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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Qumran) - 최고의 구약필사본이 발견된 곳

작성자보산|작성시간13.03.25|조회수155 목록 댓글 0

쿰란(Qumran) - 최고의 구약필사본이 발견된 곳

 

 

 쿰란(Qumran)은 사해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에센파들의 수도원이 있던 자리다.

갈릴리호수에서 흘러나온 요단강이 광야를 적시고 도착하는 곳은 아무런 생물도 살지 않는 사해(死海)다. 해발 7백50m의 모리아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황량한 유대광야를 지나 사해를 만나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35㎞거리, 사해는 유대광야를 끼고 지표밑으로 깊숙이 내려가 길게 뻗어 있다.

  남북의 길이가 77㎞, 동서 최대의 폭이 16㎞, 면적은 9백65㎢로 갈릴리 호수의 6배다. 해저 4백20m, 코발트색의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 주변,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다.  사해는 요단강에서 매일 5백만t의 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언제나 넘치지 않고 일정한 수면을 유지한다. 뜨거운 날씨로 인해 그만큼의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기 때문이다. 소금농도가 30%에 달해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주변의 유일한 오아시스 엔게디에는 사해에서 수영을 즐기려는 인파로 붐빈다.

사해 북쪽 서단에서 해변을 끼고 남쪽으로 5㎞쯤 가면 쿰란이란 고대 거주지가 나타난다. 거주지에서 서쪽으로 3백여m 떨어진 곳, 유대광야의 높은 언덕이 막 시작되는 입구에 이상하게 생긴 동굴 11개가 있다. 이곳에서 금세기 인류역사에서 놀랄만한 것이 발견됐다. 바로 사해사본이다.

1947년 2월 어느날 베드윈족의 양치기 소년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베두인의 한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예리코 남쪽 13.6 km의 사해 서안의 절벽 위에 있는 여러 동굴 안을 수색하게 되었다. 그 소년은 동굴근처까지 가까스로 올라가 돌을 안으로 던졌다. 양이 그 속에 있으면 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울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항아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작정하고 몇 시간의 노력 끝에 겨우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넓고 평평하게 다듬어진 동굴 안에는 질그릇항아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벤드윈족 소년은 혹시 보물 항아리가 아닐까 생각하고는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그 중 한 동굴 속에서 아마포(亞麻布)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 있는 높이 64.8∼75 cm, 지름 25 cm 정도의 여러 개의 항아리를 발견하였는데, 이들 두루마리 중 5개를 시리아의 예루살렘 정교회(正敎會)의 대주교 마르아타나시우스 사무엘이 샀으며, 나머지 3개는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교 E.수케닉 교수가 매수하였다.

당시 소년이 발견한 것은 고대 히브리어가 빼곡히 적혀 있는 이 두루마리는 성경 이사야서 등이 적힌 구약 필사본이었다.


1952년 9월 어느 날 밤 유대 광야, 베두인 몇 명이 함께 그들의 천막에 둘러앉았다. 그리곤 그들이 지난 5년 동안 창아 주워 모은 두루마리들과 작은 옛 조각들에 대해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의 값이 얼마나 될 지에 모두 침이 마르고 있었다. 천막 안에 피워 논 모닥불이 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각자의 얼굴을 더욱 붉게 상기시켜주는 듯 했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젊은이들의 얘기에 귀를 흘리고 천막 저편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던 한 늙은 양치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더니 젊은이들의 얘기에 끼여든다. 그때까지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였던 그가 그 이상한 다 낡아빠지고 쓰레기 같은 천 조각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값이 된다는 말에 잠에서 벌떡 깬 것이었다.

"나 그런 거 봤다 봤어...." 거기 있던 이들이 모두 입을 딱 다물더니 그 노인에게 다가들었다. 그리곤 그가 이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모두 마른침만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아마 내가 자네들처럼 그렇게 힘이 펄펄 넘쳐나던 때 였을걸세... 하루는 아주 신기하게 생긴 메추리 같이 생긴 새 한 마리를 잡으려고 따라간 적이 있었다네.... 그런데 아, 글쎄 고 녀석이 웬 동굴 같은데 들어가더니 어딘론가 사라지고 없는 게야....." 노인의 입에서 동굴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헌데, 그 동굴에 거_ 웬 오래된 단지 그릇들이 있더구만.... 것도 성한 건 하나도 없었고 다 깨져 있었어...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음_ 그래. 잔뜩 녹이 슨 아주 옛날 등잔인 하나 있었고...."


노인의 말을 듣고 있던 베두인들이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서로를 쳐다본다. 다들 입술은 모두 바짝 타 들어가고 있었다. 노인이 말하는 곳은 쿰란 집터에서 100미터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질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당장 베두인들은 밧줄과 삽 몇 자루 그리고 등잔을 망태에 담아 노인이 말한 그곳으로 급하게 길을 떠났다. 다들 그 황량한 유다 광야에서 태어나 자란 베테랑들이었고 이들에게 그 동굴을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동굴이라고 해 봤자 바로 옆에 그 짜디짠 소금바다인 사해에서 불어오는 오랜 세월의 바람으로 쉽게 파 들어갈 수 있었다.

밧줄을 내려 조심스레 내려가니 바로 동굴 위에서 1미터 아래로 작은 방 크기 만한 게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저들이 발을 내린 그곳이 바로 오늘날 쿰란의 제일 보물이라고 하는 제4번 동굴이었으니, 이 방에서 거의 600개에 달하는 두루마리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모두는 펼쳐 볼 수 있는 두루마리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잘게 잘게 조각으로 뜯어 내야만 했고 그 갯수는 약 4만개에 달했다. 세상에, 바로 코앞에 보이는 지금의 쿰란 집터에서 9개월 동안 고고학자들이 발굴작업을 해 오면서도 이 구멍들을 그 누구하나 거들떠보질 못했던 것이다. 정말 밭에 감추인 보화를 누구도 모르고 지내온 것이었다.

베두인들은 자기들이 찾은 이 엄청난 동굴을 지키기 위해 고고학자들과 마주치거나 또는 요르단 정찰병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한다. 그러니 고고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베두인들이 스스로 마구 파 나가기 시작한다. 그것도 빨리 빨리 일을 끝마쳐야 했다.

이들이 발견한 조각 하나가 당시 동예루살렘에 있던 불란서 고고학 전문대학(École Biblique)에 있던 신부 de Vaux 에게 팔린다. de Vaux는 이 사실을 곧장 당시 골동품 관리위 소장이었던 하딩에게 알린다. 물론 불법 도굴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급히 전한다. 하딩이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곳에 도착해보니 이미 약 수천 개의 조각들이 요르단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문화재보호 관리국을 통해 요르단 정부에게 15000 요르단 파운드, 당시 돈으로 약 4만 달러 정도 되는 값을 치러야 했으니, 당시 요르단으로선 빠듯한 나라살림에 엄청난 돈이었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작업은 계속 이어져 4번 동굴에서 얼마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 동굴을 더 발견하는데, 이것이 제5번동굴이다. 이곳선 단지 갈기갈기 찢어진 조각들만을 건지게 되는데 그 양은 4번동굴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이렇게 쿰란(Qumran) 동굴은 도굴되어 수십개의 두루마리들은 아랍인 골동품상을 통해 헐값에 팔려나갔다. 그 해 11월23일 히브리대학의 고고학자 수케닉 교수에게 한 아랍인 골동품상이 전화를 걸었다. 귀중한 물건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여서 예루살렘은 아랍인과 유대인 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다음날 '수케닉' 교수와 만난 아랍상인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양피지 한 조각을 들어보였다. 한눈에 고대 책의 필사본임을 직감한 수케닉 교수는 그 상인으로부터 3개의 두루마리를 사들였다. 그후 수케닉 교수에게 4개의 두루마리가 더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그는 4개의 두루마리를 손에 넣지 못하고 53년 사망했다.

'수케닉 교수'의 아들 '야딘 장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고학자가 됐으며 1954년 학술대회차 미국에 갔다가 4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하고 정부의 도움으로 25만달러에 두루마리를 사들였다. 즉, 수케닉의 아들 Y.야딘이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사무엘 대주교로부터 5개의 두루마리도 사들여 현재는 이들 두루마리 전부가 이스라엘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 후 두루마리의 가치성이 인정되었으나, 1948년 초에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이 동굴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를 못하고, 1949년 2월 15일∼3월 5일 사이에 요르단 고고학연구소의 L.하딩과 성서학원의 R.드보에 의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성서의 여러 사본들 및 외경(外經)에 대한 단편(斷片)들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700점을 상회) 기록물들이 발견되었다. 거기서 발견된 항아리 파편의 양(量)으로 보아 그 동굴에는 약 20개의 두루마리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1949년 요르단고고학 연구소의 하딩에 의해 쿰란 제1동굴에서 성서, 비성서문서, 외경 등이 발견됐다. 그리고 52년 제2동굴에서 작은 단편들이 발견됐다.

다시 제1동굴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에서 제3동굴이 발견되었으며 2백74개의 히브리어 및 아랍어 단편과 2개의 동판 두루마리가 나왔다. 같은 해 쿰란 서쪽에서 4개의 동굴이 또 발굴되었으며 에스더를 제외한 성서의 모든 문서와 경문서 주석서 제의문사 등이 발견됐다.

  이 두루마리들은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판명됐다. 이 두루마리들은 마카비시대에 새로운 종교를 형성하고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이곳에서 쿰란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에세네파사람들이 율법과 예언서를 필사해 자손들에게 물려줬던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공동체생활을 했으며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렸다.

  쿰란(Qumran) 공동체는 4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 고고학자들은 제1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집터를 발견했다. 복잡한 방들과 책상 의자가 놓여있는 방, 양장피, 잉크가 발굴됐다.그리고 와디와 연결해 물을 저장했던 물탱크, 주방, 연구실, 기도실, 도기가마, 하수도 등이 잇따라 발굴됐다. 쿰란공동체는 서기 68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그들은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두루마리 구약성서와 문헌들을 항아리에 담아 동굴에 숨겨 놓았다.

  사해사본이 2천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은 매우 건조한 이 지역의 기후 탓이다. 사해사본은 가장 오래된 구약필사본이며 현재 예루살렘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예수님 시대에 4개의 당파가 있었다. 제사장 중시의 사두개파, 평신도 중심의 바리새파, 민족독립 투사들의 단체인 열혈당파, 그리고 에센파들이다.

이 에센파들은 주전152년 대제관 직분까지 겸임해버린 요나단을 배격하고 '의의 선생'이란 지도자를 따라서 수도원을 건설하고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곧 임박할 종말의 전쟁을 대비해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후 68년 로마가 여리고를 거쳐 쿰란을 정복하게 될때 아무런 저항도 없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수도원의 모든 집기들을 근처 동굴들에 숨겨두고 떠났다가 1947년 한 목동에 의해 동굴이 발견되면서 이들의 활동과 역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되 많은 유물들 중에 성경 사본들이 있는데 이들은 고고학적 가치 뿐만아니라 성경 사본학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금세기의 최고의 발견이라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본을 '사해사본'이라 부른다.

사진은(위) 제 4번 동굴로서 에센파 수도원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인공동굴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사진(아래)는 제1번 동굴에서 발견된 수도원 규칙서이다. 양피지에 수도원의 엄격한 규칙이 적혀있다.

쿰란의 수도원을 두고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철저한 종말적인 경건생활을 했던 에센파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그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예수님 당시에 종교의 타락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가 있다. 이들은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철저한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수도원 사람들이 정결예식을 매일 행했다.

이 정결 욕조를 '미크베'라고 부르는데 남쪽과 북쪽 두군데 만들어 놓고 저녁 먹기 전에 반드시 이 의식을 행했습니다. 에센파  사람들의 주요 생활은 성경을 손으로 필사하는 것이었는데 사해 주변에서 나는 특수한 광물질을 이용해 상품의 양피지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이들의 두드러진 사상 가운데 하나가 이원론적인 사상으로 자기들은 빛의 자녀들이고 예루살렘을 중심한 제사장 계열들은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종말에 이들의 전쟁에서 종국적인 승리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 의해서 멸망된 이들의 역사는 전혀 사회에 기역하지 못한 현실도피적인 묵시사상의 한 종파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더구나 쿰란에서부터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외치며 천국복음을 전한 장소까지는 10km가 되지 않는 가까운 곳이었다. 메시아가 오셔서 회개를 외치며 천국복음을 전할 때에도 여전히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첫번째 사해두루마리이 사막의 동굴에서 발견된 후 반세기 마(57년)만에 고고학자들이 고대문서를 판독해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을 축하했다. BC 250년부터 AD 7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루마리들은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사해의 서쪽 해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었었다. 그리고 제한된 국제 고고학자들에 의한 판독이 십여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후 몇몇 내용의 복사본을 공개했으며, 사진으로 만들었고, 새로운 100여명의 학자들이 1991년부터 판독에 들어갔었다.

900개 두루마리와 37권의 주석들이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기록되었고, 15,000벌의 가죽과 파피루스로 만들어 졌다. 이 두루마리가 발견되 곳은 West Bank 의 여리고 남쪽 13.5Km 떨어진 Hirbet Qumran 의 옛 거주지의 옛터에서 발견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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