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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기념관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 남영동 대공분실을 「OO인권기념관」으로!

작성자민들레87|작성시간18.01.01|조회수1,13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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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


 

경찰개혁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촛불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에서 수사권 조정을 인권 친화적인 경찰로의 재편을 전제로 검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면서부터다. 경찰은 재빠르게 경찰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인권경찰로 거듭나기 위한 개혁방안 마련에 돌입했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사건에 대해 경찰의 책임을 묻는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까지 나오자 뒤늦게나마 사과하고, 진행되고 있는 민사소송에 대해서도 유족 측 청구를 모두 인정하고 승낙한다는 취지의 청구인낙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69일에는 민주인사나 학생에 대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자행한 곳으로 악명 높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비공식 방문하여 박종철 열사가 스러져간 509호실에서 추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이어 평일에만 개방되던 <박종철 기념전시실>(경찰청 인권센터 4)과 옛 조사실(5)을 토요일에도 개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찰의 개혁 행보(?)’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차갑다.

대한민국이 이래서는 안 된다. 2009년 결정 당시는 이명박 정권이었고, 이후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촛불혁명까지 있은 다음에는 무언가 달라도 한참 달라야 한다.



시민들이 셀프 경찰개혁을 믿지 못하는 이유

 

우리는 불과 7년 전인 2010년에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을 기억한다. 대한민국에서 야만적인 고문은 90년대 중반 이후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일반 형사 피의자에 대한 이른바 양천서고문사건이 폭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당시 경찰이 “21세기에 무슨 고문이냐며 국민을 속이려 한 일이 더 충격적이었다. 폐쇄회로 텔레비전 등을 통해 고문사실이 입증된 후에도 경찰의 거짓말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2명의 경찰관이 업무과욕으로 벌인 우발적 사건이었다고 했다. 마치 박종철고문치사사건에서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이 밝혀지자 ‘2명의 경관이 업무과욕으로 벌인 우발적 사건이었다고 한 당시 경찰의 모습을 23년 후에 그대로 재방송해주는 것 같았다. 결론은 양천서고문사건에서도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마찬가지로 5명의 경찰이 고문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경찰의 이런 태도는 중요한 사건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2009년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때는 당시 경찰 총수였던 김석기(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가 사과는커녕 엄정한 법집행이었다고 항변했고, 2015년의 백남기농민물대포사망사건에서도 경찰은 일관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은 지금까지 시민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정권의 요구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그런 경찰이 근본적인 반성도 없이 경찰개혁조치라고 이것 저것 내놓는다 할지라도, ‘새롭게 바뀐 정권의 요구에 또다시 눈을 맞추려는 게 아닌가하고 의심하는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어떻게 거둘 수 있겠는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에게 내놓는다는 의미

 

2005년 당시 경찰은 허준영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에게 내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어 대공분실 기능을 홍제동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라는 이름을 내걸고 인권경찰로 거듭 태어난 경찰상을 과시하는 그들만의 공간으로 전락시켰을 뿐이다.

그 결과 시민과의 충돌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 당연히 다른 박물관처럼 주말에도 열리는 줄 알고 찾았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시민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나마 평일에 방문한 시민 중 일부는 안내하는 경찰이 1987년 당시 경찰의 잘못을 옹호하는 식의 설명에 분노하여 즉석에서 항의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인권교육 차원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은 어떤 경찰은 <박종철 기념전시실> 앞에 있는 방명록에 당당히 경찰 인권이 최우선이다라고 써놓아 보는 이들의 얼굴을 찌뿌리게 하기도 했다. 용산지역 시민단체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매년 정례적으로 추진하고자 한 인권영화제는 딱 1년만 진행된 후 경찰의 거부로 끝내 중단되기도 했다. 심지어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하는 탐방 안내 활동에 불만을 품은 경찰이 이에 간섭하거나 방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누군들 좋아하겠는가. 경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해자인 경찰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운영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아픈 일은 이렇듯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과 한국현대사의 아픔 되새기게 해주는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으로 남영동 대공분실 만한 곳은 찾기 쉽지 않다. 독재정권 시기 고문의 현장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유일한 곳이고,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876월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이 있던 현장이다. 물고문이 벌어진 욕조 등이 있는 그 생생한 현장을 보면서 시민들은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하고 헌신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오로지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던 독재자에 분노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한국 현대사의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 우선 고문기술자 노덕술 - 박처원 - 이근안으로 이어진 고문의 역사를 통해서도 친일과 독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친일 청산을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지게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7년 박종철고문치사사건 당시 치안감으로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에 앞장섰던 박처원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죽도록 괴로혔던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노덕술의 제자이다. 해방이후 종로경찰서 대공계 형사를 하면서 노덕술을 만난 그는 1967년 민족주의비교연구회사건, 1981년 민노련·민학련사건(일명 학림사건) 등을 조작하는 등 40년간 오로지 대공업무에만 종사해온 인물이었다.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을 전기고문까지 하는 등 고문기술자이자 출장고문사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은 바로 그 박처원의 수제자였다.

이어 남영동 대공분실은 자신의 역사를 알려주는 동판인 정초(定礎)를 통해서도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준다. 정초에는 1976년 남영동 대공분실 건립 당시 책임자였던 내무부장관 김치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해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조선총독부에 부역한 인물이었다. 그런 김치열이 해방이후 처벌을 받기는커녕 미군정 하에서도 검사,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계속 검사를 하다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차장을 거쳐, 검찰총장과 내무부장관 등 요직에 있으면서 권력의 주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차장 시절, 그는 신직수와 함께 유신헌법 작성의 배후 역할을 했고,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가 최종길 교수(서울대 법대)를 고문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자살로 거짓 발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저 유명한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무고한 시민 8명이 사형당하는 일이 벌어질 때는 검찰총장으로 있었고, 내무부장관이 되어서는 끔찍한 고문기관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었다.

이처럼 정초에 새겨진 김치열 한 사람을 통해서도 친일과 독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친일청산을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 주었는지 우리는 절감할 수 있다.



이제라도 박종철 열사를 시민의 품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인권의 메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지난 711일 박종철문학상 시상식에서 박종철을 살해한 경찰은 이 곳을 즉시 떠나야하고, 남영동 대공분실은 이제 예술의 전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박종철 열사는 1987114일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온 이래, 무려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충격적이게도 여전히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재의 상징인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에게 전면 개방될 때, 그리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배우는 전시·교육 공간이자 독재에 저항한 문화예술인들이 자신들의 창작활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때, 박종철 열사는 마침내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비로소 시민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이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운영 주체는 더 이상 경찰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기본 전시공간이 더욱 확장되어 박종철 열사는 물론이고,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와 여러 간첩조작사건의 관련자 등 독재정권 시기 그 곳에서 수난당한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를 생생히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각종 기획 전시나 시민인권영화제 등 시민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한국 인권의 메카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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