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지난 8월 4일부터 10일까지 6박7일간에 걸쳐
중국 동북삼성 지역(길림성,흑룡강성,요녕성)에서 활동하셨던 밀양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선배님들의 사적지를 찾아서 답사를 마무리 하고 무사히 귀향하였습니다. 그 7일간의 기록을
여기에 담아봅니다.
답사단이 심양을 방문하여 제일 먼저 찾아봤던, 요동반도 대련부근 비사성에서 길림의 용담산성까지
옛 고구려 국경선상의 태자하옆에 자리잡고있던 白岩山城(중국명:燕州城山城)의 유허이다.
고구려 양원왕7년(551년)에 돌궐이 침입해 오자 왕이 장군 고흘과 군사 1만명을 보 내 적군 1,000명을
베고 개선했던 곳이 바로 이 백암 산성이다. 요동지방에 있는 고구려의 주요 요새의 하나로써 성벽의
길이가 2500m, 높이 가5~8m, 너비가 2~3m이다.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조선시대 인조임금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와 있었던
조선관이 심양고궁과 가까운 곳에 아직도 남아있다.봉림대군은 귀국뒤 즉위하여 효종이 되었는데 북벌정책을 펼쳤다.
요녕(遼寧, Liaoning)성 소재지 심양(沈 陽, Shenyang) 최대의 공원이자 누루하 치(淸太宗 황태급)의
능묘인 북능(北陵)공원이다. 심양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북 능이라 명명된 이 능묘는 유구한
역사 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고요하고 원초 적인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계절에 따 라 다양한 경관을
펼치고 청산녹수와 문명의 조화를 극대화한다...
의열단 창립지인 길림시 광화로 57번지 반씨농가(潘氏農家)는 찾을 수 없었고, 새로운 건물로 리모델링 되고 있는 곳이 광화로 57번지였다. 부근에 있었다는 파호문(巴 虎門)은 도시계획에 의해 없어지고, 고층건물 만 이 즐비하여 옛모습을 가늠하기 어려웠다.약 350년전에 창건했다는 관음고찰인<觀音寺>만이 파 호문이 있던 자리에서 남쪽으로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곳에 남아있을 뿐이다.
관음고찰에서 약50m앞에 파호문이 있었다고 하고, 파호문에서 광화로 57번지까지는 약200m이다.
송화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이 학교는 1927년~1930 년까지 북한의 김일성이 다녔던 유일한 학교로 그의 모교인 육문(毓文)중학교 이다. 이때 김일성이 공산 주의 사상을 습득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김일성 사적관과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김정일 시대까 지는 해마다 정월에 선물을 보내 유대관계를 강조하 였다.그러나 우리 일행의 입장은 허가하지 않았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영안시에서 서남쪽으로 50km, 목단강시 도심에서 110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의 지명은 영안시 발해진 폭포 촌(弔水樓瀑布)이다. 이 폭포가 포함된 경박호는 약 1만여년전 5차의 화 산폭발로 흘러나온 용암이 목단강과 지류 의 흐름을 가로막아 형성된 언색호(堰塞湖) 이다. 경박호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산언 색호이며 화산폭발로 생긴 언색호로는 세 계 최대규모이다.경박호는 남북길이가45km, 동서넓이가 6km이며 호안의 전체 길이는 198km,호수의 전체면적은 95㎢이 다.경박호의 평균 수심은 40~50m이며 최 대수심은 62m이다.
160년 가량 발해국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 府; 길림성/吉林省, 훈춘/琿春)와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 길림성 임강시/臨江市),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 /北靑),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길림성/吉林省 화룡시/和龍市 서 고성자/西古城子) 등과 함께 발해 5경 중의 수도(首都)였던 곳으 로 오늘날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본명은 동경성진/東京城鎭)에 위치한다. 주위 수백리되는 평탄한 분지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도성은 북동 남벽 약 1-3키로 밖으로 경박호에서 흘러내리는 목단강이 감돌아 흐르고 있으며,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서 고구 려식으로 축성하였다.
상경용천부 궁성지 앞에서(우리선조들의 발해땅이였는데 지금은 찬란하던 그 역사마져 중국의 것으로 되어 있어 마음이 아팠다. -동북공정의 핵심지역이였다)
발해시대의 사찰인 흥륭사 석등
중국 흑룡강성 발해진 동경성에 있는 흥룡사터에 남아있는 석등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석등형식을 띄고 있으며, 아주 섬세한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흥륭사석등 옆에서 단원들과 함께
발해농장의 수리시설
이 수리시설은 밀양인 윤세복 대종교3세교주와 함께 영고탑지역에서 발해농장을 개척했던 백산 안희재 선생이 설치한 것이다.영고탑은 목단강변에 위치한 영안현청의 소재지였 는데, 동경성이 서남으로 70리,해림이 북으로 60리, 서북쪽 70리 거리에 목단강역이 있다.
안희재 선생이 발해농장 (渤海農場)을 직접 경영했고, 밀양부호 한춘옥 선생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팔 가툰에서 식솔들과 함께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의열단을 배반한 구영필이 의열단 자금을 횡령하여 영고탑에서 영안공사(寧安 公司)라는 농장을 경영하다가 1927년 신민부 별동대원 황덕환에게 찔려죽었다.(이러한 구영필을 독립유공자로 만들겠다는 후손들의 파렴치함이 치를 떨게 만든다)
※영고탑지역과 발해농장은 밀양인들과는 너무나 인연이 깊은 곳이다.
발해농장의 수리시설중의 하나인 수차앞에서
단애 윤세복선생이 대종교3세교주로 승임받으신 영안(영고탑) 남관지역의 거리모습
일제가 이극로의 편지를 위조하여 1942년 11월 19 일 국내의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와 함께 영고탑에 있던 윤세복 이하 다수의 대종교 지도자도 검거했 는데 21명중 10명이 옥사한 큰변란(임오교변이라 칭한다)으로 윤세복 선생과 안희재 선생(이 옥중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출소후 3일만에 사망함)이 이 목단강시 철령하진 액하형무소에서 무지막지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단애선생은 이곳에서 ,<복당서정>,<삼법회통>,<세 한얼말>등 몇 권의 책을 저술했다.
봉오동은 길림성 화룡현에 있는 골짜기 동 네다. 과거에는 사람이 살며 농사를 지었 지만 지금은 댐을 막아 수몰지구로 변했 다. 이 봉오동에서 벌어졌던 독립군과 일 본군의 접전은 1920년 6월이니까 청산리 전투 4개월 전이다. 1920.6.7.함경도 남양에서 건너온 일본정 규군 157명이 최진동,홍범도 장군에 의해 섬멸된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운영중인 북한탈북민의 수용시설로 도문시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경계도 엄중한 것으로 보여 매우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다.
중국땅 도문에서 바라보이는 두만강을 경계로 마주하 고 있는 북한 남양시의 모습이다. 사진 의 옆쪽으로 도문-남양간 두만강의 다리 가 연결되어 있다. 국경의표시로 선을 그 어놓은 다리의 중간에까지 접근할 수 있 는데, 남양쪽에는 역사(驛舍)에 걸려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이 눈에 들어오고 북한 동 포들의 헐벗은 모습들이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 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길을 걸어가 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
치운다.“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혀 있으며 규슈대학 의과대학에서 실험용(?)으로 죽임을 당한 윤동주 시인
의 “서시”가 그의 모 교인 대성중학(은진중과 합병)기념관 앞에 세워 져 있어서 방문객을 숙연하게 만든다.
용정시내에 있는 용정지명 시원지 용두레 우물 가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간도로 이주하면서 제일 많이 모여 살던 곳의 중심지라 생각하면 되겠다.마산청년회의소(JC)와 용정시사이에 자매결연이 이루워져 마산 청년들이 우물가에 기념구조물들 을 만들어 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윤동주 의 모교인 대성중학교와 그의 생가나 묘소가 그 리 멀지 않다.
용두레우물가에서 답사단원들과 함께
두만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 가다가 개 산툰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서 가면 옥수수밭들이 지천으로 늘려있고, 용정에 이르게 되는 데, 일송정을 거쳐 화룡 청산리와 백두산 으로 가는 용정시내 해란강위에 용문교 가 있다.강은 그리 크지 않으나 조두남 선생의 선구자에 나오는 강이여서 그런지 이곳 에서 “선구자” 노래를 부르면 뜨거운 눈 물을 참기가 힘이든다.
용정시를 지나 투도진, 서성진을 거쳐 화룡 시에 도달하기 전 약 5km 지점에 도로 오 른쪽에 용성진 청호촌(일명 청파호)이란 한 적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맞은 편 왼쪽 언덕 밭뙈기 쪽으로 약 100여 미터쯤 올라 가면 콘크리트 기둥을 서로 이은 울타리 안에 묘소3기가 나란히 안장돼 있다.이곳은 바로 대종교 창시자며 초대 교주인 홍암 나철 대종사, 백포 서일 종사, 2대교주 무헌 김교헌 대종사 등 3인의 묘소이다.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독립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대한독립군 등 연합 부대가 1920 년 10월 21일 일본군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으로 유인 하여 이 일대에서 6일간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 10여 차 례를 치뤄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는 크다란 전과를 올린 전투를 <청산리전투>라고 한다. <청산리전투>의 승 리는 일제가 1920년부터 계획한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 토화계획과 작전 그 자체를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는 화룡시 외곽 서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청산촌에 위치하고 있다.
함경도와 중국 길림성(吉林省)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 은 산으로 2,750m에 달한다. 산의 봉우리에는 칼데라 호(caldera湖)인 천지(天池)가 있으며 압록 강, 두만강, 송화강으로 흘러간다.정상부에 중국측 기상및 지진관측소가 있고, 북한측 장군봉과 마주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곳은 북한의 영토인 장군봉 부분으로 오르내리는 모노레일이 깔려있는 것이 보인다
천지 북쪽에 결구("달문"이라고 부른다)가 형성되어 있고, 천지의 물 이 결구를 통해 1천여 미터의 긴 협곡까지 흘 러 폭포를 형성했다. 장백폭포는 높이가 68 m의 웅장한 폭포로 200m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도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폭포는 크게 두 갈래의 물줄기로 나눠져 있고 동쪽 폭포 수량이 전체 수량의 3분의 2를 차 지하며 떨어진 물은 송화강(松花江)으로 유입 된다. 또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비룡폭포(飛龍瀑布)"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통구진[通溝鎭] 태왕향[太王鄕] 태왕촌[太王村]에 있고,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 비'로 불린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 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 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인데, 서기414년(장수왕 2)에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왕의 훈적(勳績)을 기리고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명기해두기 위해 세운 비이다.(유리로 포장되어있다)
*우리나라와 일본간에 문제가 되고있는 신묘년조의 기사는 정면 우측으로부터 아홉번째줄 적혀있다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용산(龍山:土口 子山) 아래에 있는 고구려 기단식석실적석총(基 壇式石室積石塚)으로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 왕의 무덤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정식 명칭은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이 으로 무덤 앞으로는 통구평야(通溝平野)가 펼쳐 져 있고 그 너머에 압록강이 흐른다. 무덤은 화 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4층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석실(石室)을 설치했다.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졌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1.28m, 밑변 한 변의 길이는 29.34m, 밑면적 860㎡이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 무덤축조에 쓰인 석재의 부피는 총 6,000㎥에 이른다. 장군총에 쓰인 석재는 무덤의 서북 20㎞ 거리에 있는 양분현(陽分縣) 고대촌(高臺村) 상록수교(上緣水橋) 근처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도산성은 집안시 북쪽으로 2.5km 떨어 진 환도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의 동, 서,북 3면은 높은 절벽에 막혀있고, 通口河가 가로막은 남쪽만 이 트여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벽은 동쪽 성벽의 남쪽 부분과 서쪽 성벽의 북 쪽 부분 및 북쪽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 다. 높이는 5m 가량 된다. 이 산성의 성벽 길이는 동쪽 1,716m, 서쪽 2,440m, 남쪽 1,009m로서 성벽 총 길이는 6,951m에 이 르른다
집안의 압록강변에서 건너다 보이는 북한 만포시의 선전가옥
환인시내 서문안 도심의 중심인 정양가도 (正陽街道) 현,백화점 자리가 단애 윤세복 선생이 세운 동창학교 자리이다.(동창학교 는 1911년도에 개교하여 1914년도에 폐 교 되었는데,당시에 윤창선 선생이 동창학 교를 다니면서 단재 신채호,백암 박은식, 고루 이극로 선생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환인으로 망명한 윤세복 선생의 자택은 횡도천이였는데,이곳에는 한교공회(대표:윤세용) 본부와 통의부,참의부, 등이 조직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손경헌 선생이 1913년 11월 환인현 육도하자로 이주,1914년 4월 한인사회교민회장이 되었고,황문익 선생과 함께 흥업단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었다.
환인의 북쪽에 있는 일직선에 가깝도록 절벽을 이루고 있는 오녀산성은 주몽이 고구려를 개국한 졸본성이다.(광개토대왕비문에는 "주몽"이 아니라 "추모왕"이라고 적혀있었다)
단동의 압록강에 걸린 끊어진 다리로 6.25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이 참전하자 미 군이 군수물자의 수송을 방해하기 위해 서 폭격하여 파괴된 다리이다. 1909년 8 월에 착공하여 1911년 10월에 완공된 이 다리는 당시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철교로 건설한 것인데, 길이는 944.2m, 폭 11m이며 교각은 12개로 그중 4번째 교각이 수평으로 90°회전하면서 선박의 통행을 위해 개폐될 수 있는 구조로 되 어 있었다. 1950년 11월 8일 오전 9시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끊어진 압록강철교에 6.25한국전쟁 , 소위 그들이 말하는 "항미원조전쟁"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민해방군들의
모습을 팽덕회를 중심으로 조각해 놓았다.
끊어진 압록강철교는 신의주로부터 일곱번째 교각까지 파괴되어 있었다.
신의주 강변풍경
신의주 압록강변에서 제일 좋은 건물인 "압록강각"의 모습
압록강변에서 답사단원들의 기념촬영
단동에 남아있는 이륭양행의 건물은 세워 진 것이 100년이 넘은 건물로 추정된다.
이곳은 1919년 5월부터 아일랜드인 조 지 쇼우가 운영하던 무역선박회사였는데 김원봉 장군과 동지들의 의열단 활동을 지원하던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1919년 11월 의친왕의 상해 망명을 계획하고 실행코자 했던 곳이며 3.1운동 후 백범 김구선생께서 상해로 망명하실 때 15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륭양행의 무역선 계림호를 타고 가셨다는 기록도 있다.(백 범일지) 이 건물은 남만주 일대 항일독립 운동 역사에 중요한 항일투쟁 유적이며 역 사적 건물이다.
안중근 의사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던 옛 여순일본관동법원 건물이다.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가 재판에 참석하였 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장소이다. 2층 법정 중간 피고인석 오른쪽 플라스틱 안내문 자리에 안중근 의사가 앉아서 재판을 받은 자리이 고 이곳에 있는 책상과 의자는 복원한 것 이 아니라, 옛 여순일본관동법원 시절의 것 그대로이다.
여순지역은 대련 시내에서 약 46km 떨여 져 있고 러·일전쟁의 해상격전지였다.
여순감옥은 러시아와 일본이 여순을 점령 했을 때 각각 한번씩 두번의 공사를 거쳐 지은 건물이며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학살 한 장소이다.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 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였고 저격 의 현장에서 코레아 우라! 를 세번 외치고 즉시 체포된 후 11월 3일 여순 감옥으로 압송 되었으며,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 되어 앞에 보이는 감옥의 독방에 구금되었다.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안의사 한명만을 감시하는 간수가 있고,글을 쓸 수 있는 책상과 지필묵, 그리고 침대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안중근 의사를 처형한 교수대-보존상태가 대단히 양호(?)하였다.
이곳에 수감되셨다가 사형을 당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기념코너를 만들어 두었는데,
단재선생과 밀양인 윤세복, 손일민,황상규 선생등 39인의 민족지도자들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를
전시하고 있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단재 전시코너의 의열단에 관한부분-의열단의 거의 모든 자료가 전시되어있다.
백옥산 풍치 지구의 주요 경관인 백옥산 탑이다. 이는 본명 “표충탑”(表忠塔)이라고 한다. 일본과 러시아 전쟁 후, 일본 침략군 두목인 노기 마레스 케(乃木希典)와 도고 헤이하치로는 수 천명의 중 국 노역을 강제로 붙잡아 1907년 6월부터 이 탑 을 건설하기가 시작하고 2년 반을 걸려 25만 엔 화를 쓰며 1909년 11월에 완성하였다. 이 탑 북 쪽의 병기관에 “백옥신사 납골당”이라고 불렸던 사당도 있으며 사당에 일본 군사 유골이 2만여 함을 보관한 적이 있었다. 백옥산 산중턱에 있는 갑오(甲午) 대포는 독일 크 루프 무기 공장에서 제조했던 구경이 210mm인 가농포이다. 청군들이 노철산의 예비대포로 1881 년에 독일에서 구입했던 것인데 이후에 일본군들 이 여기로 옮겼다.
대련의 러시아풍 거리모습
대련의 주수자공항에서 2014.8.10. 18:20 비행기를 이용 인천으로 귀국했습니다.
끝까지 살펴보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밀양인이 이룩한 독립운동사를 자세히 밝혀서 밀양인으로 하여금 확고한 독립정신을 갖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우리겠습니다. 더 자세한 방문기는 답사에 참여하였던 이순공 단원이 밀양신문을 통해서 연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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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駑馬 작성시간 14.08.20 두서가 없어서 "내고향 밀양"엔 미쳐 올리지 못했는데 발빠르게 올려주셔서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많은 분들이 보시고, 밀양인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한번쯤 되돌아 보시는 계기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예상은 어느정도 하고 갔습니다만 현장에서 느끼는 밀양인의 기개는 감동적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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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龍雲(칠득이) 작성시간 14.08.21 늘~~~고향독립운동사에 애쓰는 "밀독연" 소장님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작성자龍雲(칠득이) 작성시간 14.08.20 노마님과 월연정님의 열정이
밀양독립사를 굳건한 반석위에 올려 놓을 것으로 믿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월연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8.21 칠득이 지기님과
함께했드라면 좋은 내용의
자료가 많을 텐데...
아쉽군요 -
작성자손병윤 작성시간 21.06.19 당시 밀독연 회원으로서 답사단 일원으로 함께 참가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손정태 소장의 답사기를 다시 접하고보니 2014년이 엊그제 같기도하고,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땐 좀 더 젊어서인지 8월초순의 그 무더위 속에서도 먼길 험한 길을 자원, 자부담하며 강행군 답사한 회원들의 그 열정과 혈기가 새삼 더욱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