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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제안 시리즈

[학습제안] (24) - <03> 장면張勉시대의 아이러니.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11.05.22|조회수2,522 목록 댓글 38

[학습제안] (24)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한국형 이즘을 찾아라.<03>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냐

 

(본 글은 시리즈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께서 1장부터 계속 읽어오신 것을 전제로 하여 글을 씁니다.)

 

 

제 2 장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냐

 

3. 장면張勉시대의 아이러니.

 

이승만의 최대 단점은 주변을 너무 믿는 것이었다. 이승만과 프렌체스카 부부는 고령에다 친인척이 없어 부패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비서실장 출신인 이기붕은 달랐다. 이승만이 아들이 없는 것을 기화로 이기붕은 자신의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승만의 비위를 맞추면서 막강한 권력을 오로지 했다.

 

이기붕의 권력은 막강했다. 당시 이기붕을 찬양하는 서적이 출간되기도 했는데 그 중 '민족의 해와 달'이란 책을 보면 가관이다. 여기서 '민족의 해'는 대통령 이승만을 지칭, '민족의 달'은 이기붕을 지칭했다.(위키백과) 이기붕이 한 게 뭐가 있다고 감히 민족의 달을 자처했는지 한심한 일이었다. 이승만을 무너뜨린 가장 큰 적은 '등잔 밑'에 있었던 것이다.

 

이기붕은 자기 자식의 양아버지의 권력에 기대어 부통령에 출마했고, 아들의 양아버지의 권위를 멋대로 차용하여 엄청난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다. 3.15 부정선거도 이기붕에 의한 것이었다. 4.19가 터지자 결국 이기붕은 자신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의 권총에 살해당했다. 물론 이강석은 자기 가족도 모두 사살한 다음 스스로 자살했다. 현대사의 비극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이승만은 미국의 역사에 정통했다. 미국에도 2선을 넘어 4선까지 한 대통령이 있었다. 세계 대공황을 해결한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선진국인 미국의 예에서 보듯, 적어도 (대한민국의 국부國父로 국민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던 자신의 경우에는 적어도) 자신을 3선 이상의 대통령으로 지지해 줄 것으로 믿었다.

 

독선적인 이기붕의 득세는 엉뚱한 소외를 낳았다. 국가 산업기반이 취약하여 정치가와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일 수밖에 없었던 정치/공무담임 욕구 과잉의 시절에 (비록 소수지만) 고학력자 등 정치와 권력에 참여하고픈 집단의 소외를 초래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순수한 민중의 자발적인 봉기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귀하는 지나치게 순진하다. 순진함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지만 악의적인 세력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너무 큰 것이 흠이다. 당시 프랑스 대혁명을 배후 조장한 세력이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왕가의 근거 없는 악소문을 확대 재생산하여 민중의 분노를 유발시키고, (대표적인 악소문이 마리 앙뜨와네트 왕비가 말했다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이세요'다. 마리 앙뜨와네트는 이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 빵 사 먹을 돈조차 없는 민중에게 자금을 댔다.

 

미국의 독립혁명을 '보스톤 티 파티' 사건도 거의 유사했다. 영국 배에 가득 실린 차 상자는 일당으로 동원된 인디언들에 의해서 바다로 던져졌다. 당시 구경꾼들은 '아깝다. 저렇게 버릴 거면 나 주지.'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말은 대단한 격언이지만, 사실은 미국 부르주아의 이구동성이었다. 신세계인 미국에서 돈을 번 밀수업자들과 부르주아들의 세금을 아끼기 위한 절세 전략의 공감대가 모국母國인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이었다.

 

북한 주민이 학정과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중산층의 실종이다. 북한은 새로운 왕족(김씨 일가)과 귀족(당 간부 등)이 지식, 정보, 경제적 중산층 시대의 도래를 철저하게 막고 있다. 북한의 교육수준은 다른 후진국에 비해서 엄청나게 높지만 유치원 이전부터 퍼부어지는 (새로운 왕조에 대한) 충성강요 세뇌교육과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쟈스민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은 근본적으로 마비되어버렸다.  

 

당시 프랑스 부르주아들의 위를 가로막고 있던 마지막 수구 세력은 다수의 귀족과 왕족이었다. 민중이 처단한 귀족과 왕족은 부르주와의 새로운 세상을 보장했다. 당시 직접 피를 흘린 민중에게 돌아 간 몫은 왕정 치하나 공화정 치하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등장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폴레옹 1세의 아버지 '샤를'은 아야치오시()의 소지주()였으며, 이탈리아에서 법률을 공부한 전형적인 부르주아였다. 물론 신분상승의 기회가 열린 것은 혁명적이었지만, 그 기회를 국민 전체가 향유하는 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인권은 다소 나아졌지만, 본격적으로 민중의 인권이 신장된 것은 제 1, 2차 세계대전 전후다.

 

당시의 부르주아가 지금의 중산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르다면 중상류층 정도라고 할까. 상류층은 왕족과 귀족이 배타적으로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승만 통치 당시 우리나라에는 중산층 계급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25로 폐허가 된 땅, 산업이라고는 제 먹을 것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농업이 전체의 70% 이상.... 중산층이 자라기에는 경제적 환경이 너무 척박했다. 현대의 초기 민주주의는 대부분 부르주아의 발호와 함께 태동했다. 중산층의 확대가 없으면 민주화도 어렵다는 이유다. 중산층 없는 민주화는 <무정부 상태>를 부르기도 한다. 해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후진국들의 경우가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

 

이승만, 이기붕의 독재와 권력독점은 3.15 부정선거를 낳았고, 4.19 혁명을 불렀다. 4.19는 역사적 당위고 필연이었다. 4.19는 못 먹고 (굶주리고) 못 살던 국민과 미래 희망이 좌절된 학생들이 앞장 섰지만, 그 뒤에는 권력에서 소외된 정치인과 대학교수 등 기득권이 서양의 부르주아를 대신하고 있었다. 4.19 이후 혁명의 과실을 취한 계층도 주로 이들 정치인 등 기득권이었다. 당시 국민은 정권을 바꾸고도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는 혼란 속에서 나아지지 않는 삶의 질에.... 고귀한 피를 흘리고도 그대로인 가난과 굶주림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날이면 날마다 데모였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7.29 총선이 열렸을 때, 온건보수를 표방한 민주당이 압승하고 혁신계는 완패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했다. 국민은 지나친 혼란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이러한 민의를 배신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민주당이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틈새를 공략하는 극단적 좌파의 공격과 수구보수 세력의 반격 사이를 갈팡질팡함으로써 마침내는 양쪽의 협공을 받는 상황을 연출하였고 안정을 선택한 국민은 다시 혼돈에 빠진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 윤보선과의 권력 알력과 신/구파로 나뉘어진 내부 권력투쟁은 정부가 당의 당무에 끌려 다니는 희한한 광경을 연출했다. 당시 민주당 집권세력에게 (자신들의 힘이 아닌, 국민이 힘으로 쟁취하여 넘겨 준) 권력은 공짜로 주어진 빵이었고, 노력 없이 얻은 로또 당첨이었다. 공짜에 취한 그들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날이면 날마다 더 큰 공짜 권력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그들의 일과였다. 유능해서 선택된 정권이 아닌 만큼 그들은 무능했다. 고삐가 풀려 이승만 때보다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는 부정과 부패는 그들에게 훌륭한 자금원이 되었다.    

 

국민이 피를 흘리며 쟁취한 장면 정부.... 그들은 보수였을까, 진보였을까? 경제적으로 이병철 등 일부의 꿈틀거림이 있었지만 '새 발의 피' 정도였고, 해 놓은 일이 너무 없어서 이 모두 정확한 평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혹평하자면 보수도 진보도 아닌 무능한 혼돈의 정부였던 셈이다. 집권 기간이 짧았다는 변명도 가능하겠지만, 정쟁 외에는 기록될만한 역사도 없었던 기간이다.

 

진보좌파나 친북/종북주의자 또는 민중사관론자들은 민주적이라는 점에서 장면張勉정부에 큰 비중을 둔다. 그러나 <두터운 중산층>이 없는 민주화가 무정부 상태로 갈 위험이 상존했다는 것과 이미 그러했다는 점, 그리고 (위에서 지적한 대로) 장면 정부가 거저 주어진 공짜 권력에 취해 방향조차 상실했던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민중사관론자들은 말한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정부 시절에 이미 기획되어 있었다고. 그러므로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장면정부의 공이거나, 기껏 잘해봐야 장면정부의 아이디어를 복제한 것일 뿐이라고. 그러나 이는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 계획도 대폭 수정되어 원안과 다르지만, 우선 이런 국가적 중대사를 집행할 의지도 추진력도 장면정부에는 없었다.

 

이 거대한 국가 개조사업에 꼭 필요한 것을 몇 가지만 추려 보자. 첫째로 돈 없으면 계획만 거창하게 세우다 말 것이고, 둘째 지도자의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유부단한 장면정부에 그런 것은 애초 보이지도 않았고 (오죽하면 미국 CIA의 평가까지 장면張勉의 우유부단함을 질책했겠는가. (3)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총화 단결해야 하는데 장면정부 시절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었고 (4) 국민의 자발적 노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어야 하는데 장면정부에게는 그런 아이디어조차 없었고 (5)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장면정부에는 그럴 인물도 시스템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민중사관론자들의 주장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 지적은 필자가 진보좌파나 민중사관론자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귀 담아 들어두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진보좌파도 친북/종북을 벗어나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하지.

 

필자의 이런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장면張勉정부는 다른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역설적이지만) 장면張勉정부 시대는 민족 부흥과 국가적 세대교체, 계급교체의 인터체인지였던 것이다. 일종의 과도기였던 셈이지만 수면 아래 또는 수면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구시대의 모든 기득권이 (이승만 시대와 장면 시대를 거치면서) 모조리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5.16,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이 소제목에서는 민중사관론자들에게 심히 불편하게 들릴 진실을 이야기한다. (요즘의 현대 보수는 다르지만) 보수는 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비판하면서 진보는 새로운 논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것에 목 말라한다고 주장한다. 귀하가 만약 진보주의자라면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아래는 일전에 필자가 5.16, 50주년을 맞아 쓴 글이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인지세를 폐지하라." - 반란을 두려워 한 본국 정부는 기존의 세제정책을 일부 폐기하는 등,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지만 한 번 시작한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정부군을 물리치고 무력으로 정권을 쟁취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나라를 세웠다. 국민의 지지 없이 정통성 있는 정부를 뒤집고 정권을 쟁취하는 행위를 쿠데타라고 한다. 군대를 동원하면 군부 쿠데타라고 한다. 그렇다면 위의 경우는 누가 보아도 군부 쿠데타라고 할 것이다. 그럴까?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미국의 독립혁명은 진짜 저렇게 시작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정통성 있는 조국, 영국을 버리고 독립했다. 그것도 군대를 동원하여.군대를 동원했다고 모두 쿠데타라면 미국은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다.

 

당시 영국은 그들을 반역자 또는 반란자라 불렀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대對영국 반란을 지지한 미국인이 얼마나 되었을까. 과반에도 못 미치는 <3분의 1>이었다. 3분의 1은 무관심, 나머지 3분의 1은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며 끝까지 영국을 지지했다. 과반수 지지도 받지 못했으니 분명한 쿠데타다. 끝까지 영국의 신민臣民이고자 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영국 본토, 캐나다 또는 서인도제도로 달아났다. (아직도 캐나다의 상징적 국가원수는 영국 여왕이다. 영국 여왕은 20달러 짜리 캐나다 지폐에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 승자들에게 재분배되었다. 분명한 쿠데타군의 약탈이다.

 

당시 반란군(혁명군) 사령관은 죠지 워싱턴이었다. 그는 혁명에 성공하자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혁명 동지였던 조지 애덤스는 그 다음 대통령이 되고, 토마스 제퍼슨은 3대, 제임스 메디슨은 4대.... 이 혁명동지들은 사람을 바꾸어가면서 무려 28년간이나 미국을 통치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굶주린 국민이 나서서 빵을 달라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그럼 과자를 먹이세요.'Qu' ils mangent de la brioche!'" 였다. 분노한 군중은 정부군을 궤멸시키고 그들만의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혁명이다.

그렇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을 단 두 줄로 비약시켜 놓은 것이다.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국민의 지지다. 국민의 지지가 없다면 군대를 동원하건, 군중 데모로 뒤집어 엎어버리건 이것은 쿠데타다. 반면 국민의 지지가 있다면, 또는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혁명이다. 이 기준으로 보자. 5.16은 국민의 지지를 받은 혁명이었나, 국민의 지지와는 무관한 군사 쿠데타였나.

 

5월 17일.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미 합참의장 렘니처 대장에게 긴급 전문을 보냈다. <배후세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세력은 증강되고 있는 것 같다. 미군 CIC가 조사한 바 10명 중 4명 꼴로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하며, 나머지 4명은 반대하고 있다.> - 이는 거사 다음 날 즉시 보고한 내용이다.

 

5월 17일. 군사정권이 자리도 제대로 잡기 전이다. 대국민 홍보 같은 것은 할 시간도 없었고 그런 홍보가 먹혀 들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 국민은 무언가 혁명적인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60%의 지지율.... 미국 독립혁명 당시 국민 지지율의 딱 두 배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혁명이다. 이것이 세계 최초로 현대민주주의를 창조한 나라, 미국이 가장 빠르게 한국의 군사정권을 추인한 까닭이다.

 

역사는 냉정하다. 혁명 당시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가, 나중에라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원성만 듣게 된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다. 그가 가고 난 지금,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지지율은 80%에 가깝다. 그렇다면 지금도 5.16은 쿠데타가 아니라 진정한 혁명이다. 그 때도 국민과 함께 한 혁명이었고, 지금도 국민이 기억하는 한 혁명이다. 그것도 찬란하게 성공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혁명이다.

 

당시의 상황을 모르는 20대, 30대 젊은 세대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그저.... (최고로 긍적적으로 반은한다 하여도) 비록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기적을 이루었으니 됐습니다....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진실에 눈 감고, 바른 소리에 귀 막는다면 이는 올바른 젊음의 태도가 아니다. 아무리 미워도 말馬을 가리켜 사슴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뭐래도 사슴은 사슴이다.

 

이제 지나친 비약은 하지 않겠다. 지금부터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솔직히 이야기하자. 이 시대 '젊음'에게 묻노니, 솔직히 말하자. 당시 실업률이 30%대 였다면 믿겠는가. 올해(2011년) 3월의 실업률이 4.3%라고 하니 비교해 보라. 4.3%만 해도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30%대의 실업률이라면 상상이 가겠는가? 그것도 전 국민의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나라에서.... 굶어 죽는 농민도 직업이라고 그건 빼고도 30%대의 실업률.

 

당시 최고의 직업이라는 공무원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아는가? 펜대를 굴리면서 하루 고작 서너장의 문서를 만들고, 그 알량한 문서 하나 만들어주면서 뒷돈은 얼마나 챙겼는지 아는가. 높은 사람들은 제 먹을 것 다 챙기면서 보릿고개만 되면 길 가에 굶어 죽은 아이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건 아는가. 관공서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이라는 국정지표를 써붙인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아는가.

 

당시 국회의원들은 돈 보따리를 풀면서 시골에서 상경한 선거운동원들에게 몇 푼 집어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일과였다.

유권자들은 고무신 한 컬레에 표를 팔았는데, 그 고무신조차 보리 한 줌으로 바꿔 먹어야 했다는 것은 아는가.

 

그래도 미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우리가 불쌍하다고 약간의 돈과 밀가루를 원조해 주었다. 그것조차 다 누구의 뱃속으로 들어갔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문제는 너도나도 다 해쳐먹으니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그대 같으면 분노하지 않겠는가. 썩을 대로 다 썩은 나라를 보고도 그대 젊음이 침묵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당연히 날이면 날마다 데모였다.

 

대학생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수의 실업자들도 달리 갈 데도 없으니.... 당시 거리에는 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까지 외쳤다는데, 이에 동조한 말 못할 이유 중의 하나가 '북한이 우리 남한보다 더 잘 살았기 때문'이라는 어느 이름없는 늙은세대의 증언은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 판에도 당시 집권 민주당은 신파, 구파로 나뉘어 날만 새면 정쟁이었다. 미래 비전은 고사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정권을 잡느냐... 그것이 당시 정치가들이었다. 부정, 부패는 그들의 자금줄이었고....

 

만약 5.16이 쿠데타였다면 4.19혁명을 일으킨 우리 국민이 이에 침묵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어떤 국민적 저항도 비판도 없었다. 오히려 지지를 보냈다. 총칼이 두려워서? 천만에.... 불과 1년 전에 총칼에 맞서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국민이 바로 우리 국민인데 그건 말이 안 된다.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가난과 무능과 부정, 부패가 정말 지긋지긋해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래도 오히려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무능과 부정, 부패를 일소해 줄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들만 그랬을까? 혁명 소식을 들은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첫 마디가 "올 것이 왔다. 군사혁명은 불가피한 것이다." 였다.

 

그 증언을 그대로 옮긴다. .... 윤보선 대통령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올 것이 왔다. 군사혁명은 불가피한 것이다. 사태를 잘 수습해 달라. 장면 총리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계엄령도 내가 먼저 승인해 주지" 라고 말했다고 혁명 당시 현석호 국방장관이 1961년 11월 7일 장도영 등에 대한 반혁명사건 6회 공판에서 증언했다. 현석호 국방장관은 장도영을 위한 증인이었다.(1961.11.07 경향신문)

 

혁명 주체세력들도 이 가난과 무능과 부정, 부패가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30대 40대의 젊은 혁명 주체세력.... 이들은 대부분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다.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가난만은 물리치고 싶었다.

 

그들이 밀어 낸 구정치인들이 바로 양반 가문에 50대 60대의 지주였고, 배 부른 일제 관료 출신들이었다. 조선조의 게으른 오백년 지배체제가 5.16에 의해서 비로소 끝났다. 이것은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계급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식한 워커였냐고? 1950년대에 외국 유학을 경험했던 장교들이 약 1만명, 공무원과 학자 등 이 기간에 외국 유학을 경험한 사람은 5천명.... 당시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집단이었다. 당시 관공서에서 펜으로 한 자, 한자 필사할 때, 그들은 타자기가 무엇인지 보고, 경험했고, 터득한 사람들이었다. 미군의 도움으로 유학을 했지만, 당시 세계 최강의 선진국이 미국이었으니까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은 너무 많았고, 고국에 돌아와 부딪히는 현실은 비참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깜짝 놀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도로가 왜 이리 넓으냐는 것이다. 왕복 8차선, 10차선, 12차선.... 2차선 도로를 가지고 차츰 늘린 것이 아니다. 차츰 늘리자면 땅 값이 올라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했다. 그들이 경험한 넗은 미국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들은 유능했다.

 

국민 모두가 혁명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것들을 물리쳤다. 누구도 하지 못 할 일들을 해냈다. 오천년 굶주림을 극복했다. 세계가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기적이 있었다. 찬란한 기적이 혁명처럼 일어났다. 미국은 워싱턴의 혁명으로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고, 한국은 박정희의 혁명으로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자신과 가족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공적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말을 지어 스위스를 다 뒤져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사후에 남은 텅 빈 청와대 금고....

 

전두환 무리의 쿠데타와 혼돈하지 말라. 나도 그들은 밉다. 그들은 조국을 위한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을 위한 쿠데타를 한 것이므로.

 

<칼의 노래> 작가 김훈의 말을 들어보자. “5천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한국일보 2004.12.29)

 

.............

 

귀하가 보수적 심성을 지녔다면 위 논리를 듣고 '맞어, 맞어. 나하고 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군.'하면서 무릎을 칠 것이고, 귀하가 진보주의자라 자처하는 분이라면 '저런 억지가 어디 있어. 경제 발전을 구실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한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 하자는 거잖아.'하면서 심한 거부반응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경직되게 규정되고 있는 현장이다. (원래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가장 큰 잣대는 경제다.) 설사 귀하가 평소에 중도적 성향이라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좌든 우든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분단국가의 비극이 보인다. 그러나 진보주의자에게 고하노니, 어쩌랴. 80%에 가까운 이 나라 국민들이 바로 무릎을 치는 쪽에 선다는 팩트 그 자체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박정희는 보수주의자인가.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시리즈로 연재 됩니다.>

 

 

 

2011.05.22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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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유연희 | 작성시간 14.07.03 수고 대단하십니다..
  • 작성자유연희 | 작성시간 14.07.03 수고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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