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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보충자료[이종욱(李鍾郁)<초혼문><대동단 활동의 동기>]불교평론

작성자니르바나|작성시간05.01.19|조회수1,050 목록 댓글 0


박희승

1. 지암(智庵) 이종욱(李鍾郁)은 누구인가

- 목 차 -
지암(智庵) 이종욱(李鍾郁)은 누구인가
<초혼문><대동단 활동의 동기>의 주요 내용

〈초혼문〉의 작성 배경과 역사적 의의

지암 이종욱(1884∼1969)은 3·1운동을 계기로 항일운동에 본격 투신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주었다.

그 뒤 이종욱은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수형 생활을 한 후 출옥하여 교단으로 활동의 중심을 옮겨 부채로 폐사 직전이던 월정사를 구하고 1930년대 중반에 총본산 건설운동을 주도하여 조계사(당시 태고사) 창건을 성사시켰고, 나아가 1941년 근대 최초의 합법적인 교단인 조선불교 조계종을 창립하였다.

그런데 이종욱은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와 협력 관계를 맺었던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친일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이종욱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최초로 공식화된 것은 강석주·박경훈의 《근세불교백년》(중앙일보사, 1980)이다. 이 책에서 이종욱은 교계에서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가, 조계종의 산파자, 월정사의 구원자로 평가되고 있다. 즉 《근세불교백년》에서 이종욱은 ‘겉으로는 친일을 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은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1993년 임혜봉의 《친일불교론》(민족사)이 출간되면서 이종욱은 ‘조선불교계의 친일을 주도한 인물’, ‘불교계의 특급 친일파’로 평가되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역사바로세우기’ 열풍이 불 때였다. 임혜봉은 그 동안 학계에서 다루지 않았던 일제시대 불교사를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엮어 《친일불교론》이란 민감한 제목으로 출간하였는데, 당시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를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일제시대 교단 활동의 주역들을 대부분 친일파로 규정하였고, 그 중심에는 이종욱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종욱의 본질은 무엇인가 ? 그는 과연 민족의 정신을 팔아먹은 친일파였는가? 아니면 항일운동가로 교단 재건의 산파였는가? 지암 이종욱은 1884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하여 1896년 13세에 명주사로 출가하여 백월병조 선사를 은사로 모셨고, 1908년 백담사의 무불 탁정식으로 유명한 몽성전홍 선사의 법을 이은 설운봉인 선사의 전법제자가 되었다.1) 1) 이종욱의 법사인 설운봉인 선사는 일제시대 강원도 일대에서는 이름난 고승이었다. 그는 은사였던 몽성전홍 선사가 개화운동을 위해 일본에 건너가 김옥균과 함께 활동 하던 중 병을 얻어 입적하자 그 재산을 물려받아 울진 불영사의 중창과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오세암 선원의 큰 화주였다. 현대 조계종의 최고 사판승으로 칭송되는 박영암 스님은 이종욱의 사제이다.

이종욱의 항일운동 이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파고다 공원의 만세운동 참여
1919년 4월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13도 대표로 박한영 스님과 참여
1919년 5월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과 내무부 참사, 의정원 의원 역임. 청년외교단, 애국부인회, 대한적십자사를 조직 결성 지도.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궐석재판으로 3년형 선고
1919년 10월 대동단 김가진 총재와 왕세자 이강의 탈출 주모. 김가진 총재의 상해망명을 직접 안내
1919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내 행정체계인 연통제 국내본부 조직
1919년 3월 상해임시정부 참여 항일승려들의 중심으로서 대한승려연합회의 〈불교선언서〉 작성 관여. 신상완, 김상헌과 함께 전국 사찰을 기반으로 〈의용승군헌제〉와 기밀부 조직 추진
1921년 8월경 일경에 체포되어 함흥교도소에서 3년간 수형 ·1944년 유석현, 강태동 등과 비밀항일무장조직 결사에 참여
2. 〈초혼문〉 〈대동단 활동의 동기〉의 주요 내용

필자는 일제시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이종욱에 대한 바른 인식이 일제시대 한국불교사와 조계종단의 성립사 연구에서 하나의 키워드라고 인식하고 지난 ’97년 이래 지속적으로 자료 수집을 하여 왔다. 그러던 중 지난 2000년 11월 25일 주문진 동명사(東明寺:태고종 소속, 주지 목운 스님)에 소장되어 있는 이종욱의 〈초혼문(招魂文)〉과 〈대동단(大同團) 활동(活動)의 동기(動機)〉라는 자료를 보게 되었다. 동명사는 이종욱이 월정사 교구의 시읍 중 유독 주문진만 포교당이 세워지지 않았음을 한탄하고 1962년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개척한 포교당으로 입적하던 1969년까지 주석한 도량이다.

1) 〈초혼문〉의 주요 내용과 그 의미

〈초혼문〉은 1962년 백중날(음 7. 15)에 주문진 동명사에서 이종욱이 백중 천도재 및 위국선열지사 천도재에서 봉독하기 위해 작성하였던 것이다. 백중에 불교계는 전통적으로 망자의 영혼을 달래어 극랑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거행하는데 당시 79세의 지암 이종욱은 회한에 찬 항일운동을 회고하며 먼저 간 독립운동가들의 천도재를 동명사에서 ‘위국선열초혼(爲國先烈招魂) 및 백중천도식(白衆薦度式)’이란 이름으로 거행하였다.

이종욱은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초혼문〉을 직접 구술하고 한 신자가 대필하여 〈초혼문〉을 작성하였으며, 이 천도의식은 어려서 어산(魚山)을 배운 불공의식의 대가였던 이종욱이 직접 주재하였다. 〈초혼문〉 중 중요한 내용을 몇 가지만 정리해 보자.

① 도산 안창호 회상-〈초혼문〉의 첫 내용은 1919년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에서 1921년 3월까지 상해임시정부에서 내무부 참사와 의정원 의원직을 맡아 국내 독립운동조직을 위해 ‘연통제’를 추진하였는데, 당시 내무부 총장으로 ‘연통제’를 구상하였던 안창호가 이종욱에게 국내에 잠입하여 ‘연통제’ 조직을 부탁하는 광경을 회상하면서 도산을 추모하고 있다. 실제 《안창호일기》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말까지 이종욱은 도산과 7차례 면담 기록이 있다(도산기념사업회, 안도산전서, 범양사 출판부, 1990, 224∼277쪽).

1. 22(목) 맑음, “이종욱군이 래방하야 서세충건의사건에 대하야 그 조처여하를 문함에 해건의안은 접수만하고 종속하야 상당한 인원을 본국에 파유하여 다시 타협하기로 하였다 답하다.”
1. 29(목) 구름, “이종욱군이 래방하야 김가진군과 분거할 사와 및 생활곤란함을 진하고 또 김가진군 처소에 鄭丙朝鮮干銓 등 적탐이 래왕한다하다.”
2. 1(일) 비, “이종욱군이 래방하야 왈 내부총장께서 자기다러 본국에 왕환하라함은 확정이 무하노라고 하다.”
2. 28(토) 맑음, “이종욱군이 래방왈 내부사명을 대하고 조속히 입국코져하니 주의될 바를 생각하였다가 지시하기를 망하노라 하다.”
3. 23(화) 구름, “이종욱군이 래방왈 조속히 입국할터이니 주의할 바를 교시하라함으로 여일 총판부주장하는 인물을 시하야 진정한 의사자들리면 그대로 시행케하고 불연즉 통신하라하다. 또 정부의 계획을 문함으로 계획 중에 일망을 거하야 언하다.”
이렇듯 도산은 이종욱과 상해에서 수시로 면담하여 독립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그래서 이종욱은 〈초혼문〉에서 가장 먼저 도산을 회상하며 애절한 추모의 심경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② 동농 김가진 회상-1919년 3·1운동 직후 조직된 국내 독립운동조직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은 한일합방 당시 합방에 동조한 대신이었으나 후일 깊은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 항일운동단체인 〈대동단〉에 참여하였고, 마침내 1919년 10월 임시정부의 권유와 대동단의 결의에 따라 국내를 탈출하여(임정요원 이종욱이 안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뒤늦게 항일운동에 동참한 인물이다. 이종욱과 대동단의 관계는 이종욱의 자필 〈대동단 활동의 동기〉에 소상히 나온다.

③ 백범 김구 회상-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3일 백범이 북한산 진관사를 방문하면서 이시영 선생과 이종욱을 직접 동행하여 간 것은 처음 밝혀진 사실이며, 그 동안 연구자들 사이에서 해방 직후 백범 김구선생이 귀국 직후 이종욱을 찾았다는 설만 무성하였지 직접 면담한 사실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내무부 참사였던 이종욱은 같은 내무부 경무국장이던 김구와 독립운동 동지였다.(〈內務部職員名簿〉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 이런 까닭에 불교계의 문필가로 널리 알려진 김어수는 〈불교신문〉(1984. 8. 1)의 한 칼럼에서 “김구 선생이 귀국하여 찾은 사람이 이종욱 스님이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그런데 널리 알려져 있듯이 《친일불교론》(하, 505쪽, 민족사 1993)에서 임혜봉은 해방 직후 백범이 귀국하여 불교계의 대표적인 친일파 이종욱을 찾았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며 줄곧 부인하여 왔다. 그러나 〈초혼문〉에서 이종욱은 1946년 1월 2일 백범 김구가 이시영과 자신을 진관사로 동행케 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해방 직후 백범이 이종욱을 찾아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46년 당시 백범을 수행하였던 선우진 선생의 증언을 통해서도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고, 이번 〈초혼문〉 발견을 계기로 확인된 것이다.

④ 대동단의 전협·정남용-전협은 대동단 단장이며, 정남용은 대동단 총무로 독립운동에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한 이들이다. 특히 이종욱의 〈대동단 활동의 동기〉에 의하면 정남용은 금강산 건봉사 승려로 당시 2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종로구치소에서 적의 매에 못 이겨 즉석에서 사망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승려로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분으로는 백초월이 있으나 정남용의 활약과 사망 원인은 이종욱의 회고에 의해 교계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다.

⑤ 우계 전진원(于界 全鎭源)-1919년 중반 이종욱이 서울에서 연통제 국내 본부를 조직하면서 대동단, 청년외교단 등과 접촉할 때 상해 임정과 다양한 연락선을 활용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철도 기관사 전진원이었다. 전진원은 만주로부터 경의선 철도 기관차를 직접 운전하던 역무원으로 청년외교단원인 동시에 비밀교통국의 연락원이었다. 그는 1919년 중반경 임정의 교통국이 설치된 만주 이륭양행에 도착한 임정의 각종 비밀문서, 자료, 물품 등을 서울 만리동에 살고 있던 이종욱에게 전달한 인물이다.2) 2)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 인식〉, 신용하 외, 《일제강점기하의 사회와 사상》, 신원문화사, 1991, 124쪽.

2) 〈대동단 활동의 동기〉의 주요 내용과 그 의미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3·1운동 직후 조직된 국내 독립운동단체이다. 대동단은 상해임시정부와 연계하여 1919년 10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 김가진3)의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을 성사시켰고, 나아가 조선왕조의 왕자였던 이강의 상해임시정부 참여를 추진하려다 발각되어 일제를 경악시켰던 독립운동조직이다. 3) 김가진은 1895년 갑오경장 때 농상공부 대신, 1900년 중추원 의장을 지낸 전직 고위 관리였다.

그 동안 대동단 연구는 신복룡의 《대동단 실기》(양영각, 1982)와 장석흥의 〈조선민족대동단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집, 1989), 그리고 이현희 교수의 독립운동 연구 논문에 비교적 상세히 정리되어 있지만, 대동단의 지도부와 긴밀히 연계된 직접적인 회고록은 이종욱의 이번 자필 자료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이번 자료는 이종욱이 상해임정 특파원으로 귀국하였을 때 대동단 지도부가 자신을 초대하여 이강과 김가진의 망명사건을 협의하며 협조를 요청하였던 전후 과정과 탈출 경로를 가장 직접적으로 증언한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종욱은 회고에서 첫째, 대동단 지도부가 활동하게 된 동기를 “왜적들이 기미독립운동하는 동지들을 악평하야 독립운동하는 자들은 조선내에서 제일하류계급들에 망동이요 상류계급에서는 일본에 동화되어서 추호부동한다구 미영불 기타 각국에 선전하는 고로 전기 양 동지는 적의 이 선전을 봉쇄할 목적으로 왕족 중 이강공을 상해정부로 귀족 중 김가진씨를 상해정부로 모셔낼 계획을 한 것이다.”고 증언하고 있다.

둘째, 대동단 지도부가 상해임정의 특파원 이종욱에게 탈출 계획의 협조를 구하는 경위와 임정의 협력 내용, 그리고 이종욱이 직접 김가진을 안내하여 상해로 망명한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셋째, 대동단 총무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한 건봉사 정남용 스님의 사망 이유가 일경의 몰매 때문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 주었다.

넷째, 대동단 단원이 일망타진된 계기가 한 독립운동가가 밀고했기 때문이며, 이 밀고자는 결국 “피를 대량으로 토하고 사망하였다.”고 증언하여 독립운동 배신자의 말로를 인과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독립운동사 연구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자료이다.

이종욱은 마지막에 ‘1965년 6월 28일’을 쓰고 서명을 한 후 “본 기록은 전진선(全眞善)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야 …… 대강기록합니다.”라고 서술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진선이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이의 부탁으로 작성된 증언록으로 보여진다.

4. 〈초혼문〉의 작성 배경과 역사적 의의

〈초혼문〉의 작성 연도는 임인년(壬寅年) 즉, 1962년으로 당시 79세의 지암 이종욱은 회한에 찬 항일운동의 역사와 먼저 간 선배 동지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주문진 동명사에서 ‘위국선열초혼 및 백중천도식’을 거행하면서 〈초혼문〉을 작성하고 낭독하였다.

〈초혼문〉 뒤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 영가를 필두로 이동녕·이시영·김구·김가진·전협·정남용·이광수·전진원·강태동·송세호·김한·이상재·이병철 등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이외에도 이예국·이옥선·이병규·이병호·이기만 등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영가 이름도 명시되어 있다. 이 무명의 영가들도 모두 독립운동에 관련된 인물들일 것으로 추정되나 향후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초혼문〉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1946년 정월 이종욱이 백범 김구와 동행하여 북한산 진관사를 참배하였다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즉 이종욱이 해방 직후 비타협적인 항일 민족주의자였던 백범 김구와 교류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종욱에 대한 항일과 친일 행적 평가에서 좀더 객관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둘째, 해방 17년이 지난 이후 이종욱의 투철한 항일 민족의식과 국가관의 일단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셋째, 79세의 노스님이 40여 년 전후 항일운동가들과 교류한 역사적 순간을 생생하고도 풍부하게 알려 주고 있다.

넷째, 이종욱이 노년에 출가 수행자로서 항일운동가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던 인연을 잊지 않고 전통 불교의식인 백중 천도재를 통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박희승
동국대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현재 조계종 총무원 기획과장·불학연구소 연구원. 논저서로 〈한국사회와 불교〉 〈불교정화운동연구〉 《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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