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

작성자물맷돌|작성시간24.04.07|조회수2 목록 댓글 0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

 

아브라함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또 하나 더하라면 순종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12:1)고 말씀하실 때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친족들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12:4) 순종으로 믿음을 보였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11:8)(12:4)

아브람의 믿음과 순종의 모습은 이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그의 나이 칠십오 세(12:4)에 그에게 소생이 없음에도 그가 큰 민족을 이루고 창대하게 하며 복이 될지라(12:2)고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믿으며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가는(12:4) 순종의 본을 보였습니다.

순종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김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세겜 땅에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12:7)

또 그의 장막을 벧엘 동쪽으로 옮긴 후에도 제단을 쌓았습니다.(12:8)

그가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예배드리는 일에도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롯과의 헤어짐에도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13:8-12)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롯과 그의 가족이 포로로 잡혔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가서 롯과 함께 잡혀간 포로와 재산을 찾아왔으며 그 찾은 것으로 이득을 취하지 않고 소돔에 돌려주었고, 율법이 아닌 믿음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14:12-24)

그의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은 자녀와 가나안의 언약(15:4-21)을 세워 주셨습니다.

아브람 99세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하브라함(여러 민족의 아버지)이라 하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제정하셨으며 사래는 사라(여러 민족의 어머니)라 하시고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시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을 재차 확인해 주셨습니다.(17:1~18:15)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아들을 얻었습니다.(21:1~3)

우여곡절이라고 함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지만 그에게도 인간의 한계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갔던 가나안땅에 기근이 들므로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는(12:10)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내려갔다고 하는 것은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또는 믿음의 분량의 의미를 표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모든 일에는 실수나 실패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환경 바라보고 여건 따라서 스스로 결정한 일들은 모두가 실패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그의 아내 사래를 누이동생으로 속임으로 애굽왕 바로가 그의 아내로 삼는(12:10~19) 수모를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 가나안을 떠나 그랄에 거주하며 아브람은 또다시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보내야 하는(20:1~2) 수모를 재차 당하게 됩니다.

또 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아브람은 그의 아내의 말을 들음으로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음으로(16:1~16) 그로 말미암은 전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얻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한 아들 서자가 아닌 본처에게서 낳은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로 드리라(22:2)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믿음의 조상 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한마디 변명이나 망설임 없이 순종(22:3~10)합니다.

여호와이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숫양을 예비하셔서 이삭을 대신하게 하심으로(22:12~14)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잔인한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과는 해피앤딩이지만 과정이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과정 중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조차도 환경과 여건의 변화 앞에서는 나약한 모습과 불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느 순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믿음을 보이다가도 환경과 여건에 따라 한없는 비굴함과 수치도 감내하는 모습은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비정한 아비의 모습도 보입니다.

자신의 위험 앞에서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목숨을 부지했던 그가 자식은 번제물로 선 듯 내어드리는 야비한 모습을 말입니다.

이와 같은 행실로 말미암아 믿음 없는 사람들은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 나약함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과 생활의 이중성과 일체성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일치할 때는 삶 자체가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에서 생활이 이탈할 때 불신이 되고 실패와 우환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또 한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의 과정임을 믿는 사람이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우상의 도시 갈대아인의 우르(11:27.28)에서 우상을 섬기던 데라(24:2)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비(성경의 표현대로)데라를 따라 하란에 이르러 거주하였는데 그곳도 우상숭배가 만연한(왕하19:12 37:12) 곳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섬기는 신 중에 바알과 몰렉의 제물로 자녀를 불사르는(19:5 32:35 대하28:3) 행위는 보편적 신앙생활로 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에 큰 거부감은 없는 문화에서 살아온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바알과 몰렉에게 드려지는 제사는 맹목적이며 막연한 기대로 드리는 제사라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22:2)을 듣고 따르는 확신과 신뢰가 있는 제사였습니다.

지역적 환경과 문화로 비춰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행위는 크게 무리하지 않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잔인하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고 성호를 욕되게 하는 행위가 되므로 돌로 쳐 죽이라(20:2)고 하시며, 하나님도 진노하셔서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20:3)고 하시고 또 그를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한 사람은 그의 권속에게까지 진노하시고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20:4.5)고 하십니다.

이같이 인신 제사를 지극히 가증이 여기시고 배척하시는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래 준비하시는 하나님(22:13.14)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신 제사라는 가증한 행위로부터 아브라함의 가문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며 후대에도 이와 같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유다왕 아하스가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쫓아내신 이방인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산당과 산 위의 푸른 나무 아래서 분향하고 제사한 유다에 아람과 이스라엘이 침공하여 백성들을 크게 살육하고 용사 십이만 명과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 대신과 총리대신이 죽임을 당하는(대하28:2~7) 끔찍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인신 제사를 가증이 여기시고 싫어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심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참뜻은 구원에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사건을 통한 메시지는 인간은 나약하며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도 하고 비정함도 보일 수밖에 없으며 죄 가운데서 스스로 헤치고 나올 수 없으므로 구원해 주실 이가 꼭 필요함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을 번제로 드리려는 비정한 아버지이기 전에 우리가 미치지 못한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느냐는 이삭의 물음에(22:7)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고 하는 굳은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숫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믿음을 가잘 수 있었던 것은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7:19)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이삭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을 믿었고 혹 번제로 희생이 된다 해도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부활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삭을 위하여 숫양을 예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일반 상식으로 보았을 때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명제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알게 되어 억지로가 아닌 스스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10:10) 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선물입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글 안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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