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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분노의 포도!

작성자비빔밥(경기)|작성시간14.04.30|조회수787 목록 댓글 15

예전에 ‘미스트’란 영화를 통해서

(http://fulljazz.blog.me/30176895993)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와

그 공포를 통해 통제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화 미스트에서 묘사한 공포는 그 존재가 불명확하기에

사람들은 탈출구 없는 미지의 공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사실’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이 힘을 얻게 되는데

이 ‘해석’은 일종의 권위(정치, 종교, 학계)에 의해 뒷받침되며

일단 그 해석이 받아들여지고 나면 반박 불가한 진실로 탈바꿈하지요.

즉, 반대로 이야기하면 ‘공포를 통한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공포의 대상이 치명적이어야 하되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또한 예측 불허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공포’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내부에 ‘보호자’들이 생산해 낸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보니 ‘선’의 입장을 내세우며 외부의 ‘악’에 대한 분노와

그 ‘악’에 대한 신의 징벌을 외치는 사람들이야 말로

오히려 ‘악’의 근원인 경우가 더 많기 마련입니다.

즉, 우리가 당면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밖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외부의 ‘공포’에 집착할게 아니라

그 ‘공포’를 누가 만들고 퍼뜨리는가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란 표현이 딱 맞는 것이지요.

..

영화 ‘식스센스’로 명감독의 반열에 오른 나이트 샤말란은

2004년 ‘빌리지’란 영화를 통해 공포의 의미와 용도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는 공포의 대상이 눈에 보이는 흉찍한 괴물이 아니라

바로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것(those we don't speak of),

즉, ‘밝힐 수 없는 무언의 약속’임을 보여줍니다.

괴물의 공격으로부터 고립된 안전한 마을,

하지만 동시에 미지의 괴물들로 둘러싸인 감옥과 다를 바 없는

19세기 고립된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괴물들이 사는 숲에만 가지 않으면 안전하다는 계약(?)덕에

감히 마을을 벗어나 숲속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 괴물이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빨간색은 금지색이 되어버리지요.

그러나 호기심 많은 일부 젊은이들은 마을을 벗어나고자 시도하고

그런 시도들은 괴물의 존재와 무서움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마을의 ‘장로’들에 의해 저지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지도자인 워커의 딸 아이비를 좋아하는

두 청년(루시어스와 노아) 사이에 큰 싸움이 발생해

루시어스가 심하게 다치게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루시어스를 살리기 위해서는 숲을 가로질러 외부 세계로 나가

약을 구해와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마을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정확한 실체를 본 적이 없지만

저 밖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워커는 고민하고 있는 딸에게 놀라운 진실을 말해줍니다.

사실 괴물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이지요.

또한 그들이 사는 시대는 19세기 후반이 아니라 20세기이며

과거 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 소속의 사람들이 뜻을 합쳐

잔인하고 무질서한 20세기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자신들 만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든 것이라는 놀라운 진실을..

그들은 돈을 모아 땅을 구입해 ‘자연보호구역’으로 정하고

외지 사람들이 전혀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고

자신들만의 고립된 삶을 살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된 아이비는 비밀리에 마을을 빠져나가

루시어스를 치료할 약을 구해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아가 죽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괴물의 존재를 더욱 굳게 믿게 됩니다.

주인공은 진실을 깨닫고 바깥 세상에 나가 약을 구해왔지만

여전히 괴물에 대한 진실을 밝혀지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영화에서 괴물의 존재는

아니러니 하게도 마을의 ‘평화’ 유지수단이며

마을 장로들의 정치적 신념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

이 영화에 대해 철학자 슬라예보 지첵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에겐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근대적이고 개방적인 ‘위험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낡고 은둔적인 ‘의미세계’를 보존한 안전사회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의미’를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괴물들이 지키는 유한하고 폐쇄적 공간이다.

이 폐쇄된 유토피아적 공간에서 ‘악’은 단지 배제되는 것만이 아니다.

‘악’은 가공의 위협으로 변형되고, 공동체는 그것과 일시 휴전을 수립하며,

그것을 경계하며 항구적인 비상사태를 유지해야 한다.“

지첵의 말처럼 안전은 위험의 안티테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안전’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위험’이 상존요소로 병존할 때입니다.

즉,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단절적으로 지속되는 ‘안전’만이 우리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지요.

은둔적인 ‘안전사회’는 그들을 은둔하게 한 외부 위협요소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협요소가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야만 하지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보수 세력들이 종북 세력에 치를 떠는 이유는

종북 세력들의 생각 자체가 불순하고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밖에 상정한 ‘괴물’의 본질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즉, 외부의 ‘괴물’적인 요소들이 내부에서 발견될 경우

어떠한 합리적 판단 없이 모두 제거되는데

종교 단체에서 아무리 작은 세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이단’에 잔인하게 구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결국 외부의 위협요소란 ‘이상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제1 조건이 되는 것이고

공동체 내부에서는 완벽하게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그 제거를 명목으로 정당성에 대한 별다른 근거 없이

막대한 권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괴물'을 외부로 축출하되,

내부의 ‘위협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되는데,

이는 지도자들 입장에서 ‘이상사회’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의도된 ‘위기’를 만들어낼 수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너무 ‘안전’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너무 ‘위험’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안전’을 너무 길게 끌고 나가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나태해지기 마련이고

‘위험’을 너무 강조하면 공동체 내에 불필요한 긴장이 구성되고

그것은 구성원들의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괴물’의 공격은 영화 ‘빌리지’에서처럼 가축을 죽이는 정도로만 끝나야 합니다.

만약 그 ‘괴물’이 직접 공동체의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칼과 창을 들고 괴물에 맞서 싸우자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괴물의 정체는 금방 허무하게 들통 날 것이기 때문이지요.

말 그대로 적절한 위협과 적절한 공포가 필요한 것이지요.

어쩌면 가장 현명한 지도자는 그 ‘공포’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지도자일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이 위태롭다고 숲 속 ‘괴물’에 너무 많이 의존하거나

내부의 위협 요소들을 지나치게 과장하게 되면,

그 괴물의 정체는 물론 자신의 정체도 탄로 날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종북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소한 제 생각으로 현 정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도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

최근 정부의 모습을 보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괴물들을

정작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리는 미지의 괴물은 '북한'이나

우리 내부의 '종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괴물은 ‘시민 불복종’, ‘사회적 혼란’, ‘부동산 폭락’ 등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보수세력들의 주장은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지요.

..

영화 ‘빌리지’에서 샤말란이 보여주고 싶었던 이상사회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그 영화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구성원들의 ‘안전’을 빌미로

결국 구성원들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갖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외부 위협은

사실 공동체 유지를 위한 가장 본질적인 요소 중에 하나인

개인의 자기 통제라는 가장 기초적인 윤리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변모시켜

개인의 판단이라는 윤리적 힘을 무력화 시켜버리게 됩니다.

즉, 그런 공동체의 개인들은 스스로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능력을 잃게 됩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종북 타령에 놀아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유토피아란 유토피아적 사고로 무장된 개인들의 집합인데,

동일한 유토피아적 사고를 통해 개인갈의 갈등이 방지되거나 극복된다면

영화 ‘이퀄리브리엄(2002)’이 보여주듯이 상당히 비이성적이고

폭력에 의존하는 권위주의적인 사회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모든 유토피아적 세상은 본질적으로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특히 외부의 ‘괴물’이 보장하는 평화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그런 사회는 결국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자체 붕괴되기 마련입니다.

..

‘1984’를 통해 조지 오웰은

지도자가 최종적 악으로 규정되는 20세기를 그렸지만

지금 21세기의 지도자들 그의 예상과 달리,

짧은 머리에 검정색 제복을 입은 파시스트의 이미지가 아니라

교양 있고 유머가 넘치는 젊고 매력적인 지도자들로

스스로 대다수 국민들의 동료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 정치인들은 싸구려 점퍼를 걸친채 시장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학교 화장실에 가서 직접 청소를 하기도 합니다.

또한 칼 막스의 음울한 예언과 달리

흡혈충인 자본가들은 노동자 착취에 매진하기는커녕

노동자들과 저소득층의 삶의 개선을 위해

선뜻 어마어마한 금액의 기부를 하기도 하지요.

이제 눈에 보이는 적들은 사라지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금융’, ‘자본’ 같은 악의 개념이

악령처럼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변화를 노동자, 농민의 ‘빈곤’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예리하게 잡아낸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진주’

그리고 ‘분노의 포도’의 저자 존 스타인백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 ‘분노의 포도’에서

파악할 수 없는 가공의 ‘괴물’이 주는 공포를

농민의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1920~30년대 트렉터의 등장으로 자신이 평생 일군 땅에서

갑작스럽게 밀려나게 된 소작농들은 트렉터 기사를 총으로 위협하지만

그런 행동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이내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평생 피땀 흘려 일군 토지를 빼앗는 실체는

트렉터 기사도 아니고 트렉터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가난의 구렁텅이로 던져 버린 것은

바로 대출을 빌미로 소작농을 쫓아내는 ‘은행’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은행’이란 괴물은 '은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총으로 쏘아 죽일 수 있는 명확한 ‘실체’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농민들이 만나는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대리인'일 뿐이지요.​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들은 보이지 않는 은행의 폭력 앞에서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완전히 압도당하게 됩니다.

총은 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은행이란 자신의 총으로 쏘아 죽일 수 없는

악의 근원임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이제 정치인들은 세련된 자본주의 시스템 덕에

자신들에게 향할 대중의 분노의 화살들을

목표 없는 허공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되었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외부, 혹은 내부의 ‘악’을 상정하여

그럴듯한 화살받이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진짜 ‘악’은 우리 몸속의 기생충처럼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없는 시스템 내적인 것이 되었고

가짜 ‘악’은 공동체 시스템의 위협적인 요소로

치유되지 않는 병 또는 완전히 멸절 시킬 수 없는 악으로 묘사되며

끝임 없이 공동체를 주위를 배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

서구의 근대사를 돌이켜 보면 이러한 ‘악’, 즉 ‘공포’의 대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은 혈통에 따른 일체감과 분리의식을 심어주었고

서로 다른 혈통에 대한 믿음은 세계 대전의 밑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막시즘 이후 새로운 분리가 만들어 지는 데,

바로 ‘자본’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분리이며

이 경우 자본가가 ‘악’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세계2차 대전 이후

냉전체제를 통해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이라는

무시무시한 핵전쟁의 ‘공포’를 만들어내

그 뒤에 숨어버리고 말지요.

그러다 냉전시대가 종료되자

공포의 대상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됩니다.

이제 서구 사회는 정체가 불분명한

‘알카에다’라는 조직과 전쟁을 하고 있으며,

현대의 ‘테러’는 과거 강대국 간의 핵전쟁과 달리

우리 주위에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는

더욱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공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포’의 정치적 사용은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과거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라는 무시무시한 마을 밖 ‘괴물’과

‘종북’이라는 마을 속 잠재적 ‘괴물’을 잘 이용해 왔고

이 점에 있어서는 사실 ‘북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할까요?

이는 요즘에도 예외가 아닌 것이

국내 정치인들은 틈만 나면 북한의 위협을 과대포장하거나

주기적으로 국내의 종북 세력들에 대한 척결에 나서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보아하니 내부의 세월호 사태 수습을 위해

북한의 위협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인터넷의 발달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 괴물의 진실을 점점 많이 알아가고 있다는 점이겠지요?

방금 SBS 연평도 뉴스속보를 보니

연평도 주민들도 짜증이 많이 난 듯 싶군요.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908425)

이쯤 되면 정부의 스토리텔링 능력도 바닥을 드러냈다고 봐야할겁니다.

어디 창의력 없이 과거 스토리를 자꾸만 우려먹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나저나 말빨이 안먹히면 그 다음 순서는 보지 않아도 뻔한데

국면 수습을 위해 괜한 사고를 치지 않을지 무척 우려가 되는군요.

..

오늘도 이야기가 산으로 간 듯 합니다.

생각이 날 때 시간을 내어 한 번에 쭉 써내려가야 하는데,

업무 때문에 자꾸 글이 끊기다보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틈 나는대로 급하게 글을 쓰다보니

용두사미가 된느 경우가 많습니다..이해해 주세요~ㅠ

어쨌든 요즘 여론의 흐름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듯싶습니다.

물론 국민들이 슬퍼한다고 죽은 아이들이 살아날 것은 아니지만

이제 슬픔을 걷어내고 그 슬픔을 정의로운 분노로 바꿀 때가 아닌가 싶군요!

본인이 대한민국호의 선장이면서

세월호 선장 탓만 하는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의 선장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밑의 선원들에게도 자신 없으면 옷을 벗을 것을 요구해야지요.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으면서 월급 받아먹는 것은 범죄행위입니다.

이제는 좋은 게 좋다! 다 지난 일이다! 라는 과거식 사고에서 벗어나

그 케케묵은 마을 밖 ‘괴물’과 마주할 때입니다.

늘 공포의 대상이었던 ‘북한’과 ‘종북’의 실체,

그리고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수많은 불의의 세력의 실체,

그 괴물들의 실체를 명명백백 밝혀내어야만 합니다.

누가 괴물의 탈을 쓰고 괴물 짓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괴물을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 번 기회에 반드시 밝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부를 흔들어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불의의 세력이 있다면 이들 또한 솎아내어야만 합니다.​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국민들을 위한 의미있는 반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번 세월호 사태를 통해 의미 있는 변화를 일구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월호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공무원들의 나태나 비리를 보면 내일이라 생각하고

해결을 볼 때까지 민원을 넣고

나랑 관련 없는 작은 비리도 절대로 못 본 척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 대상이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묵과해서는 안되겠지요.

..

지금 전 세계는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르게 말려들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폭발 직전이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

슬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BRICS와

이를 어느 정도 감내할 수밖에 없는 미국정부,

그리고 여전히 팍스 아메리카나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의 일부 노쇠한 정치인들과

뒤에서 이를 조정하는 군사복합체와 금융세력들,

TPP 이면에 숨은 미국의 중국봉쇄 노력과

이미 바꿀 수 없는 다극화의 흐름,

그리고 중간에 끼어있는 우리나라의 대응..

이미 진행 중인 금융 전쟁과

점점 다가오는 금융 붕괴의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일촉즉발의 국제정세..

혹자는 우리가 세월호 문제에 지나치게 몰입할 때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 번 기회에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글로벌 경제위기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우리 한국호는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 때도 과거처럼 한국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도망간다면

이제 누구를 붙잡고 하소연 하시겠습니까?

그 때엔 구조하러 올 사람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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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열공하자 | 작성시간 14.05.01 위기가 온다면 지난번 외환위기 때처럼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국민들에게만 돌아가게 되겠지요.
  • 답댓글 작성자비빔밥(경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5.07 네..결국 자본가들은 돈잔치! 그리고 그들의 구멍난 곳은 세금으로 메꾸어 주겠지요!
    돈가치는 폭락하고 자산가들은 헐값에 자산을 쓸어담고 그 결과 서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 질겁니다!
  • 작성자순백이아빠 | 작성시간 14.05.03 월드컵때 되면 또 잊혀지지 않을까요.

    어차피 무얼해도 절대지지층이 있는 이런 사회

    어디서부터 메스를 대야 할지도 모르는 사회

    ㅜㅜ
  • 답댓글 작성자비빔밥(경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5.07 네.. 또 그러겠지요?
    아마도 우리 사회의 병폐를 바꿀려면 더 큰 사고(?)가 나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ㅠ
  • 작성자겨레(경기 구리) | 작성시간 14.06.02 훌륭한 글 정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비빔밥님은 어떤분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이런 뛰어난 글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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