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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 양양가(襄陽歌)

작성자正道|작성시간17.05.21|조회수101 목록 댓글 1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 양양가(襄陽歌)



2011년 1월 1일 아침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파월 참전 기념비 앞에서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이 노래 귀절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괴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초토화 될 때 밀리고 밀리던 우리국군이 낙동강 최후 저지선 전투를 극복하고 다시 반격하며 북진할 때 부른 씩씩하고도 장렬했던 조국수호의 군가의 한 구절이다.



놀라운 것은 이 군가의 원래 가사명은 양양가(襄陽歌)라고 하는데 가사의 제목 유래를 찾아보니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조선시대 12가사중 하나에서 연유했다는 사실이다.  또 청구영언의 이 가사의 제목 양양가(襄陽歌)는 중국 당대(唐代)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에 연유한다 하니 더욱 놀랄 뿐이다. 그러나 가사 전문과 붙여진 곡과 불리어진 시대는 청구영언에 실은 이백의 시 와는 아주 다르다. 우리 국군이 부른 군가 양양가의 신식 군가는 구한말(舊韓末) 초기부터 불리워졌다고 한다.



이백의 양양가는 다음과 같다.



지는 해 현산 서쪽으로 지려는데

흰 건을 거꾸로 쓰고 꽃 아래 서성거린다

양양의 아이들 좋아라 손뼉치고

거리를 누비며 앞다투어 백동제를 노래한다

옆 사람이 묻기를 무슨일로 웃는가 하니

산에 사는 노인이 곤죽으로 취하여 웃어 죽겠다네

노자 구기  

앵무 술잔

백 년 삼만 육천 일을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마시겠노라

멀리 바라보니 한수는 오리 머리처럼 푸르러

흡사 포도주가 처음 괼 때 같구나

이 강물이 변하여 모두 봄술이 된다면

쌓아올린 누룩 더미에 조구대를 지으리라

천금짜리 준마를 소첩과 바꾸어서

비단 안장에 웃고 앉아 낙매곡을 부르리라

수레 옆에 한병 술을 매달아 놓고

봉피리 용젓대로 길 가며 서로 권하리라

함양 거리 위에서 누런 개를 탄식한다면

어떻게 달 아래 금술잔을 기울이리오

그대는 보지 못헸는가, 진나라 양공의 한 조각 돌을

거북머리 벗겨지고 이끼 끼어

눈물로 또한 떨어뜨릴 수도 없고

마음 또한 슬퍼할 수가 없구나

청풍명월은 한 푼도 돈 들여 살 필요 없고

옥산은 사람이 밀어버리지 않아도 절로 거꾸러진다네

서주 구기    

역사 노구솥

이백이 너와 함께 생사를 같이하리라

양왕의 운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원숭이 밤 울음소리 들려오네



落日欲沒峴山西(락일욕몰현산서)    倒著接䍦花下迷(도저접리화하미)

襄陽小兒齊拍手(양양소아제박수)    攔街爭唱白銅鞮(란가쟁창백동제)

旁人借問笑何事(방인차문소하사)    笑殺山翁醉似泥(소살산옹취사니)

鸕鶿杓(로자표)    鸚鵡杯(앵무배)

百年三萬六千日(백년삼만륙천일)    一日須傾三百杯(일일수경삼백배)

遙看漢水鴨頭綠(요간한수압두록)    恰似葡萄初醱醱(흡사포도초발발)

此江若變作春酒(차강약변작춘주)    壘麴便筑糟丘臺(루국편축조구대)

千金駿馬換小妾(천금준마환소첩)    笑坐雕鞍歌落梅(소좌조안가락매)

車旁側挂一壺酒(차방측괘일호주)    鳳笙龍管行相催(봉생룡관행상최)

咸陽市中嘆黃犬(함양시중탄황견)    何如月下傾金罍(하여월하경금뢰)

君不見晉朝羊公一片石(군불견진조양공일편석)龜頭剝落生莓苔(구두박락생매태)

淚亦不能為之墮(루역불능위지타)    心亦不能為之哀(심역불능위지애)

清風朗月不用一錢買(청풍랑월불용일전매) 玉山自倒非人推(옥산자도비인추)

舒州杓(서주표)      力士鐺(력사당)

李白與爾同死生(리백여이동사생)    襄王雲雨今安在(양왕운우금안재)

江水東流猿夜聲(강수동류원야성)





그러나 조선조 말기 구한말(舊韓末)즉 우리민족의 치욕의 한일합방 그 이전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불리어진 현대식 군가 양양가는 아래와 같다.



인생(人生)의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


조국(朝國)의 앞날은 양양(襄陽)하도다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나는 이 양양가를 1950년 10월 이후 10살때 부터 나의 고향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복골 에서 들었다. 우연의 일치 이지만 노래 제목이 나의 고향 지명과 똑 같았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1951년 11월 이후 당시 우리국군은 중공군의 북괴지원 참전으로 북진기세가 주춤해져 후퇴일로 에 있다가 중부전선 전역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을 때이다.  나는 이때 우연하게도 우리마을 사람들과 함께 총알이 빗발치듯하는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살았다. 국군이 진격하면 간단한 보따리 싸 들고 속초 간성지역으로 도망치듯 피난을 갔고 인민군과 중공군이 쳐 내려오면 우리마을 사람들은 허둥지둥 강릉쪽으로 정신없이 도망을 갔던 시기이다.



전투는 이곳저곳에서 치열했고 들판은 죽은 사람들의 안타깝고도 처절한 모습으로 여기저기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어 슬프고도 놀랍기만 했다. 사람들은 통곡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내일이 어떻게도 되는지도 모르고 종잡을 수 없는 처신들을 하였다. 쫒기는 가운데서도 얼굴 낮선사람 만나면 서로가 경계를 했고 다친사람 만나면 어디서 왔느냐고 따지지도 않고 서로들 부축여 주면서 아픈상처를 싸매주고 위로를 했다. 그리고는 떠나갔다.



나는 우리국군의 진정한 호국 정신을 이때에 만났다. 전투가 치열한 뒷산 소금재 고개너머 넘은 들쪽으로 우리국군 아저씨들이 중무장을 하고 전투에 투입될 때 나는 이때 아저씨들이 씩씩하게 부르는 양양가를 들었다. 전투에서 이길지도 질지도 모르는 일촉측발의 현장에서 나의 형(兄) 같은 젊은 아저씨들은 동생같은 어린 나의 빠빡갂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치지 말라고 하면서 어서 어른들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대오를 따라 군가를 부르면서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바로 목숨이 왔다 갔다 생사의 첨단의 순간에 우리 국군들이 이렇게 씩씩한 군가를 부르며 우리나라 대한민국 지키려고 적군을 물리치려 고지로 치달았던 것이다. 우리는 강릉쪽으로 피난을 갔고 우리가 사는 마을이 수복되어 이젠 안심된다 하여 다시 8월말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대 왕고모 할머니댁이 살던 과수원께 관덕정은 훈련사령부가 들어섰고 강현의 전역과 이후 비행장으로 닦여진 장산리(짐미)와 정승골과 송암산께는 전부 전투 훈련장으로 바뀌었다. 제주도 훈련소에서 투입된 신병들이 밤낮없이 전투훈련을 받으면서 부르는 군가는 어저께 부르던 아저씨들의 군가와 씩씩하게도 조금도 틀리지 않게 똑 같았지만 군가 부르는 오늘의 아저씨들의 얼굴의 면면은 어제와 달랐다. 그때의 소금재 고지를 넘던 아저씨들은 전투장에서 어떻게 된 것일가....! 아마도 승전으로 무사했을 터이지만 내가 25년이 지난뒤 우리국군의 현충원 동작동에 학생들 인솔하고 참배하러 갔을 때 그때의 아저씨들의 씩씩한 얼굴과 우렁찬 군가가 목이 미어지게 콧날이 시큰해지며 지금까지 떠오르는 슬픔은 어이한 것인지....



나는 작년 12월 20일 몇년전 부터 알고 지내던 월남에 참전했던 어제의 용사들의 뜻 깊은 제안을 받았다. 2010년 12월 31일과 2011년 1월 1일 아침을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월남참전기념관" 오른쪽 옆에 세워진 "월남참전장병전사비(월남참전장병순국사비)" 제단 앞에서 위령을 위한 진혼제 계획을 알리며 참석해 주기를 기대하는 제안이었다. 오음리에서 춘천은 아주 가까워 12월 31일 오후 3시 09분 미리 도착한 나는 참전 기념관 앞에서 마침 이틀전 부터의 혹한속에 함박눈이 내려 온천지가 오봉산과 배후령과 용화산으로 하얗게 둘러싸여 마치 설국의 형상을 바라보며 드디어 저 아래로 부터 천천히, 4시 50분경 여러 대의 차량으로 탑승해 기념관으로 줄을 지어 서서히 올라오는 어제의 세계평화 참전대열의 자랑스런 우리국군 파월장병의 씩씩한 기상을 보았다. 위기에 놓인 산간벽지를 구출하려 작전개시 중인 1951년 우리국군의 한겨울 이동의 모습 같았다. 강원도와 충청남북도 서울과 경기도 일원 그리고 멀리 강화도에서까지 마음속으로 완전무장한 애국지사들의 모습이었다.



월남참전 전우들의 반가운 대화는 밤을 새고 이어졌다. 서로 서로가 처음보는 얼굴도 있었지만 나라사랑과 공산만행을 분노하여 응징하는 이상이 한결같이 같기에 죽마지고우를 끌어 안으며 만나는 다정한 애국의 대화는 최전방의 혹한의 추위에도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대한민국 건국이래로 아니 우리민족 5000년 역사속에서 최초로 우리가 세계평화 유지군으로 자랑스럽게 참전한 사실과 못 된 김일성의 6.25 기습남침 이후 3년동안 천만이 넘는 이산가족과 500만명 이상의 아까운 목숨이 희생된 처참함, 그리고 황폐화된 내 조국을 다시 살려 부국의 경제대열에 동참하며 목숨을 내 걸고 애국했던 참전용사들의 그때의 자랑스러움 이야기꽃은 높다란 기상의 사방의 설경으로 둘러싸인 파월의 성지 간동면을 뛰어 넘어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펼쳐지는 듯 했다.



미리 준비한 파월장병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과 파월장병 모임의 이중형 회장님의 조화를 기념비 앞에 세우고 기념관에서 제공한 향로, 그리고 참전용사들이 정성스레 준비해온 주과 포등으로 위령제를 지냈다. 참전용사들이 초헌, 아헌 종헌의 잔 올리는 예도 추모정신이 담북 들여저 더욱 정성스러웠고 예절 진행의 대목마다 순간순간 일제히 드리는 참전용사들의 우렁찬 "충성"의 함성속 거수경례는 혹한의 영하 30도 추위속에서도 오음리 벌판과 설경의 산허리를 꿰뚫으며 일출의 하늘위로 날카롭게 떠올랐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위해 저 멀고도 먼 이국의 땅 월남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5000명의 애국의 넋에 진혼문을 손수지어 낭독하는 파월장병 전상열(전산우) 시인의 정성스런 목소리는 조용히 그리고 애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아남아 돌아와 지금까지 목숨 이어옴이 부끄럽다고 통곡을 하였다. 마음속으로 같이 하는 모든 참배자들의 눈시울도 모두 눈물로 이어져 여기저기에서 나라사랑의 애절함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도 느꼈다. 그리고 살아남은 파원장병들은 국민모두가 적국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려 합심하는 대열에 동참하며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들과 좌파들로부터 공격으로부터 한치의 양보도 없이 게으름도 없이 굳게 지키자고 영령들 앞에서 굳게굳게 맹세를 하였다.      



초혼제 마친 뒤 일행은 "평화의 댐" 으로 이동했다. 북쪽의 금강산 댐 즉 "임남댐" 으로부터 수공시 대비하기 위한 웅장한 댐의 기상은 조국 수호정신을 이어받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우리국군의 국난을 헤쳐나가는 기상과도 같았고 엄청나게 덮힌 눈속에 날아오르는 철새들의 평화의 비상은 영원한 대한민국의 평화를 염원하는 춤사위 같았다.



어제 나는 나라사랑의 기상을 어제의 용사들 월남 전우속에서 다시 확인했고 돌아오는 곳곳에서 주둔하여 한치의 경계심도 풀지 않고 혹한의 한겨울 속에서도 굴치 않고 우리조국 대한민국을 지키는 장병들의 씩씩한 모습을 보았다. 1950년 6.25 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르같이 죽겠노라" 했던 우리국군의 애국 국토방위 정신이 분명하게 이어오는 전통의 모습을 다시 보고 확인하였다. 이 행사 모두를 주관한 "vietnamwar. co. kr/"  운영자 서현식 전우의 묵묵한 애국의 정성 다하는 아우름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기원하오니 하느님께서 저희들의 간절한 이 작은 기도를 살피시고 보우하사

대한민국을 우리가 괴롭힘 당하는 적으로부터 평화롭게 영원히 지켜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2011년 1월 1일.

오음리 월남파병 순국장병을 위한 진혼제에 참석한 춘천의 화곡 김찬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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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미상 | 작성시간 17.07.25 저는 개인적으로 양양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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