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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의 정체

작성자보산|작성시간14.03.24|조회수32 목록 댓글 0

구원파의 정체


구원파란 무엇인가?

최삼경 sam5566@hanmail.net

월간 <교회와신앙> 발행인


                        박옥수 권신찬 이요한이 말하는 구원파란 무엇인가?



서론: 이단과 성경


1. 이단이란 무엇인가


한국에는 어림잡아 100여 개의 이단이 있는데, 그 중에 외국에서 들어온 소위 외래파는 열 개밖에 없다는 점을 볼 때, '한국교회는 과연 이단의 천국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예수, 인간 하나님이 50여 명이나 되며, 숨은 이단까지 꼽는다면 200여 개는 능히 되리라고 본다. 왜 이렇게 이단이 많은가, 그 대책은 무엇인가를 따지기 전에 이단이 무엇인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기 시작하던 사탄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이르기까지 성도를 미혹한다. 성경은 이들을 "양의 옷을 입은 자"(마 7:15), "가만히 들어온 자"(유 1:3-4), "미혹하는 자"(요일 3:7-11), 또는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마 24:24)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단이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 마디로 이단이란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이단이라 한다. 한국의 성도들은 이단문제를 교리와 연결시키지 않고, 윤리문제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짙다. 이는 잘못이다. 이 말은 윤리적인 잘못은 교리적인 잘못에 비해 문제가 적다는 말은 아니다. 이단문제는 윤리적인 문제와는 별개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안식교 같은 이단은 윤리적으로 성결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기독교방송국에서 이단에 대한 방송을 할 때 강의 후, 모인 방청인들의 질의를 듣게 되었는데, 교리적인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돈 문제나, 성 윤리 등의 윤리적인 문제만 호소하여 강사를 마치 종교경찰로 착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윤리 문제를 교리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단의 문제는 교리적인 문제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교리적으로 무엇이 잘못되면 이단이며, 어느 정도 잘못될 때 이단이라 할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모든 교리에서 이단이 발생할 수 있고,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핵심적인 교리에서 벗어날 때 이단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이서 1장 7절에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면 이단이라고 했다. 이 말은 요한이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인정하는 도케니즘(가현설주의자) 이단에 대한 말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단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도케니즘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제한하던 아리우스도 이단인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교리에서 이단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양성(兩性) 문제만이 아니라, 삼위일체론, 창조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계시론, 종말론 등 어떤 교리로부터도 이단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성경에 대한 이단의 두 가지 입장


성경과 접촉점을 가지지 않았다면 기독교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고, 최소한 성경적 분위기를 가졌을 때, 기독교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단이 보는 성경계시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성경계시 외에 자기계시를 가진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계시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대부분 이단은 성경 외에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통일교는 성경 외에 「원리강론」이란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고, 몰몬교도 성경 외에 「몰몬경」이란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때로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무서운 이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 예를 들어보자.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을 전자에 속한 이단으로 볼 수도 있다. 안식교의 경우 화이트 여사의 대쟁투를 성경 외의 계시로 인정한다고 볼 수 있으나, 표면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세분하자면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은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질적으로는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으나 표면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비록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은 내면적으로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성교인에 대한 표면적 주장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이 같은 구분을 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실질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든, 표면적으로만 성경을 자기계시로 인정하든, 여기에 속한 이단이 더 무서운 이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통교인들 마음 속에도 이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논쟁을 하다보면 오히려 이단자들이 성경을 더 사랑하는 것 같이 되고, 저들은 성경 속에 있고, 우리는 성경 밖에 있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이제 그 초점을 구원파 이단으로 돌아가 보자. 이 구원파야말로 자타가 부정할 수 없는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그러기에 가장 무서운 이단 중의 이단이 구원파이다. 이단이 성도를 미혹하는 자들이요, 성도를 속이는 자들이요, 가만히 들어와 양을 노략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볼 때, 성도를 미혹하는 그 힘은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하고, 통계적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볼 때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를 경계해야 하고, 더욱 경계해야 할 이단이 구원파이다.



3. 문제는 성경해석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더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든, 성경 외에 자기계시를 가졌든, 우리 논쟁의 초점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이단 연구에 있어서 두 가지 자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현상학적 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신학적 연구 내지는 성경해석학적 연구이다. 전자의 연구도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해석학적 연구가 이단연구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앞으로 이단을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정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성경이다. 비록 성경 외에 자기계시가 있는 이단이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최소 최대한의 성경적 접촉점 그것이 우리 논쟁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단에 수십년씩 빠졌다가 돌아온 자들마다 정통교회의 이단 비판 서적을 보고, 그들 이단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인이 볼 때, 이단에서 나온 자들은 이단에 대한 이해는 깊으나 비판의 기준이 약하고, 이단에 빠지지 않고 이단을 비판하는 자들은 비판의 기준은 강하나 이단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 이단자들이 가진 성경 외의 자기계시나 교리기준을 이해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단전문연구가에게도 어려운데 일반목회자나 하물며 평신도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 것'은 모르더라도, '내 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문제다.

특별히 성경해석학적 기준과 방법이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이단논쟁은 성경해석학적 논쟁이요, 특히 구원파 논쟁은 성경해석학적 논쟁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 자체도 그런 점에서 쓰여졌다. 하나의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그 잘못된 해석을 적용하면 결국 사망의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잠언 기자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라고 했다.

예를 들어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창 9:4)는 말을, 수혈하지 말라는 말로 해석하여 수혈을 거부하다 죽어가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라. 그런 점에서 본론의 구원파 교리비판은 성경해석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반증하는 것이다.



4. 이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누구든지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된다. 사용되는 방법은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에 속한다. 하나는 긍정적인 면이요, 하나는 부정적인 면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구약의 바로도 사용하셨고, 신약의 가룟 유다도 사용하셨다. 단지 부정적인 면에서 사용된 것이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이를 괴롭히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기에 신약 27권중 이단을 경계하지 않았던 곳은 없다. 또한 신앙의 선진들의 글 속에는 늘 변증적 요소를 담고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 속에 이단논쟁이 없는 자는 거의 없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단을 사용하신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의 반 삼위일체론이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낳게 했다. 이처럼 이단은 정통교회의 신앙적․교리적 약점을 자극하고, 보완하고, 수정하고, 견고히하는데 공헌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파는 무슨 공헌을 했는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단인가? 구원파가 생긴 배경은 장로교 신학과 워치만니 사상이다. 권신찬 씨는 장로교 목사였다는 점과 워치만니 사상과 상통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한 마디로 구원파 문제는 죄와 구원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한 기성교회의 약점을 뚫고 들어온 이단이요, 또한 이 점에 대한 신학적 필요를 자극하여 구원의 확신문제를 정립하게 한 것이다.

이 점을 이제 살펴보자.



본론: 구원파 교리 비판



Ⅰ. 같은 교리에 다른 세 개의 구원파

  (권신찬, 이요한, 박옥수)


구원파란 이름이 증명하듯이 구원을 강조하는 집단이라는 점과, 더욱이 기성교단의 이름을 가진 6개의 이단 중의 하나라는 점을 볼 때 이단 중의 이단이 이 구원파이다.

권신찬, 유병언 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기독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이요한, 일명 이복칠 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대한예수교침례회'란 이름으로, 박옥수 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예수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통 침례교가 많은 피해를 입고있는데, 한국교회는 이 점을 유의하여 정통교단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981년에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편집위원회 이름으로 편저한 신아문화사 발행(발행인 송일동), 「세칭 구원파란?」 제목의 구원파를 옹호하는 책이 나온 일이 있었다. 그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의 주장이 장로교나 감리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은 그들 자신도 잘 알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론적으로만 교리를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뿐이다."(p41)

이 말에 의하면 구원파들의 교리와 기성교회 교리가 아무 차이가 없는데, 교리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자신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말이 된다. 즉 이단이 아닌 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이단된 자보다, 이단을 규정한 자가 더 나쁠 것이다. 또한 같은 책 머리말에서는, "교리적인 것이라면 얼마든지 우리를 비판해도 상관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저들의 말대로 구원파 교리는 정통 기독교의 것과 같은가?


필자는 지금부터 정통 기독교와 너무나 유사하나, 다른 종교요 다른 복음이요 또한 반 하나님적이요, 반 성경적인 구원파의 이단성을 교리적인 면에서 분석 비판하려고 한다. 본인은 수 차례 권신찬, 박옥수 씨에게 공개질의를 한 일이 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이 책은 이요한 씨를 포함하여 권신찬, 박옥수 씨에게 공동으로 드리는 공개질의서라고 볼 수 있다.

권신찬, 이요한, 박옥수, 이 세 사람이 이끄는 같은 교리의 다른 교단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 점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그들의 교리가 정통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이다. 이요한 씨는 권신찬 씨와 윤리적인 면에서는 물론, 교리적인 부분에서 다르다고 했다 한다. 필자는 다 같은 입장에서 비판하려 하는데, 이요한 씨나, 박옥수 씨는 권신찬 씨의 이론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밝혀 응답해 주기 바란다.

자신들의 교리가 기성 정통교회와 다르지 않다고 하든(권씨처럼), 아니면 정직하게 다르다고 하든, 정통교회의 교리와 분명히 다른 교리들을 밝히려 한다. 다르다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고치고 회개하여 돌아올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 단지 성도를 미혹하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한 것이었음이 판명될 것이다.



Ⅱ. 구원파 교리, 무엇이 다른가



1. 구원관에 나타난 이단성


최근 들어서는 구원파 교인들 중에 10단계 질문서라는 것을 사용하는 자들을 본 일이 없다. 이 10단계 질문서를 비록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질문 속에 구원 문제에 대해 저들이 주장하고 싶은 모든 내용과 기성교인들을 미혹할 수 있는 함정의 핵심이 다 숨어 있다. 그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 질문: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두 번째 질문: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세 번째 질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다섯 번째 질문: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섯 번째 질문: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일곱 번째 질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이 아닙니까?

여덟 번째 질문: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아홉 번째 질문: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열번째 질문: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한 구원파의 어떤 주장이 성경과 다른가?


(1) 회개의 개념이 다르다.

모든 이단들이 정통교회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기성교인들의 체계나 확신을 뒤흔들어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것처럼 구원파는 이 회개문제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즉 기성교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공격하기 위하여 새벽마다 울고불고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회개란 단어를 구원받은 후에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적용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이 것이다. 회개란 '돌이킨다'는 말로써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 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회개란 오직 구원을 위해 돌이키는 행위로써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현재, 미래,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한데 이미 사해준 죄를 또 다시 사해 달라고 울고불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점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요, 결국 울고불고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백 날을 울고불고 회개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정죄해버리는 것이 구원파이다.


비판해 보자.

① 구원을 위해 필요한 회개라 구체적 죄의 고백이 없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 실례가 누가복음 23장 강도의 구원이다. 물론 죄인이 되었기에 죄를 짓게된 것이요, 죄는 보고, 죄는 깨달으며, 죄는 고백하나 죄인임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면 안 된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 그러나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것은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된 것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에 대한 참회하는 마음과 통회자복하는 마음없이 어떻게 죄인임을 알게 되는가? 죄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죄인에 대한 의식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죄를 범하지 않는 죄인도 있는가? 없다. 구원파의 주장은 죄와 죄인의 관계를 잘 모르고 행하는 오직 기성교인을 미혹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② 회개에는 지, 정, 의의 인격적인 요소가 다 포함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을 때 통회자복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이키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구원파의 사람들은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라는 말만 할 뿐이며, 구체적인 회개의 행위가 무엇인지 대답하는 경우를 본 일이 없으며, 오직 기성교회의 회개의 자세를 부정하려는 데에만 일치점이 있었다.

물론 통회지복하고 눈물을 흘린 그 행위가 죄를 씻는 것은 결코 아니다. 회개를 하면 회개의 행위가 죄를 씻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죄를 씻고, 죄를 사하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단지 회개란 죄 때문에 죽어버린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법칙일 뿐이다.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행위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깨달음이 없는 자기 연민의식의 눈물과 슬픔을 회개로 착각하는 교인들을 동정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뿐이다.


③ 회개는 한 번만 하는 것으로 회개를 거듭하는 것은 구원이 없는 증거로 보는 점이 비성경적이다.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에 대하여는 별개로 취급하겠다. 일단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의 면만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만큼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의 터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하기를 똑같이 바라고 계신다. 그런 점에서 성장을 촉구하며 회개의 터(구원을 위한)를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원리적으로 볼 때 틀림없이 구원의 터를 두 번 닦을 수 없고,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잘못은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이 여러 번 할 수 있다는 성도의 약점을 혼돈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의미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정죄한 곳이 있는가?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는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젖밖에 못먹는 어리아이를 가르쳐 육신에 속한 자(σαρκικοs)라고 했는데 구원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도 지옥의 자녀가 되지 않겠는가? (고전 3:1)

④ 구원파는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혼돈하고 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단회적임을 밝혔다. 그러나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이다. 이 말은 성화를 위한 회개와 구원을 위한 회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회개 자체는 둘다 단회적이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사건 자체는 단회적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회개하라는 말을 제 1 단순과거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같은 죄를 계속 범한다는 점에서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성경이 구원파의 말처럼 한 번 사죄 받은 후에는 미래의 죄까지 사함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필자도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상식적으로 보아도 무서운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구원받은 후에는 어떤 죄도 죄가 아니라는 논리가 가능해지고 결국 살인, 간음 등 어떤 죄도 지을 수 있다는 말이요, 실질적으로 그렇게 적용시키는 구원파 교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즉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지으나 그저 그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하늘과 땅처럼 멀지 않은가? 다음의 성구 다섯 개는 분명히 같은 회개란 단어의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임이 입증되는 결정적 성구들이다.


<다섯개의 핵심 성구를 중심으로>


1. 시편 51편

박씨는 본 51편의 회개 또한 구원을 위한 회개로 보지 않는지 5절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말을 가지고 다윗이 원죄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어디에 다윗이 그 입으로 직접 자신의 죄를 열거하며 사해주기를 바랬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 물음에 저의는 오늘과 교회가 하나 하나의 죄를 들어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이고 회개는 한번으로 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하나의 전제로부터 스스로 다음과 같은 모순을 낳게 합니다.

우선 다윗이 회개를 여러 번 했다는 말이 됩니다(본문, 삼하 24:10, 시편 32:5 등). 그러니 다윗은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말이요 고로 다윗은 지옥에 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한 내용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소리인가. 그가 "죄과" "죄악" "죄"라고 한 말은 무슨 죄인가? 그리고 14절에서 "피흘린 죄"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또한 17절에 그가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2. 사무엘하 24:10

이곳에 나타난 다윗은 회개는 더욱 결정적입니다. 그가 직접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사해주기를 구했습니다. "(인구조사 후에)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구원파의 말대로라면 이미 사함을 받았는데 무엇을 또 사해 달라는 말입니까? 다윗을 또 다시 지옥으로 보내시렵니까?


3. 주기도문(마태복음 6장)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구원파들은 이 회개도 단회적인 회개로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가지 문제에 봉착되어 버립니다.

① 이 기도문 전체가 모두 반복되어야 할 기도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만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일용할 양식이 한번만 필요한 것도 아니며,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한번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죄사함이 기도만은 한번으로 족할 수 있겠습니까?

② 만일 이 회개가 성화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면 구원 또한 유동적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우리의 죄도 사함받지 못함이니 구원파의 말로하면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③ 본문은 원어에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죄는 복수로서 자범죄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어가 복수일 때나, 구체적인 죄에 의해 나타내는 원죄를 말할 때를 제외하고 원죄를 나타낼 때 복수로 사용된 경우가 있는가 제시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의 이 회개는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성화를 위한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4. 요한일서 1:8-9

먼저 본문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얼핏 보면 구원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게 볼 때  3가지 문제에 봉착됩니다.

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불신자가 아니고 성도들이었습니다. 이 서신에서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은 자들에게 "자녀들아" 또는 "아이들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또 다시 구원을 위한 회개를 가르친다는 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② 본문에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는데 이 우리란 주어는 1인칭 복수로서 저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한번에 족한 회개기도를 또 하려 했고 또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면 사도요한은 지옥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사용된 "죄"란 단어 또한 복수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성화를 위한 회개로서 구체적인 죄에 대한 회개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5. 끝으로 요한계시록의 교회들에 보낸 사도요한의 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회개하라는 말이 12번 나오는데 대부분 구체적인 죄를 하나씩 지적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들은 바로는 이들 구원파는 구체적인 죄의 고백은 구원을 위한 회개도 아닌 것으로 그것을 부정하였습니다. 물론 본인도 한두 가지 죄를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다 되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는 한가지 구체적인 죄의 뉘우침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전인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죄에 대해 죄의식이 없이 전인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란 의식은 불가능할 것이 아닙니까?


(2) 죄인과 의인의 개념이 다르다.

구원받은 후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인임에 틀림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더욱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해도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감사 외에 뽐낼 것도 예수님의 공로 외의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다"라고 하면 지옥의 자식으로 정죄해버린다는 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거스리는 사탄적 궤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 편에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여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다가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다.(욥 42:7-9)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없이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성경적 증거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이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시제로 밝히고 나서 죄인임을 고백할 때는 현재시제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단자들에게 어떤 성구를 말한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겠는가? 특히 박옥수 씨와 그 수하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과거시제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웃어야 할 것인가, 울어야 할 것인가?


(3)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다르다.

구원파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묻는다. 아니 그렇게 묻는 것을 즐겨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최대 무기로 사용하는 것 같다. 10년만에 시아버지 장로님을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첫 인사가, "아버님,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한다. 필자가 아는 어떤 목사님에게, "목사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이제 보니 구원을 못 받으셨군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을 못하거나 화를 내면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데 대답을 못할 것이 무엇이며, 더욱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들이 구원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 같은데 그들 편에서 보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여겨야 할텐데 왜 교단이름을 아예 구원파라고 하지 않고, 역사적 정통성도 없이 침례교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그들은 구원의 점진성 같은 것은 아예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구원 받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상례이다.


이 점을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시켜 비판해 보자.

①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하는 점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구원을 확증하라고 할 때(고후 13:5),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성경은 구원의 확신을 요구하나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없는 자들을 구원파처럼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한 일이 없다. 그 경우가 위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6:1-2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게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된다.

②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믿음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믿음을 동시에 말한다. 즉 하나님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동시에 균형있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을 촉구하지만 구원이 인간의 믿음의 대가라거나 인간의 공로라고 말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인 예정을 말한다고 해서(엡 1:4, 2:1) 인간의 의무인 전도나 믿음을 의심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다. 분명 믿음으로 얻는 것이 구원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면 그것도 인간주의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즉(우리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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