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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부대 / 짜빈박 전투(1967년 1월 10일)

작성자느티나무|작성시간12.05.26|조회수4,313 목록 댓글 0

짜빈박 전투  (1967년 1월 10일) ... "허를 찔린 투망작전"

1. 제3대대 전술지휘소의 철수결정배경

제3대대는 목적자역 "35"에 대한 작전을 위하여 기상이 호전되기를 기다려 이른아침부터 대기상태에 있었다.나쁜 기상 조건하에서도 이미 제1대대 및 제2대대는 "진공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기지주변 마을에 대한 수색 및주민소개작전을 강행하고 있었으나 제3대대의 작전만은 공중기동 실시여부에 따라 그 성과가 크게 좌우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제3대대장 '조형남'중령은 지상이동에 대한 작전강행을 주저하고 있었다.

당일 실시예정인 목적지역 "35"에 대한 작전은 전날 실시했던 목적지역 "32"와 마찬가지로 공중기동에 의하여 서부 내륙쪽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 탐색하여야만 작전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지상기동에 의해서는 적을 내륙쪽으로 쫓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라고 믿고있는 대대장에게 성과가 전무했던 전날의 작전결과는 앞으로 남은 작전의 성과에 대해서까지도 짙은 회의를 품게 하였다.

09:00시가 가까워지도록 기상이 호전될 전망이 보이지 않자 제3대대장은 다음날로 작전연기를 결심하고 이를 여단에 건의 하였다.날씨는 여전히 우중충했지만 그로부터 얼마후 비는 멎었다. 참호속에 갖혀있던 대대 참모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밖으로 나와 대대장을 중심으로 지휘소옆 공지에 모여 앉아 더러는 C-Ration 통조림을 먹으면서 잡담으로 답답했던 마음을 풀고 있을때 여단으로부터 작전연기 승인회신이 하달 되었다.

비가 그치고 작전이 연기되자 대대장 및 참모들은 대대전술지휘소의 철수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남은 작전은 불가불 헬리콥터 지원여부에 달려있으므로 일단 철수 하였다가 기상이 호전되어 작전을 실시하게 될 때에 다시 전방진지로 나오자는 것이었다. 대대장의 결심에 따라 작전장교가 여단에 대대전술지휘소의 철수계획을 보고하는 동시에 이를 위한 헬리콥터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기불순과 여단의 계획상 헬리콥터 지원이 어렵게 되자 대대장과 참모들은 다시 대대전술지휘소의 도보이동 문제를 거론하게 되었고, 이 역시 대다수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보이동을 결심한 대대장은 이동개시 시간을 14:00으로 정하고 참모들에게 행군준비를 지시하였다.

당초의 철수결정이나 도보이동 결정과정을 살펴보면, 대대장이나 참모들에게 물론 그럴만한 동기와 이유눈 있었다. 즉, 일시적으로나마 작전이 연기되고 보니 대대장으로서 의당 가지게 될 대대전반에 대한 지휘면에서의 주지휘소 복귀의 필요성,전방중대의 비좁은 진지에서 대대전술지휘소 요원들의 장기체류로 인하여 초래될 혼잡과 불편등에 대한 배려, 그리고 철수를 위한 이동로 일체는 이미 제9중대 인원들이 대대와의 일상적인 업무연락 및 지상보급추진을 위하여 위험부담없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는 안전지대라는 인식 등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철히 판단해 볼때 이러한 동기나 이유들이란 작전상의 필연성이나 당위성이 희박한 것이었으며, 더우기 대대장 및 참모들의 이번 작전에 대한 소극성이 작용한듯한 인상이 짙어 그들의 불건전하고 비합리적인 판단 및 결정과정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대대장이 안이하고 불건전한 건의에 의존하기보다는 좀더 신중하고 현명하게 문제를 처리했다면 이 날의 "짜빈박전투"는 분명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2. 교전지역의 특징

지난 1966년 10월초, 여단의 중대전술기지 재배치계획에 의거, 제3대대는 대대전술책임지역의 서쪽 일대를 통제할 수 있는 197고지에 제10중대의 전술기지를 개설하는 동시에 제10중대로부터 1개소대를 차출하여 197고지의 북쪽 안디엠(2)-An Diem 마을 부근에 대대관측소를 운용하였다. 이 마을에는 '빈손'군 민병대 1개소대도 배치되어 별도로 관측소를 운용하고 있었으나 '투망작전'초기인 1967년 1월 7일 월남측 사정에 의하여 철수하게 됨에 따라 대대관측소가 이를 통합 운용하게 되었다.

제10중대가 197고지에 전술기지를 개설한 후, 적은 아군기지에는 전혀 접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남서쪽 1.8km 지점인 98고지를 중심으로 한 주변일대에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아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기지주변의 울창한 숲사이에겨우 개척해 놓은 임시 통로를 따라 기동을 하여야 했는데 그 때마다 항상 위험과 불편을 느꼈다.

그리하여 적활동 중심지에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하여 그 곳으로 적을 유인, 섬멸한다는 여단의 작전방침에 따라 1966년 10월 18일 제10중대는 진지의 편성 및 구축요건도 훨씬 좋은 98고지(지도상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중대내에서 통용되었다)로 중대전술기지를 옮겼다.

그후 아군의 부단한 정찰 및 매복으로 이 일대의 적을 제압하게 됨에 다라 제10중대 기지와 대대관측소가 있는 안디엠(2) 마을 사이를 불과 2~3명만으로도 아군의 왕래가 잦아졌고 우기에 접어 들면서 부터는 헬리콥터에 의한 재보급이 불가능할 때에는 대대주지휘소로부터 대대관측소까지 차량으로 추진되던 재보급을 약1개소대규모의 병력이 도보로 운반하는 경우도 점차 많아져 이 일대는 안전지대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지난 1월 3일 제10중대와 임무를 교대한 제9중대 장병들에게도 그대로 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임 대대참모들도 이러한 인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대대전술지휘소의 복귀문제를 거론했을 때 이들은 주저없이 도보이동을 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3대대 전술지휘소의 도보이동계획은 제9중대 전술기지로부터 안디엠(2) 마을까지 도보행군하고, 그 곳으로부터 526번 도로를 따라 차량편으로 대대주지휘소에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이동로는 제9중대 기지로부터 북쪽의 안디엠까지 도상거리 약3km, 도보이동 소요시간 약 40분의 거리이다.

제6중대 기지로부터 북쪽으로 뻗은 짧은 능선을 따라 폐허가 된 작은 짜빈박(2)-Tra Binh Bac 마을을 거쳐, 그 곳으로부터 다시 폭 1~2m의 좁은 소로를 따리 좌측에 수로지대인 개활지를 끼고 우측의 197고지 아래를 지나면 안디엠(2)에 이르게 된다. 길은 최초 197고지에서 서쪽의 개활지 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평평한 돌출부분을 끼고 우측으로 197고지 아래로 연결되어 뻗어 나간다.

197고지 서쪽 하단에는 10여채의 농가가 있는 외딴마을이 있었으니 모두 파손되었고 계곡 깊숙한 곳의 독립가옥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길은 이 외딴마을 앞에서 다시 좌로 꺽이면서 약200m의 수로지대를 가로질러 40고지 하단에 이르고, 다시 우측으로 40고지를 돌아서면 비로소 확 트인 개활지를 지나 안티엠(2) 마을에 다다른다.

제9중대 전술기지와 40고지, 그리고 197고지로 애워싸인 직결 약500m 크기의 수로지대는 197고지 하단으로부터 계단식으로 약간씩 낮아지면서 서쪽으로 펼쳐져 있으나 서쪽 역시 거의 폐허화 한 짜빈(Tra Binh)마을의 숲이 가로막고 있어서 마치 작은 산간분지를 연상케 하는 지대이다.

이처럼 3면이 고지로 둘러싸인 이 지대를 통하는 소로 역시 한쪽에 울창한 숲을 끼고 있으나 길을 포함한 이 일대 대부분이 안개가 끼지 않은 날이면 제9중대기지로부터 가시거리내에 놓여 있기 때문에 사실상 최근에는 적의 출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지대를 왕래하는 아군은 전혀 위험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3. 적 정

안디엠 마을과 제9중대 전술기지간의 빈번한 아군왕래를 오랫동안 탐지해 온 적은 아군의 지나친 방심과 취약점을 이용하여 보급물자를 운반하는 아군의 소대규모병력을 기습공격할 목적으로 증강된 1개중대규모(약200명)의 단대호 미세부대를 이 일대에 침투시켰다. 그 중에는 일부 비무장 병력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경기관총, 자동소총 및 장총 등 경장비외에 죽창, 곡괭이까지 공격대용무기로 보유하고 있었다.

40고지 서쪽지역의 적은 전일에도 제9중대 일부 병력이 안디엠(2)으로부터 제9중대 기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는것을 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적은 전날 야간 또는 이날 여명을 이용하여 197고지 하단 외딴 마을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에 주력을, 그리고 안디엠(2)쪽으로부터 예상되는 아군증원부대를 차단하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40고지와 197고지 사이의 접근로상에 배치하고 주력부대의 후방 계곡쪽에 있는 독립가옥에 지휘본부를 설치하여 각 매복부대와의 사이에 지휘용 유선까지 가설하였다.



4. 적침투에 대한 첩보

이러한 적의 움직임에 관련한 첩보가 전날 대대에 입수되었슴에도 불구하고 한 대대참모의 경솔한 조처로 인하여 대대는 이 첩보를 활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전날 대대가 목적지역 "32"에서 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안디엠(2) 마을에서 대민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던 대대민사장교 '양영구' 중위는 그 마을 주민으로부터 "1개중대규모의 월맹군이 안디엠(8) 마을 일대에 들어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당시, 이미 월맹정규군이 지역내 침투에 관한 첩보를 입수하고 있었던 여단은 전부대에 이를 확인하기위한 첩보취득임무를 부여하고 있었고, 이러한 첩보는 당시 아군의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했기 때문에 하급부대에까지도 비교적 널리 전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베트콩"부대와 월맹정규군이 아군에게는 외견상 식별이 어려웠으며 월남주민들은 언어관습이나 행동상의 특징등에서 쉽게 이들을 식별할 수 있었다. 이같은 중요한 첩보를 입수한 양중위는 언어상의 장벽으로 첩보내용이 확인리 어려운데다가 또한 대체적으로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월남민간인의 제보이기는 했으나 이를 요원하게 취급할 수 는 없었던 것이다.

오후 늦게 구대한 양중위는 대대본부 상황실(전술작전본부)에 근무중인 화학장교 '강용신' 대위에게 첩보내용을 알렸다. 원래 대대작전보좌관이었으나 신병으로 퀴논에 있는 제6후송병원에 입원했다가 '투망작전' 직전에 원대복귀하여 편제상 화학장교의 보직을 받아 대대상황실을 관장하고 있었던 강대위는 그날 저녁에 이 첩보를 무선망으로 대대전술지휘소에 있는 작전장교 '진우현' 소령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작전장교는 이 첩보를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고 일소에 부치고 말았다. 40고지 바로 서쪽에 있는 안디엠(8)은 제9중대 전술기지 북방 불과 1.8km 내외의 거리에 있는 마을로서 당일 작전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목적지역 "32"의 서측방, 즉 후방지역에 해당한다. 작전장교는 1개중대나 되는 적이 아군기지 가까이까지, 더구나 아군이 작전하던 지역 후방으로, 그것도 백주 대낮에 침투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여단의 일선대대 장교들 에게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류의 첩보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 첩보가 주무참모인 정보장교에게 통보되거나 또는 대대장에게 보고 되었던들 직능상의 책임 및 인식에 따라 이 첩보 내용이 좀더 신중하게 검토 되었을 것이다.

첩보를 해석, 평가하는 업무가 작전장교에게 있는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주요업무가 간혹 대대급에서는 선임참모인 작전장교에게 집중 또는 거기에서 조정되는 그릇된 관습에 의한, 선임참모의 독선으로 말미암아 적에 대한 공격작전을 펼 수도 있었던 호기를 상실하고 말았다.



5. 대대전술지휘소의 도보이동

대대전술지휘소 요원들이 이동준비를 하는 한편, 13:00시를 전후하여 제9중대의 일개소대는 기지 동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기지주변을 돌도록 되어있는 정찰로를 따라 주간정찰차 출발하였다. 물론 이 소대는 정찰임무 외에 대대전술지휘소의 이동간 유사시에는 이에 즉각 대처하라는 부가적인 임무도 띠고 있었다. 여전히 흐렸던 날씨는 다시 세찬 바람속에 가랑비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낮은 구름과 짙은 안개가 시계를 극도로 제한하였다.

대대전술지휘소가 이동개시를 여단에 보고한 것은 14:00시 였으나 경계소대의 출동지연으로 14:10분에야 제9중대 전술기지를 출발하였다. 대대장을 포함한 대대본부요원 31명과 제9중대에서 견걔부대로 차출된 1개소대로 구성된 이들 행군부대는 대부분 M1 및 칼빈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당시 교육용으로 극히 일부에게 지급되어 있었던 M16 신형소총은 전위소대에 1정, 그리고 대대지휘반에 1정 뿐, 지원화기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더구나 본대인 대대지휘반은 그 절반이 권총을 휴대하고 있는 장교와 통신병이었으므로 화력면에서는 그야말로 미미한 것이었다. 통신망은 여단, 대대주지휘소와의 교신을 위한 전술망이 각각 구성되어 있는 외에, 예비 무전기를 활용, 편법적으로 제9중대 전술망에 대대지휘반이 가입하여 이동간 행군부대를 지휘 하였다.

한편 197고지 서쪽 하단의 파손된 외딴 마을 일대를 중심으로 매복한 적들은 아군의 보급소대가 제9중대 기지로부터 보급을 수령하기 위하여 인디엠(2)를 향하여 출발할 때가 아니라, 소대가 안디엠(2)으로부터 보급물자를 수령, 복귀할 때에 기습공격을 가할 것을 기도하였슴에 틀림이 없다. 시간적으로 늦을수록 그들의 퇴각에 유리한 점, 짐을 맨 아군에 대한 공격상의 이점과 물자노획의 가능성 등을 적은 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은 그들의 척후병에 의하여 아군의 이동병력이 예상했던 소대규모를 훨씬 넘는것을 알고 약간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은 아군의 부대구성, 기동상의 약점과 그들의 지형적 이점을 감안, 곧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동시에 병력의 일부를 40고지 쪽으로까지 확장배치하게 되었다. 행군부대의 전위소대가 적의 주력이 매복하고 있는 외딴 마을 앞에서 왼쪽으로 구부러진 길을 따라 전방의 40고지를 바라보며 수로지대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을때, 본대인 대대지휘반은 그 뒤를 따라 마을  앞으로부터 활처럼 굽은 작은길로 행군중이었으며, 즉, 후방부대를 제외한 전위소대와 대대본부지휘반의 대부분은 분지와 같은 이 수로지대에서 적 매복대의 주력앞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행군하고 있었다.   

이 일대는 고지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안개는 더욱 낮게 깔리고 그만큼 시야는 더욱 제한되는 곳이다. 외부와의 통신도 제9중대와의 사이에만 유지되고 있을 뿐, 여단 및 대대 주지휘소와의 사이에는 197고지의 전파장해를 받아 이 지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두절되었다. 전위소대의 첨병이 도보이동거리의 꼭 절반지점을 지나고 있던 이 때의 시간은 정확이 14:30분 이었다.



6. 적의 기습공격

박광남 일병과 함께 첨병으로 앞서가던 제2분대 1조장 기세창 병장은 197고지 하단쪽으로부터 전방 40고지쪽 숲속을 향해 낮은 포복의 자세로 길을 건너는 2~3명의 적을 발견하였다. 40고지쪽으로 이동배치중이던 이 적을 아군첨병은 불의에 아군과 조우한  적이 도주하는 것으로 속단하였다. 기병장은 뒤따르던 박일병을 향해

"적이다!"

외치며 우뚝 선체로 움직이는 적을 겨냥하여 2~3발을 사격하였다. 행군대열은 일시에 전진을 멈추었다. 전위소대는 자동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경계태세를 취하였지만 대대지휘반의 일부 병사들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아군의 위협사격 정도로 속단하여 우뚝 서 있기도 하였다. "전방 숲속으로 적 2~3명이 도주한다" 는 보고를 받은 소대장의 추격명령에 따라 전위소대가 다시 행동을 개시하려는 순간, 우측 197고지쪽으로부터 적이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여 왔다.

행군부대는 일제히 길 좌측의 물이 잠긴 논바닥에 산개하여 좋은 은폐물이 되지도 못하는 낮으막한 뚝에 의거하고 적에게 응사하였다. 논두렁에 엎드린 첨병들은 40고지쪽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적들은 일제히 전위소대와 대대지휘반의 선두그룹을 향해 화력을 집중하여 사격을 가해왔다.



7. 전위소대의 전투상황

피아간의 한동안 불꽃튀는 사격전이 계속되었으나 전세는 아군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였다. 하나 둘 전사상자가 속출 하였다. 낮으막한 둑을 은폐물 삼아 대항하고 있는 아군에게 산발적이나마 적의 유탄이 명중하기 시작하였다. 논물 속에 엎드려 최초상황을 중대에 보고하고 있던 통신병 신유웅 상병이 적의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불리한 개활지에서는 더 이상 대대지휘반의 엄호는 물론, 적에게 대항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전위소대장 김태철 소위는 분대장들에게 행군방향이던 40고지쪽으로 일제히 추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때 40고지 방향에서도 총탄이 날아왔다. 소대장이 등과 머리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40고지쪽으로부터 날아오는 적의 사격은 치명적이었다. 가장 가까운 첨병과는 불과 수류탄 투척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수류탄을 마구 던지던 첨병들도 모두 머리에 총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제2분대장 송관석 하사는 분대의 일부 사격을 40고지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엄호를 하도록 하고 결사적으로 전사한 첨병쪽으로 포복하여 기어갔다. 분노에 찬 분대장은 수류탄을 뽑아 던졌으나 그도 역시 머리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적에게 완전히 노출된 전위 제2분대는 하나 둘씩 장렬하게 쓰러져 갔다.

전위소대의 결사적인 대항으로 적들도 역시 전위소대와의 사이에 있는 수로지대를 건너오지 못하고 있었으나, 전위소대는 더할나위 없이 불리한 상황하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 전사상자는 늘어만 갔고 빗물과 흙탕물로 뒤범벅이 된 총기마저 제대로 작동이 되지를 않았다. 아군주변의 수로지대는 점점 피로 물들어 가고 있는 가운데 전위소대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제1분대 박광선 하사는 이제 얼마 남지않은 병력으로라도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전사상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수로지대를 서쪽으로 횡단하여 한계단씩 낮은 논둑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소대장의 M16 소총을 집어들고 자동소총수 윤광열 상병과 함께 적의 사격에 맹렬히 응사하면서 남은 소대원들로 하여금 서쪽으로 수로지대를 횡단케 하였다. 그러나 물에 찬 수로지대를 횡단하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아군이 움직일 때마다 적의 사격은 어김없이 집중되었다. 적의 살상지대를 벗어나려는 이 마지막 시도도 사실상 수포로 끝났다. 아군의 저항이 현저히 줄어들자 숲속으로부터 한 무리의 적이 몰려나왔다. 적들은 도로주변의 아군 전사상자들에게 확인사살의 만행을 거듭하고 화기와 통신장비를 절취하여 갔다. 수로지대를 벗어나려던 아군의 마지막 시도로 약간명이 적의 유린을 면하기는 했으나 적의 총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복부관통상을 당한 변운한 일병은 다음날 아침에야 아군에게 구출 되었으나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1월17일 필리핀의 미공군 클라크 기지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전위소대원중에는 교전초기 40고지방향으로 진출하여 숲속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아군에게 구출된 이상운 일병만이 전혀 부상조차 입지않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날씨와 지형, 병력과 화력 등 모든면에서의 악조건을 무릅쓰고 최후의 1인까지 장렬히 적과 싸운, 불과 한시간 이내의 애절한 순직이었다.



8. 대대본부 지휘반의 전투상황

전위소대의 뒤를 바짝 뒤따르고 있던 대대지휘반은 최초의 총격을 듣고 일시에 전진을 멈추었으나 일부 병사들은 아군의 위협사격 정도로 속단하였거나 또는 영문을 몰라 우뚝 선 체 어리둥절하고 있는 가운데 적의 기습적인 사격을 받았다. 대대지휘반 선두에서 작전보좌관을 뒤따르던 통신병들은 적이 노리는 좋은 사격목표였다. 대대전술망을 맨 통신병 장정상 병장은 교신을 시도해 보지도 못한체 적탄에 쓰러졌고, 여단전술망은 197고지의 전파장애로 이미 쓸모없게 되어 있었다.

본대의 중앙에 위치한 대대장 역시 적의 사격권 안에 있었다. 피아간 격렬한 사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미루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으나, 쏟아지는 비와 자욱한 안개로 시야가 흐려 정확한 사태파악이 어려웠다. 대대장은 유일하게 이용가능했던 제9중대 전술망으로 제9중대장에게 즉각 출동을 명하는 한편, 포병지원사격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곧 197고지의 장해로 포병사격마져 불가능함을 알았고 전위소대 통신병이 전사하자 통신이 두절되어 전위소대의 전황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피아간의 총격전은 더욱 격렬해 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은 지형적으로 불리할 뿐만 아니라, 병력 및 화력면에서도 열세에 있슴이 들어났다. 개활지대에 있는 대대지휘반의 일부와 전위소대에게는 시시가가으로 위험이 가중되고 있었다. 대대장은 이들 선두병력으로 하여금 개활지를 빠져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얼마 안되는 후미부대의 화력을 집중지원하여 보았으나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너무나 근거리에서 적의 집중사격을 받기 때문에 기동이 불가능 하였다.

미해병 항공연락장교 오스왈트(Larry J. Oswalt) 대위는 개활지를 빠져 나오기 위하여 논두렁을 뛰어넘다가 다리에 적탄을 맞아 논물속에 엎어진체 움직일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적들은 그 일부가 마을 쪽으로부터 197고지 하단의 평탄한 숲과 잡초지대를 따라 아군후미쪽으로 우회기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부는 대대지휘반 정면으로 육박해오고 있었다. 권총을 뽑아든 대대장도 사격을 가하였다. 대대선임하사관 조병세 주임상사의 M16 소총이 그런대로 위력을 발휘하여 육박해오는 적을 일시적으로나마 저지시켰다.

대대장은 이제 2개소대 밖에 안되는 제9중대의 투입으로 이 엄청난 적을 격퇴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가적인 증파부대 투입이 필요했다.

"더 지체하면 위험합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대대장의 안전을 염려하던 대대선임하사관이 독촉했다,

"빨리가서 여단에 증파부대를 요청하여야 합니다."

권고의 정도를 넘어 강요에 가까운 대대선임하사관의 거듭되는 독촉을 받은 대대장은, 한편으로 부대를 계속 지휘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직접 여단에 증파부대를 요청하기 위하여 제9중대 전술기기로 향하였다. 그야말로 위기절정의 순간에 대대장이 교전지역을 벗어나고, 전위소대장마져 전사함으로써 아군에게는 '지휘부재'라는 가공할 현상에 부딛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유일한 M16 소총 소지자인 대대선인하사관이 연락병과 함께 대대장보호라는 구실하에 함께 이탈해 버림으로써 가뜩이나 변변치 못했던 대대지휘반의 화력은 더욱 약화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대장의 뒤를 이어 대대지휘반의 후미병력까지 뒤로 물러남으로써, 아군후미부대를 처단한 뒤에 선두부대를 포위공격하려는 적의 기도를 돕는 결과를 빚었고, 그만큼 개활지에 고립된 아군의 전위소대와 대대지휘반 선두그룹의 상황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대대지휘반 선두그룹은 처음부터 가장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보잘것 없는 병력과 화력으로 개활지의 중앙, 적주력의 정면에 대치하여 그 어느쪽도 진출이 어려웠다.

작전보좌관 조경식 대위와 포병관측하사관 김충일 중사, 4.2인치 박격포관측하사관 차용주 중사, 작전하사관 김길우 하사 등 노련한 하사관들이 주축이 되어 용전분투 하였으나, 적의 집중사격을 받아 전사상자가 속출하였다. 군의관 김수현 중위는 그 자신이 적의 유탄에 하복부 파편상을 입었으나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하였다.

드디어 아군후위부대 공격에 성공한 적들은 먼저 대대지휘반 선두그룹쪽으로 공격해오기 시작하였다. 호루라기와 함성이 울릴때마다 적은 육박해 들어왔고, 무수한 수류탄이 날아왔다. 대대본부요원들은 수류탄조차 제대로 지니고 있지 않았다. 왼쪽어깨에 총상을 입고도 혼신을 다한 작전보좌관 조경식 대위의 지휘하에 대대본부요원들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끝내 적에게 모두 유린 당하고 말았다.



9. 포병의 활약과 제9중대의 출동상황

전투중 교전현장에서 시종유지된 유일한 통신망은 포병연락장교와 제9중대 전방관측장교 사이에 교신됨 포병사격지휘망이었다. 제9중대 전방관측장교 양석교 중위는 대대본부요원들이 출발한 뒤 포병사격지휘본부에 제3대댇 전술지휘소의 출발상황을 보고하였다. 얼마뒤 행군부대 진행방향에서 나는 총성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동중인 포병연락장교를 호출하였다.

제9중대 전방관측장교와 교신중 적의 기습사격을 받은 포병연락장교 강신호 대위는 곧 포병사격을 요청하기 위하여 사격지휘본부를 호출하였으나 197고지의 전파장해로 교신이 안되어 제9중대 관측장교에게 81mm 박격포 사격지원을 요청했다. 제9중대 전술기지에는 81mm 박격포 1개반과 106mm 무반동총 1개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제9중대 기지로부터 약 1.3km 거리의 교전지역은 그 일부가 숲에 가렸을 뿐만 아니라 낮게 깔린 안개로 관측이 불가능 하였다. 관측장교는 40고지에 대한 사격임무를 106mm 무반동총 분대에 부여하고, 81mm 박격포는 197고지 서쪽 하단으로 좌표를 정해 제1탄을 발사하였다. 탄착지점이 너무 멀다는 포병연락장교의 관측통보에 따라 '줄이기200'을 하여 사격을 계속하였다.

아때 포병대대 사격지휘본부에서는 처음부터 무선망을 청취하고 있었으나 포병연락장교와의 직접교신 불능으로 제9중대 관측장교를 통해 부분적인 교전상황을 보고받으면서 전포병화력을 교전지역으로 조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전지역은 197고지로 인하여 사각지대일 뿐만 아니라 피아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사격지원이 불가능 하였다. 부득이 교전지역 외곽에 대한 차단사격만을 실시할 수 밖에 없게 되므로서 이날 전투에서 포병은 적에게 가장 두렵고 위협적인 존재이던 포병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였다.

한편 최초로 전위소대 통신병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은 제9중대장 김윤영 대위는 정찰중인 제1소대장 김원식 소위를 호출. 교전지역으로 진출케 하고 대대관측소의 제3소대와 기지내 잔류병력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기지내에는 환자와 각종 근무자들뿐, 출동준비를 갖춘 병력은 60mm 박격포반대원 3~4명에 불과하였다. 조급해진 중대장은 몇명되지도 않는 81mm 박격포대원까지 출동시켰다. 관측장교는 81mm 사격지원의 우선 및 긴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중대장은 81mm 박격포반을 포함한 10여명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이리하여 유일한 지원화기이던 81mm 박격포마저 10여발을 발사한 뒤에 중단되고 말았다.

관측장교 양중위는 중대장을 수행할 경우, 저지대로 내려가면 사격지휘본부와는 그의 통신마저 두절될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포병사격지휘본부의 지시에 따라 중대기지에 남아서 105mm 곡사포사격을 유도하였다. 이때 포병은 교전지역에 대한 고사계사격까지 시도해 보았으나 197고지 전사면에 걸릴뿐이어서 끝내 적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을 주지 못하였다.

제9중대장은 짜빈박(2)(Tra Binh Bac) 마을에 이르러 제1소대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제1소대 선임하사관이면서도 60mm 박격포반장을 겸하고 있어서 이 날의 소대정찰에는 나가지 않았던 황병호 중사의 인솔로 중대본부요원들을 먼저 진출시켜 행군부대의 후위분대인 제2소대 3분대와 합류케 하였다.



10. 제1소대의 반격작전

제9중대 1소대가 뒤이어 교전지역에 도착한 것은 15:30분, 사실상 전위소대가 이미 적에게 유린을 당한 뒤였다. 제1소대는 적전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적의 맹열한 사격을 받아 부상자만 늘어나 전진을 못하고, 대대지휘반 후미의 일주 부상자 구출에 그쳤다. 미해병 항공연락장교 오스왈트 대위도 이때 구출되어, 그들의 무선망을 이용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뒤늦게나마 항공지원을 받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1소대는 수차 마을쪽으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이 불가능 하였다. 16:30분경, 소대의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황병호 중사를 주축으로 한 약 1개분대의 병력이 197고지의 하단을 따라 우측으로 선회기동하였다. 숲과 잡초를 헤치며 약 100m쯤 전진하였을 때 전답 언저리의 나무울타리를 등지고 있는 적 1명을 발견하였다. 측방을 감시하는 적의 전초임에 틀림없었다. 은밀히 접근하여 이 적을 사살하고 장총 1정을 습득하였다.

이 우회기동부대가 적과 마주치게 되면, 이들의 지원사격하에 공격을 단행키로 된 소대장으로부터, 오히려 그와 반대로 빨리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뒤늦게 이때에야 지원된 무장 헬리콥터가 곧 도착, 공중공격을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디어 속칭 '휴이'(Huey)라는 UH-1e형 무장헬리콥터가 대거 8대나 날아왔다. 교전지역 상공을 선회하던 헬리콥터가 미해병 항공연락반의 유도를 받아 차례로 적진을 향하여 공중공격을 시도하였다. 적들도 대공사격을 가해왔다.

불행히도 헬리콥터 1대가 조종사의 부상으로 아군후위부대의 바로 후방 개활지에 불시착했다. 미해병 항공연락반이 먼저 달려가 구출해낸 조종사는 대퇴부 옆 급소부분에 관통상을 입었었다. 헬리콥터 편대는 기상관계로 오래 체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적에게는 헬리콥터의 출현이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철수의 계기가 되었다.        



11. 제3소대의 반격작전

한편, 출동명령을 받은 제3소대장 전우창 소위는 중대장의 불같은 독촉에 쫓겨 긴급출동이 가능했던 병력만을 이끌고 관측소를 출발하였다. 2개분대에도 못미치는 병력이었다. 전우창 소위는 이미 용안작전시 대대규모의 적기습공격을 받았던 중대야간방어전투에서 적의 주공격을 물리쳤던 전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역전의 용사엿고, 그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정의감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곧기 때문에 중대장병 사이에 "막대기" 또는 SOF로 통하는 소대장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전투경험과 성격으로 안하여 이날 적의 기습상황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근본적으로 소대임무에 비추어 상황이 불리하기는 했으나, 출동장병 규모나 적과 마주쳐 전진해 나갈때 무모했던 행동등으로 미루어볼 때, 소대장이 그럴만한 근거도 없이 적을 과소평가하고 상황판단에도 요원했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소대는 안디엠(2)에서 526번 도로를 횡단하여 197고지 북서쪽의 돌출부분을 지나 40고지 방향으로 계속진출하였다. 아군의 증원부대를 차단하기 위한 적의 매복대가 있슴을 알지 못하는 제3소대는 40고지를 향하여 개활지를 횡단하고 있엇다.교전지역에 점점 접근할수록 총성은 더욱 요란스럽게 들렷다. 앞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은 전방에 대한 경계와 관측마저 부실하게 하였다. 제3소대는 40고지 전방에 있는 약 100m폭의 개활지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일단 전투대열을 정검하고 개활지를 횡단했어야 할 소대장은 마음만 앞서 개활지의 논둑을 따라 앞장서 계속 전진하였다. 소대원들은 20m쯤 뒤로 처져서 따라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갑자기 개활지 건너편 적의 매복대로부터 일제사격을 받았다. 소대는 전진을 멈추고 응사하였으나 그순간 앞서가던 소대장이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를 보고 뒤따르던 맹행남 병장과 김영춘 일병이 달려가 소대장을 끌어안다가 그들 역시 적의 집중사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고 염규진 일병은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피아간에 개활지를 가운데 두고 대치된 상태에서 사격전을 계속하였으나, 병력과 화력이 열세한 제3소대는 가까스로 염규진 일병만을 구출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20:45분 대대관측소로 철수하였다. 이날 제3소대 전사자를 보호하지 못했던 제9중대는 다음날 전사자 수습중, 적이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 폭발로 수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적은 간교하게도 죽은 전우창 소위와 그의 대원들의 겹쳐쌓인 사체사이에 수류탄으로 부비트랩을 장치해 두었던 것이다.



12. 여단본부의 조치

당시 여단과 예하대대간의 주통신수단응 무선망이었다. 여단전술작전본부에서는 24시간 여단전술망을 운용하는외에, 추가설치해 놓은 무전기를 이용하여 필요시, 각 대대전술망과 포병사격지휘망을 감청하여 왔다. 물론 이러한 도청결과는 아군작전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았으나, 때로는 지나친 간섭을 야기하여 오히려 예하부대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어쨌던 이날 교전현장의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여단은 포병사격지휘망의 감청결과로 상황발생 사실만은 비교적 빨리 인지할 수 있었으나, 감청할 수 있었던 것은 포병사격지휘본부의 일방적인 대화뿐이었기 때문에, 상황의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게 된것은 15:00시가 지나 포병사격지휘본부의 보고를 받은 뒤였다.

보고를 받은 여단장은 항공지원요청과 증원부대 투입준비를 작전참모에게 지시하고, 곧장 포병대대본부로 차를 몰았다. 교전부대의 직접보고도 아닌 간접보고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던 여단장은 상황의 긴박성에 비추어 사태파악의 신속한 파악, 그리고 현지 대대장과의 교신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포병대대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비극적 이었고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대대장과으이 연락마저 불가는하였다. 이때 대대장은 교전지역을 벗어나 제9중대 전술기지로 이동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인 사태에 대처하는 여단본부의 노력도 순조롭게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3MAF(미해병 제3상륙군사령부;The 3rd Marine Amphibious Force)에 긴급요청한 항공지원은 기후관계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한편 여단아 즉각 증원가능한 부대도 여단예비인 제10중대 뿐이었다. 이낳 탐호이(2)마을 '진공작전'을 마친뒤, 여단예비로 전환되어 여단본부 지역내의 새 진지로 이동중이던 제7중대는 이동 노상에서 부비트랩 폭발로 부상자까지 발생하여 'MADVAC(의무후송;Medical Evacuation)을 요청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여단은 제10중대 외에도 이미 당일 작전을 마친 제1대대 및 제2대대로 하여금 각각 1개중대의 출동준비를 갖추게 하는 한편, 3MAF에 거듭 지원을 요청한 결과, 근접항공지원을 위한 무장 헬리콥터 편대와 별도로 증파부대 투입을 위해서 긴급대기용 CH-46 시누크 헬리콥터 3대만을 겨우 지원받게 되었다.

그나마도 시간적으로 너무 늦게 지원되어 제10중대의 1개소대만이 첫번째로 교전지역에 투입되었고 , 다른 1개소대가 두번째로  제9중대 기지에 증원되어 야간기지 경계를 보강하였다. 그후 탄약보급과 전사상자 후송을 위하여 세번째로 날아간 헬리콥터는 착륙조명등을 보고 가해오는 적의 대공사격으로, 착륙하지도 못한체 탄약만을 보급하고서는 돌아가 버렸다.



13. 제10중대의 증원

17:30분경 제10중대장 박용하 대위를 비롯한 소수의 중대본부요원과 제1소대를 첫번째로 출발한 헬리콥터 편대는 불량한 기상과 교전지역에 낮게 깔린  짙은 안개 때문에 착륙을 취소하고 여단본부지역으로 회항하다가 여단의 착륙강행지시를 받아 다시 교전지역에 접근, 18:00시경에야 적의 저항없이 교전지역내 수로지대의 남서쪽에 착륙하였다. 바로 이 증파부대가 착륙하기 직전에 있었던 무장 헬리콥터 부대의 공중공격으로 인한 타격을 받은 적은 철수준비에 급급하여 아군증파부대 헬리콥터에 대해서는 저항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까지도 교전부대의 대대전술망이 회복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피아간의 대치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던 제10중대장은 착륙즉시 일대의 논둑을 이용, 병력을 산개 배치한 뒤, 가까스로 육안관측에 의해 대대지휘반 잔류병력의 위치를 확인, 합류하고 제1소대는 40고지 방향으로 진출시켰다. 이리하여 당일의 일몰시간인 18:55분도 훨씬 지나 진격을 개시한 제1소대가 40괴 능선의 남서쪽 하단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속이었다. 더 이상 숲과 어둠을 헤치고 전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제1소대장 조성국 소위는 다른 전진로를 택하기 위하여 이미 숲속에 들어서 있는 소대병력을 하단의 숲 밖으로 후진시켰다.

그러나 때마침 40고지 남쪽의 하단을 따라 서쪽으로 철수를 개시한 적의 일부와 뒤섞여 삽시간에 혼전에 빠지고 말았다. 피아간 사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태권도와 죽창의 대결이었다. 1대 1의 대결에서는 아군이 단연코 우세했다. 철수에 급급했던 적들이 결국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제1소대장도 부대를 수습하기 위하여 후방의 20고지로 소대를 집결시켰다. 어둠속에 정확한 전과를 확인할 수 는 없었으나 위생병 권혁도 병장이 맨주먹으로 적의 소총 1정을 취득하였고 아군의 피해는 약간명이 적의 죽창에 다친 정도였다.



14. 지휘체제의 회복

최초 격전의 와중에서 대대장의 교전지역 이탈로 야기된 '지휘부재'현상은 제10중대가 투입된 뒤에야 수습되었다. 제9중대장이 중대전술망을 가지고 이미 출동한 뒤에 제9중대 고지에 도착했던 대대장은 대대전술망으로 대대주지휘소에 연락하여 여단에 증원부대를 요청케 하였으나 그때 여단은 이미 포병사격지휘본부의 보고를 받아 필요한 조치를 취한 뒤였다. 그후 대대장은 중대기지의 예비무전기를 활용, 여단전술망을 회복하고 상황전말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교전지역에서는 이미 적에게 탈취당한 3대의 무전기 외에도 예비무전기를 포함한 2대의 무전기가 있었으나 지휘체제의 마비로 이들 무전기를 신속히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제9중대와 제10중대에 대한 대대의 작전지휘는 물론 이들 양중대간의 협조된 작전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제10중대의 일부가 증원된 뒤에야 교전지역에서는 작전장교에 의하여 부대가 수급되고 통신망도 회복되었으며 제9중대장은 야간기지 방어를 위하여 중대기지로 복귀하였다.

교전지역의 작전부대는 수급되었으나 간간이 적의 사격은 계속 되었으며 어둠으로 인하여 공격작전은 불가능 하였다. 전사자와 추락된 헬리콥터를 보호하기 위하여 부대는 작전장교 지휘하에 야간경계조를 급히 편성하여 방어를 실시하였다. 한편 무장헬리콥터의 공중공격을 받고 철수하려던 적들은 제10중대 1소대와의 불의의 접전으로 퇴로가 일시 차단되자 이따끔 사격으로 저항을 계속하면서 197고지 동쪽으로 다른 철수로를 택하여 자정까지에는 완전히 퇴각한 것으로 보였다.

다음날 07:10분 제9중대 1소대와 제9중대 기지에 증원된 소대를 포함한 제10중대(-)가 교전지역 일대에 대한 탐색작전을 폈으나  접전은 없었다. 15:30분까지 전사자를 후송하고 일부장비를 수집하는 한편, 파손된 헬리콥터도 기체를 분해하여 15:00시까지 후송하였으며 16:00시 모든 병력이 제9중대 기지로 철수 하였다.

한편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당일 계획된 작전을 중지하고 작전대기 하였다. 제3대대 전술지휘소의 잔존병력과 제10중대는 하루를 더 제9중대 기지에서 대기한 뒤, 12일 오후에 헬리콥터 지원을 받아 각각 대대지휘소와 여단본부지역으로 복귀하였다.



이 전투에서의 전과와 손실은 다음과 같다.

전과: 사라 18명, 추정사살 25명, 소총 2정, 실탄 250발, 대검 1개, 탄창 2개, 수통 2개, 탄띠 2개, 곡괭이 3개, 죽창 1개, 기타장구 3점.

손실: 전사 32명(후송중 전사자 포함), 부상 30명, 자동소총 6정, M1소총 8정, M16소총 1정, 칼빈소총 8정, 권총 1정, M40유탄발사기 2정, AN/PRC-10무전기 3대, AN/PRC-6무전기 1대.

여단은 "짜빈박 전투"후의 부대정비를 위하여 목표지역 "33" 및 "35"에 대한 제3대대의 작전을 중지시켰다.



[전투 교훈]

정보의 중요성

제3대대전술지휘소가 복귀하기 위하여 도보이동을 실시하기 전날, 안디엠(2) 마을에서 대민지원활동중이던 대대민사장교가 그 마을 주민으로부터 입수한 "1개중대 규모의 월맹군이 안디엠(8) 마을일대에 들어와 있다."는 첩보가 대대전술 지휘소의 작전장교에게 전달 되었다. 이 첩보는 주무참모인 첩보장교에게 통보되거나 대대장에게 보고되지도 않은체, 신뢰성이 희박하다는 작전장교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해 무용화 되었다.
이 첩보를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대대는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었던 결정적인 기회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도보이동중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이 사례는 불확실해 보리는 첩보일지라도 이를 소홀히 다룸으로써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동시에, 첩보의 중요성을 대변해주는 좋은 사례의 하나이다.

지휘관의 책임

전투간 대대장의 기본임무는 전투지휘이다. 대대장의 적절하지 못한 상황판단과 부적절한 결심으로 말미암아 '지휘부재'현상을 자초했다. 지휘착오나 지휘부재가 가뜩이나 열세한 전투력을 더욱 약화시켰고, 이로 인하여지휘부재중 실시된 반격작전 및 부대증원도 사실상 무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여하한 상황하에서도 부대의 성패에 대한 모든 책임은 지휘관만이 진다. 보병대대교범은 이를 보다 구체화하여 [대대의 성공 또는 실패에 대한 책임은 대대장만이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3대대장 역시 이러한 지휘상의 기본적 원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전투의 결과가 확연해진 뒤, 비통에 잠겨있던 대대장은,

"대대장병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그들과 함께 목숨을 바쳤어야만 했다"

고 스스로를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늦은 자책이었다. 지휘결함 및 지휘부재가 '짜빈박 전투'의 실패를 자초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휘상의 결함만이 '짜빈박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 유일한 요인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 전투를 주의깊게 고찰함으로써 전투의 제반국면에 따라 각급제대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교훈을 찾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중기동수단문제

헬리콥터는 월남전을 상징할만큼 작전상의 기여도가 눈부신 것이었지만, 짜빈박 전투에서 본 바와같이 때로는 작전이 헬리콥터 운용계획의 영향으로 크게 차질을 초래한 경우를 해병여단은 때때로 겪어야 했다. 미군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공중기동은 자체보유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기상의 영향이 크긴 했지만 긴박한 상황에도 한정된 헬기지원으로 말미암아 원활한 작전을 할 수 없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무선장비 및 총기

당시 한국군은 밀림이 많은 월남전에서는 부적합한 성능도 미약한 AN/PRC-10을 장비하고 있었다. 신형무전기 AN/PRC-25 로 대체지급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었으나 당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의해 1차로 취득되었던 신형무전기가 해병여단에는 29대가 지급되어 투망작전 후반기에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 지급이 며칠만 빨랐어도 아군작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을 갖게한다. 당시 한국군이 절실하게 갈망하였던 M16 소총과 신혐 AN/PRC-25 무전기가 소요에 충족되까지에는 많은 시일을 요했다.

주목해야될 적의 전술

투망작전을 마친 여단은 작전결과를 분석평가하고 이후의 작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했으나, 작전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진지한 검토가 미흡하였다. 짜빈박 전투시 적매복대의 유선사용사실이 주목할만한 적의 전술로써 거론되었으나 예하부대에 전파되지 못하는 브리핑 위주의 검토가 되고 말았다.  다음작전이었던 "푸롱(Phu Long)전투"에서 제6중대가 작전에 투입되어 월맹군이 깔아놓은 야전용 유선을 발견하고도 이전에 아군이 사용했던것으로 착각하여 그대로 지나쳤다가 후방으로부터 적매복대의 집중공격을 받는 위기를 맞게된다. 1967년 2월1일의 "강구전투"에서도 적의 매복대에 의한 기습공격으로 손실을 입었다.

짜빈박 전투이후의 개황

투망작전이 개시된 1967년 1월 5일을 전후하여 여단작전지역의 서부산악지대에는 월맹군 제2사단본부와 그 예하부대인 월맹군 제21연대(2,000명)가 이동해 옴으로써 여단과 대치한 적병력은 1개사단규모로 증강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후 1967년 2월 15일 짜빈동 전투에서 생포한 적포로의 진술에 의하여 확인되었으나 당시 정보보고에서도 1967년 1월 12일 이들 적의 이동에 관한 첩보가 최초로 알려졌었다.

여단은 이같은 적의 증강 사실과 관련, 적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여 전술기지 보강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는 한편, 전술기지를 중심으로한 소부대작전을 강화하였다. 적의 공격에 대비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여단은 1967년 2월 15일 짜빈동(Tra Binh Dong)의 제11중대 전술기지를 공격해 온 적의 대규모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혁혁한 전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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