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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난징 대학살

작성자대한나라|작성시간18.03.05|조회수223 목록 댓글 0

식민지 확대 위해 중국 노리던 일제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전쟁 일으켜 난징 점령하고 수십만 명 학살·강간

中, 日의 사과·배상 요구하고 있죠

지난 13일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난징 대학살 80주년'을 맞은 중국 정부에 "동병상련(同病相憐·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김)의 마음으로 애도한다"고 말했어요.

같은 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난징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해 80년 전 있었던 중국인들의 희생을 애도했답니다. 그렇다면 80년 전 중국 난징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일제의 침략 야욕과 중일전쟁

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1920년대 경제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 자원과 물건을 더 많이 내다 팔 시장이 필요했어요. 일본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새로운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1937년 중국 난징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중국인 시신들이 친화이강 주변에 쌓인 모습이에요.
1937년 중국 난징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중국인 시신들이 친화이강 주변에 쌓인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무라세 모리야스)
때마침 중국에서 장제스(훗날 대만 최고 지도자)의 국민당과 마오쩌둥(훗날 중국 국가주석)의 공산당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어요. 이를 '국공 내전'(1927~1936년)이라고 불러요. 중국이 정치적 대혼란에 빠지자, 이를 틈타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 지역을 침공하고 그들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 나라인 '만주국'을 세웠어요.

일본은 중국 영토를 더 많이 장악하고자 호시탐탐 전쟁을 일으킬 기회만 노렸어요. 그러던 중 1937년 결정적 사건이 벌어졌어요. 7월 7일 밤,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오(蘆溝橋·마르코폴로 다리) 근처를 정찰하던 일본군이 어디선가 들려온 총성을 듣고 긴급히 인원을 점검했는데 병사 한 명이 안 보인 거예요.

사실 그 병사는 용변을 보는 중이었고 20여 분 후 부대로 복귀했죠. 하지만 일본은 이를 꼬투리 잡아 '중국이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면서 군대를 보내 루거우차오를 점령하고 중국에 전면전을 선포했어요. 8년에 걸친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일본은 속전속결로 중국 주요 도시를 장악해 나갔어요.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잡고 일본에 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어요. 상하이에 모든 역량을 모은 중국군은 3개월간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지고 말았죠. 일본군은 도망치는 중국군을 파죽지세(대나무를 쪼개듯 맹렬한 기세)로 추격했고, 그해 12월 9일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을 포위했어요.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관리들은 대피했고, 수도를 충칭으로 옮긴다고 발표했어요.

◇대규모 학살과 강간

일본군에게 포위된 난징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어요. 그동안 일본군이 중국인의 항전(抗戰) 의지를 꺾겠다며 점령하는 도시마다 민간인 폭격·살상·강간·약탈을 무차별로 자행했기 때문이에요. 일본군 만행을 취재하던 한 영국인 기자가 '시체를 파먹고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진 개들이 그곳에 남은 유일한 생명체다. 한때 10만명이 넘는 인구가 빽빽하게 모여 살던 지역에는 고작 다섯 명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잔혹한 만행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죠.


중국 난징 대학살 80주년 촛불 추모제 모습.
중국 난징 대학살 80주년 촛불 추모제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무차별 폭격으로 난징을 파괴한 일본은 1937년 12월 13일 난징 함락에 성공했어요. 일본군은 포로로 잡은 중국 군인들을 강변이나 농경지, 도시 주변 도랑으로 데려가 마구 죽였고, 무고한 민간인들도 붙잡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했어요. 일본군끼리 '누가 100명을 먼저 죽이나' 시합을 벌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난징에서 20만~30만명이나 되는 중국인이 비참하게 죽어갔어요. 많게는 8만명에 이르는 중국 여성도 강간 피해를 봤는데, 이조차도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고 해요. 많은 여성이 피해를 본 다음 살해당하거나 자살했기 때문이지요.

◇일본의 책임 회피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중일전쟁도 끝났어요. 이후 난징 대학살이 국제사회에 조금씩 알려졌지만, 사실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세계적으로 더 많이 주목받았지요. 전쟁이 끝나고 난징 대학살 주동자에 대한 공식 처벌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피해에 비해 아주 미약한 수준이었어요.

난징
1946년 일본 도쿄에서 국제 군사재판이 열리자 많은 서양인 기자 등이 난징 대학살의 참혹함에 대해 증언했어요. 그 결과 난징에 주둔했던 일본군 수장 마쓰이 이와네가 사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러나 중국에서 열린 재판에서는 학살을 주도한 일본인 장교 4명만이 처형됐고 대다수 학살자는 법정에 오르지도 않았어요.

난징 대학살이 국제사회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데는 당시 국제 정세가 급변했던 요인이 커요. 전범국 일본이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제 재건에 성공했고, 중국이 공산주의 길을 가면서 서구 자본주의 진영과 대결을 벌이게 됐죠. 이에 따라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난징 대학살을 알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거예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더 이상 중국에 사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난징 대학살 70주년인 지난 2007년 일본 집권당의 한 국회의원은 "난징에서 발생한 사망자 규모는 일반적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발언을 했지요. 심지어 일본 극우 세력은 난징 대학살이 중국이 일방적으로 날조한 사건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어요.

지금도 중국은 일본에 난징 대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일본은 '학살이 있었다 할지라도 정부에서 개입하지 않은 개인의 일탈 행위였다'며 공식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이 없는 한 동아시아 국제 관계는 언제든 어긋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될 거예요.


[난징서 중국인 보호한 외국인들]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에게서 중국인을 보호해줬던 외국인들이 있었어요. 대표적인 사람이 '난징 안전지대 국제위원회'를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숨을 장소와 음식을 제공한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였지요.

그는 난징 서쪽 지역에 여러 난민 수용소를 설치하고 중국인 수백 명을 보호했어요. 당시 독일 총통이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일본의 만행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지요.

미국인 선교사 윌헬미나 보트린도 여성 수천 명을 살해·강간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그는 당시 진링 여자예술과학대 학장을 맡고 있었는데, 대학살이 시작되자 학교 정문에서 수많은 여성 피란민을 받았어요. 중국 여성들을 납치하려던 일본군으로부터 맞아가면서도 여성들을 보호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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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대전고43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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