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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고고학

청동기시대 주구묘의 발생과 변천 2008

작성자아제|작성시간12.09.11|조회수617 목록 댓글 21

김권중 선생이 2008년에 발표한 논문의 일부를 토론목적으로 발췌해서 올립니다.

 

<요약>

청동기시대 주구묘는 주구라는 묘역시설로 매장주체부 주변을 구획하는 묘제로서 고고학적인 의미는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주구묘의 최초 등장은 한반도 남부지역 전체에서 거의 동시기 인 전기 후반이며, 변화 양상에는 지역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전과는 달리 피장자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두드러지며, 특정지역에서 주거공간과 구분된 묘역을 형성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발생 당시의 주구묘는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와 같은 분구묘적인 개념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철정리와 옥방8지구의 경우와 같이 복수의 매장시설을 설치하는 방식이 적용된다고 하여도 전반적으로 분구묘의 매장관념에 적합하지는 않다고 판단된다. 또한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와의 직접적인 계보를 상정하기에는 시기나 매장방식, 구조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단계의 묘제인 지석묘로의 대체는 자연스럽지 못한 면이 있다고 판단되지만 영남 남서부지역 주구묘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원형과 방형계통이 공존하는 전통은 지석묘 단계에도 자연스럽게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주구묘의 발생에 관한 문제는 외적인 요인보다 현재로서는 전단계와 다른 매장관념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으로 내적인 요인에 의해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본문 발췌>

주구묘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 이르러 확인되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편년뿐만 아니라 기원이나 계보, 성격, 의미 등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진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의 기원을 다루면서 국내 주구묘의 기원이나 계보 등에 대해 연구된 것이 있는데(中村2004), 매장관념에서 유사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출토유물과 구조, 연대 등 여러 가지 측면
에서 해결되지 않는 점이 많다.

이 글은 최근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한 주구묘의 연구를 위해 조사된 자료의 소개와 함께 묘제의 특징과 구조, 출토유물의 양상을 파악하여 지역별 편년과 변천 양상에 대해 살펴볼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또한 주구묘 발생 이전 묘제와의 관계, 지석묘와의 관계,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와의 관계 등을 검토하고, 궁극적으로는 주구묘가 내포하는 고고학적 의미의 해석에 초점을 두고자한다.

주구묘는 기존에 周溝石棺墓, 周溝附石棺墓등으로 명칭되었으나 매장주체부의 형태가 전형적인 석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석곽형과 목관도 있기 때문에 주구라는 독특한 묘역시설을 강조하기위해서‘주구묘’로 부르고자 한다. 한편, 한반도 서남부지역 원삼국시대 주구묘와의 구분도 혼동의 우려가 있지만 청동기시대라는 시대명칭을 덧붙여 사용하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까지 주구묘로 파악되는 것은 11개 유적에서 37기 정도이다. 대체로 네 지역에 집중되고 있는데 그 분포를 살펴보면 2개 유적이지만 강원 영서지역에서 가장 많은 25기가 확인되었고, 그 외는 영남 남동부지역 4개 유적, 영남 남서부지역 3개 유적, 호서지역 2개 유적으로 각각 1~3기씩의 주구묘가 확인되었다.

 

(중략)

한반도의 주구묘는 유사한 형태인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보다 연대가 앞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기원은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우선 검토해야할 지역은 역시 중국인데, 중국에는 山西省候馬市蕎村遺蹟이나 鳳翔縣秦公陵園遺蹟에서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와 유사한 것(圍溝墓)이 발견되어 춘추·전국시대 秦國의 영역에서 주민과 함께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다(兪偉超1996). 그러나 이 묘제는 전국시대 말기의 묘제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安信元2004) 연대적으로 차이가 있고, 규모나 구조, 성격 등이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주구묘와는 차이가 커서 서로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거리를 좁혀 북한지역을 본다면 현재까지 주구묘로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구묘의 기원은 결국 남한 내에서 구해야 한다고 판단되는데, 최근 中村은(2008)은 남한내 주구묘 출현을 지석묘의 출현과 동일한 시점으로 보고 동북아시아 지석묘의 다양성을 들어 북방에서 지석묘가 전파되었을 때 조성집단의 사람 수 등의 관계로 구축 재료가 돌에서 흙으로 전환된 것으로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호서지역과 같이 주구묘가 지석묘의 출현 시점이 거의 동일한 지역도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지석묘 출현 이전이나 직전에 등장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지석묘 조성집단의 인원수 문제로 인해 돌이 흙으로 전환된 것이라는 점은 뭔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주구묘의 기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주구묘 발생 전단계의 묘제를 고려해야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전단계의 묘제는 명확하지 않고 몇몇 사례가 있지만 구조적으로 차이 있다. 결국 현재로서는 주변지역이나 전단계에서 그 기원을 찾기보다는 단순히 묘제만이 아닌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과 필요 즉, 집단내의 계층화가 진전됨에 따라 발생된 결과로서, 유력개인이나 집단의 강조를 위한 매장관념의 변화와 같은 내재적인 요인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좀 보충설명을 하자면 주구묘는 청동기시대 전기, 다시말해 지석묘(고인돌)보다 더 이른 시기에 사용된 무덤 양식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것입니다. 마한 분구묘의 일종인 주구묘와는 또다른 묘제입니다. 역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교해서 주구가 있는것만 동일할 뿐 전체 구조, 평면 배치가 전혀 다른 묘제입니다. 아무리 연대가 올라간다해도 이걸 근거로 전방후원분의 직접적 기원이라고 말하긴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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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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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잔잡아권하실 | 작성시간 12.09.17 모든 부분에서 일본에 앞섰다는 증거는 널려 있잖아요. 일본 출신입니까? 영토와 인구가 언제 기준인데요? 백제,신라 망했을 때도 일본열도는 전체가 통일되지 않았고 동북지역은 번외지역이었으며 북해도는 아예 관심밖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 기준으로, 일본 열도 전체 기준으로 보면 영토와 인구가 훨씬은 아니더라도 많았을 수는 있겠지요.근데 영토와 인구가 국력의 절대적 기준이던가요? 수,당의 백만대군을 물리쳤고,사서에 대륙의 북부와 동부까지 장악했으며 당태종 이세민을 항복시켰다 기록돼있다는 고구려가 영토와 인구가 지나국에 비해 많았습니까? 광개토비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본측의 주장을 채택하
  • 답댓글 작성자잔잡아권하실 | 작성시간 12.09.17 이유가 뭡니까 도대체? 여기 다른 나라 사람도 많이 들어온다고 하던데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우리나라 정사에 나온 기록은 전쟁도 아니고 잠깐 잠깐 들어왔다 전투 수준의 노략질을 해댄 왜구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이죠. 19세기에 해적들이 강대국의 영토, 식민지에 수없이 약탈질을 해댔는데 그럼 얘들이 최강이었습니까? 또 삼국시대 때 고대 얘기를 하는데 여태까지의 모든 역사를 왜 얘기하나요? 또 왜의 실체 자체가 한반도에서 출발한 왕조 또는 가야, 백제의 왕조일 가능성이 아주 큰 상황인데 그런 것이라면 왜를 지금의 일본개념으로 대치시킬 수 있겠어요? 대륙, 한반도, 열도에 걸친 한민족 내부 투쟁이라고 볼수있지요. 영국이
  • 답댓글 작성자잔잡아권하실 | 작성시간 12.09.17 개척한 미국식민지 정부가 영국에 반기를 들고 싸웠는데, 그럼 영국과 전혀 다른 종족, 원래 부터 그 땅에 살며 그 땅을 지배해온 토종 종족, 다른 정체성을 가졌던 국가인 미국이 영국에 맞서 싸운 것인가요? 미국이 학살하기 전 인구가 2억이나 되고 영국이 비교도 안되게 엄청난 땅덩어리를 보유했던 인디언의 국가가 독자적으로 영국에 대항한 전쟁이던가요? 인디언한테 열등감 느끼는 미국인들이 있나요? 그건 굳이 그런 식으로 꼬자면 열등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라고 하는 거에요. 한국말의 뜻도 쌩반대로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외국인군요. 그 중에 특히, 일본인은 적반하장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잘 하긴 합니다만...ㅋㅋ
  • 답댓글 작성자garimtto | 작성시간 12.09.17 클라라님 일본의 생산량이 한국의 생산량을 앞질렀다는 시기는 아마 헤이안 시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중/일 3국의 면적 당 생산량 내지 효율성은 경기/충청 지역만한 곳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자료가 일본 전역(큐슈+시코쿠+혼슈+혹카이도)을 기준으로 한 것 아닐런지요. 당시 일본이라고 불리는 세력의 영향력은 확실하게 보면, 오:사카 정도로 보고 있지 않은지요. 덧붙여서, 일본의 후진성(?)을 든다면, 백강 전투에서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어이없게 소진했다는 점으로 보일 수 있지 않을런지. 암튼,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니::
  • 답댓글 작성자garimtto | 작성시간 12.09.17 이 쯤되면, 왜의 정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도 필요한 시점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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