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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제안 시리즈

[학습제안] (27)- <04> 광복군 비밀요원, 박정희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11.05.26|조회수7,913 목록 댓글 98

[학습제안] (27)- <04> 광복군 비밀요원, 박정희

 

 

제 2 장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냐

 

4. 박정희는 보수주의자인가.

 

(1) 광복군 비밀요원, 박정희

 

박정희는 왜 만주군 장교를 지원했나.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가 아니었다. 만주군 장교였다. 박정희가 왜 일본군을 선택하지 않고 만주군을 선택했을까? 기왕 만주에서 근무하려면 정식 일본 관동군이 훨씬 더 끗발이 세었을텐데. 공부를 못해서? No! 박정희는 소학교 때부터 줄곧 1등만 했고, 만주군관학교는 물론 일본 육사도 '최우수'로 졸업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최우수 졸업생이라면 말 한 마디면 (지원서 한 줄이면) 일본 관동군 장교 정도야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아예 일본 관동군이 아닌 만주군을 지원했다. 물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세운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더더욱 (기왕 일본에 충성할 거라면) 승승장구.... 출세가 보장된 일본 관동군 장교를 택하지, 하필이면 상대적으로 끗발 떨어지는 괴뢰국인 만주군 장교가 되었을까? 친북/종북 좌파나 안티 박정희 세력들은 이 부분에 자신있게 답변해야 한다. 이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박정희를 친일파로 모는 자들은 논리적으로 자승자박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박정희가 썼다는) 지원서 서신에도 일본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은 없다. 다만 만주국의 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 뿐이다. 박정희가 썼다는 "一死以テ御奉公"도 만주국을 지칭하는 것이지 일본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뜻이 아님은 민족문제연구소도 알고 있을 것이다. 박정희가 보냈다는 서신을 보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설사 박정희의 서신이 100% 진짜라고 하더라도 박정희가 목숨을 다해 충성을 맹세한 주체는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였다. 앞에 '일본인으로서'를 넣고서도 왜 박정희는 '천황폐하를 위해', '황국 일본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을까? 일제 치하에서는 입만 열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였는데. 학교에서도, 관공서에서도, 군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입에 달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박정희는 왜 '천황폐하를 위해', '황국 일본을 위해', '대일본제국(다이닛폰테이코쿠)을 위해' 대신에 그들이 잘 쓰지도 않는 '조국을 위해'를 넣었을까.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이 조국이 일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나 일본국민은 일본을 '황국', '대일본제국(다이닛폰테이코쿠)', '본토' 또는 '내지內地'라 불렀다. 그리고 그 국민은 황국신민이라 불렀다. 당시 일본군이 일본을 조국이라 부르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오히려 조국이라는 단어는 독립군들이 즐겨 쓰던 말이었다. 나라를 빼앗겨 나라의 이름조차 없으니 조국이라는 단어가 더 유용하게 통용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조국은 일본이 아니라 당시 일본에 강제병합된 우리나라였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조국'이라는 단어는 누군가에 의해 최근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정희가 일본 관동군 장교로 지원하지 않고 만주군을 선택한 것은 그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일본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형식적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충성을 서약함으로써 당시 세계의 강국이었던 일본의 선진문물을 습득하고 (당시 군국주의였던 일본사회의 최고 엘리트는 당연히 '일본군부'였다.) 조국의 광복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만주일보의 기사가 가짜일 가능성

만주일보의 기사가 진짜인 증거는 찾기 어렵다. 우선 박정희가 혈서를 제출했다는 부서는 1938년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  부서도 군관학교 입학 담당과는 거리가 먼 부서였으며, 혈서를 보냈다는 기간도 이상하다. 신문기사에 써있는, 혈서를 보냈다는 때는 이미 군관학교 합격자 발표가 나온 이후였다.

 

그리고 당시는 관제 언론에 의해 이런 조작된 미담(?) 만들기가 성행하던 시대였고, 여운형의 학병권유문 등도 나중에 일본의 조작이었음이 드러 났다. 결정적으로 혈서 원본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단지 박정희의 증명사진만 있을 뿐이다. 적어도 기자라면 증명사진보다 혈서를 직접 찍은 사진이 더 기사 가치가 높다는 것 쯤은 알 것이다. 한 마디로 믿을 수도 없는 (조작되었을지도 모르는) 복사본을 가지고 박정희를 매도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보기도 힘들다.

 

조작된 혈서血書...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일보 기사를 공개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수년간 친북/종북 좌파나 민중사관론자들이 주장해 온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는 조작이었음이 폭로되었다. 그들의 주장을 그들 스스로 뒤집어 엎은 자폭自爆인 셈이다. 그 기사에는 "一死以テ御奉公"라는 일곱 글자가 있었는데, 번역하자면 '한 번의 죽음으로써 충성함...' 정도일 것. 그동안 주장해 온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 조작임이 밝혀졌는데, 이 일곱 글자는 조작이 아닐까?

 

골수 좌파 지식인의 증언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송남헌>이라는 사람을 두들겨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송남헌[宋南憲, 1914.4.11~2001.2.20]  한국의 독립운동가, 현대사 연구가. (중략) 광복 후 군사정부에 의해 좌익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는 통일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힘을 기울이며 현대사 연구가로 여생을 보냈다.> 이 정도면 극우보수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좌빨' 아니면 거의 '빨갱이' 수준이다.

 

특히 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2년 간의 옥살이를 하였으니 그가 어떤 입장인지 알만하다. 그런 그가 <해방 3년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26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해 옮긴다. 이 글에는 <만주군 박정희 중위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되는 과정>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송남헌은 친북좌파가 말하는 이른바 <수구꼴통>이 아니라 오히려 '박정희 죽이기'에 앞장 서는 강만길이 추앙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사람이 쓴 글이니까 좌파든, 우파든... 특히 좌파나 민중사관론자들은 이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을 쓴 때가 1994년 10월 15일이니, 박정희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박정희는 만주군 내의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위에서 다섯번째, 아래에서 세번째 줄 주목. 이 씨는 다음 날 (2월 10일) 저녁 부대간부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자기 신변을 밝힌 뒤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중위와 신대위에게 주었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아래에서 네번째 줄 주목 : 이 국내 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으며....)

 

기왕 시작했으니, 아래도 한 번 읽어보자.

 

백범 김구 선생의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백범의 증언과 이기청 씨의 증언을 비교해 보자.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출처 : http://bookstore21.net/korean/815/park-oss.htm)

 

 

애국자愛國者

(인용) 우리 민족이 해방된지 1년 하고도 두어달 지난 1946년 가을이었다. 아직 대한민국 건국 이전이지만 국토 경비를 위해 미 군정청이 창설한 태능 육군사관학교(아직 4년제 육사가 시작되기 전의 단기과정)에서는 제 2기생 교육 중이었다. 사관학교장은 이치업 육군 대위였는데, 그는 명색이 국군의 간성을 교육하는 육사교장이면서도 자신은 물론 주변의 누구도 애국가를 알지 못해 답답한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생도들에 애국가 가사를 쓰라는 문제를 내고 시험을 치루었던 것이다. 생도 전원이 백지 답안을 제출하였는데 딱 한 명의 생도가 애국가 4절 가사를 정확하게 써냈다. 그가 바로 박정희 생도였다.

이치업 교장이 박정희 생도를 불러 애국가를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박정희는 대구사범 졸업 후 교편을 잡는 동안 학생들에게 몰래 애국가를 가르쳤다고 대답했다. 가사는 현재와 같으나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별의 노래)'을 차용해 불렀을 때였다. 안익태 곡의 애국가는 그 뒤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육사에서 비로소 애국가가 불려지게 됐다. (이치업.스티븐 엠.딸프 공저 '번개장군' : 2001 원민)

이치업 당시 교장의 이 증언은 문경의 그의 제자들의 증언으로 확증된다. 이영태(李永泰)는 스승 박정희가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고 증언한다. 그는 이낙선(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 (조갑제의 ‘박정희’ 79쪽).

 

 

시대의 슬픔, 창씨개명

한 때, 민중사관론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카키 마사오'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것을 가지고 혹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보수우파에서 김대중 전대통령 역시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했고, 중.고교 교육 모두를 일제교육청 소속 학교에서 받았으며, 졸업 후 왜인이 경영하는 목포 해운회사에 들어가 사주를 구워삶아 징용. 입대 모두 피할 수 있었고,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아 해방을 맞은 1945년 그는 21살의 나이에 이미 해운업계에 널리 알려진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했다는.....등의 경력으로 반격하자 창씨개명으로 인한 그들의 공격은 일거에 사라졌다. 공격만큼 빠른 놀라운 속도의 후퇴였다.

 

필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창씨개명이나 왜인회사 입사 및 성공과정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창씨개명의 슬픈 식민지 역사를 부풀려 스스로 자학하는 것이 우리 시대든 우리 후대를 위해서든 무슨 (역사 해석상) 이익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은 민중사관론자든 국민사학론자든 냉철한 실증사관으로 짚어보고 국가존립과 부국강병의 소중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더욱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왜 조지 워싱턴을 국부로 만들었나.

아무리 둘러 치고 매 쳐도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 박정희는 제자들에게 우리나라 태극기와 역사와 한글을 가리쳤고, 만주군 장교로써 비밀리에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임명장을 받고 광복군 비밀요원이 되었으며, 독립군의 국내진공에 관한 비밀거사에 참여했고 광복군 제 3지대의 일원으로 귀국했다. 이런 그가 어째서 친일파로 분류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민중사관론자에게 묻는다. 위의 역사적 사실史實을 보고도 아직도 박정희가 친일파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렇게도 절실하게 친일파로 만들고 싶은가. 미국인들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라 한다. 그런 워싱턴의 사생활을 한 번 볼까? '셀리'라는 정부를 둔 것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무려 10 명의 사생아를 두었고,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샐리 허밍스'라는 14세 흑인 노예와 불륜을 저질러 6명의 혼외 자식을 두었으니 알만하지.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 뿐이겠어? 

 

미국인들은 고민했지. 그리고 합의했어. 덮어 두기로. 그런 분들까지 매도하면 미국의 독립은 뭐가 되냐고.... 그래서 사회적 합의를 이룬거야. 세계를 주무르는 미국도 그러는데, 이 작은 나라에서 무엇을 더 까발리고, 거짓증언하고, 음해하고, 모독하고 싶은가. 그래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더

역사를 다루는 자에게 조국이 없으면 역사를 공부 할 이유가 없다. 민중사관론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인물이 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식 민주주의를 중우정치(衆愚政治 : 어리석은 군중에 의한 정치)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조국 그리스를 위하여 민주주의는 당장 때려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대신 그는 철인(哲人:깨우친 철학자)에 의한 정치를 주창했다.

 

"철학자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왕이 되지 않는 한, 또 반대로 왕 또는 지배자로 불리는 이들이 실제로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한,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한.... 국가나 인류에 있어서 나쁜 것들이 종식될 날이 없을 것이다." ....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음.)

 

소크라테스가 죽자, 제자 플라톤에 의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집대성, 전수된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불세출의 영웅이 교육되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알렉산더는 불세출의 영웅이고 위대한 왕이었지만, 그는 진정으로 소크라테스가 말한 철인哲人이 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꿈이 알렉산더를 통하여 완성된 것이다.

 

민중사관론자들에게 묻는다. 이러면 어떨까?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말한 <정치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진 지도자>로써 박정희가 철학이 있었는지, 그렇다면 그 철학은 무엇이었는지, 실제로 지혜를 사랑했는지, 조국을 사랑했는지,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의 지도자였는지.... 그런 것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이 더 이성적이지 않을까.

 

 

본 시리즈는 연재됩니다.

<다음 편에 계속>

 

2011.05.26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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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유연희 | 작성시간 14.07.03 수고 대단하십니다..
  • 작성자sindyman | 작성시간 15.01.01 눈물이 핑 도네요.정말로.눈을 부릎뜨고 속독으로....
  • 작성자차옥수 | 작성시간 15.05.04 업적대단하시죠
  • 작성자투덜이k | 작성시간 16.04.19 잘 읽었습니다. 좋은 지식 감사합니다.
  • 작성자재용김 | 작성시간 16.11.29 박정희 대통령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좌빨들은 단지 일본군 장교였다고 매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울뿐 입니다. 청소년기에 보았던 느꼈던 박정희 대통령님의 모습이 새롭게 떠오르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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