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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몰랐던 역사이야기

작성자진영이|작성시간24.01.16|조회수57 목록 댓글 0

 

 

 

 

 

 

 

 

 

 

미국의 하버드, 예일, 펜실베니아, 프린스톤, 스텐포드 등의 미국 주요대학을 중심으로 영국의 캠브리지 대, 카나다 토론토 대, 호주 멜본대, 프랑스,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체코, 댄마크, 유럽, 기타 국가들에서 아시아 역사학, 국제관계, 동서 비교문명 분야에서 교재 및 연구도서로 채택돼 활용되고 있는 이홍범박사의 저서 ‘아시아의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 책이다.

 

 

 

 

 

 

 

 

 

 

 

 

 

제가 동학에 대해서 연구하게 된 것은 하버드 대학에서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저명한 교수들이 저를 초청해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동학을 좀 써 달라” 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의 교수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동학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써야 됩니까?” 하니까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대원군에 대한 연구이고, 또 하나는 동학에 대한 연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습니까?” 하니까 “소위 서양의 한국 팽창 정책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집권층인 대원군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유익한 것이고, 또 서민 대중으로부터의 반응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동학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버드에서 펠레스 박사가 연구해서 대원군 연구는 끝났는데, 동학 연구는 이홍범박사가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도 쓰고, 동학연구를 통해 ‘아시아의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 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와그너 박사가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2년 동안 강의하러 한국에 갔을때 저는 펜실베니아 대학으로 돌아가니 펜실바니아 교수들이 태평천국하고 비교 연구를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평천국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동학(東學)의 연구를 하게 되었고, 결국 한중일 3국의 상고사까지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또 태평천국을 연구하다 보니 아프리카 소말리아 이슬람 운동, 남미의 소위 기독교 천년왕국운동, 체코슬로바키아, 유라시아, 그렇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걸 설명하려다 보니까 자연 과학을 연구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 그 중 양자역학, 초끈이론까지 연계시켜서 총체적인 연구방법을 택해서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Asian Millenarianism 아시아 이상주의입니다.

 

 

 

 

전, 펠실베니아 대학 교수였던 힐러리 콘로이씨가 아시아 이상주의 추천서를 쓰셨는데 하버드대학 아시아 태평양 전문가였던 라이샤워 박사와 힐러리 콘로이 교수는 미국에서 아시아 태평양 문제의 전문학자로 쌍벽을 이룬 인물이다.

 

 

힐러리 콘로이 명예교수는 한 때 “일본이 갑오경장을 통해 한국에 근대화의 방법까지 숟가락으로 떠먹여주었으나 한국은 받아먹지 못했다”며 한민족을 우매한 나라로 취급했을 정도로 친일파 학자였다.

 

이렇게 철저한 친일 학자가 "중국과 일본의 어머니 나라가 한국이며 동아시아 역사의 종통도 한국이다." 라는 내용의 글이 담긴 책 아시아 이상주의 추천사를 적었다는 사실 하나가 주는 상징성은 실로 막강하다 볼 수 있다. 이홍범 박사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힐러리 콘로이 명예 교수의 추천서가 의미 하는 것은 이 책에 나와 있는 이홍범 박사님의 주장에 대해서 아이비리그에 있는 박사들이 충분한 검증을 하였다는 것을 학자의 양심을 걸고 보장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연구의 최고 대가의 추천서가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이상주의"라는 책이 아이비리그의 역사 교과서로 채택이 된 것으로 보인다.

 

 

 

 

http://www2.hsp.org/collections/manuscripts/c/conroy3018.htm

 

F. Hilary Conroy Papers, 1972-1988

Processing made possible by a grant from the Pennsylvania Historical and Museum Commission (PHMC).

www2.hsp.org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교수회의를 통해서 책을 선택하는데 이 분야에서 최고의 학술서적으로 평가할 때에 도서연구 목록에 넣는다. 하버드 유니버셜 라이브러리를 치면 Millenarianis 분야에 책이 4권이 나오는데 여기에 9년동안 한권도 하버드대학에서 채택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한국 사람이 쓴 책으로서 채택 된 것은 처음이다. 하버드대학이 포문이 되어 예일, 프린스턴, 펜실베니아, 스탠포드 그리고 캐나다의 맥길 대학, 이태리 국립대학등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The Ancient Founders of China and Japan Were Koreans

 

Ancient Korean historical records state that ancient Koreans turn over China and other Asian countries. According to Chinese history, there were three founding emperors. They are Tai-hao Fu-hsi (太嘷伏羲), (2) Yan-di Shen-nong (炎帝神農), (3) Huang-di Xuan-yuan (皇帝軒轅). All ofg them were Koreans. The five emperors after the founding emperors are (1) Shao-hao Chin-tian(少嘷金天), (2) Zhuan-zhang Kao-yang (Zhuan-zhang高辛). (3) Di-gao Gao-xin (帝gao高辛), (4) Di-yao Tao-tang (帝堯陶唐). and (5) Di-shun You-yu (帝舜有虞).

 

 

 

 

중국과 일본의 고대(古代) 건국자들은 한국 사람이었다.

 

고대 한국 역사 기록들은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중국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권력을 이양(移讓) 받는다라고 기술(記述)한다. 중국 역사에 따르면 건국 3황제(皇帝)가 있었다. 태호복희(太嘷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皇帝軒轅)이 그들이다. 그들 모두는 한국 사람이었다.

 

 

건국 황제(皇帝) 뒤의 5 황제(皇帝)는 1. 소호금천(少嘷金天), 2. 전욱고양(顓頊高陽), 3. 제곡고신(帝嚳高辛), 4. 제요도당(帝堯:陶唐), 5. 제순유우(帝舜有虞)다.

 

 

 

 

 

​All of them were Koreans, except Zhuang-zhang. whose identity is unclear. In ancient Korea, the Koreans used the two words of the last name or title such as Tai-hao, which the Chinese usually did not use. In ancient times, the Mongolian, the same Tungus people as the Korean, used Korean names or titles such as Gen ghe s(u) Khan, which originated in ancient Korean.

 

Korean words and languages, used in ancient Choson Korea, were spread, used, and changed in many statesㅡChina. Mongolia. Eastern Russia, and central Asia. The Chinese made their country‘s name “漢” (Han. or China) from the Korean name “韓” (Han. or Korea). Although the meaning of the two characters is different, the pronunciation is the same. The Chinese usually used one word of a surname or title such as “Li” of the Chinese Tang Dynasty: General Li Shiji, after Tang defeated the Kokuryo Dynasty, the Koreans adopted surnames of one word from two or four words.

 

신원이 불명확한 전욱고양(顓頊高陽) 이외에 그들 모두는 한국 사람들이다. 고대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들은 보통 쓰지 않은 태호(太嘷)와 같이 두개의 단어를 직함(職銜)으로 또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고대시대에 한국인과 같은 퉁구스 사람들인 몽고인들은 고대(古代) 한국에서 기원한 징기스칸 같은 직함(職銜)이나 한국 이름을 사용했다. 고대 조선 한국에서 사용된 한국 낱말들과 언어들은 중국, 몽고(蒙古), 동(東) 러시아 그리고 중앙 아시아 등 많은 나라로 널리 퍼지고, 사용되고, 변형되었다.

 

 

 

중국은 한국 이름인 한(韓)으로부터 자기들의 나라 이름을 한(漢)으로 만들었다. 비록 두 글자의 뜻은 다르지만 발음은 같다. 중국은 흔히 중국 당(唐) 왕조의 리 쉬지의 리 같이 성(姓)이나 직함(職銜)에 한 단어를 사용했다. 당(唐)이 고구려를 패배시킨 후에, 한국 사람들은 2개나 4개의 성(姓)에서 한 단어를 채용(採用)했다.

 

 

 

 

 

According to the ancient Chinese source, Shujing 書經 (Classic of Documents or History), the founders of China were Koreans. Even Chinese Sima Qian’s Shiji also stated that (all emperors or kings) from Huangdi (Emperor) to Yu of the Xia Dynasty had the same root, although their states were different. According to the Korean source, Taebaek ilsa, Fuhsi (伏羲), who was the first emperor of three, was T'aeuui Han‘ung Heavenly Emperor's youngest son in the Han'ung Choson (Korea) State.

 

Gushi bian 古思辨 (Accounts of Ancient History), written by Chinese scholars maintains a similar view. According to the book, Tung-i represents the same people as the Yin (Korean) people. The myths of the people are also the same. Many scholars in the modern era clearly recognize that the founders of China from Fuhsi to the Yin Dynasty were Koreans. ​

 

고대 중국의 자료인 서경(書經)에 따르면 중국의 건국자는 한국사람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은 또한 황제(皇帝)로부터 주(周)왕조(王朝)의 우(禹)까지, 비록 그들의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기술했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 라는 한국의 자료에 따르면, 삼황의 첫번째 황제 복희는 환웅 조선 한국 나라의 태우의 천황의 막내아들이었다.

 

 

중국 학자에 의해 쓰여진 고사변(古思辨)도 비슷한 견해를 유지한다. 그 책에 의하면 동이는 은(殷)나라 사람들과 같이 같은 사람들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신화도 또한 같다. 현 시대의 많은 학자들도 복희(伏羲)부터 은(殷)왕조(王朝)까지 중국의 건국자는 명백히 한국 사람들이었다 라고 인식했다.

 

 

 

 

 

 

 

 

 

 

 

 

 

 

 

 

 

 

 

 

 

 

 

 

 

이홍범 박사, 아시아 이상주의,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역사 교재

Asian Millenarianism, An interdisciplinary Study of the Taiping and Tonghak Rebellions in a global context, Hong Beom RHEE, cambria press, youngstown, new york, 2007. p.12-31

 

 

 

 

"Previous Historiography and Colonial Legacy​

과거의 역사기술 그리고 식민지의 유산

 

 

 

 

 

 

 

 

 

 

 

 

 

 

Most historical writings on Korea were also “the by-product of research conducted by colonial officials or by scholars in the employ of colonial governments,” as Lee V. Cassanelli points out.

 

Colonial governments destroyed not only traditional social and political institutions and imposed their own, but also destroyed its history and spirit. It is important to overcome a colonial legacy in studying millenarianism related to ancient history. ​

 

카사넬리 교수가 지적한 것과 같이, 한국에 대한 대부분의 역사기술들은 식민지 관리나 식민지 정부가 고용한 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된 부산물이었다. 식민지 정부는 전통적인 사회 제도와 정치 제도를 파괴했고, 그리고 그들의 것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제도의 역사와 정신을 파괴했다. 고대 역사에 관계되는 이상주의(理想主義)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식민지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

 

 

 

 

 

 

 

 

 

 

 

 

 

The nationalistic Japanese did not want Korean history to be known as older than the Chinese and Japanese histories. ln this way both the Japanese and Chinese continued to distort real history.

 

In 2003, under a Chinese government policy, Dongbei Gongcheng (North - East Project), and with a huge budget (probably more than $600 billion), the Chinese started to destroy ancient Korean historical and cultural relics and to distort the history of the Koguryo Dynasty.

 

The purpose was to make false history, as if Koguryo were founded and ruled over not by the Koreans but by the Chinese. Even today, the Chinese government does not allow people to take a picture of the Koguryo relics without a permit.

 

 

 

 

 

 

 

 

 

 

민족주의적인 일본인들은 한국 역사가 중국과 일본역사 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본과 중국 모두 진짜 역사를 왜곡하기를 계속했다.

 

2003년 중국 정부의 대규모의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공정이라는 정책하에 중국인들은 고대 한국의 역사 문화 유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구려 왕조의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의 목적은 마치 고구려는 한국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인들에 의해서 건국되었고 지배되었다는 거짓 역사를 만든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중국 정부는 허가 없이 고구려 유적들의 사진 촬영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Shirayanagi Shugo, one of the most prominent Japanese scholars of ancient Japanese history, argues that Chinese culture, including Confucianism and Taoism, was clearly Korean culture. The Chinese could not completely overcome Korean culture until the end of the Han Dynasty (AD. 220).

 

 

 

 

It is true that the ancient Choson Korea ruled over China’s midland. In reality, Sima Qian’s Shiji was a difficult distortion of history written to hide the fact that Koreans ruled over the silk road and the Chinese midlands.

 

Therefore, the name of Han, 漢 (Chinese) was borrowed by the Chinese from Han, 韓 (Korean).

 

 

 

고대 일본 역사의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사람인 쉬라야나기 슈고 씨는 유교와 도교를 포함한 중국 문화는 명백하게 한국 문화였다고 논한다. 중국인들은 한왕조(漢王朝) 끝 무렵(AD. 220)까지 한국 문화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고대 조선 한국이 중국의 내륙을 넘어서서 지배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한국인들이 실크로드와 중국의 내륙을 넘어서 지배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쓰여진 힘겨운 역사의 왜곡이었다. 그러므로 중국, 한(漢)의 이름은 한국의 한(韓)으로부터 중국인들이 빌렸다.

 

 

The prominent Japanese scholar Kashima Noboru argues in his book, Wai to Shin’goku (倭と辰國), that ancient Koreans were connected to the Xia, Yin, Zhou dynasties in China and to the Japanese royal court.

 

Some prominent Japanese intellectuals and scholars like Fukuzawa Yukichi, who is the most famous nationalisic intellectual of Meiji Japan, recognized that the Japanese learned a lot from Korea: The arts of sericulture and shipbuilding, implements for weaving and farming, writings on medicine, Confucianism, and other cultural items were either imported from Korea or developed in Japan."

 

저명한 일본의 학자인 카쉬마 노보루(鹿島昇) 씨는 그의 책 (倭と辰國, 일본(倭)과 중국의 진국(辰国))에서 고대 한국인들은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와 일본의 황실 조정과 연결되어져 있다고 논한다.

 

몇몇 저명한 일본의 지성인들과 명치(明治)의 가장 유명한 애국적인 지성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학자들도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많이 배웠다고 인정했다: 양잠업과 조선업, 직조(織造)와 농업 도구, 의학서, 유교 그리고 다른 문화 항목들이 한국으로부터 수입되었거나 또는 일본에서 발전되었다.

 

 

The majority of Korean experts not only in Korea but also in the United States and other countries have not overcome the trappings of colonial legacy. There are two main reasons why we have not overcome this legacy yet. One is because many Korean historians studied under Professor Yi Pyong-do, who worked with Imanishi Ryu, a former professor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for Japan on the Korean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Chosonsa P’yonch'an Wiwonhoe). This committee was established in 1910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o oversee the production of Korean history.

 

 

 

 

 

 

 

 

 

 

 

 

 

 

 

 

 

 

 

 

 

 

 

 

 

 

 

 

 

 

 

 

 

 

 

 

 

 

 

 

 

 

 

 

한국에 있는 한국 전문가의 대부분 뿐만 아니라 미국과 다른 나라에 있는 한국 전문가들이 식민지 유산의 덫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식민지 유산을 왜 극복 못하는 2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많은 한국 역사학자들이 동경 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이마니쉬 류와 같이 일본을 위하여 한국 역사 편수회 조선사 편찬 위원회에서 같이 일한 이병도 교수의 지도하에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1910년에 일본의 식민지 정부에 의해 한국 역사의 생산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립되어졌다.

 

 

 

 

Japanese activities to destroy Korean history are beyond most scholars’ imaginations. Even afier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 in 1945, Yi Pyong-do and the colonial legacy remained the most powerful influence on Korean historians.

 

Many Korean scholars who havc been influenced by him have been working as history professors at universities in Korea and in many other countries. His influence on Korean historians and Korean experts is still considerable. For instance, A New History of Korea, written by Professor Ki-baik Lee.

 

published by Harvard University, argues that the Tonghak founder's doctrine included elements from Catholicism and also embraced features of popular shamanistic beliefs.

 

 

 

 

 

 

 

 

 

한국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행위는 대부분 학자들의 상상력을 넘어선다.1945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병도와 식민지 유산은 한국 역사가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으로 남아있다.

 

이병도에 영향을 받은 많은 한국 학자들이 한국의 대학들에서 그리고 많은 다른 나라에서 역사교수로서 일해왔다.

 

한국과 한국 전문가들에게 끼친 이병도의 영향은 아직도 대단하다. 예를 들어 하바드 대학에서 출판된 이기백 교수에 의해 쓰여진 신한국 역사는 동학(東學)창시자의 교리는 천주로부터의 요소를 포함했고 그리고 통속적인 샤마니즘(巫敎)의 신앙의 특징을 포괄했다고 논한다.

 

 

 

The other reason why ancient Korean history, which has a relationship with East Asian millenarianism, has not been studied in scholarly depth is because it is a very difficult and thorny task to find and read ancient Korean, Chinese, and Japanese historical sources.

 

Furthermore, since the Korean government adopted the policy to use mainly the Korean language, or Han’gul, there are not many scholars who have the proficiency to read ancient Korean, Chinese, and Japanese documents. Therefore, few scholarly publications in English introduce ancient Korean sources.

 

 

 

A colonial legacy on Asian studies still rules over scholarly circles. As suggested by the African work of Professor Lee V. Cassanelli, some misconceptions on Asian history, which have been caused by a colonial legacy, have influenced not only American scholarship but also world scholarship.

 

 

왜? 동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와 관계를 가지는 고대 한국 역사가 학문적인 깊이로 연구되지 않아왔던 또 다른 이유는 고대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 자료들을 발견하고 읽는 과업이 아주 어렵고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한국정부가 주로 한국어, 즉 한글만 사용하기로 한 정책이 채택되었기 때문에, 고대 한국, 중국, 일본의 자료들을 읽기 위한 능숙함을 가진 그렇게 많은 학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영어로 쓰여진 학문적인 출판이 고대 한국 자료들을 거의 소개하지 못했다.

 

아시아 연구에 대하여 식민지의 유산이 아직도 학문계를 지배하고 있다. 카사넬리 교수의 아프리카 연구에 의해 제안된 것 같이, 식민지의 유산에 의해 야기되어진 몇 가지 잘못된 개념들은 미국 학계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American scholar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reating a new friendship with Japan after World War II, at the Hakone Conference in Japan in 1964, held to change Japan’s image from a warlike nation to that of a democracy.

 

The Amencan scholars' studies mainly focused on Japanese modernization, the Meiji Restoration, Taisho liberalist movements, Samurai culture, and Japaqnese expansion abroad.

 

Edwin Reischauer, Albert Craig, and Akira Iriye, Havard University; Hilary Conroy, Cameron Hurst III, and Frederick Dickinson, University of Pennsylvania; John Hall and James Crowley, Yale University; Marius Jansen, Princeton University; and Peter Duus, Stanford University contributed to these Japanese Studies.

 

 

 

일본의 인상을 호전적임에서 민주주의로 바꾸기 위하여 개최된 1964년 일본 하코네 회의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과 새로운 친선관계를 창조하는 데 미국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학자들의 연구는 주로 일본의 현대화, 메이지 유신, 타이쇼 자유주의 운동, 사무라이 문화, 그리고 일본의 해외 팽창같은 데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바드 대학의 에드윈 라이샤우워, 알버트 크레이그, 그리고 펜실바니아 대학의 아키라 이리예, 힐러리 콘로이, 카메룬 허스트 III, 그리고 프레드릭 디킨슨, 예일 대학의 존 홀, 제임스 크롤리, 프린스턴 대학의 마리우스 잰슨, 스탠포드 대학의 피터 더어스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본 연구들에 공헌을 했다.

 

 

 

 

In Chinese studies, American scholars mainly concentrated on the study of Chinese modernization, nationalism, revolutions, lncluding the Taiping millenarian rebellion and the Communist revolution, the prehistory of China, and why the Chinese fell behind on the way to modernity. However, half a century after World War II, we have not overcome the colonial legacy.

 

Professor John King Fairbank of Harvard University, in his book, China: A New History, contends: “The path of historical wisdom is to find out what issues are in dispute. to identify major current questions, rather than to try to resolve them here and now. Our libraries are littered with the pronouncements of writers who knew all about China but could not see how much they did not know. ​The expansion of our knowledge has expanded the circumference of our ignorance.

 

 

중국의 연구에서 미국학자들은 중국 현대화, 애국주의, 태평천국의 난(亂)을 포함한 혁명들, 그리고 공산주의 혁명, 중국의 역사 이전, 그리고 왜? 중국은 현대화의 여정에서 뒤떨어졌는가 하는 연구에 주로 집중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반세기 후에도 우리는 식민지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해왔다.

 

 

하바드 대학의 페어뱅크 교수는 그의 책 차이나 새로운 역사에서 주장한다. 역사에 지혜의 행로는 문제와 질문들을 지금 여기서 해결하기 보다는 어떤 문제가 논란인가를 발견해 내고, 주류 질문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서관은 중국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작가들의 발표들이 쓰레기더미처럼 널려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많이 모르고 있는 지를 볼 수 없었다. 우리의 지식의 팽창은 우리의 무지의 지평을 넓어지게 했다.

 

 

 

 

”Fairbank argues: “If we wish to understand the social and human factors in China’s falling behind the West in the modern period, we must look more closely at her Korean history, classical thought, and many other features of her high civilization to see how they all may have played a part.”

 

' However, there are few scholars who have paid attention to ancient Korean history, classical thought, and civilization, which were actually an important part of Chinese prehistory. Ancient Korean history was based on the millenarian doctrine.

 

Without ancient Korean millenarianism and history, we cannot understand true social, religious, political, and human factors not only in China but also in Japan and Asia, including the Taiping and the Tonghak millenarian movements.

 

 

 

페어뱅크 교수는 말한다. 만약 현대에 중국과 서방에 뒤떨어진 사회적 인적 요인들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중국의 한국 역사와 고전적인 사상 그리고 고도의 문명을 우리는 더 가까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떻게 그것들 모두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를 알기 위하여.

 

그러나 중국의 이전 역사의 실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인 고대 한국역사, 고전적 사상, 그리고 문명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고대 한국역사는 이상주의(理想主義) 교리의 기초 위에서 근거했다. 고대 한국의 이상주의와 역사없이, 우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태평(太平)과 동학(東學) 이상주의 운동을 포함해서 일본과 아시아에서의 진실한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인간적 요소들을 이해할 수 없다.

 

 

 

 

After the Second World War, the United States helped the colonized nations recover their territories. However, American scholarship of Asia has not overcome the influence of a colonial legacy, even though more than half a century has passed since the War.

 

One of the most important tasks of scholars is to find and write on the truth of human affairs from a colonial legacy or distorted historical accounts. Three or four days before General Yamashita Yasufumi, a Japanese war criminal, was executed by the Allied Forces, he mentioned that the distortion of history made Japanese military clique go in the wrong direction.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식민지 국가들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미국의 아시아 학문은 비록 전후 반세기가 흘러갔지만 식민지 유산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학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가 식민지의 유산이나 왜곡된 역사 기술(記述)로부터 인간사의 진실들을 발견하고 기술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본의 전범(戰犯)인 야마쉬타 야수푸미는 처형되기 3-4일전에 역사 왜곡이 일본 군부 도당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After the victory of the the Allied Forces, scholars began digging to find true history in the world including Asia, Africa, and other colonized countries from a colonial legacy. Prominent Japanese scholar Kashima Noboru states: “Our country does not have historians, although there are history teachers.

 

For the people who are unable to read historical account are not historians.” Koreans have more serious problems in reading historical accounts than Japanese. Our scholarship is still under a colonial legacy. Noboru argues that we have to discard the people who protect distorted historical accounts, in order to find the missing Asian history.

 

연합군의 승리 뒤에 학자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다른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을 포함하여 식민지의 유산으로부터 세계의 진실된 역사를 파기 시작했다.저명한 일본의 학자인 카쉬마 노보루 씨는 말한다. 우리나라는 비록 역사 교사들은 있지만, 역사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적 서술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다. 한국인들도 일본보다 역사 서술을 읽는데에 더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학계는 아직도 식민지의 유산하에 있다. 노보루는 잃어버린 아시아 역사를 찾기 위하여 왜곡된 역사 서술을 보호하는 사람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As Lee V. Cassanelli points out, knowing what issues are in dispute and finding the truth of history are very important tasks in overcoming a colonial legacy. In addition to Lee V. Cassanelli, scholars at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and Harvard University, such as Hilary Conroy, cameron Hurst III, Frederick Dickinson, Edward Wagner, and others encourage overcoming a colonial legacy to find the truth of history.

 

 

They provide a new direction for Asian studies as well as African and millenarian studies in a global context. One of the benefits of comparative history is that it enables scholars to view their own areas of specialization from the outside, and to discover some of the blind spots that their particular traditions of scholarship have produced. The next step in advancing the study of Asian, African, and world history will begin with the overcoming of colonial legacies and the reexamination of present scholarship.

 

카사넬리 교수가 지적하듯이 어떤 문제가 논의중인 것을 앎 그리고 역사의 진실을 발견함이 식민지의 유산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카사넬리 교수와 더불어 펜실바니아와 하바드 대학교의 프레데릭 디킨슨, 에드워드 와그너, 그리고 다른 분들이 역사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식민지 유산을 극복할 것을 독려한다. 그들은 세계적 맥락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연구뿐만 아니라 이상주의(理想主義)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공한다.

 

 

 

비교(比較) 역사의 이익중의 하나가 학자들이 외부로부터 그들 자신의 전문 분야를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특별한 학문 전통이 만들어 놓은 몇몇 어두운 곳을 발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세계 역사의 연구를 전진하게 하는 다음 단계는 식민지의 역사를 극복하는 것과 현재 학계의 재검토를 시작하는 것이다.

 

 

 

 

 

Japanese scholar lmai Keiichi lectured and wrote about the Korean's great contributions to the development of the Kanto region. Kanazawa, who was a professor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during the colonial era, also argued that the ancient Japanese royal court destroyed the historical records that said that the famous Japanese emperor's ancestor came from Korea.

 

Another modern Japanese scholar argues that Japanese imperial family came from Korea, saying that Choson Korea was the grandfather 's land of the Japanese imperial court. Japanese Emperor Tenji was the Puyoyong, son of King Uija of the Paekche (Kudara) Dynastyin Korea. The emperor named Japan Nippon (日本).

 

일본 학자인 이마이 케이이치는 칸토 지역의 발전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큰 기여에 대하여 강의했고 썼다. 식민지 시대 동안 동경제국대학 교수였던 카나자와 씨는 또한 일본 황실 조정은 일본 황제의 선조들이 한국으로부터 왔다는 역사 기록들을 파괴했다라고 논(論)했다. 또 다른 현대 일본 학자는 일본 황실(皇室) 가족은 한국으로부터 왔다라고 논(論)한다.

 

 

 

조선 한국은 일본 황실(皇室) 조정의 할아버지 나라였다고 말하면서. 일본 황제 텐지는 한국에 백제 쿠다라 왕조의 우이자 왕의 아들인 부여용(夫餘勇)이었다. 이 황제가 일본을 니폰-일본(日本)이라 명명(命名)했다.

 

 

 

The Japanese imperial family originated in Korea. The first Emperor Jinmu to the ninth Emperor Kaika most likely came from Silla Korea. The tenth Emperor Sujin to the fifteenth Emperor Oujin and the twenty-fifth Emperor Buretsu came from Paekche (Kudara) Korea.

 

The twenty-sixth Emperor Keitai to the twenty-eighth Emperor Senka came from Silla. The thirty-ninth Emperor Tenji to the fortieth Emperor Jitou came from Silla. Another Japanese scholar, Tanaka Katsuya, in his ancient Japanese history account, argues that ancient Choson Korea, which was governed by Koreans, or the Tungus people, ruled over Manchuria and Eastern Russia, entered Japan, colonized the Kyushu district, and established the Japanese imperial court.

 

일본의 황실 가족은 한국에서 기원한다. 첫 번째 황제(皇帝) 진무(神武)부터 9세(九世) 황제 카이카(開化)는 한국신라(新羅)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10세(十世) 황제 수진(숭신(崇神))부터 15세(十五世) 황제 오우진(응신, 應神)과 25세(二十五世) 황제인 부레추(무열, 武烈)) 황제는 한국 백제(百濟) 쿠다라 로부터 왔다.

 

 

26세(二十六世) 황제 케이타이(계체, 繼体)에서부터 28세(二十八世) 센카(선화, 宣化) 황제 까지는 신라(新羅)로부터 왔다. 29세(二十九世) 황제 텐지(흠명, 欽明)에서 40세(四十世) 황제 진토우(천무, 天(武)까지는 신라(新羅)로부터 왔다.

 

또 다른 일본 학자인 타나카 카추야 씨는 그의 고대 일본 역사 기술(記述)에서 한국 사람들에 의해, 또는 만주(滿洲)와 동(東)러시아를 지배했던 퉁구스(Tungus) 사람들에 의해 통치(統治)된 고대(古代) 조선 한국은 큐슈 지역을 식민지화 했고, 그리고 일본 황실 조정(朝廷)을 세웠다라고 논(論)한다.​

 

 

 

Major Japanese Shinto shrines, centered in the Kyushu district, had Korean names such as 熊, which means “bear,” 곰 (kom) in Korean, and くま (kuma) in Japanese. The Japanese Kojiki and Nihonshoki write about the founding stories of Japan. The stories in the Kojiki and Nikon Shoki are significantly related to Korea; they copied many ancient Korea-related myths.

 

 

They were actually written by the Koreans, who travelled to Japan from Korea. Without knowledge of ancient Korean history and language proficiency,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the myth. Even if a colonial legacy prevails, the Japanese language indicates how strongly ancient Korean civilization lnflueced Japan. The Japanese began to use the phrase “Kudaran koto iuna (下らん こと 言うな, or “Don’t say anything, if it is "or the big (kudaran) country's").

 

 

The Japanese called Paekche (one of the three ancient states of Korea, which ruled over part of China) “kunnara" in ancient times instead of Haksai, which it would be in japanese. The Japanese could not say kunara, which would say kudara. The Japanese admired and respected the Paekche as a big stateㅡone of the three Korean dynasties. The term "Nara" state in the Middle Age of Japan was derived from Korean term "Nara", which means "state.”

 

큐슈(九州)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중요 일본 쉰토(Shinto, 神道) 성지(聖地)들은 곰을 의미하는 웅(熊)같은 한국 이름을 가졌다. 곰(kom)은 한국말이고, 일본어로는 쿠마(くま, kuma)이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의 건국 이야기에 대해 기술(記述)한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있는 이야기들은 한국과 중대하게 관계되어져 있다. 이 이야기들은 의미심장하게도 많은 고대(古代) 한국에 관계된 설화(說話)들을 복사했다. 이 이야기들은 사실 한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여행했던 한국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

 

 

 

고대(古代) 한국의 역사와 언어의 유창함 없이 그 설화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식민지의 유산이 유행하지만, 일본의 언어가 얼마나 강하게 한국의 문명(文明)이 일본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가를 가리키고 있다.

 

 

일본어는 쿠다란 코토 이우나(Kudaran koto iuna, 下らん こと 言うな) “커다란 나라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말하지 마라” 라는 관용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일본어(倭語)인 하크사이(Haksai) 대신에 고대 시대에 백제(百濟), 중국의 한 부분을 지배했던 한국의 삼(三) 고대(古代) 나라들 중의 한 나라를 쿤나라(kunnara) 라고 불렀다.

 

일본인들은 쿠다라(kudara)라고 말한 쿠나라(kunara)를 말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한국 삼(三) 왕조(王朝)중의 하나인 백제를 큰 나라로 동경했고 존경했다. 일본의 중세(中世) 때에 나라라는 단어는 나라를 뜻하는 한국어 나라에서 유래했다.

 

 

 

 

Origin of Ancient East Asian Millenarian Tradition

 

All East Asian history has a common point. Ancient East Asian countries had a supernatural and millenarian dream. Legendary founders of all East Asian countries were based on Heavenly or Divine myth. In East Asia, the emperor or king of each country was bestowed with divine rights by heaven for prosperity and peace of the people and country.

 

In political struggles, the winners reported their history as great, distorted the defeated nation’s history, and degraded millenarian belief as shamanistic. Good examples are cases in ancient Asian millenarian history, Tonghak and Taiping millenarianism.

 

It has been known that East Asian millenarian tradition originated in Chinese culture. There are few scholars who recognize that in the 3rd century, the Chinese Han Dynasty distorted East Asian history for purposes of Chinese ethnocentrism. and in the 19th century, Meiji Japan distorted East Asian history under the imperial millenarian ideology for Japanese expansion. In reality, the millenarian myth of legendary Chinese and Japanese founding emperors originated in ancient Korean millenarian history.

 

 

 

 

고대 동(東)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 전통(傳統)의 기원

 

모든 동아시아 역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고대 동아시아 나라들은 초자연적인 이상주의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아시아 나라들의 전설적인 건국자는 하늘의 또는 신적인 설화(說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동(東)아시아에서는 각 나라의 황제(皇帝)와 왕(王)은 국민과 나라의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하늘에 의해 신적(神的)인 권리를 부여받았다.

 

 

 

정치적인 투쟁들에서 승리자는 그들의 역사를 위대한 것으로 보고했고, 패배한 나라의 역사를 왜곡했다 그리고 이상주의 신앙을 샤마니즘적으로 비하했다. 좋은 예(例)가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 역사에서 동학(東學)과 태평(太平) 이상주의이다. 동(東) 아시아 이상주의 전통은 중국 문화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3세기에 중국 한(漢) 왕조가 중국의 민족중심주의에 목적으로 동(東)아시아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그리고 19세기에 일본의 팽창을 위하여 황제(皇帝) 이상주의 이념 하에 명치(明治) 일본이 동 아시아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학자는 거의 없었다. 실재로는 전설적인 중국과 일본의 건국 황제(皇帝)의 이상주의 신화(神話)는 고대 한국의 이상주의 역사에서 기원(起源)했다.

 

 

 

 

The Ancient Founders of China and Japan Were Koreans

 

Ancient Korean historical records state that ancient Koreans turn over China and other Asian countries. According to Chinese history, there were three founding emperors. They are Tai-hao Fu-hsi (太嘷伏羲), (2) Yan-di Shen-nong (炎帝神農), (3) Huang-di Xuan-yuan (皇帝軒轅). All ofg them were Koreans. The five emperors after the founding emperors are (1) Shao-hao Chin-tian(少嘷金天), (2) Zhuan-zhang Kao-yang (Zhuan-zhang高辛). (3) Di-gao Gao-xin (帝gao高辛), (4) Di-yao Tao-tang (帝堯陶唐). and (5) Di-shun You-yu (帝舜有虞).

 

 

 

 

 

 

 

 

 

 

 

 

 

 

 

 

 

 

 

 

 

 

 

 

 

 

 

 

 

 

 

 

 

 

 

 

 

 

 

 

 

 

 

 

 

 

 

 

 

 

 

 

 

- 전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교수의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중에서 -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학자는 홀로 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학자들의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 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학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논문이나 연구 저서를 출간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잘못 전해왔던 것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바로 동조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오한 연구 결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발표자가 그러한 결과를 내놓기까지는 깊고 오랜 연구를 거쳤기 때문에 그 결과에 동의하려면 그 발표자 정도의 이해 수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한 뒤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연구를 많이 하는 학자일수록 홀로 서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학자는 외롭다. 심오한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학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를 안아주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라도 그것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난의 성격을 지녀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역사 연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사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풍토가 아쉽다.

 

 

새로운 주장을 받아주는 아량이 부족하다. 학문을 벗어난 공격, 심지어는 인신 공격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학교 입장이 난처하다면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면서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그 뒤 어느 정보 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다 기억하는 바와 같이 1980년대는 그러한 곳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시대였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곤란하다면서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본 것은 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선생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필자가 제기한 견해는 중국 고대 문헌을 검토하면서 얻어낸 것으로서 고조선의 영토를 넓게 본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일치한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역사 연구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므로 그것이 사실과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과 일치한 연구 결과는 모두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필자가 우리 고대사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을 강단 사학자와 재야 사학자로 분류하고 필자를 재야 사학자에 포함시켰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주장은 비정통 역사학자의 주장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뜻을 담은 것 같다.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외국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도 했으며 현직이 대학 교수인데 필자를 강단 사학자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남을 칭찬은 하지만, 비방이나 비난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 쓰는 것도 삼간다.

 

올바른 서평을 쓰려면 비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직 필자가 할 일만 충실하게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의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모두 독재 정권에 도움을 준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독재 정권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정권 유지에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리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 모두 독재 정권에 협력한 것인가. 역사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 중요성은 정권과 상관없이 강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모함을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고대사 학자들을 민주화에 역행한 사람들인 것처럼 매도하여 새로운 고대사 연구나 그 결과에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으로 말하면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단체한테서 연구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아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즈음은 우리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 또는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면 세계화의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 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차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도에 필자는 한번도 변명을 하거나 반박을 해본 적이 없다. 묵묵히 연구 생활에만 정진하면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필자의 주장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필자가 그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첫째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내 자신이 남을 모함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를 비방하거나 공격한 학자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필자가 고조선을 포함한 우리 고대사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기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 고대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지난날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침묵만을 지켜왔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서 필자가 새로운 주장을 한 뒤에야 그대들도 기존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의 고대사 내용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지금 필자는 외롭지 않다. 그 동안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필자를 매도했던 학자들까지도 요즘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넓게 보고 있으며 그 문화 수준도 지난날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매우 기쁘다. 우리 민족사를 바로잡는 데 조금은 이바지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필자가 이렇게 그 동안의 사정을 밝히는 것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필자의 체험으로 알림으로써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해주자는 뜻에서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에서이다. 그래야만 우리 겨레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 윤내현,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中 -

 

 

 

 

 

 

 

 

 

 

 

 

 

 

 

 

 

 

 

 

 

 

 

 

 

 

 

 

 

 

 

 

 

 

 

 

 

 

 

 

 

 

 

 

 

 

 

 

 

 

 

 

 

 

 

 

 

 

 

 

 

 

 

 

 

 

 

 

 

 

 

 

 

 

 

 

 

 

 

 

 

 

 

 

 

 

 

 

 

 

 

 

 

 

 

 

 

 

 

 

 

 

 

 

 

 

The Ancient Founders of China and Japan Were Koreans

 

Ancient Korean historical records state that ancient Koreans turn over China and other Asian countries. According to Chinese history, there were three founding emperors. They are Tai-hao Fu-hsi (太嘷伏羲), (2) Yan-di Shen-nong (炎帝神農), (3) Huang-di Xuan-yuan (皇帝軒轅). All ofg them were Koreans. The five emperors after the founding emperors are (1) Shao-hao Chin-tian(少嘷金天), (2) Zhuan-zhang Kao-yang (Zhuan-zhang高辛). (3) Di-gao Gao-xin (帝gao高辛), (4) Di-yao Tao-tang (帝堯陶唐). and (5) Di-shun You-yu (帝舜有虞).

 

 

 

 

중국과 일본의 고대(古代) 건국자들은 한국 사람이었다.

 

고대 한국 역사 기록들은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중국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권력을 이양(移讓) 받는다라고 기술(記述)한다. 중국 역사에 따르면 건국 3황제(皇帝)가 있었다. 태호복희(太嘷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皇帝軒轅)이 그들이다. 그들 모두는 한국 사람이었다.

 

 

건국 황제(皇帝) 뒤의 5 황제(皇帝)는 1. 소호금천(少嘷金天), 2. 전욱고양(顓頊高陽), 3. 제곡고신(帝嚳高辛), 4. 제요도당(帝堯:陶唐), 5. 제순유우(帝舜有虞)다.

 

 

 

 

 

​All of them were Koreans, except Zhuang-zhang. whose identity is unclear. In ancient Korea, the Koreans used the two words of the last name or title such as Tai-hao, which the Chinese usually did not use. In ancient times, the Mongolian, the same Tungus people as the Korean, used Korean names or titles such as Gen ghe s(u) Khan, which originated in ancient Korean.

 

Korean words and languages, used in ancient Choson Korea, were spread, used, and changed in many statesㅡChina. Mongolia. Eastern Russia, and central Asia. The Chinese made their country‘s name “漢” (Han. or China) from the Korean name “韓” (Han. or Korea). Although the meaning of the two characters is different, the pronunciation is the same. The Chinese usually used one word of a surname or title such as “Li” of the Chinese Tang Dynasty: General Li Shiji, after Tang defeated the Kokuryo Dynasty, the Koreans adopted surnames of one word from two or four words.

 

신원이 불명확한 전욱고양(顓頊高陽) 이외에 그들 모두는 한국 사람들이다. 고대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들은 보통 쓰지 않은 태호(太嘷)와 같이 두개의 단어를 직함(職銜)으로 또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고대시대에 한국인과 같은 퉁구스 사람들인 몽고인들은 고대(古代) 한국에서 기원한 징기스칸 같은 직함(職銜)이나 한국 이름을 사용했다. 고대 조선 한국에서 사용된 한국 낱말들과 언어들은 중국, 몽고(蒙古), 동(東) 러시아 그리고 중앙 아시아 등 많은 나라로 널리 퍼지고, 사용되고, 변형되었다.

 

 

중국은 한국 이름인 한(韓)으로부터 자기들의 나라 이름을 한(漢)으로 만들었다. 비록 두 글자의 뜻은 다르지만 발음은 같다. 중국은 흔히 중국 당(唐) 왕조의 리 쉬지의 리 같이 성(姓)이나 직함(職銜)에 한 단어를 사용했다. 당(唐)이 고구려를 패배시킨 후에, 한국 사람들은 2개나 4개의 성(姓)에서 한 단어를 채용(採用)했다.

 

 

 

 

According to the ancient Chinese source, Shujing 書經 (Classic of Documents or History), the founders of China were Koreans. Even Chinese Sima Qian’s Shiji also stated that (all emperors or kings) from Huangdi (Emperor) to Yu of the Xia Dynasty had the same root, although their states were different. According to the Korean source, Taebaek ilsa, Fuhsi (伏羲), who was the first emperor of three, was T'aeuui Han‘ung Heavenly Emperor's youngest son in the Han'ung Choson (Korea) State. Gushi bian 古思辨 (Accounts of Ancient History), written by Chinese scholars maintains a similar view. According to the book, Tung-i represents the same people as the Yin (Korean) people. The myths of the people are also the same. Many scholars in the modern era clearly recognize that the founders of China from Fuhsi to the Yin Dynasty were Koreans. ​

 

고대 중국의 자료인 서경(書經)에 따르면 중국의 건국자는 한국사람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은 또한 황제(皇帝)로부터 주(周)왕조(王朝)의 우(禹)까지, 비록 그들의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기술했다. 태백일사 라는 한국의 자료에 따르면, 삼황의 첫번째 황제 복희는 환웅 조선 한국 나라의 태우이 천황의 막내아들이었다.

 

 

중국 학자에 의해 쓰여진 고사변(古思辨)도 비슷한 견해를 유지한다. 그 책에 의하면 동이는 은(殷)나라 사람들과 같이 같은 사람들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신화도 또한 같다. 현 시대의 많은 학자들도 복희(伏羲)부터 은(殷)왕조(王朝)까지 중국의 건국자는 명백히 한국 사람들이었다 라고 인식했다.

 

 

 

 

 

 

 

 

 

 

 

 

 

 

 

 

 

 

 

 

 

 

 

 

 

 

 

 

 

 

Ancient Choson Korea was the suzerain state over many states in China, and ancient Koreans ruled over huge teritories in China. Chinese recordsㅡJim shu 晉書 (Book of Jin). Houhanshu 後漢書 (Book ofthe Late Han Dynasty), Shanhai jing 山海經 (Book of Mountain and Sea). Lunyu 論語 (Confucius‘ Analects). Qishu 齊書 (Book of Qi Dynasty). Nan-qishu 南齊書 (Book of South Qi Dynasty), Songshi 宋史 (History of Song Dynasty), Liangshu 梁書 (Book of Song Dynasty), Zhoushi 周史 (History of Zhou Dynasty), Beishi 北史 (History of North), Shizi 史記 (Sima Qian’s The Records of the Historian), and Lia-oshu 堯史 (Book of Liao Dynasty)-reported huge ancient Korean territories in Asia. It is not difficult to learn that ancient Koreans ruled over most Chinese territory, if one studies the records carefully in relation to other Korean and Chinese historical records and linguistic and archaeological evidence.

 

고대 조선 한국은 중국의 많은 나라들을 지배한 종주국(宗主國)이었고, 그리고 고대(古代) 한국인들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중국의 기록들 진서(晉書), 후한서(後漢書), 산해경(山海經), 논어(論語), 제서(齊書), 남제서(南齊書), 송사(宋史), 양서(梁書), 주사(周史), 북사(北史), 사기(史記), 요사(堯史)는 아시아에서 광대한 고대 한국 영토를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한국과 중국의 다른 역사 기록들과 언어학적인 고고학적인 증거들의 관계에서, 기록들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의 중국 영토를 지배했다는 것을 배우기는 어렵지 않다.

 

 

 

The Chinese record Shuowen says that the sky over the T ung-i state is enormous and its territory is huge. This Chinese source also states that Shun (舜, the Korean-Chinese emperor) paid tribute to ancient Choson’s (Korea’s) Heavenly Emperor. Chinese scholar Xu Liangzhi, in his Chinese history book, Zhongguo shi qian shi hwa, states that the Tung-i people’s activities were broad, spanning all of Shangdong, Hubei, northwest of Hunan, north of Anhui, Hebei, and the east of Hubei Province, the Liatung peninsula, and the Korean peninsula. The Shandong peninsula was the center of T ung-i activities in Asia. Houhanshu, written in the late Han Dynasty, states that ancient Korea totaled seventy-eight states comprising a huge territory. Although it is clear that ancient Koreans ruled over most of China, Sima Qian’s Shiji intentionally never wrote about the founders of the most powerful ancient Choson Korea.

 

중국의 기록인 설문(說文)은 동이(東夷) 나라를 넘어서 하늘은 엄청나고 영토는 크다 라고 말한다. 이 중국의 자료는 순(舜)은 고대 조선(朝鮮)의 (한국의) 천황(天皇)에게 공물(貢物)을 바쳤다고 기술한다.

 

 

 

중국 역사학자 주 리앙지(Xu Liangzhi)는 자신의 책 (Zhongguo shi qian shi hwa)에서 동이(東夷) 사람들의 활동(活動)이 모든 산동(山東), 하남(河南), 북서(北西) 호남(湖南), 북부(北部) 안휘(安徽), 호북(河北) 그리고 동부(東部) 호북(湖北) 지역(地域), 요동(遼東) 반도(半島)와 한반도에 이르게 광대(廣大)했다라고 기술(記述)한다.

 

 

산동반도는 아시아에서 동이(東夷) 활동의 중심이었다. 후(後) 한(漢)왕조(王朝)에 쓰여진 후한서(後漢書)는 고대(古代) 한국은 거대한 영토를 포함하는 78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라고 기술(記述)한다. 비록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의 중국을 다스렸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가장 강력한 고대 조선(朝鮮) 한국의 건국자들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결코 쓰지 않았다.

 

 

Sima Qian only wrote about others. However, even Sima Qian’s Shiji also says that the 14th Heavenly Emperor Chiu in ancient Han’ung Choson (Korea) was a Heavenly Son (emperor) whose tomb is in Dongping in Shandong Province in China.

 

It is also a piece of evidence that ancient Korea ruled over the midland of China. The nine Tung-i states, which are known as Chinese states now, have paid tribute to Tan’gun Choson Korea. A Kokuryo mural found in a tumulus depicts the tribute relationship. However, even today Chinese authorities do not allow people to see many ancient historical and cultural relics without a permit. Many records still remain of ancient Korean and Chinese writings claiming that ancient Korea ruled over most of China. According to the Korean record, T’aebaek ilsa, Lord (legendary Chinese emperor) Shun from China visits Nangye in Shandong Province every five years. ​

 

사마천(司馬遷)은 단지 다른 것에 대하여 썼다. 하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조차도 중국의 산동지방 동평(東平)에 그의 묘(墓)가 있는, 고대 환웅(桓雄)시대에 14대 천제(天帝) 치우(蚩尤)는 천자(天子) 황제였다고 말한다. 고대 한국이 중국의 중앙부까지 다스렸다는 증거의 한 단편(斷片)이다. 지금은 중국 나라들이라고 알려진 9동이(九東夷) 나라는 단군조선에 공물(貢物)을 바쳤다.

 

 

고분(古墳)에서 발견된 고구려 벽화(壁畵)가 공물(貢物) 관계를 묘사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중국 당국(當局)은 허가없이 사람들이 많은 고대 역사적 문화적 유물들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고대 한국이 대부분의 중국을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고대 한국과 중국의 기술(記述)들의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한국 기록에 따르면, 영주(領主)(전설적인 중국 황제(黃帝)) 순(舜)은 중국(支那)으로 부터 산동(山東)에 있는 난계(Nangye)를 5년마다 방문한다.

 

 

 

 

Shun had an audience with the Korean Heavenly Emperor in the morning. The Chinese source, 書經 (“Shujing,” Classic of Documents or History), one of Confucian classics, also relates a similar story: “In February, Shun went to the East (Tan’gun Choson Korea), and performed worship to Heavenly Emperor at Mountain Taishan (泰山) (in the Shandong Province). Finally he had an audience with the Eastern Emperor and consulted about months and dates of a year.” Shun probably also learned about the I-jing to understand weather and cycle principles of the universe. However, Sima Qian’s Shiji wrote, “Shun met with a ruler of the East.” Sima Qian later replaced the term “ruler” with “emperor.” Sima Qian’s Shiji was written not only by Sima Qian but also by Chu Shaosun, Sima Zhen, and unknown writers with their Chinese ethnocentric bias under Chinese political pressure.

 

순(舜)은 아침에 한국 천자(天子) 천황(天皇)을 알현(謁見)했다. 유교(儒敎) 고전(古典)인 중국의 자료인 서경(書經)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2월에 순(舜)은 동쪽으로 단군 조선 한국에 갔다, 그리고 산동지역 태산(泰山)에서 천제(天帝)에게 경배를 시행(施行)했다. 마침내 그는 동쪽 황제(皇帝)를 알현(謁見)했고 일년(一年)의 달(月)과 일(日)에 대하여 대화(對話)를 나눴다.

 

 

순(舜)은 아마도 또한 우주(宇宙)의 주기 법칙과 날씨를 이해하기 위하여 역경(易經)에 대해서 배웠다. 하지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 썼다. 순(舜)은 동쪽의 지배자를 만났다. 사마천(司馬遷)은 후에 지배자(支配者)를 황제(皇帝)로 대체(代替)했다. 사마천(司馬遷)의 시각은 사마천(司馬遷)뿐만 아니라 샤오순, 시마 첸,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작가(作家)에 의해 중국의 정치적 압력하에서 중국의 민족중심주의 편견(偏見)을 가지고 기술(記述)됐다.

 

 

 

 

 

Colonial Legacy, Present Scholarship of Asian Studies, and Cultural Differences

 

식민지의 역사, 현재 아시아 연구의 학술(學術), 그리고 문화(文化) 차이

 

 

The ancient Korean pictographic character or Chinese character “Tung,” or 東 means the East. “I,” or 夷 is combined by two characters 大 and 弓. 大 means “great” or “big” and 弓 means “archery.” or “Heaven or Heavenly Mind.” The term “弓” (Kung) in ancient Korean pictographic characters or in Chinese characters with the meaning of “Heaven or Heavenly Mind” has long been used in Korean history.

 

The term “弓” was also used as “Heaven or Heavenly Mind" in Korean Ch’amwisol and Tonghak millenarian movement. We have to be very careful in reading Chinese characters for the study of human affairs, particularly in Asian millenarian study. Another example which causes difficulty in translation follows: “Dong (Tung) (東) in the Chinese pinyin system means the East. “Xi” (西) means the West.

 

 

고대 한국의 상형문자 또는 중국 문자 동(東)은 동쪽을 의미한다. 이(夷)는 대(大)와 궁(弓) 두 글자가 조합된 것이다. 대(大)는 위대(偉大)한 또는 큰을 의미하고 그리고 궁(弓)은 궁술(弓術) 또는 하늘 또는 천심(天心)을 의미한다. 하늘 또는 천심(天心)의 의미를 가지는 고대 한국 상형문자 또는 지나 문자로 궁(弓)은 한국의 역사(歷史)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

 

 

궁(弓)은 하늘 또는 천심(天心)으로 한국 참위설(讖緯說)과 동학(東學) 이상주의(理想主義) 운동에서 또한 쓰였다. 특히 아시아 이상주의 연구에서, 우리는 인간사의 연구를 위하여 중국 문자를 읽는 데 아주 조심해야 한다. 번역시 어려움을 일으키는 다른 예(例)가 다음과 같다. 동(東)은 중국의 핀인(병음, 拼音) 체계(體系)에서는 동쪽을 뜻한다. 서(西)는 서쪽을 뜻한다.​

 

 

 

 

Asian Millenarianism, An interdisciplinary Study of the Taiping and Tonghak Rebellions in a global context, Hong Beom RHEE, cambria press, youngstown, new york, 2007. p.12-31

 

 

However, “Dong (Tung)-xi (東西) is usually used as “thing” instead of East and West. Without considering the contents and historical background, we cannot truly understand the Chinese meaning and could easily misunderstand the meaning of “i”. Despite the original meaning of Tung-i, the meaning of “i ” began to be used for “barbarians” since the Chinese Han Dynasty. Later the Chinese called the Korean Tung-i (Eastern barbarian),” and Westerners “Yang-i (Western barbarian).” The Japanese followed suit.

 

The motivation of both the Chinese and Japanese for using the term “i” could have been to hide their jealousy or ignorance of advanced civilizations because ancient civilized Korean and modern civilized Western powers were so powerful. The Koreans mostly did not use the term “i” for the Chinese and Japanese because ancient Koreans established ancient Chinese states and the foundation of their states.

 

The Chinese and Japanese ruling classes were originally Koreans. Kanazawa Shozaburo, who was a professor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in the Meiji era, argued that ancient Chinese leaders who came from China to Japan used Korean last names.“ His argument is true.

 

하지만 동서(東西)는 동(東)과 서(西) 대신에 보통 사물(事物)로 사용된다. 내용과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는 것 없이 우리는 진실로 중국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夷)의 의미를 쉽게 오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동이(東夷)의 원래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夷)의 의미는 중국 한왕조(漢王朝) 이래로 야만인으로 사용되어지기 시작했다.

 

 

 

후에 중국인들은 한국 사람을 동이(東夷) 동쪽 야만인으로, 그리고 서양인을 양이(洋夷) 서쪽 야만인이라 불렀다. 일본인들도 전례(前例)를 따랐다. 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중국과 일본의 동기가 선진 문명에 대한 그들의 질투와 무지(無知)를 숨기기 위하여 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대 문명화된 한국과 현대의 문명화된 서방의 힘이 그렇게 강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과 일본에 대하여 이(夷)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대 한국 사람들은 고대 중국의 나라들을 건국했고 그리고 그들의 나라들의 건국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의 지배계급은 원래 한국 사람들이었다. 명치(明治) 시대에 동경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카나자와 쇼자부로 씨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왔던 고대 중국 지도자들은 한국(韓國)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논(論)했다. 그의 논의(論議)는 사실이다.

 

 

 

 

 

 

 

Confucius and many Chinese admired Tung-i as the highest of civilized people and wanted to live in Tung-i states where there was virtue, justice, and peace, while the Chinese suffered from injustice, corruption, and internal fighting and wars at that time. According to ancient Chinese records, the Chinese viewed and admired Tung-i as bright, brave, and the most powerful and civilized people.

 

These Chinese records testify that Ki-baik Lee’s and John Fairbank’s findings are questionable. Although we recognize now that the term “i” is used for “barbarian,” originally the meaning was completely different. In ancient times, the term was used for “great (archery) power for filial duty and peace.”

 

The main reason why Tung-i (Koreans) invented archery was to protect the bodies of dead ancestors and respected teachers from animals and beasts for filial duty and loyalty rather than for war. The primary purpose was for defense and peace. The doctrine of filial duty, loyalty, and respect of teachers originated in ancient Korean millenarianism.

 

공자(孔子)와 많은 중국인들은 동이(東夷)를 최상(最上)의 문명(文明化)된 사람으로 동경했고, 동이(東夷) 나라에서 살기를 원했다. 동이(東夷) 나라에서는 선(善), 정의(正義), 평화(平和)가 있었으나, 중국에는 그 당시에 부정의(不正義), 부패, 내부의 싸움, 전쟁에 시달렸다.

 

 

 

고대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동이(東夷)를 용감하고 가장 강력하고 문명화(文明化)된 사람으로 보았고 동경했다. 이들 중국의 기록들은 이기백과 존 페어뱅크의 발견물들이 의문스럽다는 것을 증언한다. 비록 우리들은 이(夷)란 단어는 원래와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야만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인식한다.

 

 

 

고대 시대에는 이 용어는 효(孝)와 평화를 위한 위대한 (궁술, 弓術)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동이(東夷)(한국(韓國) 사람들)가 왜 궁술(弓術)을 발명하였는가 하는 중요한 이유는 전쟁을 위하여서라기보다는 효(孝)와 충(忠)을 위하여 죽은 조상들과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시신을 동물들이나 야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첫째의 목적이 방어와 평화를 위해서였다. 선생님에 대한 효(孝), 충(忠), 경(敬) 교리(敎理)는 고대 한국 이상주의(理想主義)에서 기원했다.

 

 

 

 

 

Names of Tung-i, Nine i, and Choson Korea

 

The Chinese have used the term Tung-i (Eastern great bowmen) for the name of Korea or Korean instead of Choson, the formal name of ancient Korea. There are also other names with “i” probably more than nines, such as Jiu-huang, 九皇 (Nine emperors), Jiu-li, 九麗 (Nine beauty), Jiu-jing, 九井 (Nine wells), Qinqiu-guo, 靑邱國 (Clear state), Cang-shui (State over water), and others. In Chinese records about Korea, there are many words with “nine.” “Nine” means that ancient Choson Korea had nine united states. Chinese Shanhaijing 山海經 (Book of Mountain and Sea) reports that there are nine wells and tails. When one well is damaged, the other eight wells activate. Although this has significant meaning in Asian history, most scholars may interpret it simply as nine “well” and think it just an ancient myth. Nine wells refers to nine Tung-i states of ancient Choson Korea. Nine tails means nine Tung-i states because there were nine Tung-i states in ancient Choson Korea.

 

 

 

동이(東夷), 구이(九夷), 조선(朝鮮) 한국의 이름

 

중국인들은 고대 한국의 공식(公式) 국명(國名)인 조선(朝鮮) 대신에 한국 국명(國名) 또는 한국 사람을 동이(東夷, 동쪽 위대한 궁사(弓師))로 사용하였다. 또한 구황(九皇), 구려(九麗), 구정(九井), 청구국(靑邱國) , 창수(蒼水) 같이 이(夷)와 더불어 다른 이름들이 있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기록들에 구(九)를 가진 많은 단어들이 있다. 구(九)는 고대 조선(朝鮮) 한국은 아홉 개 나라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은 아홉 개의 우물과 꼬리가 있다고 기록한다. 하나의 우물이 손상되면 다른 여덟 우물이 작동한다. 이것은 아시아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이것을 단순히 아홉 우물로 해석하고 이것은 단순히 고대의 설화(說話)라고 생각한다. 아홉 우물들은 고대 조선(朝鮮) 한국의 아홉 개 동이(東夷) 나라를 나타낸다. 아홉 꼬리는 아홉 동이(東夷) 나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고대 조선(朝鮮) 한국에서는 아홉 동이(東夷)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Here is an example on how a strong colonial legacy influences our scholarship even today. Professor Ki-baik Lee argues in his book, A New History of Korea: The Case of the Shamhan, as seen in the account of the Eastern Barbarians” (Tung-i chuan) in the Chinese source San-kuo chih, was perhaps a model of normal development. However, Professor Lee’s interpretation of Tung'i (東夷) as the Eastern barbarians is questionable, although his book has provided much valuable insight about Korea. His school of thought is no more than an outcome of a colonial legacy, copied from what the Japanese colonial scholars wrote during the colonial period. It is a common mistake that most Korean and Asian experts in America, and in other countries as well as Korea, have made.

 

 

여기 오늘날에도 얼마나 강하게 식민지의 유물이 우리 학문에 영항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한 예가 있다.

 

이기백 교수는 자신의 책 한국의 신역사(新歷史)에서 논한다. 중국의 자료인 삼국지(三國志)에 있는 동쪽 야만인을 동이(東夷)의 기술(技術)로 본 것처럼 삼한(三韓)의 경우는 아마도 정상적인 발전의 예(例)이다. 그렇지만 이기백의 동이(東夷)를 동쪽 야만인으로의 해석은 의문스럽다,

 

 

비록 그의 책이 한국에 대한 많은 가치있는 통찰력을 주지만! 그의 사상(思想) 학교는 단지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 식민지 학자들이 기술(記述)했던 것을 복사한 식민지의 유산의 성과일 뿐이다.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한국에 사는 대부분 한국 사람들과 아시아 전문가들이 범하는 공통적인 실수다.

 

 

 

 

 

John King Fairbank interpreted 夷 ( yi or i ) as “barbarians on the East” in his prehistory of China. The interpretation can be challenged. The term “yi” or “i,” in prehistory period was used as “civilized people.” 東夷傳 (“Tang-i zhuan,” Biography of Tung-i), 三國誌 (Sanguozhi, Biography of the Three Kingdoms: Wei, Shu and Wu in China between AD.222-263) that Ki-baek Lee quoted, never said that Tung-i (Koreans) were barbarians. Rather it clearly praises the fact that Tung-i do not take gold, silver, and silk fabrics as treasures. Tung-i’s nature is honest, strong and brave. ... The Chinese learned morality and virtue from Tung-i in four directions when the Chinese lost them.

 

 

존 킹 페어뱅크 씨는 자신의 중국의 전(前)역사에서 동쪽의 야만인으로 이(夷, yi or i )를 해석했다. 그 해석은 도전(挑戰) 받을 수 있다. 전(前) 역사 시대에는 위(yi)와 이(i)는 문명ghk(文明化)된 사람으로서 쓰여졌다. 이기백이 인용했던 동이전(東夷傳, 동이(東夷)의 일대기),과 삼국지(三國誌, 위(魏)오(吳)촉(蜀) 삼국(三國)의 일대기, AD. 222-263 사이) 는 동이(東夷, (한국 사람들)을 야만인이라 말하지 않았다.

 

 

동이(東夷)는 보물로서 금(金) 은(銀) 비단,직물을 취(取)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칭송한다. 동이(東夷)의 성질(性質)은 정직하고 강(强)하고 용감하다. 중국인들이 도덕과 선(善)을 잃어버렸을 때 네 방향으로 동이(東夷)로부터 그것을 배웠다.

 

 

 

 

This kind of story also has been written in other Chinese books. Houhan shu (後漢書) and Liji (禮記, Records of Etiquette) state that the East is "i", and "i" is foundation. Tung-i people are generous and like all living beings. The foundation comes from the earth. Tung-i people's nature is good. They practice (the Heavenly) Way. Therefore the people of virtue will not die (東方曰夷夷者抵也言仁而好生萬物 抵地而出故天性柔順易爾御至有君子不死之國). Shuowen (說文), written by Xu shen in the Chinese Han Dynasty states that Tung-i are the people of virtue who follow the great Way. Tung-i’s customs are generous, and they live long, Tung-i follow the Way, and they are great (東夷從大大人也).

 

 

이와 같은 이야기는 또한 다른 중국의 책에 쓰여있다. 후한서(後漢書)와 예기(禮記)는 동(東)은 이(夷) 그리고 이(夷)는 기초다 라고 기술한다. 동이(東夷) 사람들은 너그럽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좋아한다. 그 기반은 땅으로부터 온다. 동이(東夷) 사람들의 성질(性質)은 선(善)하다. 그들은 천도(天道)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선(善)한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東方曰夷夷者抵也言仁而好生萬物 抵地而出故天性柔順易爾御至有君子不死之國)

 

 

 

한왕조때 허신(許愼)에 의해 쓰여진 설문(說文)은 동이(東夷)는 대도(大道)를 따르는 선(善)한 사람이다 라고 기술(記述)한다. 동이(東夷)의 관습(慣習)은 너그럽고, 그들은 장수(長壽)하고, 동이(東夷)는 도(道)를 따르고 그리고 그들은 위대했다.(東夷從大大人也)

 

 

 

 

According to 詩傳(“shizhuan”), “i" of Tung-i means "comfortable" and “honor”. Once upon a time, Heavenly God bestowed a bow and arrow to Ye, who is the main God of Tung-i. God requested Ye to help all countries under heaven. Ye removed all suffering from the earth. Ye helped people achieve the millenarian dream. 山海經 (Shanhai jing, Book of Mountain and Sea), wrltten in the Yin Dynasty in China, records that the state of the people of virtue is located in the north (君子國在其北).

 

 

시전(詩傳)에 따르면 동이(東夷)의 이(夷)는 편안한, 명예(名譽)를 뜻한다. 옛날에 천신(天神)은 동이(東夷)의 주신(主神)인 예(羿)에게 활과 화살을 하사했다. 신(神)은 예(羿)에게 하늘 아래 모든 나라를 도우라고 요구했다. 예는 땅으로부터 모든 괴로움을 제거했다. 예(羿)는 사람들이 이상주의(理想主義)에 꿈을 이루게 도왔다. 중국의 은왕조(殷王朝) 때 쓰여진 산해경(山海經)에는 선(善)한 사람들의 나라가 북쪽에 위치해 있다 라고 기록(記錄)한다.(君子國在其北)

 

 

 

 

 

 

 

 

 

Colonial Legacy and the I-jing

 

In historical records and accountings in Asia, historians and writers have used the terms of the I-jing doctrine, which has a relationship with Asian millenarianism. Without the I-jing, we cannot understand what I-jing-related terms mean. Scholars and historians such as Sima Quian in China and Immanishi Ryu in Japan have distorted history for their own nationalistic purposes. Many scholars, including Asian and American Asian experts, have been influenced by a colonial legacy. Without knowing the I-jing, we may not understand some historical and millenarian accounts.

 

For example, the Chinese source, Gangmu (綱目) writes, 伏羲氏以木德王天下...易曰帝出乎震 (“As Fuhsi governed the state with virtue of wood, ... according to the I-jing, the Emperor Fushi came from 震, or zhen). In the I-jing, “wood” indicates the "East". Zhen (震) is one of the eight diagrams. It means east. Therefore, Fuhsi is from the East, and he is a Tung-i (Korean). In ancient times the East meant Tung-i and the West meant the Chinese. Without understanding the I-jing, it is impossible to interpret and understand historical accounts and characters that relate to it. Many Asian millenarian doctrines and movements, including the Tonghak and the Taiping, are related to the I-jing.

 

 

 

 

식민지(植民地)의 유산과 역경(易經)

 

 

아시아에서 역사적 기록들과 기술(記述)들에서 역사가들과 작가들은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와 관계가 있는 역경(易經) 교리의 용어들을 사용해 왔다. 역경(易經)없이 우리들은 역경(易經)과 관계있는 용어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다.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나 일본의 이마니쉬 류 같은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그들 자신의 국가적인 목적을 위하여 역사를 왜곡했다.

 

아시아와 미국의 아시아 전문가들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식민지의 유산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왔다.

 

 

역경(易經)을 아는 것 없이, 우리는 어떤 역사의 이상주의의 기술(記述)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자료인 강목(綱目)은 복희씨이목덕왕천하(伏羲氏以木德王天下...역왈제출호진(易曰帝出乎震)(복희는 목(木)의 미덕(美德)으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역경(易經)에 의하면 복희(伏羲) 황제(皇帝)는 진(震)으로부터 왔다) 라고 기술(記述)한다.

 

 

역경(易經)에서 목(木)은 동쪽을 가리킨다. 진(震)은 팔괘(八卦) 중에 하나이다. 그것은 동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희(伏羲)는 동쪽으로 부터이고 그리고 그는 동이(東夷) 한국인이다. 고대시대에는 동쪽은 동이(東夷)를 서쪽은 중국을 의미했다. 역경(易經)의 이해 없이, 관계있는 역사적 기술(記述)과 문자(文字)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동학(東學)과 태평(太平)을 포함한 많은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 교리들과 운동들은 역경(易經)과 관계가 있다.

 

 

 

 

 

 

In 99 BC, Sima Qian was castrated by the Han ruler (141-87 B.C.) because he defended General Li Ling, who surrendered to the Huns, who were Tung-i (Korean). Shiji is one of the typical distorted historical writings of although many scholars have relied on these historical accounts. Although Shiji is one of the best known historical accounts of China, it is also one of the worst distortions of history.

 

Even ancient Choson Korea used the title of emperor; Sima Qian willfully wrote the term “king” or “lord.” The Chinese during the Han Dynasty began marshalling power against ancient Korea’s rule over China. Their distortion of history intensified to writing history as if the Chinese had ruled China since ancient times.

 

They continued to change the names of locations in China even into the late 20th century, probably to hide the areas over which ancient Korea had ruled. However, if one investigates Sima Qian’s Shiji in comparison with other ancient Korean and Chinese sources carefully, it is not impossible to uncover Shiji’s distortion of history. While ancient Koreans established China and ruled over most Chinese territory, Koreans also entered Japan to form the ruling class, including the Japanese imperial court in the Kanto region (she surrounding region centering on Edo, or Tokyo).

 

기원전(紀元前) 99년, 사마천(司馬遷)은 한(漢)나라의 지배자에 의해 거세(去勢) 당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동이(東夷, 한국사람)인 흉노족(匈奴族, 훈족, the Huns)에게 항복(降伏)했던 이릉(李陵) 장군(將軍)을 변호했기 때문이었다. 사기(史記)는 전형적인 왜곡된 역사 기록들 중에 하나다. 비록 많은 학자들이 사기(史記)의 역사 기술(記述)에 의존해 오고 있지만. 사기(史記)는 중국의 가장 잘 알려진 역사 기술(記述)이지만, 그것은 또한 가장 흉악한 역사 왜곡중의 하나이다.

 

 

 

 

고대 조선(朝鮮) 한국은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사마천(司馬遷)은 의도적으로 왕(王) 또는 영주(領主) 등의 용어를 썼다. 한왕조(漢王朝) 동안 중국은 한국의 중국 지배에 대해서 힘을 행사(行使)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역사 왜곡은 고대 이래로 부터 중국인들이 중국을 지배한 것처럼 역사 쓰기를 강화했다.

 

 

그들은 20세기 후반에까지 중국에 있는 지명을 변경하는 것을, 아마도 그들은 고대(古代) 한국이 지배했던 지역을 숨기는 것을 계속했다. 하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다른 고대(古代) 한국과 중국의 자료들을 주의 깊게 비교하여 조사해 보면, 사기(史記)의 역사 왜곡을 밝혀내기가 불가능하지 않다.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중국을 건국했고 대부분의 중국 영토를 다스릴 동안, 한국 사람들은 또한 칸토(Kanto) 지역[에도(Edo)를 중심으로 주변지역, 동경(東京)]에서 일본(倭國)의 황실(皇室) 조정(朝廷)을 포함하는 지배층을 형성하기 위하여 일본에 들어갔다.

 

 

The Chinese Emperor Burned Historical Accounts

 

The First Emperor Shihuangdi of the Qin Dynasty in China burned almost all existing Confucian classical books, Including political and historical accounts, although medical and agricultural works were exempted, and killed 460 Confucian scholars and historians. In such circumstances, Scholars and historians could not write true or accurate works. Countless precious historical accounts, detailing the extent to whlch ancient Koreans ruled in China, were burned on his orders.

 

중국 황제(黃帝)가 역사(歷史) 기술(記述)들을 불태웠다.

 

 

중국에서 진(秦)왕조의 첫 번 째 황제인 진시황(秦始皇)이 거의 모든 존재하는 정치적인 역사적인 책들을 포함하여 유교(儒敎) 고전(古典) 서적(書籍)들을 불태웠다. 비록 의학서와 농사서(農事書)는 제외되었지만. 그리고 460명의 학자와 역사가들을 죽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진실한 또는 정밀한 일을 쓸 수 없었다.

 

고대 한국 사람들이 중국을 지배했다는 정도로 자세히 서술한, 셀 수 없이 귀중한 역사적인 기술(記述)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불태워졌다.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 view Of Ancient Korea

 

The official history book for Chinese students, authorized and published by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 governmental educational agency includes the words “Tung-i" (東夷), "Jiui (九夷),” and “Chiu (蚩尤),” in The Chinese History book. Although the book does not explain that these words were taken from Korean, it briefly alludes to historical wars between the Chinese and an “outside tribe” without actually naming the Koreans themselves.

 

It only gives the name of Chiu as the Chinese enemy, and locates his territory in eastern China, thereby refusing to explain that he was, in fact, the Korean emperor. The very existence of such a figure, however, and the consequent Chinese need to fight him is, in its own way, good evidence that the ancient Koreans once ruled over China.

 

 

 

고대(古代) 한국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시각

 

 

중화인민공화국의 교육부에서 관리되고 발행된 중국 학생들을 위한 공식적인 역사책은 동이(東夷), 구이(九夷), 치우(蚩尤) 등의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비록 그 역사책은 그 단어들은 한국으로부터 취했다고 설명하지 않지만, 간단하게 중국과 실재로 한국 사람들을 호명(呼名)하지 않고 외부 종족(種族) 사이에서의 역사적인 전쟁들을 암시한다.

 

 

 

오직 치우(蚩尤)의 이름을 중국의 적(敵)으로, 그의 영토를 동쪽 중국에 위치시킨다.

 

그는 사실 한국의 황제(皇帝)였다고 설명하기를 거부하지만, 그런 인물의 존재와 그에 따라 중국인들이 그 나름대로 그와 전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은 한국 사람들이 언젠가 중국을 지배했다는 바로 좋은 증거다.

 

 

 

 

 

According to the Chinese government history book, Huangdi (the Yellow Emperor) or 黃帝 (2698-2598 B.C.) was the Chinese ancestor who fought Chiu (2707-2512 B.C.). Huangdi lived in Huashe, where the Chinese lived, in the west of China. According to ancient Korean records, Taebaek Ilsa, Huangdi Xuanyuan was a descendant of Tung-i official Sojon (少典), who was punished by Tan’gun Choson Korea. Sojon’s other descendant is Kongson (公孫). All Huangdi Xuanyuan’s people are Sojon‘s descendants (少典之別派曰公孫...軒轅之屬皆其後也). The Chinese source, Sima Qian’s Shiji also tells the same story: Huangdi is Sojon’s descendant. His surname is Kongson and his first name is Xuanyuan.(黃帝者少典之子姓公孫名曰軒轅)."

 

 

중국 정부의 역사책에 따르면, 황제(黃帝, 기원전 2698-2598)는 치우(蚩尤, 기원전 2707-2512)와 싸웠던 중국의 선조였다. 황제(黃帝)는 서쪽 중국 지역인 화쉐에 살았다. 고대 한국 기록인 태백일사(太白逸史)에 따르면, 황제헌원(黃帝軒轅)은 단군조선에서 처벌(處罰) 받았던 동이(東夷) 관리 소전(少典)의 자손이었다. 소전(少典)의 다른 자손은 공손(公孫)이다.

 

황제헌원은 소전(少典)의 자손이다.(少典之別派曰公孫...軒轅之屬皆其後也) 중국의 자료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또한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황제(黃帝)는 소전(少典)의 자손(子孫)이다. 그의 성(姓)은 공손(公孫)이고 그의 이름은 헌원(軒轅)이다.(黃帝者少典之子姓公孫名曰軒轅)

 

 

 

 

 

 

 

 

 

 

 

 

 

 

 

 

 

 

 

 

 

 

 

 

 

 

 

 

 

 

 

 

 

 

 

 

 

 

 

 

 

 

 

 

 

 

 

 

 

 

 

 

 

운초 계연수선생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李沂,1848~1909)선생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와 예로부터 민간에 비장되어 온, 신라 고승高僧 안함로(安含老,579~640)의 『삼성기 상』과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 다섯 종의 책을 독립군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분의 자금 지원으로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이 『환단고기桓檀古記』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역사서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학문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전해준 분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팔다리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제와 함께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 섰던 식민사학자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 『환단고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선생이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팔다리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밀정 감영극에 대한 기사 독립신문 1921년 3월 26일자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편집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민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 백제 전후부터 내려오던 고귀한 우리의 역사 기록을 거반 망라해서 묶어 놓은 책이 환단고기다. 신라 때부터 마지막 왕조 근세조선 때까지 당대의 최고 지성인 다섯 분이 천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의 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李沂,1848~1909)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청주에서 살았었다.

 

 

 

 

 

 

 

 

 

 

 

양종현 선생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 『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환단고기』 원본 분실에 대해 제자 양종현씨는 "이유립 선생이 1976년 의정부에 거주할 당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친척이 운영하는 안과가 있던 군산에 5일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집세를 5개월 정도 밀린 상태에서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 알고 책을 모두 팔아 버려 이때 초간본도 함께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립 선생이 초간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조병윤이 1979년 이유립의 허락 없이 교정이 안 된 오형기필사본을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하여 광오이해사에서 100부를 출간하였다. 이로 인해 조병윤은 파문당하고 이유립은 『환단고기』가 이미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며 그해 10월 광오이해사본을 교정한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도에 배달의숙본을 발간한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가 있다.

 

 

 

 

 

 

 

 

 

 

 

 

 

일본은 실제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동안 관변학자들을 동원해 식민사관을 세웠다. 일본이 물러간 후에도 대한민국에 심어진 일제 식민사관은 청산되지 않고 지금까지 배우고있다.

 

중국과 일본 역사도발에 대해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제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한중일 역사전쟁의 의미와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지금 우리의 발걸음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으면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도 가질 수 없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아가 말했듯이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그 때문에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변화에 대비하고 밝은 미래를 열 수 있다.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은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놓고서 성姓씨를 가르쳐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읽게 하되 어릴 때부터 읽게 할 것이며, 역사를 배우게 하되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게 할 것이다.’라고 역사교육을 강조했다. 또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1297-1364)은 ‘나라가 몸이라면 역사는 정신과 같다(國猶形 史猶魂)’고 하였다. 정신이 없으면 몸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는가? 국가와 민족을 소생시키는 깨어 있는 정신을 위해 역사를 배워야, 그것도 바르게 배워야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정신이 없는 민족이다.”

 

 

 

 

 

 

 

 

 

 

 

 

 

 

 

 

 

 

 

 

 

 

 

 

 

식민사학 자체는 근대에 들어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만든 역사학이다. 하지만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다 보면 고대사에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해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직까지 일제의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자들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인지? 또 그런자들은 무엇 때문에 식민사학에 집착하는지?

 

어떻게 그런 자들의 세력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또 하나는 식민사학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 밝혀 보자는 것이다. pp.15~16 [예스24 제공]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의 저자 이희진박사는 청산해야 할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어떻게 뒤틀린 길을 가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가 고대사 학계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병도가 키운 제자들이 대한민국 학계를 장악하고 역사학을,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키운 결과가 바로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 어떻게 학계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학자들을 패거리 집단으로 전락시키며,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짓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는 파렴치한이 되고 있는지를 저자는 처참한 내부 고발자의 심정에서 진술하고 있다.

 

 

이들에게 연구 기금과 학회지 발간 및 활동비를 지원하는 관료들이 결국 이들과 야합하게 되는 과정을 이 책에서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가 무사안일과 출세주위에 물든 관료들의 손을 통해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선심 쓰듯 뿌려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 이러한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언론이다.

 

이희진박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려 들어갔던 고려대학에서 인문학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제 발로 역사학을 전공하는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성과도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한 『가야 정치사연구』부터 『가야와 임나』, 『거짓과 오만의 역사』등 그 분야에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고대사연구자들이 얼마나 일본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뭘 모르던 시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되는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가야를 일본 땅이라고 말하는 식민사학자들

 

https://www.cj-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0073

 

[기고 칼럼] 가야를 일본 땅이라고 말하는 식민사학자들 - 청주일보

【청주일보】 대한민국헌정지회장한효섭 = 문재인 정부가 탄생하면서 국정 100대 과제에 가야사 복원을 포함 시켰다. 정부는 가야사복원 공약 사업을 실천하고자 1조 2천억 원의 엄청난 예산을

www.cj-ilbo.com

 

 

 

 

 

 

가야사 복원 사업에 투입된 1조 2천억원 투입

 

가야사 복원 아닌, 고대 일본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복구 관련자들 사기죄로 처벌, 국고 환수 및 국정감사해야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51

 

혈세 1조 2천억 들여 가야사 일본에 바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가야사 복원 사업에 투입된 1조 2천억원은 눈먼 돈 식민사학과 식민고고학이 독점하는 가운데 돈 잔치 가야사 복원 아닌, 고대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복구남원이 식민지인 기문국이라고 대국민 사

www.koreahiti.com

 

출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http://www.koreahiti.com)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자면서 만든 프로에 어떻게 식민사관에 입각한 논리를 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또 이를 비판하자 진상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을 문제 있는 인물로 몰고 가고

 

또 그런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전국민에게 배포함으로써 결국 식민사관을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결과를 자아냈던 경험담을 수록하고 있다.

 

 

결국 식민사관이란 태생부터 어떤 실체가 있는 역사관이 아니라, 철저히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과 야합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관이 건국 80년이 되도록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를 쳐서 학계에서 큰소리를 치는 주류로 성장한 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것이 신진 학자에 불과한 저자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몸을 던져 불속에 뛰어드는 이유일 것이다. [예스24 제공]

 

 

 

 

 

 

 

독도나 정신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왜곡이 불거질 때마다 온나라가 뒤끓는 대한민국에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틀을 세운 한국 고대사를 후손들에게,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한국 고대사 학계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비극의 출발점이었다고 진단한다.

 

 

이병도를 비롯한 해방후 한국 고대사학계를 장악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반대편의 역사학은 반실증적인 것 즉 반과학적인 것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역사학이 실증적인가?

 

그들이 말하는 실증성을 대변한 인물이 쓰다 소키치이고, 쓰다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초창기 한국 고대사학계였다. 하지만 그들이 배운 쓰다 소키치의 한일 고대사 체계는 실증사학의 탈을 쓴 황국사관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의 일부를 비판하는 척 하면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전의 기록을 활용해 한반도 초기 국가의 식민성을 강조하는 그림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이 얼마나 교활한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보통 야비한 인간들이 아니다. 이러한 그림 맞추기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 고대 국가의 건립 연대는 수 백년이나 늦추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토대로 한국고대사를 복원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것을 저자는 제안하고 있다.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입니다.

 

 

박기자 : 좋습니다. 그럼, 식민사관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세요.

 

임성국 : 1981년 <다물>지 12월호에 최만주 선생이 손수 쓰신 '식민 사관이란 무엇인가'하는 권두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40(현재 약 80년)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사권(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학계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의 나팔수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의 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서울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연세대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인보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병도씨는 그 때까지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한국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그 위조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강제로 반복 교육함으로써 일제의 침략 정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어지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꼭 필요한 구성요건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를 아예 쏙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윗대의 환웅과 환인 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 이념'도 '국조'도 '장구한 역사'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 즉 중국 한족(漢族)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몄습니다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없었고, 고유문화도 없었고, 한반도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발해)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고,

 

고구려와 대진(발해)의 뒤를 이은 대금, 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 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를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만의 반도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전국유이민(戰國流移民)설)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 분열, 동족 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고, 조선사는 탐관오리, 사색당쟁으로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중국,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 반도 안에 움추린 채 기를 못폈던 약소국,

 

셋째,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하고, 부패하고, 분열하고, 민족 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미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갓 고깃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행복도 증진시킬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단계로 역사 정복(식민사관),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강제로 사용케하고 한글을 못 쓰게 함),

 

넷째로 전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입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 시대를 제2편, 고려 시대를 제3편, 조선 시대를 제4, 5, 6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는데에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은 실상 반도 속에 움추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병도씨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 날조 작업의 주역으로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사학계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 사관을 철저히 답습하였는데, 이병도의 진두 지휘하에 식민사관에 중독된 사람들을 하루 빨리 재교육시켜 진정한 민족 사학자로 재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최만주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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