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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공부방

[스크랩] 다산의 이모저모

작성자솔내음|작성시간18.03.14|조회수113 목록 댓글 0

- 엘리트에서 미관말직으로
다산은 평생을 따라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 지금에야 조금 덜하지만 남과 북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살벌한 냉전시기에 '공산주의자'라는 붉은 딱지가 붙은 사람이 겪었던 그것처럼.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는 비서관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엘리트 관리이던 다산은 천주교문제 때문에 하루아침에 지방의 미관말직으로 좌천된다. 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은둔하고 있다가 역시 천주교와 관련된 옥사에 연루되어 한번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한번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한 개인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건만, 다산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책을 놓지 않으며 학문연구에 전념하는 학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2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고,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33세에는 예문관(별칭으로 翰林)과 함께 관리들의 선망의 대상인 옥당(玉堂), 즉 홍문관의 교리 및 수찬벼슬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뒤이어 경기도 암행어사가 된 데 이어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으며 화성 축조공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거중기를 발명했다. 이어 정조 19년(1795) 그는 34세의 나이로 벼슬의 꽃인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르며 엘리트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그 해 4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謀)가 밀입국하여 북악산 아래에서 천주교를 선교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신자들을 공격하는 서용보 · 이기경 · 홍낙안 등 공서파(攻西派)의 모함을 받아 7월에는 종6품의 충청도 홍주목 소재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당했다. 품계가 한꺼번에 6등급이나 강등되는 수모를 겪고서 잘 나가는 중앙의 고위관료에서 한미한 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책으로 ?겨간 것이다. ▲


-성호와 퇴계의 학문 연구
열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호조좌랑이 되어 한양으로 벼슬살이간 아버지를 따라가 거기서 성호의 종손 이가환과 누이의 남편인 매형 이승훈 등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던 이들을 만나 교유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던 다산은 부임지인 금정역에서 멀지 않은 온양 서암의 봉곡사에서 성호의 종손인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1735-1813), 종증손 이재위(李載威) 등 인근의 성호의 후손들과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10일간 공자의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또 "박학한 성호 선생님 / 百世의 스승으로 모시리라"하며 평소 흠모하던 성호 선생의 유고를 교정하였다. "성호 선생이 남긴 글이 지금에 와 없어지고 전하여지지 못함은 후학들의 허물입니다"하며 이삼환에게 편지를 보내 유고정리를 제의하고 모임을 주도한 것이다. 단지 한 때 천주교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모함을 받아 관직 품계가 여섯 계단이나 떨어져 지방의 한직으로 좌천되고서도 슬퍼하거나 술로 허송세월하지 않고 오히려 거대한 다산학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황의 문집인 <퇴계집>을 열심히 읽고 퇴계학문의 깊은 이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였다. <서암강학기 西巖講學記>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은 이 때의 공부내용을 기록한 저서이다. 관리로서 임무는 소홀히 한 채 억울한 좌천에 낙심하여 기생을 옆에 두고 술로 세월을 보냈을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선생의 이런 자세는 지식인으로서의 참모습이요, 200여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에도 관리들의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세번의 유배길
다산은 평생에 세 번의 유배길을 떠난다. 하지만 한림, 즉 예문관의 검열이 되는 과정에서 생긴 잡음으로 떠난 첫 번째 유배는 일주일이 채 못되어 끝나기에 유배라 할 수도 없다.
천주교를 믿는 이는 역적의 형벌로 다스리겠다는 엄명에 다산의 형 약종이 천주교 관련 문서와 물건들을 안전한 곳으로 몰래 옮기다 발각된 이른바 '책롱사건 冊籠事件'으로 촉발된 신유박해에 그의 표현대로 "붉은 옷 죄수들이 길을 메울 정도"로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도 목숨을 겨우 부지한 다산은 "젊은이야 기다리면 만날 날도 있겠지만 노인네야 앞 일을 누가 알겠나"하고 슬퍼하며 경상도 장기(지금의 경북 영일군)로 유배를 떠난다. 처음에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힘들어하였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저술작업에 전념하게 된다. 그 결과 장기에서 다산은 상복문제로 서인과 남인사이의 기해년의 예송을 다룬 <기해방례변>과 한자 발달사에 관한 <삼창고훈>, 그리고 한자 자전류라 할 수 있는 <이아술 爾雅述> 6권을 저술하였다. 의금부에서 받은 모진 고문이 가져다 준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궁벽한 산골에서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유배 생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저술들은 불행하게도 그 해 겨울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다산이 서울로 압송되고 조사받는 경황 중에 분실되어 오늘에 전하지 않고 있다.

“북쪽바람 눈 휘몰 듯이 나를 몰아 붙여
머나먼 남쪽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던졌구료“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음은 겨우 면하였지만 형 약전과 함께 유배길에 올라 1801년 음력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 날, 유배지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서회 客中書懷'라는 시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가슴아픈 이별을 뒤로하고 천리 먼 길을 걸어온 유배객을 기다리는 것은 매서운 겨울바람과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큰 독소로 여기고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내준 허름한 방 하나에 겨우 거처를 정한 다산은 억울한 유배의 억눌린 심정을 잊고 이제야 학문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에 다산은 누추한 주막의 뒷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고 방대한 육경사서에 대한 저서의 시작으로 <예기> 연구에 열중한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하게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厚重하게 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유배지에서의 진정한 성인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엘리트관료가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궁벽한 곳에 유배오고서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에서 의로움에 합당하도록 하겠다는 그의 다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금욕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산의 당당한 태도에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된다. 산수를 벗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임금에 대한 흠모의 정을 노래한 연군가를 부르며 서울로부터의 해배의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보통의 유배객과 달리 핍박받는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 바탕하여 '수기 修己'로서의 육경사서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치인 治人'으로서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라 할 수 있는 <경세유표>와 목민관이 지켜야 할 사항들을 적어놓은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다. 죽기 2년 전인 일흔 세 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유배시절 저술했던 상서 (尙書, 五經 중 하나로 일명 書經)를 개정 · 보완했던 다산에게서 우리는 참다운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정말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천주학쟁이' 다산
끈질기게 붙어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다산은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오늘날의 다산이 있게 된 것이다. 정조사후 중앙의 세도정치라는 혼탁한 정국 속에서 벼슬살이를 계속 하였다면, 그저 그런 평범한 선비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유사옥으로 인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하며 남긴 방대한 <여유당전서>는 그를 주자와 견주는, 오히려 그를 뛰어 넘는 위대한 학자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다산학)는 '한국학의 보고'가 되었다.
다산의 일생은 자의든 타의든 천주교와의 연관성의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들 속에서 성장했다. 한국인으로서 북경에 가서 처음으로 서양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다산의 매형이다. 최초의 천주교리연구회장(明道會長)으로서 순교한 정약종(丁若種, 1760∼1801)은 다산의 셋째형이다. 진산사건으로 효수된 윤지충(尹持忠, 1759∼91)은 다산의 외사촌형이고 백서(帛書)사건으로 능지처참 당한 황사영(黃嗣永)은 정약현의 딸 즉, 다산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그의 고향 마재는 처음의 서양학문(西學)에 대한 관심이 서양의 신앙(서교)으로 발전하면서 피어린 순교의 역사를 배태한 '자궁'이었다.

 

-다산과 광암 이벽과의 만남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다른 종교에 대해 흥미를 갖고 심취하는 계층은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 당한 그룹이다. 일부가 나중에는 배교(背敎)하였지만 당시 천주교를 믿은 중심 계층은 노론중심의 국정에서 소외된 일부 남인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그룹)였다. 1779년 겨울 권철신을 강장(講長)으로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가 열리고 이중의 일부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1784년에는 한국천주교회로 발전한다. 즉 1783년 늦가을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 세례를 받게 하는 동시에 천주교 서적과 각종 성물을 구해 오도록 했다. 이승훈은 그의 부친 이동욱이 동짓날 중국에 가는 사신인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가는 데 수행했던 것이다. 이듬해 봄 이승훈이 북경 북당(北堂)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서적과 성물을 갖고 귀국하자 이벽은 자신의 수표동 집을 임시성당으로 정하고 선교활동에 나선다. 다산도 이 무렵에 이벽의 포교대상이었을 것이다.
큰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의 배 위에서 다산에게 처음으로 천주교를 소개한 사람은 8세 연상인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85)이다. 광암이라면 바로 한국천주교에서 창립성조(創立聖祖)로 받드는 인물로서 큰형수의 동생이니 다산과는 사적으로 사돈간인 셈이다. 다산은 그의 둘째형 약전과 함께 '일찍이 이벽을 따랐다'(嘗從李壁)는 기록을 할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냈고 서학과 천주교서적을 읽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성균관 학생시절 <중용>에 대한 정조의 물음에 이벽과 상의하여 답안을 작성했는데 정조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신해사옥 이후 다산의 입장
다산은 이벽과의 만남 이후 한동안 천주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다산은 젊은 한때 사 · 오년 동안은 마음으로 열중하였지만 1791년의 진산사건(신해사옥)이후에는 사설(邪說)로 여기고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 정약종이 신유년의 옥사에서 1786년에야 비로소 천주교를 배웠다고 자백하였으니 다산도 아마 이 무렵부터 믿지 않았을까 한다. 1797년 정조가 정삼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임명하자 반대파의 모함을 해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辨謗辭同副承旨疏)에서 처음에는 서학, 즉 천문(天文) · 역상(歷象 천문학 및 역학??) · 수리(數理 기하학 및 수학) · 농정(農政) · 수리(水利) 등에 매혹을 느끼다 점차 천주교에 마음을 빼앗겨 성심으로 믿어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이라는 세례명까지 받을 정도였으나 윤지충이 어머니의 죽음에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를 지냈다가 처형당한 신해년(1791년)의 사건이 있은 뒤로 허황되고 괴이하고 망령된 설이라고 여기고 "마침내 마음을 끊었다"(遂絶意)고 말하고 있다.
다른 기록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은 입증되고 있다. 신유년(1801년)의 천주교 옥사 때 "천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못하면 무엇 하겠느냐"고 할 정도로 다산을 죽이고자 혈안이 됐던 반대파(공서파)로부터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약종의 일기와 서찰 덕분이었다. 정약종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둘째 형과 막내가 함께 배우려 하지 않아서 한스럽다"라 했던 사실과 "이 사실을 약용이 알게 해서는 안된다"는 구절이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끌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제사를 폐하는 부분에 이르러 결국 천주교에서 마음을 접은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동안 예학, 특히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대해 깊이 연구한다. 유배지 장기에서 <기해방례변>으로 시작된 그의 '예'에 대한 연구는 50권의 <상례사전>, 12권의 <상례외편>, 9권의 <사례가식> 등 <여유당전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꼭 읽어야 할 책을 열거하면서 <예기>를 포함시킨다. 뿐만 아니라 예에 관해 열심히 공부할 것을 부탁하며 <독례통고 讀禮通考>라는 예에 관한 책을 보내주기도 한다. 천주교 때문에 다산이 겪어야 했던 순탄치 않았던 벼슬생활, 일가친척들과 친구들의 죽음, 18년의 유배생활과 17년의 미복권의 굴곡의 삶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오늘의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게 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역경 속에서도 정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역사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새삼 반추하게 된다.

 
 

-18세기 후반의 사회상
“갈밭의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그지없어 관청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통곡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온 거야 있을 법도 하다지만 예부터 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어라 시아버지 장례치르고 갓난아긴 젖먹이는데 三代의 이름이 軍籍에 올랐다네 달려가서 호소해도 범같은 문지기 버텨 섰고 里正이 호통치며 남은 소마저 끌고 갔다네 아이 낳은 죄라고 남편이 한탄하더니 칼갈아 들어간 뒤에 방에는 피가 흥건하여라”
유배 3년째인 1803년 가을 강진에서 지은 시로 제목 '애절양 哀絶陽'은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한 백성의 사연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슬픈 사연인 즉 이러하다.
갈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16살부터 60세의 정상 남자들에게 해당되는 군적(軍籍)에 등록되어 군에 가지 않는 대신 내야하는 일종의 세금인 군포를 물어야 했다. 죽어 백골만 남은 사람과 갖태어난 젖먹이 아기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백공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添丁)이 일반화된 시절이었으니 탐관오리에게 부당함을 하소연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라 일찌감치 포기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낼려고 하였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은 결국 소를 빼앗기게 한다. 농사꾼에게 어쩌면 자식보다 소중한 소를 빼앗긴 힘없는 백성은 모든 것이 아이를 낳게 한 자신의 생식기 탓이라고 하면서 결국 그것을 자르고 만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생식기를 들고 관청에 가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하였지만 문지기는 막무가내로 앞을 가로 막아버렸다.
이렇듯 다산이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중앙의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에만 골몰하며 밥그릇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영 · 정조 76년 간에 걸쳐 기틀을 잡아가던 개혁의 노력은 1801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500년 역사의 마지막 개혁의 몸부림'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
다산은 목민관으로서 유배객으로서 이런 비참한 현실을 직접 눈으로 목도(目睹)하고 바로 잡고자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금정도찰방으로, 이어 황해도 곡산부사 등 일선 관리로 재직하면서 그는 어진 목민관이 되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하였다.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연천 현감 김양직과 삭령 군수 강명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두 사람은 뇌물을 받고 노비를 풀어주고 군역을 면제시켜주었다. 또 세금을 빼돌려 개인 호주머니를 채우고 국가의 곡식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폭리를 취하는 등 지방 수령이 할 수 있는 온갖 악정은 빼놓지 않고 다하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마음놓고 백성들에게 탐학질을 하는 데는 정조 임금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김양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길 때 묘자리를 봐준 지관(地官)이었고 강명길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주치의를 역임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폭정을 알면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곡산부사로 있을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부임지인 곡산에 이르렀을 때 이계심이란 자가 백성들의 고통 12가지를 적어바치며 엎드려 자수하였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는 전임 부사가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자 천여명의 백성들을 인솔하고 관청에 들어와 항의하다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된 사람이었다. 당장 체포하라고 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냥 보내주면서 그에게 말하길 "수령이 선정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폐정을 보고도 수령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마땅히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잘못된 정치를 보고 일신의 안전을 살피지 않고 항의하는 이계심도 훌륭한 백성이지만 이런 사람을 알아 주는 다산도 그에 못지 않은 훌륭한 목민관이 아닐까?


-천연두와의 한판 승부
훌륭한 목민관이 되겠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던 다산은 때마침 곡산땅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명 '마마'라 불리는 천연두가 창궐하자 이에 대한 치료법을 적은『마과회통 麻科會通』12권을 지었다. 그 자신 일찍이 천연두와는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하여 스스로를 '삼미자 三眉子'라 불렀고 슬하에 9남매 중 요절한 대부분이 어려 홍역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다산은 당시엔 목숨까지 잃을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천연두의 치료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어려서 천연두를 앓을 때 치료해 준 이헌길(李獻吉)에게서 책을 빌려 그 근본원인을 탐구하고 중국의 관련서적 수십권을 뒤져 초고를 정리하고 그것을 다시 다섯 차례나 고쳐 12권의 <마과회통>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 인명보다 이익을 중시하는 의원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의원이 의원을 직업으로 삼는 까닭은 이익을 위해서인데 몇십 년 만에 한 번씩 발생하는 천연두 치료로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직업으로 삼아도 기대할 이익이 없는 데다 환자를 치료하지도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밤이나 비가 올 때면 등잔불이나 삿갓을 급히 찾다가도 아침이 되거나 비가 그치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듯이 천연두에 대한 세간의 얄팍한 연구를 비판한 다산은 楚亭 朴齊家와 함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다산의 18년 동안의 고독한 강진 유배생활에서 말없이 따뜻한 위로를 해주던 친구는 그윽한 차향기, 그리고 더불어 다도를 즐기며 말동무가 되어 주던 혜장과 초의 두 선사(禪師)였다. 하지만 다산이 언제부터 처음 차를 마셨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유배전의 음다설과 유배후의 음다설로 나눠진다. 주의할 것은 단순히 차를 마신 것과 음미하면서 다도를 즐기며 차를 생활화한 것은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배 전의 음다설(飮茶說)

차 연구가인 김명배 선생은 『다도학논고 茶道學論攷』에서 이전의 일반설이었던 유배후의 음다설에 대해 다산의 차에 관한 시문의 역사적 시기를 증거로 제시하며 유배전부터 다산은 차를 마셨다고 주장한다. 관직생활을 하기 전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생활하며 그곳에서 읊은 <등성주암 登聖住菴>(18세) <하일지정절구 夏日池亭絶句>(19세)의 다시(茶時)와 성균관 유생시절 차가 들어 있는 식당 차림표로 볼 때 유배 전부터 다산은 차를 마셨다고 주장한다.


-유배 후의 음다설(飮茶說)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기간 중 혜장선사(惠藏禪師 兒菴 1772-1811)로부터 차를 배워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는 이을호 교수를 비롯한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는 다산이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1801)되어 오기 전에 차와의 인연을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은 없고 오히려 유배 후 백련사의 선승 혜장선사를 만나 비로소 차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동문 밖 주막집에 거주한지 5년째 되는 을축(乙丑 1805)년 가을에 인근 백련사(만덕사)에 소풍을 나갔다가 다산 만나기를 갈구하던 혜장선사와 해후를 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차생활을 시작하며 그에게 명다(茗茶)를 부탁하는 <기증혜장상인걸명 寄贈惠藏上人乞茗>이라는 시를 보내기까지 한다. 그는 오랫동안의 유배생활과 학문연구로 인해 쇠약해지고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도 차를 즐겨 마셨으며, 혜장이 소개해준 다선(茶仙) 초의선사와의 만남은 사제지간으로 발전한다. 다산은 귀양에서 풀려 한강변 고향집으로 온 후에도 초의나 강진 다신계의 선비들이 보내주는 차로써 계속해서 차를 마셨고 경기학인를 비롯한 막역한 벗들과 차와 시로써 교유하였다. 그는 생애를 마감할 즈음에도 다종(茶鍾 찻잔)을 곁에 두고 지낸다고 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다.

 
 

-정조의 비호
오늘날의 다산이 있기까지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정조(1752∼1800/ 조선 제22대왕/ 재위 1777∼1800/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개혁 군주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조는 오늘날의 사상범이라 할 수 있는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다산을 보호해 준 방패막이이자 동시에 경전에 관해 서로 토론하고 잘못된 점을 비판하였던 학문적 스승이자 친구였다. 또 스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던 정치적 동지였다.

하지만 다산은 1801년 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처자들을 데리고 고향 마재로 낙향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도록 뒤에서 충동질하던 벽파가 이에 반대하던 자신을 포함한 남인 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자신이 머무르는 집을 조심하며 살겠다는 뜻에서 '여유당(與猶堂)'이라 부르고 "선인들 남기신 글 다시금 읽으며 남은 생애 이 가운데다 내 맡기리라"하며 분주한 벼슬살이로 하지 못한 공부에 열중한다. 낙향하여 학문에 열중하고 있는 어느 날, 규장각 서리가 보자기에 뭔가를 들고 밤늦게 찾아왔다. 정조가 보내준 <한서선 漢書選> 10권이었다. "너를 잊지 않고 있으니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보내 준 책을 읽으며 학문에 정진하라"는 정조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다.


-정치관료로서의 만남

10살 연상인 정조와의 인상적인 만남은 1784년 23살의 나이로 성균관 학생으로 있을 때였다. 정조가 <중용>에서 의심스러운 80조(70조-이광용)를 기술하고 이에 대한 답을 적어 올 것을 숙제로 내주자 서학을 포함하여 폭넓은 독서를 한 사람으로, 사적으로는 큰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자신과는 사돈 사이인 이벽과 상의하여 <중용강의>를 지어 바쳤다. 여기에서 다산은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은 理가 發해서 나온 것(四端理發)이라는 퇴계를 비롯한 기존의 일반설을 뒤집고 氣가 發한 것(四端氣發)이라는 율곡의 說을 주장하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서 자신과 생각이 일치함을 확인한 정조는 "세속의 흐름을 벗어나 독창적이며 논리가 명확하여 첫째로 삼는다"고 하고 다산을 불러 크게 칭찬하였다. 이후 성균관에서 보는 시험에서 출중한 성적을 내어 임금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하사받은 '우등생'이었던 그는 나중엔 당시 규장각에서 인쇄한 책은 다 받아 더 받을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나이 28세인 1789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종7품인 희릉직장으로 시작한 벼슬길은 정조의 총애 아래 잘 닦은 신작로를 달리는 것처럼 순조로웠다. 과거에 합격한 바로 그 해에 초계문신으로 뽑힌다. 정3품 아래의 당하문관 중에서 문학에 재질이 있는 자를 뽑아 국왕이 직접 지도 · 편달하면서 재교육하는 제도인 초계문신제는 정조의 강력한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신진 엘리트 관료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초계문신들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정조는 개혁의 필연성을 설파하고 그 방법과 방향을 함께 모색하였을 것이다. 당파싸움으로 날이 새고 지는 암울한 상황을 개혁의 중심세력이라 할 이 신진엘리트들의 도움아래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정면돌파하고자 하는 정조의 야심이 숨어 있는 것이다.


-기술관료로서의 만남

정치관료로서의 이러한 만남 말고도 다산은 기술관료로서도 정조와 만난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는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거기에 성(화성)을 만들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신도시'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죽어 간 아버지를 새롭게 이장하고 그곳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또 매년 참배하는 것에는 할아버지(영조) 때부터 실시해 온 탕평정치를 정착하여 망국적 당쟁을 일소하고자 하는 정조의 포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당쟁의 약화 내지 일소는 자연스럽게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신진 엘리트 관료들의 후원아래 정조는 자신의 개혁프로그램을 차근차근 그러나 과감하게 실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정조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는데는 다산처럼 자신과 개혁적 성향을 함께하면서도 과학기술에 능통한 관리가 필요하였다.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여기엔 배다리(舟橋)가 필요하였다. 한강 폭만큼의 선박을 가로로 이어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수백명의 능행 행렬이 지나가도록 배다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용은 둘째치고 안전상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다. 정조의 왕조개혁 구상과 직결된 배다리를 완벽하게 만들어낸 다산은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배다리에 이어 다산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사업은 화성(수원성) 축조이다.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중이던 다산은 정조로부터 화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고 기존의 조선과 중국(청나라)의 성제를 바탕으로 벽돌을 이용하고, 성벽의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독창성을 발휘해 좀 더 선진화된 성제를 보여줬다. 또 정조가 직접 하사한 책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기중기를 설계하여 4만냥 이상을 절약하고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게 하였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 신하를 따뜻이 보살펴 주었던 정조와 다산의 아름다운 만남은 당쟁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다.

정조가 죽었다는 갑작스런 천붕(天崩)의 소식에 접한 다산은 얼마전 하사한 그 책이 "신하와 영결(永訣)하시며 내리신 선물"이라며 통곡하였다. 정치관료로서 그리고 기술관료로서 현군(賢君) 정조와 의기투합하였던 다산은 바로 '정조스쿨'이라 할 수 있는 초계문신에 뽑혀 그와 함께 참혹한 백성들의 현실에 가슴아파하며 모순투성이인 봉건왕조의 개혁에 헌신하였으나 두터운 당쟁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머나 먼 유배길을 떠나고 만다.

 
 

-부인 홍씨와의 애틋한 이별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1761-1838)와 결혼한 다산은 공교롭게도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에 먼저 눈을 감고 홍씨는 이년 후인 1838년에 남편 다산을 뒤따른다.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여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한 다산은 정치적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한창 나이인 사십에 유배를 떠나며 사랑하는 아내와 눈물의 생이별을 하게 된다. 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기약없는 머나먼 귀양길을 떠나는 남편을 아내는 세 살짜리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로 전송한다. 한참 말을 배우며 재롱을 피우던 이 귀여운 막내가 네 살에 요절하였다는 소식에 자신의 애절한 슬픔은 뒤로하고 제 뱃속에서 낳은 애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는 애미의 애통한 심정을 헤아려 정성껏 보살피기를 머리카락 하나의 틈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두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탁한다.
홍씨 부인은 시어머니(다산의 의붓어머니로 다산의 부친 정재원의 4번째 부인)를 모시며 지아비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산이 장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기를 "찾아오는 손님 머리 잘라 술상 차렸고 늙으신 시부모님께 방아를 찧어 즐겁게 해드렸다지"했는데 친정 어머니의 그 고운 심성을 홍씨 부인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유배지에서 여섯폭 다홍치마의 위안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 珍詞七首贈內)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10여 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을 지아비가 장롱 속 깊이 간직했던 빛바랜, 하지만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며있는 다홍치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이에 다산은 그 비단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한다.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매조도는 그림 아래쪽으로 다음과 같은 4언율시와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뜰앞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有列其芳 惠然其來)
여기에 둥지틀어 너의 집을 삼으렴(亥止亥樓 樂爾家室)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華之旣榮 有--其實)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은은한 매화향기에 취해 쓸쓸한 유배생활의 위안을 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새가 정원의 매화나무에 앉는 것을 보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부인이 혹 새가되어 날아온 것은 아닐까? 바다 건너 흑산도에 계시는 약전 형님이 보고싶은 마음을 새에게 대신 보내지는 않았을까?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유배객을 위로하려 먼저 가신 아버님이 하늘에서 보낸 귀한 친구인가? 지필묵을 꺼낸 다산은 몇 해전 부인이 인편에 보내온 시집올 적 입었던 색바랜 다홍치마를 꺼내 그 위에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다산 부부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
고향 마재 마을을 지키며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던 홍씨에게 지아비의 해배소식은 맨 살을 꼬집어보아야만 믿길 정도로 거짓말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문에 들어서는 남편의 모습에 부인은 고개 돌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날 때 나이 사십의 건장한 청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깊이 패인 주름살에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만은 덜 늙었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못다 한 저술작업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다산은 60년 전, 15살의 나이로 불그레한 볼에 꽃가마 타고 온 새색시를 맞던 그 날 숨을 거둔다. 죽기 전 다산은 얼마 남지 않은 회혼일에 맞춰 미리 시(回 禮)를 하나 짓는다.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6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한 이팔청춘 곱던 얼굴의 여인을 주름살만 가득한 할머니로 만든 무심한 세월에 대한 투정이 가볍게 묻어 있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폐족의 설움을 안고사는 다산의 어린 자식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유배가던 아버지를 전송하던 세 살짜리 막내아들을 뒤로하고 천리 길 전라도 강진 땅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다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버지는 큰아버지(약전)와 함께 유배를 떠나고 약종 백부는 대역죄인으로 참수당하니 어린 나이의 자식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각각 19살, 16살로 한참 과거준비에 열중할 나이였던 다산의 두아들 학연과 학가에게 큰아버지의 '대역죄인' 소식은 마른 하늘에 뜬금없는 날벼락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큰아버지의 죽음도 슬픈 일인데 이제 과거까지 볼 수 없으니 얼마나 낙심하였을 것인가? 당시 대역죄인의 집안은 과거를 볼 수 없는 것이 국가의 법률이었다.
이런 두 아들의 심정을 헤아린 다산은 유배지에서 편지를 보낸다.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책읽기에 힘써라. 출세길이 막힌 폐족이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 사람들보다 백배 천배 열심히 공부해야 겨우 몇 사람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 내 귀양사는 고통이 몹시 크긴 하지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유배간 아버지에게 햇밤을 보낼 정도로 효심이 깊었던 아들이었지만 여러 차례 글공부를 재촉하는 아버지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부지런하지는 않았나 보다. 자질은 있지만 게을러 학문에 진척을 보이지 않는 자식들을 걱정하다 병까지 앓으며 노심초사하던 다산은 엄히 꾸짖는 편지를 보낸다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넓게 알고 이치에 밝은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 평민이 배우지 않아 못난 사람이 되면 그만이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고 말아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따뜻한 아버지 다산
학문을 게을리하는 아들을 다산은 유배지 강진으로 불러 직접 가르친다. 유배초기 서슬파랗던 관가의 감시가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풀렸다. 이에 다산은 1805년 겨울 유배지를 찾아온 장남 학연과 읍내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 함께 묵으며 주역과 예기를 밤낮으로 가르쳤다. 유배 중 네 번의 교정을 거쳐 완성한 <주역>과 함께 <예기>를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말하고 <독례통고 讀禮通考>라는 책을 인편에 보낼 정도로 예에 대한 연구에 각별하였던 다산인지라 아들에게 직접 예기에 대해 강론하였던 것이다. 이 때 예에 대한 학연의 질문에 답변한 것을 기록하여 모아놓았는데 이름하여 스님들이 묵는 암자에서 묻고 답했다하여 <승암문답 僧庵問答>이라 하였다. 유배지를 다산초당으로 옮긴 1808년에는 둘째 아들 학유를 옆에 두고 오경 가운데 <주역>과 <춘추>를 읽도록 하였다.
큰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은 둘 다 가까이 두고 직접 가르치고 싶지만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며 읽어야 할 책의 순서를 꼼꼼히 적고 있다. 이 외에도 그가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옆에서 직접 가르치며 학문의 진척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걱정이 구절 구절마다 깊이 배어있다. 이렇게 공부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던 아버지였지만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어린 자식의 죽음에는 한없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외동딸에게는 사내아이와는 또 다른 애틋한 부정을 느낀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향으로부터 기별이 오면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졸인다"고 하였던 다산은 1802년 겨울 네 살짜리 막내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간장을 쥐어 짜는 서러움이 복받친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귀양살이 떠날 때 과천 점포 앞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아버지와의 기약없는 이별에 슬퍼하던 그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몇 날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리라. 눈 앞에서 네 명의 사내아이와 한 명의 계집아이를 잃었을 때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스스로를 위로하였으나 유배지에서 듣는 막내의 죽음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절하는 연습한다 예쁜 모습 보여 주고 / 술잔을 건네주며 웃음 띤 모습 절로 보여 / 오늘같은 단오날 저녁 / 누구 있어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하리"하고 어렸을 적 딸아이의 재롱을 그리워하면서도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다산은 어른으로 성장한 딸을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자 초당의 제자인 윤창모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그 애의 친정어머니가 시집올 때 입었던 색바랜 비단 다홍치마 위에 매화와 새를 그리고 애절한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아마도 시집간 딸에게 아버지로서 죄인의 몸인 것이 늘 부담스러웠을 것인데 그 미안함을 매조도에 담아 보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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