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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리고 프로파간다의 힘!

작성자비빔밥(경기)|작성시간14.05.13|조회수1,831 목록 댓글 9

“전체주의는 폭력을 휘두르고 민주주의는 선전을 휘두른다.”

                                                       - 에이브럼 노엄 촘스키 -

 

최근 우리 국민들을 ‘미개’하다고 페이스북에 표현했다가 곤경에 처한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의 막내아들에 이어

정몽준씨의 부인 또한 아들의 말을 옹호하며 점입가경을 넘어서

개판난장의 집안 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정몽준씨가 악어의 눈물 연기를 잘 하셨습니다만..​ㅋㅋ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있는데,

바로 정몽준 아들이 언급한 ‘미개’한 국민들은

일반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수룩한 사람들,

즉,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없어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 못하고

편견과 고정관념, 무지와 부주의함으로 인해

대뇌피질이 제 기능을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상황을 스스로 파악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그리고 그 판단에 의해 민주적 절차와 질서를 요구하는

민주적 사고를 갖고 있는 시민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정몽준스러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개’의 개념은

일반적인 교과서 개념의 ‘미개’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봐야겠지요.

오히려 그들 입장에서 문명화된 사람들이란

비판의식 없이 단백질 블록만 탐닉하는

개혁적 시민의식을 상실한 좀비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한 그 문명화된 사람들 대다수는

민주적 시민정신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미개’하다 비난하며

지체 높으신 정몽준 아드님의 고견에 동의를 보내고 있구요.

많은 분들은 정몽준 아들의 경거망동이 아버지의 길을 막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아들의 발언을 문제 삼는 사람들 중에서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종북세력(?)들이 정몽준을 음해하고 있다고 판단

더욱 더 응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사실 민주주의를 다수의 지배로 정의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1972년 노벨상 수상자인 케니스 애로우의 지적처럼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개인들이 느끼는 중요성의 정도와

개인의 헌신 정도는 크게 차이가 있으며

정형화된 투표제도는 그런 가장 중요한 차이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나마 현대 민주주의의 의의를 찾아보자면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허울뿐인 권력 분산인 경우가 많으니

사실상 소수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가장된 민주주의,

즉, 과두정치의 형태로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엘리트들의 최고의 무기는

예나 지금이나 바로 ‘언론’이지요.

..

현대 홍보 산업의 핵심 매뉴얼로 꼽히는

‘프로파간다’의 저자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군대가 대중의 육체를 통제하듯 여론을 조목조목 통제할 수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지식을 홍보 분야 개척에 활용하였습니다.

실제로 미 정부는 20세기 초 ‘연방공보위원회’를 설립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평범한 미국 시민들을

세계 1차 대전에 반발하는

반독일 미치광이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 ‘선전’의 효과를 가장 잘 파악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이후 프로파간다, 즉 ‘선전’이라는 개념은

무지한 대중을 계몽한다는 최초의 중립적 의미에서

대중을 의도적으로 조작한다는 다소 악의적 개념으로 변화되어 왔고

20세기 미디어의 확장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배계급의 권력 획득과 유지를 위한 최고의 무기로 사용되어온 것입니다.

..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통치를 받으며

우리의 생각을 주조하고, 취향을 형성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대중의 생각을 조종하는 끈을 잡아당기면서

사회의 노후한 힘에 박차를 가하고,

세상을 하나로 묶어 인도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월터 리프만이

엘리트의 정보조작에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무지한 대중’이라는 개념에 집착했던 반면

버네이스는 리프먼의 사회주의적 색채를 깨끗이 잊고

엘리트 세력의 타고난 지도력과 능력을 높게 사며

엘리트 통치의 원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물론 우리의 일반적 인식처럼

‘선전’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선전’은 장기적으로 효과가 좋은 정책들의 실현이나

기업들의 성공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되어왔으니까요.

하지만 대중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킨다는 측면에서

특히, 무지한 대중들의 지적 결함을 이용하여

그들 스스로 자신을 옥죄는 최악의 선택을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선전의 비윤리적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대중들이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기에

대중들의 생각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도 무방하다는

선전가들의 윤리적 해명은 그 근거가 빈약하기 짝이 없지요.

선전가들에게 있어 대중이란

대략 초등학교 과정에서 이루어진 지적 능력 평가의 탈락자들로

더 이상의 지적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냉혹한 평가와 함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소수 엘리트들의 판단에 따라

자신들이 삶과 미래가 운명 지어지는 소극적 존재로

혹은 좀 더 심하게 말해 사육이 필요한 ‘가축’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트들 눈에 대중이란 ‘미개’한 존재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미개한 대중들은 엘리트들의 자신들에 대한 경멸의 시선을 알아서는 안 되며,

국가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성실, 근면한 시민, 혹은 애국자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당연히 ‘미개’의 낙인을 짊어져야할 그 무지한 대중들은

오히려 소수의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그 ‘미개’함의 낙인을 전가함으로서

자신들의 ‘미개’함을 ‘애국’이나 ‘정의’로 오도하는 것입니다.

..

대한민국은 선진화된 그 어느 나라보다도

엘리트 세력의 ‘선전’이 성공적으로 먹혀든 나라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 박정희 정권에 대한 환상,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경제 개발의 초석을 다졌다는 생각 자체가

당시 엘리트 세력이 만들어 놓은 ‘선전’으로

후대 정치적 이유로 인해 더욱 강화되어 왔습니다.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가 독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은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요.

물론 여전히 그러한 기득권의 선전은 유효한 바,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과거 박정희의 환상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 놓은 지역 구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전해온 지역적 특색과 환경의 차이로 인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차이가

‘다름’의 개념을 넘어서 정치색을 갖게 된 것은

지배계급의 의도적 ‘선전’의 결과입니다.

가까운 과거 MB가 정권을 잡고 4대강으로 대한민국을 말아먹었어도

올곧이 지배 여당에게 표를 던지는 무지한 대중들은

‘건전한 보수’로 가장한 친일세력들의 프로파간다에

완전히 넘어간 경우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

물론 이러한 프로파간다의 성공은 단지 우리나라의 예만은 아닙니다.

독일의 히틀러 칠레의 피노체트와 같은 독재자들이

이 ‘선전’이라는 도구를 매우 잘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 또한 ‘선전’의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그 ‘선전’의 힘은

경제 분야에서도 큰 역할을 하지요.

과거 제 글을 읽어오신 분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많은 디플레이션 대공황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빠른 경제 붕괴가 오지 않는 이유는

1971년 닉슨의 금태환 거부 이후

‘화폐’가 완벽한 ‘신용’으로 바뀌면서

화폐의 성질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붕괴되는 거품을 오히려 거품을 증가시켜 막을 수 있지요.)

두 번째 이유는 서구 국가들의 지속적인 ‘선전’의 영향 때문입니다.

‘선전’이란 기울어 가는 배 속에서

끊임없이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 결과 승객들은 합리적 상황 판단을 못하게 됩니다.

물론 위험을 감지한 승객들이 앞 다투어 갑판으로 나왔다면

오히려 무게가 쏠리면서 배의 침몰이 더 빨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송’의 내용을 굳게 믿고

자신의 옆에서 가만히 있는 동료들을 보면서 안도를 할 경우

일종의 피어프레셔(Peer Pressure)가 작동하게 되어

그러한 ‘선전’의 힘은 더욱 강화되어지고

그 결과 위기는 늦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

예전에 세계 경제 상황을 ‘타이타닉’의 침몰에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배가 거대할수록 가라앉는 시간은 오래 걸립니다.

그리하여 배가 기우는 속도가 늦으면 늦을수록

처음의 위기의식은 마치 안정을 찾아가는 오뚝이처럼

정상화 편견으로 자꾸만 되돌아갑니다.

그리하여 위기감이 사그라지는 어느 순간

오히려 적당이 기운 것이 정상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배는 분명히 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탈출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세월호의 아이들이 배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었다면

아니 최소한 함께 동승했던 트럭 기사들처럼

위기 시 올바른 판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면

‘방송’만 믿고서 선실 안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2008년 금융위기는 이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습니다.

IMF가 우리 국민들에게 잊힐 수 없는 상흔을 남겨놓았다면

2008년 금융위기는 호환과 마마처럼 두려움의 기억만을 남겨주었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의 본질이 쉽게 지워진 것은

호환 마마의 비현실적인 경고의 한계가 아니라

금융세력들의 ‘선전’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14년 대한민국 국민들은

세월호 사태를 앞에 두고

대한민국의 정부의 ‘선전’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전쟁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 괴물 뒤에 존재하는 선진 제국들의 더욱 더 커다란

‘고질라’와 같은 프로파간다와 싸워야 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세월호의 아이들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대한 과제를 주고 떠났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그 아이들이 남겨둔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을 해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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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코난(경기) | 작성시간 14.05.13 정말 우리(서민)와 그들(특권층,정치인,재벌)등의 언어의 개념은 다른것같습니다 그때문에 서로 더 오해하는지도 ㅎ
    말대로 미개의 개념도 그렇고 민주주의 개념도, 살만하다는 개념도, 나라의 주인이라는 개념도 국민이라는 개념도...
  • 작성자초보자(여수) | 작성시간 14.05.13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작성자새벽기차(호주) | 작성시간 14.05.14 '세월호의 아이들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대한 과제를 주고 떠났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미개하지 않다는,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가슴앓이 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바로 한표,한표를 제대로 행사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다 미개하며 똑똑한 우리가 다스려야할 대상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미개한 일개 국민들이 타는 세월호 같은 배들은 자본가들의 경제논리에 의해 여전히 위험한 상태로 바다위를 떠 다닐 것이고 언젠가 또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을 앗아갈 것입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으로 더 이상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빕니다...

  • 작성자고릴라신 | 작성시간 14.06.01 훌륭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소현 (경기) | 작성시간 14.06.08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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