그 책을 샀지요. 우리 집 세 아이가 어찌나 좋아했던지요. 책장이 너덜너덜 닳아지도록 보고 또 보며 즐거워했습니다. <장갑>이라는 그림책이 내가 좋아하는 이상으로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확인했습니다. 얼마 뒤 나는 이 그림책의 화가인 에우게니 M. 라초프와 러시아 그림책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장갑>(한림출판사)은 옛이야기 구조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그림책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든지 하진 않습니다. 원래 옛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어서 그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림이 있음으로써 이야기의 사실성이 허물어지고. 이미지가 고정되고, 생생한 이야기 세계의 즐거움이나 풍요로운 넓이가 손실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옛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 때는 각별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범한 장갑 속에 동물이 일곱 마리나 들어간다는 비현실적이고 괴상한 이야기. 섣불리 그림을 곁들이면 오히려 거짓이 드러나겠지요. 사실적인 장갑에 쥐, 개구리, 토끼. 여우. 늑대, 멧돼지, 곰이 모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런 이야기일수록 그림으로 보여주기보다는 말로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겠지요. 언어의 세계라면 장갑 속에 그 동물들이 자유롭게 기어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언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약속합니다. 이는 신화나 옛이야기를 비롯하여 근대적인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이 증명하는 바이며, 때문에 현대 작가들도 언어를 무기로 삼아 불다능을 가능하게 하는 공상 세계에 뛰어들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애씁니다.

  <장갑>은 신기할 정도로 이야기와 그림에 위화감이 없고 조화가 잘 이루어져 일체화되어 있습니다. 라초프의 그림 없이는 <장갑>이라는 이야기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솜씨입니다. 옛이야기 그림책은 수없이 많지만 이 정도의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비결이 무엇일까요? 또한 <장갑>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차지하는 그림책도 드뭅니다. 특히 3~5세 유아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어린이가 좋아한다는 것은 "들어갈 만한 세계"를 느끼고 "아! 그렇구나" 하고 공감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야기에게 사실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몰아의 경지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입낟. 어떤 요소가 그런 사실성을 낳게 했을까요?

 

  에우게니 M. 라초프의 <장갑>들여다보기

 

  옛이야기 [장갑]은 내가 편집자라면 그림책 만들기를 피했을 작품입니다. 그림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라고 말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 이토록 성공했을까요? 어린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어른들까지도. 어째서 "장갑속에는 그렇게 많은 동물이 들어갈 수 없어! 거짓말이야!"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림속의 어떤 요소가 이야기에 강한 리얼리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 문제가 오랫동안 나의 의문이었습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나는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 체험이 있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편집자로서, 그리고 그림책 연구자의 입장에서, <장갑>이라는 그림책을 예로 그림책 읽는 법을 설명할까 합니다.

  첫 장면, 할아버지가 흘리고 간 장갑 하나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동물들을 사실적인 그대로 그릴 경우 장갑 크기와 동물 크기가 균형이 안 맞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들어가게 하려면 장갑을 크게 하든지 동물을 작게 그려야 합니다. 거짓이지요, 그런데 라초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갑 크기를 거의 바꾸지 않은채 동물들을 장갑에 넣는데도 자연스럽습니다. 고무처럼 늘어나는 장갑도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와 같은 마법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둘째 장면, 장갑은 여전히 장갑 그대로 입니다. 쥐가 장갑에 비해 조금 작게 보이지만 부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라초프의 대마술이 시작됩니다.

  셋째 장면, 장갑에 쪽마루가 생기고 입구에는 사다리도 보입니다. 여기에 다음 등장인물로 개구리가 나타납니다. 이상하지요. 때를 겨울이고 눈이 오는데 개구리가 나타나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 한겨울의 개구리는 라초프의 이야기 해석력과 표현겻, 상상력을 푸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요.

  개구리와 쥐가 사는 장갑에 이번엔 토끼가 등장합니다. 장갑은 표현하는 각도가 다를 뿐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이 장면 이후의 장갑 표현은 좌우 방향이 교대로 바뀌면서 화면에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끼가 함께 살게 되니까 장갑 모양이 달라집니다. 손을 집어넣는 쪽이 입구였는데 여기에 베란다처럼 마루를 깔로 증축을 했으면 추녀도 달았습니다. 마루 밑에는 창고같은 작은 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추녀에는 웬일인지 커다란 못이 하나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우가 나타났습니다.

   장갑에 네 마리 동물이 들어갔을 때, 늑대가 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장갑은.......굴뚝이 생기고 연기가 나옵니다. 장갑이 집다워졌고 생활의 냄새가 풍깁니다.

  일곱째 장면에서는 멧돼지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장갑은 이제 포화 상태입니다. 장가에는 창문이 뚫리고 입구에 작은 종이 생겼습니다. 처음에 나는 이 종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는데 아이들이 알려주었지요. "종이 매달렸어." 하고. 정말 아이들이란 그림의 세부적이 표현을 잘도 봅니다. 어른의 눈은 대상을 상식이라든가 개념이라는 흐름속에서 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을 놓쳐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야기의 세계를 확인하고 납득할 수 있는 실마리를 하나라도 더 잡으려 하지요. 먹이를 노리는 동물의 눈처럼요.

   이제 여섯 마리입니다. 멧돼지까지, 정말 장갑은 꽉꽉 찼습니다. 만원입니다. 양쪽 창문도 활짝 열려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오른 장갑은 이 장면의 마지막 문장 '이것으로 일곱마리가 되었습니다 .장갑은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것 같았습니다.'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주듯이 실밥이 터져 있습니다. 어린이는 귀로 듣는 마로가 눈으로 보는 그림의 기막힌 대응을 통해서 '정말이구나!'하는 느낌은 강하게 가질 것입니다.

 

  문장 어디에도 겨울, 눈, 추위는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장갑이었던 것이 새로운 세부를 하나씩 보탬으로써 하나의 집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거의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상황 설정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갑의 크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실로 놀아운 수법의 표현이 아닙니까?

  라초프는 장갑 한 짝에 일곱마리의 동물이 들어가면서도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잃지 않기 위한 방법을 거듭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장갑을 장갑 모양의 집으로 바꿈으로꺼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겠지요.

  또 한가지는 개구리의 존재입니다. 왜 한겨울에 겨울잠을 자야 할 개구리가 나타나는가? 소박한 질문입니다. 아무지 훌륭한 화가라도 때로는 부주의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너무 큰 잘못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 -아마도 이 그림책을 아는 모든 사람이라고 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 <장갑>을 겨울 이야기의 대표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은 나 역시 그럤습니다. 그러나 이 개구리가 마음에 걸려서 그림책 문장을 되풀이해서 읽어보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겨울, 눈 , 추위 등의 언어나 겨울을 연상시키는 언어가 전혀 없는 겁니다. 놀라웠습니다. 덮어놓고 겨울 이야기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 이야기는 겨울이 아니라도 괜찮은 것입니다. 장갑은 겨울에만 쓰는 것이 아니지요. 일할 때 쓰는 장갑도 있으니까요. 겨울 이야기가 아니라면 개구리가 나와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지요.

  아 옛이야기를 겨울 이야기로 설정하고 무대와 배경을 겨울로 정한 것은 화가인 라초프의 발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점이 또 멋집니다. 겨울은 눈과 추위를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동물들이 따뜻한 장갑속으로 기어드는 기분에 공감하게 합니다. 혹독한 추위와 따뜻한 장갑, 추위에 떠는 동물들이 서로 양보하며 따뜻한 장갑속으로 기어드는 기분.

  독자에게 충분히 납득되고 공감이 가는 이 설정이 이야기 세계에 리얼리티를 불어 넣습니다. 납득과 공감은 이야기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강력한 실마리가 됩니다. 화가는 자신의 아이디어로 이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무대를 제공했고, 단단한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리얼리티 앞에서는 상식과 과학적 사실을 뛰어넘는 '한겨울의 개구리'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술이란 그런것이겠지요, 나는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거나 경시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예술적 진실의 가치와 힘의 존재오 확실하게 인정합니다. 한겨울의 개구리는 잘못도 아니고 거짓도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진실한 표현이 이 그림책에 있습니다.

  그림책 속의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그림책 안에서 어떻게 리얼리티가 만들어지며, 어떤 효과와 힘을 낳는가. 그것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우리는 어린이의 기분을 기반으로 하여 구체적인 작품을 검토함으로써 '어린이가 좋아하는 그림책'의 본질을 해명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창조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창조의 출발점은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 그림책. 마쓰이 다다시 지음. p87~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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