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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편.

사천포해전과 사천성전투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기록에 대한 고찰

작성자고구려|작성시간12.03.17|조회수1,631 목록 댓글 4


사천전투는 임진왜란의 [사천포해전]과 정유재란의 [사천성전투]로 구분되는데 임진년의 [사천포해전]은 조선이 승리한 해전이고 정유재란의 [사천성전투]는 일본의 속임수 전략에 조ㆍ명연합군이 크게 패한 전투이다.

박정주


1.임진왜란의 사천포해전

 

1-1.조선의 기록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조선 수군이 경상남도 사천 앞바다에서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한 해전으로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두 번째로 출전해 치른 첫 해전이다. 전투로는 1592년(선조 25) 5월 7일부터 8일까지 치른 세 번의 해전에 이어 네 번째이다. 같은 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치러졌다. 함대 규모는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의 정예함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의 함대 3척 등 총 26척이다. 이순신 함대에는 새로 창안된 전함 거북선도 포함되었는데,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사천포해전이 처음이다<백과사전>.


1-2. 일본의 기록들

일시: 1592년(선조25년)5월 25일부터 6월1일까지 사천앞바다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전과: 왜선 13척 격침

참전장수: 조선군-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일 본- 미상

병력: 조선-이순신휘하함선 23척, 원균휘하함선3척 합계 전선26척과 민선20여척 / 일본-일본전함 13척(전부소실)

전과: 조선군-피해없음/ 일본-전함13척 침몰

전투의 배경: (*1592년 5월 5일 이순신과 이억기는 판옥선 24척을 이끌고 일본군의 본진인 가덕도로 향하는 중 거제도 옥포에 왜선 50여척을 발견하고 이를 격파했다/옥포해전.5월 7일). 이를 옥포대전이라 한다<저자주>.) 이 후 이순신은 본진으로 돌아온 후 5월 27일 까지 함대전법 및 훈련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순신은 휘하장수들과 함께 다음 전투의 전법을 상의하여 전라좌수영과 연합하기로 결정했다. 이순신은 수영에 전언을 보내 6월3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5월27일에 원균이 전언을 보내와 원균의 함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해서 이순신은 좌수영과 선대를 연합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늦다고 판단하고 5월 29일 단독으로 출격했다. 이순신은 원균의 선대와 만난 후 왜선대를 추월해 나아가니 왜선대가 사천포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순신은 사천포 내해가 좁고 조류가 심하기 때문에 선대를 일렬로 정렬 [長蛇陣]으로 넓히라고 명하고 그대로 사천포로 향하였다. 일본선대를 港에서 유인하려고 했으니 약 200여명의 왜군은 港에서 조총으로 사격만 할 뿐이었다. 이 때 조류가 갑자기 변하여 이순신의 함대는 港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거북선(龜甲船)을 처음으로 출격시켰다. 거북선은 선대가 진입하기 전에 돌격하여 왜선을 교란시켰다. 그러자 왜군은 바로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했다. 이순신은 남은 모든 전함을 침몰시켰다. 이순신과 나대용은 이 전투에서 조총에 왼쪽어깨를 맞아 부상을 당했다.


2.정유재란의 사천성전투


2-1조선의 기록

일시 : 1598년(선조 31) 9월 19일~10월 1일

전투지역 : 경남 사천시 사천성

전쟁상대국 : 일본

관련유적 : 경남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 9월 19일부터 10월 1일까지 경상남도 사천성에서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벌인 전투.


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9월 18일 조·명연합군은 사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주로 향하였다. 이때 왜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지휘하에 사천의 신성(왜성)에 본진을 두고 1만 여의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사천성(구성)에는 2천여 병력을 배치하여 14,0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9월 19일 조·명연합군이 진주의 왜군을 물리치고 사천성에 육박하자 사천성의 병력을 사천 신성(왜성)으로 이동시키려 하였다. 사천성의 왜군이 철수 준비를 하던 28일 밤 경상우수사 정기룡의 조선군은 이 정보를 알고 야습을 감행하였다. 당황한 왜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천 신성으로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은 사천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사천 신성(왜성)을 공격하였는데, 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명나라 군대가 많이 희생당하였다. 게다가 명군 진영에서 불랑기포가 오발하여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명군은 우왕좌왕하며 진열이 흩어졌고, 이를 본 시마즈(島津)는 전병력을 출동시켜 명군을 공격하였다. 명군은 이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와해되어 3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당한 채 진주 방면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조·명연합군 전술의 취약으로 처음의 승리를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은 패배한 아쉬운 전투였다<배과사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사천성(泗川城)의 탈환: 1598년 9월 20일부터 작전을 개시한 중로군은 남강을 건너 유격장 모국기 등이 먼저 望晉? 永春재를 점령하여 불을 지르고 이틀 후인 22일에는 서남으로 40리 떨어진 昆陽성도 탈환하였다(그림-1). 어디서나 왜군은 잠시 싸우다가는 허둥지둥 도망을 치는 것이 중로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승세를 탄 제독 동일원은 사천성을 빼앗기 위해 우병사 정기룡을 선봉장으로 삼고 보기(步騎) 3천여 명으로써 공격 전진케 하였다. 제독 자신은 정예 4천명을 뽑아서 이에 뒤따르게 한 다음 28일 밤에는 사천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 때 성을 지키던 적장 가와카미(川上忠實)는 신채(왜성) 본진의 시마즈(島津)로부터 이미 철수 명령을 받고 있던 터여서 다음날부터 철수하려던 참에 마침 하루 전에 중로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수장(守將) 가와카미는 수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사천성은 이미 독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적병은 그 위급함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자 비장한 각오로 새벽부터 성문을 박차고 나와 아군의 포위망을 뚫기 시작하였다. 이때 적의 도주 길은 성문 앞 일대에 넓게 펼쳐진 고랑들(古浪坪:현 사천평야)의 좁은 길과 무논(水田)을 거쳐야 했다. 아군은 도주하는 적을 기병으로 추격하고 퇴로를 막고 한편으로는 보병이 달려들어 활을 쏘아 적병을 거꾸러뜨렸다. 이러하여 고랑들에서 다음날까지 계속된 격전에서 아군은 유격장 노득공(盧得功)을 잃었으며 적은 1백5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간신히 바닷가 본진 신채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동일원 제독의 접반사(接伴使)인 이충원(李忠元)이 보고하기를.사천으로 진격하니 적의 무리 4백 명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신채(사천왜성)로 들어갔습니다.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가 벤 적의 머리는 80여급이었고 노유격(盧遊擊)은 탄환(彈丸)을 맞아 죽었습니다. 적의 시체 중에 비단옷을 입은 자가 있었는데 항복한 왜인이 알아보고 ‘이 자는 사천 진영의 부장(副將)이라’ 하였습니다.” 고 하였다.《선조실록》

 

2-2.일본의 기록들

일시:1598년(선조?)10월1일 

지휘관: 조·명연합군-董一元/ 일본-島津義弘

병력: 조·명연합군 수만인~200,000내외/ 일본-7,000내외

전과: 조.명연합군-30,000~80,000내외 사상자/ 일본-미상

전투의 개요

1598년10월 조선의 사천에서 島津義弘이 이끄는 島津軍7천명이 명군의 장군 동일원이 이끄는 수만의 조·명연합군을 격퇴한 전투로서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설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의 명군의 수가 3만7천에서 20만까지라는 설이 있고, 명군의 사망자가 수천에서 8만이라는 자료마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일본 측 기록>

전투의 배경

1598년 9월 말부터 10월초까지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小西軍), 사천왜성(島津軍), 울산왜성(加藤軍)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 중 명장 동일원이 이끄는 20만이라 칭하는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했다. 사천은 일본군의 策源地인 부산과 일본최좌익(조선의 서쪽)의 순천왜성, 남해왜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함락하면 서쪽에 있는 일본군과의 연락을 분단시킬 수 있었다. 사천에 주둔하였던 일본 병력은 島津義弘과 島津忠恒이 이끄는 島津軍7천뿐이었다. 宗軍과 立花軍이 援軍을 신청하였으나 義弘은 이 신청을 거절하고 島津家의 군세만으로 조ㆍ명의 대군을 맞아 격퇴하였다.

전투의 경과

島津軍은 川上忠實에게 수백의 병사를 주어 사천古城을 지키게 하고 약 일만 석의 식량을 저축해 두었다. 島津軍은 소수지만 완강히 저항하여 연합군을 도발시켰다. 또한 川上忠實은 瀨戶口重治에게 명하여 적의 병량고를 불태우게 하고 이를 성공했다(그림-3). 대 병력의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병량고가 불에 타버려 궁지에 몰렸다. 단기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島津義弘은 사천신성(왜성)을 배수의 진을 치고 완강히 저항했다. 복병을 배치했다가 연합군의 공격에 대하여 대량의 철포를 사용하고, 지뢰를 매설하여 저항하는 등 이를  잘 방어하였다. 또한 철편과 철정을 포탄 대신 장진한 대포를 사용했다. 연합군이 공격하는 곳에 義弘은 복병을 출동시켜 적의 대열을 끊어놓고 혼란시켰다. 여기에 義弘본대도 공세로 전환하였다.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하고 또한 피로도 쌓여 격퇴되고 말았다.


그 후 집결하여 철퇴한 연합군의 병력은 일만 정도였다고 한다. 島津측에서는 [취한 수급이 3만, 벤 시체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출전미상). 이 전투에서 島津義弘은 [鬼石蔓子]라 불리어 무서워했고, 그 武名이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전해졌다.

[繪本太閤記]의 기록

회본태합기에는 사천성(사천고성)을 수비한 것은 伊勢兵部少輔定正(貞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사천신성은 新塞城이라 했다. 또한 [鬼ㆍ島津]이 아니고 [?(파)ろしのしまんず] 라고 기술하고 있다. 명군의 병력은 4만여 이고, 島津軍의 병력은 義弘의 5천, 忠常의 1천, 伊勢兵部少輔定正의 3백 합계 6,300여명이고, 취한 명군의 수급은 3만 여로 기술하고 있다.

성패의 원인

성안의 島津軍은 전력 차 때문에 장기전이 되면 불리할 위험이 있었다. 한편 포위하고 있는 명군도 최저 수만의 병력의 대군을 장기간 주둔하는 것은 식량도 문제이고 그 외 島津軍의 습격으로 병량창고가 불타버려 쌍방 단기결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조ㆍ명군은 연합군이기 때문에 지휘통제가 어렵고 한번 예측불허의 사태가 발생하면 수습하기가 어려웠을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은 겨우 7천으로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승리를 낙관하지 않았을까하는 등이 연합군의 약점이었다고 전한다.


한편 島津軍은 이 전투에 패하면 일본군의 연대가 붕괴되고 수많은 일본군이 탈출구를 잃게 된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島津의 전통적인 전술인 [미끼를 던져 사로잡는 전법]으로 열세를 만회한 경험이 몇 번 있었고, 무엇보다 전군이 통일되어 있었다. 더욱 일본의 援軍을 거절하고 島津家의 병력만으로 싸우겠다는 소수지만 군으로서의 의무감이 대단히 높았다고 생각된다.


상기의 요인이 복합하여 島津軍의 기습작전과 복병 등이 성공하여 연합군이 혼란에 빠져 와해했기 때문에 적은 병력의 島津軍이 승리했다고 추측된다. 또한 島津軍이 대량의 철포를 방어에 사용하고 효과를 거둔 것도 큰 요인이었다.


따라서 사천성의 전투에서 명군의 병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패전 측인 명의 기록에서 [전사자 약8만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 8만인이라는 것은 세계사와 비교하여도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패전의 장수는 책임을 물어 처형되는 경우도 있어 전과는 과대히, 손해는 과소히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전사자를 과소보고 했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측이 추정한 명군의 사망자 수 3만 여명의 기록보다 많아 그 진실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전투의 전말

사천전투에 앞서 8월18일 이미 豊臣秀吉이 사망했지만 이를 숨기고 10월 15일부로 일본군에게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島津家가 이 사천전투에서 명군을 격퇴함으로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탈출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한 11월18일의 노량해전에서 小西軍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이 전투를 세계전투 사에서도 비교될 만한 일본의 전설적인 승리의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사천성전투에서 일본군의 유인전술 모의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요시히로(島津義弘)는 그의 陣中에서 복무하던 明나라 사람 郭國安(곽국안)이 명장 董一元의 선봉장 茅國器(모국기.그림-2)와 서로 아는 사이인 점을 이용, 詐降計(사항계)를 구사했다. 즉, 「곽국안이 망진왜성의 새 守將임을 자처하며 中路軍이 공격해 오면 內應(내응)하겠다」는 密書(밀서)를 모국기에게 보냈던 것이다. 1598년 9월21일, 남강 南岸의 망진왜성(望晉倭城)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모국기(茅國器)는 곽국안(郭國安)이 내응하는 신호로 믿고 선봉부대를 이끌고 급히 南江을 건넜다. 뒤이어 中路軍의 全軍이 도하했다. 망진왜성을 쉽게 탈취한 中路軍은 그날 중에 영춘왜성(永春倭城)도 점령하고, 다음날인 9월22일에는 곤양왜성(昆陽倭城)을 불태웠다. 이것은 敵을 가까이로 끌어들여 결전을 벌이겠다는 요시히로(島津義弘)의 誘引(유인)작전에 걸려든 셈이다. 9월29일, 勝勢를 탄 中路軍은 사천읍성으로 몰려갔다. 마침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철수명령에 따라 사천왜성을 향해 퇴각하던 왜병 300여 명이 中路軍에 포착되어 150여명이 전사했다.  10월1일, 시마즈 타다츠네가 진두에 서서 中路軍에 반격을 가하겠다고 나섰지만, 요시히로(義弘)는 출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明兵 1騎(기)가 달려와 성문 앞 300m 지점에다 표찰 하나를 세워 두고 돌아갔다. 표찰에는 「明日, 사천왜성을 공격하겠다」는 戰書(전서)였다. 10월2일, 董一元은 오전 6시30분경 사천왜성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오전 9시경 中路軍은 목책까지 진군하여 화살과 총탄을 우박처럼 발사했다. 드디어 中路軍의 一隊가 성문을 깨고 담을 넘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공격군의 200m 후방에 거치돼 있던 城門 파괴용 대포가 과열에 의해 파열하면서 그 불꽃이 날아가 화약상자에 옮겨 붙음으로써 연쇄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明兵들이 공세를 멈추고 도주하려고 했다. 기회를 포착한 왜병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돌격했다. 백병전에서는 예리한 일본도가 위력을 발휘했다. 主將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본대를 이끌고 달려 나와 도주하는 明軍을 추격했다(그림-4). 中路軍의 선봉장 모국기는 敵의 主將 요시히로(島津義弘)까지 출성하자 성 안의 수비가 엷을 것으로 판단, 一枝軍(일지군)을 이끌고 바로 성문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이것을 본 시마즈 타다나가(島津忠長)가 100騎를 이끌고 사천왜성과 明兵 사이로 뛰어들었다.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 부대도 가세했다. 이때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 부대는 中路軍의 후미에 있던 輜重(치중)부대를 향해 화살과 철포를 발사했다. 後陣의 대소동에 놀란 모국기 부대는 사천읍성 방면으로 도주했다. 한편 董一元 직속의 4,500騎는 영춘왜성과 사천읍성 사이의 石橋(석교) 前面에 최후 방어선을 치고 전세의 逆戰(역전)을 꾀했다. 그러나 가와카미 히사토모(川上久智)의 부대가 달려 나와 中路軍은 붕괴되어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며 합천 삼가까지 도주했다.  이 때 동일원이 왜성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신청한 사실을회본태합기에그림으로나타내고있다(그림-5).


그림-1 사천성 주변 해안도http://cafe.daum.net/sinuc3/4ppT/2389

 


그림-2[모국기(茅國器, 明軍 中路軍將軍)에 관한 그림: 영외에서 조선의 여자를 잡아 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회본태합기>

 


그림-3[요시히로진영의 明人 郭國安이 명의 병량창을 불태우는 그림]<회본태합기>

 


그림-4[吉廣,忠常이 명군을 泗川에서 물리치(?)는 그림]<회본태합기>



그림-5사천의 新寨(사천왜성)에서 義廣이 董一元이 보낸 사신을 크게 꾸짖는 그림<회본태합기>


3.조선과 일본의 기록의 정리

사천포해전은 이순신장군의 지략으로 일본군을 크게 압도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조선 측 기록과 일본 측 기록이 별 차이가 없이 기술되어 있어 일본이 이 전투에서 패전한 사실을 그대로 적시했으나 사망자의 숫자 등은 일본 측 기록에는 없고 단지 200여명이 육지로 도망갔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조선 측의 2,600명과는 전투의 성과에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일본 측이 이 전투를 과소평가한 느낌이 든다.

사천성해전에 대하여는 일본 측 기술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한 이 전쟁을 적은 병력으로 많은 조명연합군을 지략으로 물리친 ‘전설적 전투’로 격상하고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일본군이 큰 피해 없이 조선에서 퇴각할 수 있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조선의 기록은 구체적 내용의 기술이 적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일차 사천구성을 쳐서 수복하는 내용을 위주로 적고 수백인의 일본군을 사살했다는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조선과 명, 일본이 전쟁기록에 대한 견해와 기록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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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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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동혁 작성시간 12.03.18 이런 좋은글을 남겨주시다니 작성자님 지식이 대단하신거 같네요 좋은글 감사하고 앞으로도 몰랐던 만은 사실을 일깨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진만 볼 수 있습니다.
  • 작성자이종식 작성시간 14.03.30 감사합니다!!
  • 작성자소나무 작성시간 14.05.19 대단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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