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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오지만디아스 : 그 부서진 잔해의 주위에서..

작성자비빔밥(경기)|작성시간14.07.08|조회수425 목록 댓글 3
“19세기 후반 이후 경제학을 구성하는 패러다임은 경제가 하나의 균형 시스템, 즉 정지 상태의 시스템이라는 생각에 기반한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경제학자들이 영감을 얻은 곳은 바로 ‘물리학’이었다.”       

                                                                                     -에릭 바인하커-

 

“우리는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말로 모르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 모델과 현실 세계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앨런 그린스펀-

 

아담스미스에서 하인리히 고센에 이르는 고전파 경제학의 뒤를 이어

한계주의자의 시대(1830-1930)를 열었던 대표적인 학자는 레옹 발라입니다.

레옹 발라(Leon Walras)는 당시 미분 방정식의 발전 덕에

수많은 자연의 신비가 풀려나가는 것을 목도하면서

똑같은 수학적 기법을 응용하여 인간의 경제적 행동 또한

정확히 설명,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자연과학적 사고에 따르면 자연은 일종의 균형점을 갖고 있고

이미 수학 방정식을 통해 그러한 균형점들이 인간에게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기에

발라의 그러한 기대는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지요.

발라는 수학을 통해 경제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발라가 물리학의 균형 개념을 경제학에 도입함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경제 교과서에 배우는

전통 경제학의 수학적 기초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와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레옹 발라가 놓은 기단 위에서 그들의 탑을 쌓아가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알프레드 마샬, 폴 새뮤얼슨, 케네스 애로우 등

걸출한 경제학자들이 배출됩니다.

그 이후 밀턴 프리드만이나 로버트 루카스와 같은

시카고 경제학자들이 신고전파 미시 경제학 기법들을

거시 경제학에 응용하기 시작하면서

‘최적 균형’과 같은 수학적 개념들이

전통적 거시 경제 이론의 핵심으로 들어오게 되지요.

그렇게 경제학은 수학화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처럼 근대의 경제학자들이 이루고자 했던 최종 목표는

발라가 시작한 수학적 포뮬러를 통해

누구도 의심할 수 없고 반박할 수 없는

자명한 경제적 진실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처럼 발라를 시작으로 경제학에 수학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며

근대 경제학은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지만,

동시에 수학적 포뮬러(formula)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던

당시 과학자들이 저질렀던 이론적 실수를

수많은 경제학자들 또한 그대로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잘못된 가정을 진실로 받아들임으로서,

혹은 경제 상황에 맞지 않는 무리한(far-fetched) 일반화를 시도함으로서

근대 경제학은 비현실적 ‘합리성’의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17~19세기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자들의 가장 큰 오류는

관찰된 현상을 수학적 포뮬러를 통해 이론화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되는

‘귀납적 일반화의 한계’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자신들의 이론이 그와 관련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보편타당한 이론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몇 가지 관찰된 사건들을 바탕으로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한 수학적 포뮬러를 수립함으로써

미래의 관찰 가능성(결과)을 확실한 현재의 것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이 추후 수정이 가능한 가설임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변함없는 법칙, 즉 보편적 법칙임을 주장했던 것인데,

이는 근대 과학의 합리성의 토양이라 할 수 있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면서,

(과학은 수학적 원리에 의해 자명한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사변적 노력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짐..)

동시에 과학자들 본인들의 은밀한 정치적 욕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방법론적 인식은

칼로 사람을 찔러놓고 그 사건의 본말을

모두 ‘칼’ 탓으로 돌리는 행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자고로 ‘칼’의 용도는 그 ‘칼’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르기 마련이지만

정작 칼을 휘두른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애써 무시하고

‘칼’에 전적임 책임을 돌려버리는 행태와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과학자들은 스스로 만든 수학적 포뮬러의 한계에 갇혀서,

아니 그 수학적 포뮬러의 자명함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은밀한 의도를 숨기고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어왔던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가설'을

불변의 '진리'로 포장했던 것이지요.

..​

물론 과학자들이 과학이 단순한 사실에 대한 '기술(description)'에 불과함을 강조하면서

혹은 자신들의 연구 과정이 최종적으로 수학적 포뮬러의 예측 범주에 국한된다고 말하면서

과학의 윤리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온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근대 과학은 그들의 최상의 도구였던 ‘수학’ 속에

야비하게 숨어버리거나 아니면 스스로 갇혀버리게 되는데,

스스로를 새로운 물질문명을 열어가는 창조자(creator)임을 부정함으로서

창조자가 당연히 짊어져야 할 윤리적 책임과

불완전한 창조자로서 발생하는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자리잡은 수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과​

17세기 시작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들이 경쟁하듯이 만들어낸 20세기 문명이

끊임없는 혼란과 분열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드는 사람은 항상 있지만

그 결과에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경제학 또한 자신의 수학적,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

결과적으로 경제의 혼란과 분열의 중심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작금의 모든 경제 혼란에 대해,

잘못된 방법론에 근거하여 무책임한 경제 상황을 조장, 혹은 방조한

현대의 경제학이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경제학이 근대 과학과 아무런 상의 없이 그들의 과학적 방법론을 도용,

근대 과학이 갖고 있는 출생의 비밀과 성장의 내적 한계에 더해

근대 과학적 방법론 위에 실체가 불분명한

자신들 만의 공허한 용어들(terminology)을 추가해왔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가 근대 과학을 '수학'이 낳은 ‘중세(스콜라철학)의 서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근대 경제학은 그 서자를 닮고 싶었던 아류, 즉 모방자(imitator)였던 것입니다.

(사실 경제학 뿐만 아니라 '과학'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현대 거의 모든 학문들, 특히 현대 의학도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

물론 20세기 중반 이후에 기존의 경제학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복잡계 경제학, 행동 경제학 등이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면서

과거와 다른 새로운 관점들이 지금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을 통제하고 있는 경제 권력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여전히 20세기의 신고전파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수학적이지 않은 인간들을 수학의 틀 속에 가두어버리고 있지요.

침대의 크기에 맞춰 인간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을 여전히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20세기를 이끌었던 경제학의 놀라운 믿음과 신념이

그들이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는 무거운 현실에 짓눌리며

천천히 압사해 가고 있는 모습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의 시대를 구할 새로운 경제적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새 패러다임은 기존 패러다임의 단순성에 복잡함을 더하고,

예외 변수들을 통해 기존 패러다임을 분해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방법론을 새롭게 넘어서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인간들의 이기심을 기본으로

인간들의 변칙적, 혹은 예외적 행동을 처벌하며

예측 가능한 정상적(?) 인간들의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경제 이론을 만들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이상적 경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인간 자체를 개조할 수 있을지의

더 근원적인 고민에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북유럽 선진국들이 우리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이상적 사고들을 현실 경제와 사회에 실현해 가는 모습을 볼 때,

근대 경제학이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편협하며,

오히려 그 편협한 이해가 인간과 사회를 타락시켜온

주범일 수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과거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경제학의 우선순위를

원점에서 다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현실적이 된 결과

우리의 현실에서 더 이상 어떠한 의미 있는 해결책을 찾기 힘든

지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을 꾸지 않고 눈앞의 현실과 타협하는 개인과 사회는

늘 그 타협에 의해 더 큰 타락의 위기를 맞이하는 법이지요.

결국 어떠한 주도적 방법론이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그 방법론 자체의 힘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방법론에 제시해 주는 조건에 더 많은 사람들이 타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문의 세계도 결국에는 인간의 정치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기적인 인간, 무한 경쟁의 기본틀을 갖고 있는 지금의 경제학은​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대한 반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의 선택에 의해

우리 사회게 그렇게 변해 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지금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론적 배경이 꼭 필요합니다.

이론이라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이자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창시절 항상 과거의 이론들을 배웁니다.

지금의 문명과 삶을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기본적 생각들이 어떻게 형성된 것이지 배워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윤리시간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배우고,

데카르트, 뉴턴 등의 인류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기본적인 사칙연산부터 시작하여

방정식, 미분, 적분, 통계 등 과거 수 천 년간 인류가 쌓아올린

수학적 업적을 배워왔지요.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 과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가 왜 굳이 평생 쓸 일도 없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며,

말장난에 불과한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개념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정확히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뉴턴의 과학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었고

그 한계가 전반적 근대 과학은 물론 우리 일반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는 사회과학에 실증주의 개념을 도입한 오귀스트 콩트가

사회 과학의 타당성을 논하면서 저지른 실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하여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해석해 줄 수 있는 도구가 없는 상황입니다.​

한 때 뉴턴이 진리였던 것처럼 지금은 아인슈타인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일단 수학에 의해 진리임이 결정되고 나면

그 어떠한 의미있는 반성적인 사고도 받아들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수학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문학 부재'의 결과로 봐야합니다!

학생들은 왜 굳이 먼지 쌓인 과거의 유산을 끄집어내어

고리타분한 죽은 이론들을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더 좋은 시험 점수를 받기 위해

그 의미도 모르면서 열심히 외웠던 악몽만이 남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학창시절은 '인문학'에 대한 불편한 트라우마를 남기고

과거에 대해 더 배우고자 하는 잠재적 의지마저도 송두리째 뽑아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인이 된 이후에는 홍수같이 쏟아지는 수많은 가공된 정보들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헤매거나 어떤 일방적 주장에 쉽게 동조하고

그 주장을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게 되는 것이구요.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공교육의 목표는 학문의 의의와 중요성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문에 대한 의욕 자체를 박멸시키는게

주목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합니다.

그리고 교육에 관련된 지배계층의 음모가 있다면

단순히 무지를 조장하기 보다는

분석능력 자체를 무력화시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것일 겁니다.

..

제가 그간 철학과 과학에 관련된 내용들을 많이 언급해왔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의 우리 현실과 상관없어 보이는

플라톤과 스콜라 철학, 데카르트와 근대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 우리가 이루어낸 문명과 그 문명의 기반이 된 이론들

특히 현대 경제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화폐의 상징적 의미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현대의 화폐 제도를 논하는 것은 그 해석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즉, 현대의 많은 이론들이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이해할 수가 없고

그 이론에 대한 비난의 논리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보니

서로 자신의 논리에만 매몰되어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공격하게 되는 것이지요.

현대의 경제학 또한 과거의 모든 이론과 동떨어져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분야가 아닙니다.

경제학은 근대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모델로 해서 탄생하였지만

경제학이 다루는 모든 개념들은

철학(이념), 종교(상징과 해석), 인류학(교환)의 개념 없이는

결코 제대로 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제학은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경제학이 다루는 인간, 거래, 화폐, 시장 등 모든 개념이

현대 경제학이 만들어지기 오래전 수많은 상징과 의미 체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의 경제학은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 하에

인간의 거의 모든 활동을 경제학의 영역에 집어넣어

인간의 모든 활동을 경제의 관점에서 설명하되,​

그 어떤 것 하나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귀납적 일반화와 그 과정에서 관찰 가능한 범주의 것을

이미 관찰된 것의 범주에 집어넣어 버렸던 과학자들의 오류를

과거의 경제학자들도 그대로 따라갔던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의 상황이 그렇다면

현재의 경제학 모델(그 또한 여러 의견으로 나누어진)만을 바탕으로

디플레이션, 인플레이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논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요즘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당면한 경제 위기나

늘 논쟁의 대상이 되는 디플레이션과 하이퍼 개념에 대한 설명을 자제하고

좀 더 근원적인 인류학, 철학 개념들 설명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이유는

근대 학문의 근본적인 한계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상적인 경제적 개념을 논의 해봐야

핵심은 늘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세상 모든 것을 기본적으로 ‘권력’의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의 욕망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소유욕’이며 그 소유욕을 가장 확실하고 안정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혹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다!’란

서로 모순되는 삶의 조언 앞에 당황하곤 하는데,

결국엔 돈에 관련된 거의 모든 조언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 ‘돈’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는 수단인 것입니다.

‘돈’이란 결국 우리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수단으로

매슬로우의 가장 기본적 단계에서 최상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욕구 충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도구입니다.

즉, ‘돈’은 ‘권력’의 다른 표현인 것이지요.

우리는 지배와 피지배란 거대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이 권력의 중요한 두 개의 발현 과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명시적으로 실현하는 '정치적 장'이 있으며,

두 번째는 과학이던 경제학이던 이론을 만드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자신들의 권력을 그 이론 속에 직조해 넣는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했을 때,

‘칼’과 ‘펜’은 이 두 가지 권력 발현 형태에 대한 은유이며,

‘펜’이 ‘칼’보다 강한 이유는

‘펜’이 갖고 있는 권력 직조의 은밀성,

즉, ‘정당성’을 ‘날줄’로 하여 그 사이에 ‘씨줄’인 ‘권력’을 직조하는

권력 직조의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대 학문들은 이러한 학문함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고

어떠한 이론이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과정은

그 이론의 절대적 우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이론이 가져다주는 시장 효용성, 기존 권력에 대한 봉사,

즉, 그 이론이 특정한 조직과 개인들에게 주는

암묵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권력은 결국 대다수 무지한 대중들에 의해 지지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드러내 놓고 권력을 향유하는 집단과 함께,

은밀하게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학자, 전문가 집단,

그리고 언론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시장을 지배하는 대중들 또한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대중들은 지배계급의 지속적인 프로파간다에 의해

개인의 이익관계에만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관계 자체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로 인해, 마땅히 일어나야 하고 이미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회적 변화가 지체되거나

상향을 위한 적절한 변화의 시기를 놓침으로써

변화의 과정을 재앙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따라서 대중들은 명시적, 혹은 은밀한 권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그들의 권력을 확대시켜주는 수단으로서 결국 ‘악’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는 바이러스를 조심해야 하지만

일단 바이러스가 퍼지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를 조심해야 되는 것이지요.

..

어쩌면 우리는 고대 바벨탑의 교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문명이 애초에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문명의 이론적 기초가 우리의 신성한 지혜가 아니라

우리의 창조력 일부를 과거 아퀴나스가 언급한 Cardinal Sins,

즉 탐욕과 정욕, 질투와 자만과 섞은 결과라면

우리의 문명은 그 자체의 모순의 무게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운이 좋다면 제가 살고 있는 시대에

모든 걸 새롭게 창조하는 멋진 기회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군요.ㅋ)

참고로 우리가 쌓아올린 모든 과거의 바벨탑이 붕괴한 것은

점점 늘어가는 자체의 무게를 늘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우리 문명이 스스로 붕괴되는 모습들을 보고 있습니다.

오랜세월 계속되어 온 종교분쟁 등 고질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여전히 어떤 의미있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에너지, 환경 문제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스스로를 지탱하는데 힘겨워 보이는

부채 자본주의의 수많은 모순들..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요?

..

이제 마무리할까 합니다.

늘 그렇지만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글을 연결해서 쓰다 보니

쓰면서 다시 읽어보면 도대체 무슨 주제의 글인지 저도 헛갈리곤 합니다.

이번 글도 제목을 고민하다가 제가 좋아하는 Shelly의 시에서 제목을 따오기로 했습니다.

바로 ‘오지만디아스’라는 시인데,

오지만디아스는 기원전 13세기 이집트 람세스2세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셸리는 한 때 세상을 호령했던 그를 기리고자 만든 그의 조각상이

세월이 지나 폐허가 되어 사막을 뒹구는 모습을 보고

권력의 무상함을 시로서 표현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의 문명은 이 오지만디아스의 조각상의 운명과

비슷한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요?

과거 ‘나는 왕중의 왕!’이라 자부했던 오지만디아스였지만

지금 그의 부서진 조각상은 잔해가 되어

과거의 ‘영화’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문명이 후대의 눈에

또다른 오지만디아스의 폐허로 비춰지지 않기를 바라며

Shelly의 오지만디아스  전문을 올려드리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오지만디아스(Ozymandias)

                                                  by P. B. Shelly

 

나는 고대의 나라에서 온 한 여행객을 만났다.

그의 이야기다. 몸뚱이 없는 거대한 돌 다리 두개가

사막에 서 있다. 근처의 모래 위에는

사람의 깨어진 얼굴이 반쯤 묻힌 채 놓여있다. 찡그린 표정

주름진 입술, 그리고 차갑게 내려다보는 조소는

조각가에 대해 말해준다. 거기선 열정이 읽혀진다.

생명이 없는 것에 각인된 채 아직 살아있는 것은

그것을 빚어낸 손과 다듬어낸 심장의 고동이다.

그리고 받침대에는 이런 문구가 남아있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

나의 업적을 보라 너희 위대한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그러나) 곁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 웅대한 폐허의

썩어진 것들을 둘러싼 채 끝이 없고 텅 빈

적막하고 평평한 모래만이 멀리 뻗어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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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논산댁 | 작성시간 14.07.09 어제 저녁 대강 읽고는 오늘 다시 단정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어찌보면 본질은 두고 겉만 따르다보니 판단력에 문제가 생기겠죠..
    비빔밥님 말씀대로 다시 본질로 가야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 답댓글 작성자비빔밥(경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7.09 자세히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쓰긴 했지만 내용이 많이 난해해서 올릴까 말까 고민을 좀 했었거든요..^^
  • 작성자Hobo | 작성시간 14.08.05 제가 여기 자주 들어왔는데 님의 글은 처음 읽었는지..기억을 못하는지...암튼 지난 글들을 찾아서
    진지하게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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