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코카사스 세계문화테마답사 " 이대우 이사장님의 답사기입니다

작성자촌사람|작성시간23.11.20|조회수61 목록 댓글 0

성주문학회가 간행한 "성주, 사람과 문화 2023"에  이대우 이사장님의 코카사스 답사기가  실렸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소중한 원고를 전재합니다.

코카사스 답사를 원하시는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코카서스 여행기

이대우 (예술마당 솔 이사장)

 

 

트랜스 코카서스

이번이 코카서스 첫 여행길은 아니다. 20여 년 전부터 나는 남러시아의 크라스노다르 시를 예닐곱 차례 다녀온 바 있다. 크라스노다르 시는 코카서스 산맥의 산줄기가 쿠반 강과 서쪽을 향해 나란히 뻗은 비옥한 평야에 자리했는데, 그곳에서 흑해나 코카서스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학술회의차 현지 대학을 방문할 때면 코카서스에 쉽게 다녀올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북부 코카서스는 5천 미터 이상의 고산들이 즐비한 ‘그레이트 코카서스’ 지역이다. 상대적으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올망졸망한 남부의 ‘트랜스 코카서스’는 낯선 지역이다. 물론 몇 년 전 세계테마기행 촬영으로 한 달 정도 방문한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 나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산골과 초원을 구석구석 돌기는 했지만 빡빡한 촬영 일정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아쉬움이 너무 컸던 것일까 자유로운 여행자 신분으로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길고 지루한 코로나 상황으로 모든 여행길이 막히면서 계획은 뒤로 또 뒤로 밀리고 말았다.

마침내 코로나 팬데믹이 종료되자 ‘예술마당 솔’의 지인들과 함께 곧바로 트랜스 코카서스 여행을 실행에 옮겼다. 여행이란 본래 연극과는 달리 도입부 없이 클라이맥스부터 시작하는 법이 아닌가. 조지아행 비행기 좌석에 앉는 순간 나는 이미 조지아 농부들과 아르메니아 양치기들의 순박한 미소를 그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모스크바를 경유하던 예전과는 달리 카자흐스탄을 경유하는 하늘길을 택했다. 긴 비행시간에도 불구하고 일행 가운데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통해서나 접하던 아득한 먼 나라를 찾아간다는 사실에 작은 불편함 따위는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는 듯했 다.

사실 조지아가 우리와 영 인연이 없는 나라는 아니다. 얼마 전 나는 책상 서랍 속의 낡은 서류뭉치 사이에서 메모 하나를 발견했는데 러시아 학술원 회원인 고 김례호 교수가 20여 년전 써준 친필이었다. 김 교수는 조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외국 민요가 조지아(그루지야) 것이라며 기억을 더듬었었다. 귀중한 자료라는 생각에 나는 그 메모를 서랍 속 깊숙이 모셔 놓았다가 이번에 짐을 정리하는 과정에 메모를 발견한 것이다. 김 교수는 북한의 제1기 소련 유학생으로 파견되었다가 소련파가 숙청되던 때부터 러시아에 눌러앉은 고명한 문학자다. 김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오장환 시인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김 교수는 1953년 시베리아의 톰스크 대학에 다니던 무렵 오장환 시인을 본인이 직접 만났다고 한다. 당시 오장환은 결핵으로 톰스크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요양하던 중이었다. 그 후 두 사람 사이의 연락이 끊기며 오장환 말년의 삶은 미궁에 빠지지만 어쩐지 그의 병상 기록은 톰스크 병원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던 오장환은 톰스크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어느 공동묘지에 묻혔을 수도 있다. 문득 조선의 러시아 망명문학을 함께 연구하자던 김 교수의 제안이 떠오른다. 문학에는 이처럼 발굴하고 기억해야 할 크고 작은 역사가 있지 않겠는가?!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김 교수가 남긴 메모 속의 조지아 민요는 <수리꼬(술리코)>인데, 조선과 조지아 사이의 지난 인연을 이어주는 흔치 않은 자료이기도 하다.

 

날에 날마다 찾았네

님에 계신 곳 찾았네

오늘도 하염없이 헤매니

어데 있느뇨 수리꼬

 

<수리꼬>는 조지아 시인 바린카 체레텔리의 서정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1930년대 소련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노래다. 몹시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이 노래가 엄중한 혁명 초기 소련에서 국민가요로 유행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다. 그러나 <수리꼬>가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의 애창곡이었던 까닭에 혁명가요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았고 번안 형태로 조선에까지 흘러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과연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은 조지아 청년의 불행한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수리꼬>와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그렇고, 톨스토이의 <까자크 사람들>이나 푸시킨의 <카프카즈의 포로>가 그렇듯, 코카서스를 다룬 문학 작품들 대부분은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그만큼 코카서스 지역은 그리스의 식민지 시대이던 수천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열강들의 쟁탈이 끊이지 않던 비극적 장소이기도 하다. 서로 언어가 다른 50여 민족이 코카서스의 깊은 산과 계곡에서 은둔자들로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그들의 힘겨운 역사를 대변해준다. 게다가 정교, 사도교회, 이슬람교가 작은 코카서스 땅을 조각조각 찢어놓지 않았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코카서스의 장엄한 설산 풍경, 화려했던 실크 로드 문화유산들, 바보 성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 등등이 일순간 이곳을 전쟁의 마지막 도피처에서 신비로운 여행지로 바꾸어놓았다. 마치 코카서스에선 전쟁을 핑계로 누구의 일상도 방해받을 수 없다고 모두가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지금도 코카서스의 세 나라는 안팎으로 복잡한 국경분쟁에 휘말려 있지만 관광객 유치에는 적극적이다.

 

올드 트빌리시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그렇다. 여기가 코카서스...... 유럽의 동쪽 경계선이자 시작점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밤이 늦었으니 민박집부터 찾아가야 한다. 뻔히 속는 줄 알면서도 열 배나 비싼 요금을 내고 택시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적인 택시 호출을 하려면 현지 택시 예약앱을 깔아야 하는데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바가지요금은 어디서나 여행객이 거치는 통과의례라 스스로 위로해 본다.

다음 날 아침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우리는 하루를 서둘렀다. 6월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거리로 나서자 골목 담장마다 그려진 형형색색의 기괴한 그래피티들과 낯선 조지아 문자들이 어느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이냐고 묻고 있다. 나는 꼬인 실타래 같은 조지아 문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라틴 문자와는 전혀 생김새가 다르며 차라리 인도 문자에 가까웠다. 문자는 AD 405년 아르메니아의 성직자 메스롭 마슈토츠가 창안한 것이다. 훈민정음을 세계 유일의 창제문자로 알던 내 상식이 무참히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훈민정음보다 천 년이나 앞섰다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에서는 그 문자 덕분에 수많은 교회 서적과 문학 작품을 보존했을 것이다. 거리로 나서면서 코카서스의 수수께끼는 이미 시작되었다.

소비에트 시대에 지어진 작은 공동주택들이 밀집한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자 작은 광장에 서 있는 거대한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조지아의 국민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동상이다. 거리명에도, 지하철 역명에도, 곳곳의 유적지 지명에도 시인의 이름이 붙여진 걸 보면, 적어도 조지아에 머무는 동안은 그 이름을 기억해야만 할 것 같았다. 루스타벨리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조지아 문화를 이해하는 외국인으로 인식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런 생각이 스치는 동안 우리의 시인 가운데 국민적 추앙을 받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애써 답을 찾아보았다.

여행 첫날의 첫 번째 행선지는 올드 트빌리시 역사지구다. 올드 트빌리시는 1500년 이상 조지아 왕국의 수도였으나 크림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 제국이 수도 트빌리시에 관공서, 극장, 광장 등의 커다란 공공건물들을 건축하면서 도시를 확장시켰다. 그때부터 교회와 요새와 전통가옥들만이 의붓자식처럼 버려진 구도심을 올드 트빌리시라고 불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따돌림받던 의붓자식이 종손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올드 트빌리시는 이제 더 이상 낡은 구도심이 아니라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이 넘쳐나는 조지아의 얼굴로 변신한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루스타벨리 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1970년대에 건설된 트빌리시 지하철은 7,80미터는 족히 될 깊은 지하에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자 빠른 속도감에 일행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역사 내부는 고급 대리석과 소비에트 시대의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광고판으로 얼룩진 서구의 지하철과는 다르게 따뜻한 예술적 감성이 느껴졌다. 그래, 지하철이란 한때 사회주의의 위업을 과시하는 수단이었으니, 평양의 지하철도 이런 모습이겠지?! 엉뚱한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굉음을 울리며 내달리는 객실 안에서 승객들이 여행복 차림의 이방인들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우리도 여기저기 가벼운 눈인사로 응답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보통사람들의 삶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올드 트빌리시의 구시가지 언덕 위에는 마치 거대한 왕관 모양을 한 나리칼라 요새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15세기경 페르시아가 쿠라 강 언덕 위에 축조한 그 요새는 지금도 옛 제국의 위용을 뽐냈다. 요새 아래로 컬러풀한 레고를 이중삼중 쌓은 듯이 전통가옥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푸른 하늘과 회색의 쿠라 강이 어우러진 올드 트빌리시는 마치 동화 속 인형의 나라를 연상시켰다. 빼곡히 들어선 전통가옥들 사이로 아치형 벽돌문을 낸 메이단 바자르가 가장 먼저 우리의 눈을 유혹했다. 그 지하상점은 오래전 실크로드 대상들이 진귀한 동방의 물건들을 거래하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코카서스의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도록 붉은 벽돌로 지은 바자르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상쾌했다. 그곳에서는 누구든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돌아가 동방에서 온 상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거기서 여행객들은 마치 고향으로 돌아갈 물건을 구하는 실크로드 상인들처럼 각종 향신료, 포도주, 수공예품 등을 열심히 흥정했다. 바자르 반대 출구로 나와서 골목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가면 역시 붉은 벽돌로 지어진 둥근 돔형 건물들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거대한 솥뚜껑 모양의 그 괴상한 건물들은 오랜 여행에 지친 실크로드 대상들이 즐겨 찾던 온천탕이다. 천산과 초원 그리고 카스피해를 거쳐 도착한 동방 상인들은 아마도 그 온천탕에서 지친 심신을 달랬을 것이다. 거기서는 비누 거품 마사지와 온천욕을 즐길 수 있으니 이국적인 실크로드 문화체험으로는 제격이 아닐까 싶다.

나리칼라 요새로 향하는 언덕길은 오전부터 오가는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우리도 견고한 아치형 성문을 거쳐서 무너져가는 성벽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손발을 동원해 바둥거리며 정상을 기어오르자 철십자가 하나가 말없이 서 있다. 트빌리시 사람들은 수백 년 전에 어떤 심정으로 이 페르시아의 요새 안에 철십자가를 세웠을까? 철십자가 아래로 트빌리시 전경이 펼쳐졌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쿠라 강, 건너편 언덕 위의 성모 교회와 광장, 저 멀리 반짝이는 원통형 음악당, 물결 무늬 푸른 가림막으로 꾸민 평화의 다리, 독특한 모습의 관공소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꼴라쥬처럼 어우러졌다. 아, 트빌리시의 전경은 신의 도움 없이는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허기와 더위에 지쳐 광장 앞에 있는 전통 식당으로 들어갔다. 조지아 음식은 코카서스의 풍광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한 터, 메뉴 앞에서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조지아 음식은 진정 신의 음식이다. 놀라운 향에 식욕을 당기는 음식을 식탁이 넘치도록 차려내는 민족은 어디에도 없다”는 푸시킨의 찬사가 생각났다. 나는 현지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들로만 주문했다. 어머니의 빵 푸리, 양젖 치즈 술구니, 호두 패티를 넣은 가지요리, 양고기 샤슬릭, 맥주 등등. 이만하면 가장 조지아적인 음식들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니 대부분의 손님들은 손에 커다란 만두를 들고 쪽쪽 빨아먹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만두가 힌칼리라는 조지아 국민음식이다. 힌칼리는 만두피 속에 육즙을 가득 내는 것이 특징인데 이탈리아의 라비올리처럼 중국을 통해 전해진 이래 조지아 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식이 되었단다. 오죽하면 소문난 조지아 술꾼들조차 보드카보다 힌칼리를 더 선호한다고 하지 않는가.

 

카즈베기

여행객들이 찾는 조지아의 명소 가운데 하나가 만년설이 뒤덮인 카즈베기 산이다. 트빌리시에서 불과 백오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그 설산에 가려면 자동차로 네다섯 시간은 달려야 한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만이 그레이트 코카서스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먼 옛날 실크로드 대상들이 넘어 다녔다는 그 험준한 길을 러시아 제국은 군용도로로 넓게 확장하고 ‘조지아 군사도로’라고 불렀다. 자동차가 덜컹거리는 불편을 감수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아라그비 강을 따라 이어지는 그 긴 산길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절벽길 아래로 굽이치는 코카서스 계곡의 절경이 펼쳐졌다가 이내 잔발라 호수의 시원한 풍경이 시선을 끌기도 하고 또 만년설을 모자처럼 쓴 고산들이 스크럼을 짜듯이 길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귀향길이기도 했던 밀리터리 하이웨이를 따라 가다가 베브리스티케 요새에 잠시 정차했다. 요새는 여행객들로 이미 몹시 혼잡스러웠다. 영어, 불어, 러시아 어 등 온갖 외국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시끌벅적한 소음 사이로 한층 톤을 높인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러시아 황제가 조지아 남부지방에서 온천욕을 즐기기 위해 숙영지로 재건한 고성이란다. 페테르부르그에서 여기까지는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졌는데 온 가족을 동반한 채 이 험한 산길을 오가다니, 황제는 정말 정신이 나갔던 것이 아닐까?! 아무리 황제라 해도 몇 달 동안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시달려야 했을 텐데 말이다. 버스는 요새를 남겨둔 채 다시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등성이에서 양들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광경을 몇 번이고 지나친 후 카즈베기 가는 산길에서 가장 험준한 길목인 츠빌리 패스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언덕 위에는 조지아와 러시아 사이의 수교 2백 주년을 기념하는 둥근 우정탑이 서 있다. 알록달록한 모자이크화가 그려진 반원형의 우정탑 앞에 이르자 눈 덮인 카즈베기 산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설산 분지에는 한때 고립된 산골 마을에 지나지 않던 스테판츠민다 마을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에서 그루쉐가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숨어들었던 코카서스 산골 마을이 아마 저기였을 것이다. 이 정도로 깊은 산속이라면 어떤 추적자의 매서운 눈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특히 눈 내리는 겨울이라면 트빌리시로 통하는 외길마저 끊길 테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스테판츠민다 산골 마을에선 누구라도 편안한 겨울잠을 잘 수 있었으리라. 코카서스 여행 중에 길을 잃은 빅토르 위고도 석 달이나 저 마을에서 묵어야 했다고 한다. 스테판츠민다 건너편에 자리한 게르게티 트리니티 수도원에 오르기 위해 이번에는 산악택시로 갈아타야 했다. 경사진 언덕길을 돌고 또 돌아가자 설산 속에서 게르게티 수도원이 은둔한 성자의 아우라처럼 빛났다. 수도원 담장 위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속에 한순간 마음은 경건해졌다. 트빌리시에서는 오감의 즐거움을 만끽하지만 여기 게르게티 수도원에서는 영감이 충만해지는 선물을 받는다. 수도원 돌벽 위에 올라서자 카즈베기 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발 5,600미터 높이의 거대한 설산을 코앞에서 바라보는 순간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신들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감동일까, 아니면 그 세계를 엿본 뒤에 찾아오는 위압감일까? 프로메테우스가 아직도 쇠사슬에 묶인 채 형벌을 받고 있다는 카즈베기 산을 바라보며 마치 그리스인들처럼 세상의 끝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흰 눈 덮인 카즈베기 정상이 석양에 붉게 물들어갔다.

 

북 아르메니아 로리 지방

아르메니아를 여행하기 위해 처음에는 자동차를 렌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트빌리시의 복잡한 교통상황을 겪고선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현지 여행사를 이용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인터넷으로 확인한 여행사 프로그램에는 아르메니아 북부지방 당일 여행이라고 소개된 것이 고작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어떤 사람들과 동행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루스타벨리 광장 건너 거대한 모형 자전거 아래의 미팅 장소로 서둘러 나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30분쯤 기다리자 키 작고 마른 가이드가 나타나고 또 덩치 큰 두바이 청년 한 명이 합류했다. 이렇게 급조된 6명의 아르메니아 미니 여행단은 승합차를 타고 트빌리시를 출발했다. 가이드는 국경을 통과할 때의 간단한 주의사항만 전달할 뿐 운전에만 몰두했다. 감작스러운 동승자들 사이에 서로를 탐색하려는 시간만이 지루하게 흘렀다.

어느덧 아르메니아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을 통과하려면 조지아 측과 아르메니아 측으로부터 각각 출국과 입국절차를 밟아야 한다. 예상과 달리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수속은 일찍 끝났다. 먼저 출입국관리소를 빠져나온 나는 환전을 하기 위해 동네 슈퍼마켓 같은 작은 면세점에 들어갔다. 아무렇게나 진열된 조잡한 물건들 사이로 낯선 상표가 붙은 포도주와 꼬냑 병들이 눈에 띄었다. 본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서로 포도주의 원조국이라며 신경전을 벌일 만큼 다양한 포도주와 꼬냑 생산으로 유명하다. 한반도 크기의 코카서스 땅에 550여 종이 넘는 포도나무가 재배된다니 그런 주장이 나올 만도 했다. 나는 맛과 향이 독보적이어서 모주꾼인 처칠도 반했다는 ‘아라라트’ 꼬냑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아라라트란 노아가 방주를 세웠다는 구약 속의 영산이자 아르메니아의 국가적 상징인데 이제는 술 상표로 더 잘 알려져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조지아에서와는 다른 느낌이다. 조지아가 프로메테우스나 이아손의 황금 양털 같은 그리스 신화의 고향이라면 아르메니아에서는 기독교 신화로 넘쳐나고 있다.

국경을 넘어선 승합차는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아르메니아 북부의 산은 강원도의 산과 몹시 닮아있다. 산과 산이 끝없이 이어졌고 울창한 수목들도 낯익어서 마치 한국의 산골 마을을 여행하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달리자 깊은 계곡 아래로 거대한 폐광촌이 나타났다. 공장과 집들은 온통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때 번성했을 탄광촌은 소비에트와 함께 운명을 다한 것 같았다. 승합차가 15분 정도 더 산 정상을 향해 오르자 아르메니아 교회 양식의 육중한 돌 건물이 나타났다. 10세기에 지어진 ‘하그파트’ 수도원이다. 묵언 수행하는 겸손한 수사처럼 수도원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깊은 협곡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원 입구에 늘어선 허름한 기념품 목판 앞에서 몇몇 노인들이 필사적으로 손님들을 불러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적힌 입구 표지판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공동묘지를 연상시키는 엉성한 격자 담장을 따라 수도원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하치카르(돌 십자가)가 서 있었다. 하치카르는 고대에는 경계석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임을 표시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아르메니아 교회를 특별히 사도교회라고 부르는데 예수의 제자 다테우스와 바르톨로메오가 초기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를 전파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그 후 AD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며 기독교를 공인한 첫 번째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 교회는 지금까지도 로마 카톨릭교나 그리스 정교의 종교적 관할권에서 벗어나 독립적 교권을 유지하고 있다. 궁금한 김에 가이드에게 정교와 사도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실제로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서로 다른 교회력을 사용하는 정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수도원 본당으로 들어서자 돔 천장에서 어두운 실내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내렸다. 정면으로 보이는 후진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전능자 그리스도’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졌고 제단 앞 금빛 촛대에서는 촛불이 타올랐다. 좌우 돌벽에도 이콘과 촛대가 놓여있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실내는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촛불을 켜고 기도를 대신해 잠시 묵상했다. 아두운 실내에서는 마치 카타콤브에 들어온 듯, 혹은 거대한 동굴 속에 들어온 듯 속삭이는 목소리조차 돌벽과 돔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순간 일행 가운데 한 여성이 ‘넬라 판타지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녀린 소프라노는 벽과 천장을 타고 올라가 허공을 맴돌다가 천사의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이를 듣는 사람도 수도원의 신비한 분위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하그파트 수도원을 나와 또 다른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인근의 사나힌 수도원으로 이동했다. 사나힌 수도원은 한때 5,6백 명이 넘는 수사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이지만, 지금 수사들은 간 곳 없고 여행객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사나힌’의 의미가 ‘나는 저것보다 먼저 지어졌다’라고 하니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두 수도원은 아마도 경쟁 관계였던 모양이다. 수도원 입구에서는 반갑게도 영화 <석류의 빛깔>의 주인공인 아르메니아 민족시인 사야트 노바의 초상화가 여행객들을 맞아주었다. 본당을 지나 회랑을 지나자 커다란 빈 공간들이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었다. 그곳은 수사들의 도서관과 거대한 크레브리(포도주를 숙성시키는 도자기 술독)가 묻힌 포도주 저장고로 쓰이던 장소였다. 먼 옛날 그곳에서는 구원을 갈망하던 수사들이 학문에 정진하며 치열하게 삶을 불태웠을 것이다. 북 아르메니아 로리 지방의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세속에 찌들었던 마음이 어느덧 조금씩 정화되고 있었다.

여행을 마칠 무렵이 되자 가이드가 애당초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직접 보고 느끼라는 베테랑의 노하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종일 함께 걷고 식사하고 구경하는 동안 서먹서먹하던 여섯 명의 미니 여행단 사이에 작은 우정이 싹트고 있었다.

 

알마티

귀국길에는 예상과 달리 몹시 피곤한 일정이 기다렸다. 시차까지 고려해서 비행시간을 계산했어야 했는데 부주의한 탓에 경유지 대기 시간을 꼼꼼히 확인하지 못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야 알게 됐지만 대기 시간은 예상보다 무려 10시간이나 늘어나 있었다. 늦은 밤 트빌리시를 떠난 비행기는 새벽 3시쯤 우리를 알마티 공항에 내려놓았다. 인천행 비행기를 갈아타자면 2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졸리고 피곤하지만 무작정 공항 밖으로 나왔다. 동이 트기 직전의 알마티는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 있었고 택시기사들만이 분주히 손님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공항 가까이 호텔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지었을 소비에트식 낡은 호텔에는 중년의 여직원이 밤새 근무 중이었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밤늦은 시간에도 가방을 멘 손님들이 계속 호텔로 들어섰다. 공동화장실을 이용하는 도미토리 같은 방이나마 확보하고 나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당장은 여기서 눈을 좀 붙이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지!

여행은 때때로 계획에서 벗어날 때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짜릿함을 맛보기도 한다. 그 짜릿한 순간이 불과 몇 시간 후에 찾아왔다. 겨우 서너 시간 눈을 붙이고 환전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는 호텔 밖으로 나왔다. 위치를 살피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호텔 뒤편 저 멀리에 흰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겨울 코카서스에서나 볼 수 있는 놀랍고 멋진 광경이었다. 아, 저것이 알라타우 산맥이로군! 천 년 전 키르키즈의 왕자 마나스가 천산과 알라타우를 넘어 북경까지 정복했었지...... 알라타우 산맥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20여 년 전 서사시 <마나스>를 구하기 위해 비슈케키의 출판사들을 찾아다니던 기억이 생각났다.

 

이 이야기에서 듣게 될 모든 내용에는

진실과 거짓이 혼재하며

그 모든 것이 다 오래전 일이었기에

더 이상 목격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경이로운 일들의 증인도 이제는 없으며

여기에는 실재와 허구가 뒤섞였으니

이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다.

 

중앙아시아의 찬란했던 역사를 노래한 <마나스>는 <일리어드>나 <오딧세이>보다 16배나 더 긴 세계최대의 서사시다. 이 서사시는 천년 넘게 마나스치라는 극소수의 전승자들을 통해서만 구전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서사시의 분량은 무려 50만 행에 달하여 마나스치가 작품 전체를 시연하려면 꼬박 한 달이 걸린다고 한다. 언젠가 비쉬케키에 머물 때 우연히 백발의 마나스치 노인 집에 초대되어 낭송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내가 <마나스> 번역을 평생의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모두 그때의 감동적인 순간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키르키스탄을 가는 길에 잠시 알마티를 경유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공항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어서 알마티에 대한 궁금증은 해묵은 숙제처럼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내가 알마티를 그토록 방문하고 싶었던 이유는 80년대 중반부터 여러 고려인 문인들과 맺었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앙아시아 한글 신문 <레닌끼치>의 편집국장인 정상진 선생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정상진 선생은 한국전쟁 직후 북한 문화부부부상을 지냈고 2000년대에는 서울을 오가며 북한 문화계의 형편을 알리는 <아무르 강에서 부르는 백조의 마지막 노래>라는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암튼 프랑스 유학 시절 <레닌끼치>를 정기구독하면서 시작된 인연으로 나는 여러 해 동안 정 선생과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선생은 내가 러시아 문학을 프랑스에서 공부한다는 사실에 무척 안타까워했다.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 허가를 신청했으나 답장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대신 사과하며 소장하던 책 여섯 권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 책들은 소련 유일의 한글 출판사인 알마티의 <사수시 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글판 시와 소설의 모음집이었다. 후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수민족의 권리를 회복시킬 때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도 한글 출판사를 열 수 있었다. 내가 정 선생으로부터 받은 책들은 그렇게 소중하게 만들어진 단행본들이었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여섯 권의 책은 해빙기에 새로운 희망과 의욕으로 창작하던 고려인 작가들의 간절함이 만들어낸 피와 눈물이었다.

알마티에 머무는 시간이라고 해야 겨우 한나절에 불과했다. 시간을 아껴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해야 했다. 트빌리시에서와는 달리 사뭇 신뢰가 가는 택시기사에게 알마티 한복판의 공화국광장으로 가자고 부탁했다. 택시는 알라타우 설산과 나란히 달리다가 마침내 공화국광장에 도착했다. 넓은 광장 한복판에는 거대한 직사각형 건물이 서 있는데, 그 건물이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당사로 사용되다가 독립한 후 대통령궁으로도 사용되던 아키마트다. 아키마트 건너편에 오벨리스크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아슬아슬할 정도로 높은 탑 끝에는 황급 갑옷을 입은 스키타이 무사가 날개 달린 눈표범에 올라타 있다. 카자흐스탄 독립을 기념하는 그 스키타이 동상은 카자흐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듯 단호한 모습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오벨리스크 좌우로 서 있는 천상의 지혜자 동상과 대지의 어머니 동상은 여행객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따가운 여름 햇살을 피해 멀리 피서를 떠난 것인지 광장에는 행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정오가 넘어서자 일행들 모두 허기진 표정들이다. 어서 가까운 음식점을 찾아야 했지만 눈을 씻고 봐도 주변에는 무심한 건물들뿐이다. 대로 건너편 놀이터 앞에서 한 고려인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길 안내를 받긴 했지만 강제이주의 후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사수시 출판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때의 고려인 작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음식점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내 오랜 기억은 지난 인연을 쫓고 있었다.

번화가 속에서 <포럼>이라는 백화점 빌딩을 찾았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백화점 매장과 카페에는 부모를 동반한 아이들과 청춘남녀들로 가득했다. 음식점에 앉은 손님들도 서빙하는 종업원들도 여유롭고 차분해 보였다. 조지아에서 항상 경계하던 바가지요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서 한껏 들떠있는 사람들은 우연히 새 여행지에 온 우리뿐이었다. 알마티는 관광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은 억지스럽거나 과장되지 않았다. 아, 행운처럼 누릴 수 있었던 짧은 카자흐스탄 여행, 우리는 다시 택시에 몸을 싣고 서둘러 공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다음을 기약하는 새로운 버킷 리스트가 또 만들어졌다.

 

이대우 : 서울 출생.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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