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리더스 칼럼

모든 종교는 넘어섬을 위한 전 단계일 뿐이다!

작성자비빔밥(경기)|작성시간14.08.21|조회수728 목록 댓글 10

세월호 특별법은 여전히 표류중입니다.

지난주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무언가 현실적인 돌파구가 나오기를 바란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교황은 단지 위로와 평화의 메시지만을 던지고 갔을 뿐,

우리 현실에서 크게 바뀐 것은 없어 보입니다.

물론 교황의 선한 모습에서

우리나라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름 위안을 받은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벽안의 외국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모습을

좋게만 볼 수는 없더군요.

 

또한 가톨릭의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흑역사나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가톨릭의 범죄와

마피아와 연계된 검은 돈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종교의 이중성에 학을 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과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

현 교황의 겸손과 배려가 진심일지는 모르지만

얼굴마담인 교황의 선한 모습이

가톨릭의 어두운 면을 모두 덮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점은

그가 던진 희망 뒤의 어두운 이면일 것입니다.

..

많은 분들은 자신이 종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종교에 대해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 오고 있고

정치, 경제, 사회 등 우리의 모든 분야와

직,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어왔습니다.

모든 문화의 근본은 ‘종교’라고 강조한

철학자 Christopher Dawson이나

기독교를 정면으로 비난해 온

‘만들어진 신’의 저자 Richard Dokinson이나

결국 우리가 얼마나 종교적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가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근대에 들어 탈종교화가 대세가 된 듯하나

여전히 지구의 한 쪽은 수천 년 케케묵은 종교의 노예이며

다른 한 쪽은 탐욕의 신 맘몬(Mammon)의 추종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존재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인간 인신의 한계로 인해

모든 존재론적 질문은 결국 종교적 질문이 되는 것이며,

그 무지의 ‘본래성’을 회피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현실적 노력 또한

종교적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에덴과 고돔, 소모라는 모두

가장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도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종교적 틀을 벗어날 수 없으며

자신이 그 틀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종교적 상향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찾은 자신의 종교적 혹은 비종교적 답 안에서

반복적인 퇴행을 경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

문제는 정형화된 종교가 되었건

자신만의 신념이 되었건,

그 누구도 ‘방황 - 자기만족 - 권태’의

의식의 삼단계를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획일화된 종교가 지배하던 과거와 달리

우리는 존재론적 고민 앞에서

여러 가지 선택 중에 하나를 고를 수가 있습니다.

종교라는 만병통치약을 선택할 수도 있고

철학적 해독제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육체적 만족과 쾌락이라는 해열제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선택을 하지만

모든 선택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우리에게 나름의 ‘만족’을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다만 앞의 종교 또는 철학과 쾌락은

매우 중요한 관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진지한 종교와 철학은 스스로를 검토해 볼 수 있는

나름의 신념, 이론적 체계를 항상 제공하는 반면

쾌락의 탐닉은 스스로 검토해 볼 수 있는

나름의 체계 자체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떠한 형태의 ‘만족’이든

항상 시간이 흐르면 ‘권태’가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권태’가 엄습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만족을 주고 평안을 주었던

기존의 체계를 근본부터 검토하여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움을 향해 도전해 갈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체계가 주는 만족을 위안삼아

반복이 주는 퇴행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이지요.

그러나 쾌락에 몰두하는 경우에는

어느 순간 ‘권태’가 엄습했을 때,

그 권태의 원인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체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쾌락이 주는 ‘권태’는 ‘당혹감’을 가져오게 되고

이 경우 대부분 예외 없이 더 깊은 ‘쾌락’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처럼 말초적 쾌락이 발생시키는 ‘권태’는

더 강한 쾌락의 추구로 물리칠 수 있으며 (사실 미룰 수 있으며)

결국 ‘쾌락’의 크기만큼 ‘권태’의 크기도 커지게 됩니다.

(이 부분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이 우주의 진리를 통합적으로 그리고 세세하게

모두 이해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할 때,

우리의 삶이란 결국 더 높은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삶이 것이고,

쾌락주의자들이 오해와는 달리

구도의 삶이야말로 일상에서 ‘권태’를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오히려 쾌락으로 ‘권태’를 몰아내고자 하는 시도는

자신의 삶에 더 큰 ‘권태’를 몰고 오는 악순환을 만들 뿐이지요.

..

건강한 종교, 혹은 진지한 종교란

끊임없이 자신의 선 자리를 반문하며

더 높은 진리를 향해 도전해 나가는 종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역사를 분석해 볼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세 암흑시대는

마치 사춘기 청소년이 겪은 열병과 같은 시대였으며

표면상의 어두운 모습들과는 달리

진리를 향한 종교적 열정을 불태웠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제가 예전 글에서도 자세히 설명해 드린 적이 있듯이,

근대 과학적 사고는 고대 희랍의 논리적 도식에

중세 기독교의 사변적 노력이 결합하여 일구어 낸 결과이며

사변적 노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중세의 노력이 없었다면

근대 과학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 기독교의 변화 과정입니다.

결과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기독교는 사춘기 이후 성년기로 넘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정신적, 지적 퇴행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전성기를

중세 스콜라 철학 시기로 생각하며

그 이후 기독교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그간의 진지한 지적 노력을 포기하고

어설픈 신비주의와 종교적 궤변들에 쉽게 안착하면서

결국 세속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중세시대에 그들이 완성하고자 했던

진리의 지적 체계는 미완성인 상태로 흉물로 남게 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돗대기 시장의 장사치들로 변하게 되었지요.

과거 자신들의 화려한 전성기를 지키고자 했던 정치적 욕망이

그들 스스로를 깊은 심연 속으로 던져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후 진행된 거의 모든 자구노력들,

개신교의 탄생과 무한 분열,

가톨릭의 예수회의 탄생 등은

선조들의 종교적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거대한 지적 틀 속에서 종교적 만병통치약을 만들고자 하는

거대한 구상이라도 가졌었지만

그 후손들은 성분 불명의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사들로 추락하고 만 것입니다.

..

이러한 종교의 세속화가 갖는 문제는

의미 있는 종교적 체계를 던져주고

그 체계를 의심하고 실험하며 더 깊은 진리를

자극해야 될 종교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검토가 불가능한 허술 한 체계를 바탕으로

값싼 진리를 팔아먹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앙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종교적 만족에 이은 ‘권태’를 쫒아낼

스스로의 방책을 포기한 것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한

종교적 ‘마약’을 찾게 되며

결국 마약 중독자들이 보여주는

사고와 행동 양식을 보여주게 됩니다.

어떠한 종교든 스스로 검토할 수 없는

엄밀한 지적 토대가 없다며

이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신비주의 사기가 되거나

아니면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약장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즉, 인간의 이성의 기능에 부합하며

나름의 종교적 목적을 제시해주고

그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다음 단계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주는

지적 체계가 없는 종교는

인간 인식의 상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방황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종교라고 한다면

그 종교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멍텅구리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갖고 있는 ‘이성’에 대한 지속적 자극인 것입니다.

그 인간의 이성은 본래 신적인 능력이든

아니면 우리 신체에 귀속된 인간 본래적인 것이든

그 이성이 모든 예언과, 종교, 철학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세속화는

인간의 육체적 쾌락에 타협하는 저급한 세속화가 아니라

현실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지칠지 모르는 ‘이성’을 도입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세속화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의 기능을 제약하고

무의미한 죽은 기도만을 반복시키는 성직자는

그 자체로 인간 종의 멸종을 유도하는

몽매주자의 표상으로 성직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진정한 성직자는 자신의 믿음과 신념에

끊임없이 반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적인간이며,

이미 찾은 진리에 머물지 않고

그 진리를 발로 차고 물어뜯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

세속화된 죽은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들 스스로 자본가들의 협력자가 되는 것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지배 계급의 Cultural Hegemony를 구성하는데

온갖 협력을 마다하지 않았지요.

혹은 그 지배 계급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그럴듯한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하면

가난한 자들의 손과 발에 입을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왕처럼 대접받게 되는

신의 나라를 제시해 주며 그저 그들에게 값싼 동정을 주면 그만인 것입니다.

물론 종교의 사회적 순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신앙으로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오늘 이 순간에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고 계시는

수많은 성직자들에게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봉사 자체가 종교의 근원적 목적일 수는 없으며

일부의 선한 모습이 일부의 악한 모습을 다 덮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는 죽은 신에게 죽은 기도문을 반복해서 올리는 것도 아니며

가난한 자들에게 값싼 동정을 파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종교는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존재를 공부해 가는 것입니다.

광의의 의미에서 종교는 바로 우리의 삶자체이며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마도 그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신도들의 성장을 근원적으로 막고 있는 성직자들은

세상이라는 늪에서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의 손을 끌어 늪 위로 올린 후

벗어날 수 없는 쇠고랑을 채워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노예 상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방황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주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나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주는 지속적인 반복에 의한 퇴행을 의미하고

퇴행이야 말로 인간 정신의 최악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초록잎(경북) | 작성시간 14.08.21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작성자정호림 | 작성시간 14.08.22 깊이있는 지식수준이 부럽고
    님의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낌니다.
  • 작성자정호림 | 작성시간 14.08.22 종교의본질이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 부터 보호하고 안심시켜 그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구축해가는 수단이라고 본다면
    성직자들에게 종교가 우리의 삶에 디딤돌이 될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큰 바램이 아닐까요.
  • 작성자현란함 | 작성시간 14.12.11 신은죽었다. 믿는 순간 속는것이다. 네 맞습니다. 종교만큼 인류를 후퇴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란 참 이기적이에요. 장자가 말했듯 땅에 묻히면 땅속벌레에게 땅위에 버려지면 들짐승이 먹어 없어지는것을 뭘그리 집착을 하는지들...
  • 작성자아나(대구) | 작성시간 16.10.14 종교란 적당하면 몸과 정신을 의탁하기 좋지만 광신하는 순간 의미가 변질 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