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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김대중의 종북 공산주의 반역 정체

작성자+진리사랑|작성시간16.07.19|조회수3,234 목록 댓글 0

 

<김대중의 종북 공산주의 반역 정체>

 

(이 글은 조갑제씨의 "김대중의 정체" 책을 요약한 글 등 여러 증거 자료들 모은 것입니다)

 

# 조갑제씨의 "김대중의 정체 요약 글

 

1. 김대중의 정체

 

1.1 해방 후 좌익 전력

 

김대중씨는 좌익 신민당 목포지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전력으로 해서 6.25 때 생사를 넘나 들었다. 1980년 5.17일 심야 자택에서 연행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때 자신이 쓴 진술서에 의하면 그가 해방 뒤부터 좌익 이념에 기울어 복잡한 인생 역정을 걷게 된다.

 

본인이 작성한 진술서 내용 중 일부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여운형이 주도 했던 좌익계열 향후 조선 인민 당이 됨) 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 했음.

2) 같은 해 11월경 건 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후 약 2개월 동안 참가 했다 자진 그만 두었음

3)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백남운)에 동조 하여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아 합법적 정치활동에 종사 했음(약5-6개월간)

-이해를 돕기 위하여 김대중이 가입했던 신민당과 그 창설자인 백남운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 한다. 백남운은 1894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 났다. 그는 1938년 연희전문을 그만 두기까지 유물사관과 계급 투쟁론의 입장에서 강의를 했고 광복 후 정계로 진출 좌익운동에 참여했고 좌익의 통일전선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1946년 모스크바 의정서에 의해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 된 후 그는 북한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김두봉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 왔다. 중국공산당과 가까운 김두봉이 북한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신민당으로 개편하자 백남운은 남조선 신민당을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김일성이 북조선 공산당과 김두봉의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 노동당이 되자 1946년 11월 남한에서는 소련과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좌익 3당, 즉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 신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합쳐서 남조선 노동당, 즉 남로당을 만들었다. 이 합당 과정에서 백남운과 여운형은 소외된 끝에 남로당에 합류하지 않고 사회 노동당을 만들었으나 실패하고 근로인민당을 창당, 여운형은 위원장, 백남운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이 암살 된 후 고전하던 백남운은 1948년 5월 총선 직전 자진 월북하여 거기서 눌러 앉았다. 1967년에는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에 뽑혔고 1979년 85세로 죽었다.

6.25 당시의 남로당 최 고위 간부 박갑동 씨에 따르면 백남운은 6.25 이전에 이미 김일성으로부터 지령을 받는 관계가 되어 박헌영의 남로당을 견제 했었다고 한다. 남로당이 발족 했을 때 박헌영은 북한에 있었다. 미 군정에서 1946년 9월 그에 대한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 했던 것이다.

4) 1946년 6월 민청(민주 청년연맹) 목포시 부위원장으로 활동

-민청은 당시 좌익이던 공산당과 인민 당,신민당의 행동대원 들이 모인 단체로 10.1 폭동을 주동 하는 등 좌익계 극렬 단체 이다. 김대중 씨는 가입한 사실은 있지만 별로 활동 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나. 1950.9.7일 당시목포시 서산동 4번지 거주 장금성이 조선 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 당 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청원서에 의하면 피의자가 민청 목포시 지부 부위원장으로 민청사업 취지 및 국내외 정세를 교양한 사실이 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김대중씨를 기소 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에는 장금성이란 사람이 작성한 조선노동당 청원서 사본이 있는데 이 사람은 민청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가입 했다가 조선공산당이 신민당(당수 백남운), 인민 당(당수 여운형)의 일부 세력과 합당, 남조선 노동당(당수 박헌영)을 만들 때 따라 갔던 사람이다. 그는 지하활동을 하다가 6.25 직전에 전향한 좌익들을 교도하기 위해 조직된 보도 연맹에 가입 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1950년 9.7일에 다시 조선노동당 당원이 되기 위해 전라남도 목포시 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신청서를 낸 것 이다. 바로 이 서류를 경찰이 압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 김대중씨의 이름이 나온다. 청원요지는 이렇다.

<성명: 장금성 지하 당 시절 별명:장세철

생년월일:1925년 7월1일(26세)

입당 년월일:서기 1946년 10월15일

입당당시 직책: 조선공산당 목포시 북 지구 제22야 세포당원

현재: 전라남도 목포시 제 22동 노동당 부 책임자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그 달 19일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 대에 입대, 9월20일경에 목포시 창평정 로동조합 보안대 남부에 가입하여 치안확보에 노력 하였으며,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연맹 목포시 위원회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민청의 사업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민청에 가입하여 1946년 20일에 민청 제22동 분회를 목포시 서산 동 김판섭 동무 집에서 결성하는 데 참가 하였고 맹원 획득에 주력 하였음. 매주 3회씩 목포시 금화동 윤양신 동무 집에 강습 장소를 정하고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제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교양을 받았으며 분회 장 김판섭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9월23일 총파업 직전에 모든 선전투쟁에 참가 하였음 <중략>

서기 1950년 9월7일

전라남도 목포시 서산 동 4번지

청원인 장금성

조선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 당위원장 동지 앞

김판섭 대필>

장 금성의 자술서에 따르면 좌익통일전선 조직인 민청에는 김대중씨 같은 신민당원이나 장금성 같은 조선공산당원(후에 남로당원)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동일한 노선의 행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금성의 글에는 민청 목포시 위원회 부위원장 이던 김대중씨가 신민당 간부로서 조선공산당 당원이던 장금성을 설득하여 민청에 가입시키고 맹원들을 교육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김대중씨는 자신이 “민청의 모임에서 교양을 한 사실”은 인정 했으나 민청부위원장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대중씨는 신민당 목포시당의 핵심인 조직부장 이었고 좌익 청년 행동대 민청에도 가입하여 활동 했다. 여기 다른 자료를 하나 더 소개 한다.

피의자심문에서 김대중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 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동당 상임 위원급으로 권상식 등과 같이 활동 했다고 썼다.

이 권상식이란 인물은 1971년 2월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서를 수사기관 앞으로 작성하여 낸 적이 있다( 군 검찰은 이 진술서를 김대중씨 기소자료에 첨부 재판부에 제출함)

< 진술서: 권상식 서기 1923.11.5일생 . 본인은 해방 후(중략) 좌익계 신민당에서 활동. 당시 김대중은 조직부장으로 활동 중 194년 10월 소위 인민항쟁 당시는 각 동별로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은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 전부가 지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다가 본인은 서을로 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목포 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어 특채발령을 받고 목포서에서 근무하다가 6.25 동란으로 부산으로 가 있었습니다. (중략). 그 당시 김대중은 새벽으로 공산당 교육을 받고 당 사무소에 와가지고 국제정세 및 국내정세를 말하고 나갔기 때문에 활동상을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신민당이 해산되자 김대중이는 그 후 보니까 전남기선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그 후로 금전관계 사고가 나자 공당에서 제명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대중의 김석철이 신민당 재정부장으로 있다가 탈당하여 있기 때문에 아마도 김대중의 활동상을 잘 알 것입니다.

서가 1971년 2월 10일 권상식>

위의 진술서에 나타난 김대중 조직부장의 부하 다섯 명의 운명이 처절하다. 두 명이 북한으로 갔고, 한명은 사형, 다른 한명은 행방불명, 그리고 권상식은 수사에 협조한 대가로 경찰관이 되었다.

광복을 맞자마자 남북이 분단되고 남한에서 김일성과 소련의 조정을 받는 좌익과 이승만의 지도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사이에 이념대결이 벌어 졌다. 그 좌익의 선동과 폭력에 우익이 대응 하는 과정에서 피를 피로써 씻는 학살이 벌어 지던 시절 그 중심에 20대 초반의 김대중이 있었던 것이다.

 

1.2 임자도 간첩사건

 

1968.7.20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전남 목포 앞 임자 도를 거점으로 하여 암약해 온 북괴 간첩 단을 적발해 118명 중 간첩 27명을 구속 검찰에 보냈다고 발표 했다. 정보부는 발표문을 통해서 ‘지하당 전남도책인 정태홍(정태묵의 가명)등 간첩 단은 1962-1967년 사이 북한을 오가며 1845만원의 공작금을 받아 지하 당을 조직 활동 해 왔다고 밝혔다. 이 간첩 단의 주범인 정태묵은 당시 45세로서 전남 목포시 출생. 전 남로당원으로서 국가보안법 위반 죄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복역 중 6.25 전쟁으로 탈옥 북한에 4회 왕복, 노동당 입당, 공작금 800만원 수령, 지하당원 포섭 활동을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1980년 7월31일자로 육군 계엄 보통 군법회의 검찰부 검찰관 중령 정기홍이 군법회의 앞으로 보낸 김대중 등 24명의 피고인에 대한 공소장에는 임자도 간첩사건의 주범 정태묵에 대해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 (김대중 피고인은) 1967년 5일자 미상경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여관 등에서 북괴로부터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야당인 신민당 입후보자가 다수 당선되도록 김대중 등을 지원 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의도적으로 접근해 온 소위 임자도 거점 간첩 정태묵(1972.12.8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사형판결을 받아 집행된 자)을 2회에 걸쳐 접촉하여 그로부터 선거전략을 교도 받는 동시에 목포 산정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종사하던 위 정태묵의 처의 동료 교사인 임자도 출신 성명 미상을 그 운동원으로 소개 받고 동 선거 전략에 따라 선거 운동을 하여 당선 되고 (하략)>

이에 대하여 김대중씨의 자필 진술서에는

<1967년 임자도 간첩사건이 발생 했는데 그 주범 정태묵은 본인의 목포상업학교 1년 선배이며, 선거기간에도 2-3차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의사를 표시 한 바 있음. 그러나 당시 누구나 해방 직후의 좌익 활동을 중단하고 본가인 염전 업에만 전념 하는 줄 알았지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 몰랐음. 선거기간 중 타인과 동석으로 2-3차 만났으며 선거 후에도 서울서 1차 만난 것을 사실대로 진술 함. (하략) >

1980년 8월29일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는 김대중 피고인과 함께 기소된 이택돈 전 신민당 국회의원에 대한 신문이 있었다 그는 서울 고법 판사로서 정태묵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후에 인터뷰에서 “나는 그때 주심 판사였다. 임자도 간첩사건 기록을 읽어보니 정태묵이 김대중씨를 만난 것은 목적을 갖고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 했다.

 

1.3. 한민통 일본본부와 김대중과의 관계(주일 한국대사관의 보고서)

 

김대중내란 음모 사건이란 말은 정확한 사건 명칭이 아니다. 1981년 대법원이 김대중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거 하도록 만든 것은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이므로 이 사건은 ‘김대중 한민통 조직 및 내란 음모사건’ 이라고 부르는 게 보다 나을 것 같다.한민통 사건의 핵심은 1973년 해외 망명 중이던 김대중씨가 북한정권의 조종을 받는 재일 조총련의 대남공작 요원 및 친 북인사들과 함께 한민통 일본본부를 조직했고 이 조직은 그 뒤 조총련의 자금과 사주를 받아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민통의 초대의장으로 추대된 김대중씨는 취임하기 전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서 도쿄에서 납치되어 강제 귀국 당 했다. 1981년 우리 대법은 김대중씨의 역할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로 확정 했다.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을 변란 할 목적으로 불법 조직된 반국가단체인 북괴 및 반국가단체인 재일조선인 총연합회(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자금지원을 받아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활동하는 반 국가 단체라 함이 본원의 견해로 하는바이오(하략)”라고 했다.

1980년 여름에 주일 한국대사관서 작성하여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보낸 영사증명서가 붙은 “조총련.한민통 일본 본부. 김대중 관계”란 심층 보고서가 있다. 이 자료는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어 김대중 피고인에게 유죄 확정의 결정적 증거가 된 자료 이다. 이 보고서는 1980.7.3 합동수사본부가 주일 한국대사관에 한민통 일본본부,동기관지 민족시보등 중요구성 간부들의 성격과 활동 상황에 대하여 조회요청을 했고 그 답신으로 보내 온 것이다.이 보고서는 김대중씨와 함께 한민통 일본본부(이하 한민통으로 약칭)를 만든 곽동의,배동호,김재화 등 핵심 요원들이 민단 비판세력으로 위장 하고 있으나 실은 조총련의 조종을 받은 북한 간첩. 친북인사들이라고 하는 한편 그 들의 조직적.사상적 뿌리를 세밀 하게 소개 하고 있다.

배동호, 곽동의 등은 한민통 조직 전부터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반민단 세력을 규합하여 민단유지간담회를 조직, 주한미군철수 등 북괴활동에 동조 하는 활동을 전개 하였다는 것 이다. 이 보고서는 ‘1970년 4월경 곽동의는 민단유지간담회 회원 중 북괴 간첩인 윤효동의 안내로 북해도 하코다네 해안에서 북괴 공작선편으로 입북하여 대남공작 지령을 받고 동년 5월경 귀일 하여 민단파괴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고 되어 있다. 곽동의는 나중에 김대중이 의장으로 추대된 한민통에서 조직국장이 된다. 이 보고서는 이들이 김대중씨와 한민통을 결성 하는 과정을 이렇게 썼다.

1) 1971년 1월경 배동호,곽동의 등은 북괴 지령에 의하여 한국과학 기술처에서 교토대학에 유학중인 이동일에게 3000 만엔 의 자금제공을 전제로 미군을 몰아 내야 한다고 교양하는 등 포섭공작을 진행 했다.

2) 동년 7월 민단조직을 근본적으로 와해하기 위해 베트콩파를 주축으로 한 청년학생을 동원 민단 동경 본부를 습격하여 유혈난동의 참극을 벌이는 등 그 정체가 탄로되어 배동호,김재화,곽동의,정재준,김종총,조활준,김은택,김군부 등 주동분자들이 민단에서 제명 또는 축출 당하자 노골적으로 친 북괴세력으로 표출 되어 비합법투쟁으로 급선회 하였음.

3)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71년 1월경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김대중이 일본에 오자 배동호는 고양일 등을 통해 김대중에게 접근하여 동인의 체류비,여비를 지원 하는 등 인연을 맺어 그 후 김대중이 일본에 올 때마다 접촉 교분을 다졌음.

4) 1972년 10월11일 지병 치료차 일본에 온 김대중은 동년 10월17일 유신을 맞이 하자 귀국을 단념하고 해외에서 전체 동포들을 총 집결시켜 정부타도를 목표로 한 조직적 투쟁을 전개 할 것을 선언하여 배동호,곽동의, 김재화,정재준,조활준, 김종충 등 베트콩파 중심 인물들의 호응을 얻는 한편 7월6일 경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회 미국본부를 결성한 데 이어 동년 7월10일경 일본에 돌아와 배동호 등 베트콩파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여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에 착수 하였음.

 

1.4. 한민통 결성은 김대중의 구상

 

   주일 한국대사관의 보고서는 김대중씨가 배동호,곽동의,김재화 등이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인사들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기록했다.“특히 1973년 3월경 당시 민단 가나가와 현본부 의장 박성준이 김대중에게 배동호,곽동의는 조총련과 합작하여 베트콩파와 한 패거리가 되어 반한 활동을 하면서 민단을 망치고 있다는 경고를 한 바 있으므로 동 배동호,곽동의를 비롯한 베트콩파들은 북괴 또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민단을 와해하고 반 국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며(하략)”이 보고서는 ‘1973년 8월4일경 동경 팔레스 호텔에서 김대중 주재 하에 위 배동호,김재화,정재준,조활준,김종충,양상기 등이 회합하여 한민통 일본 본부의 정강정책 및 임원구성을 확정함에 있어’ 5항으로 ‘한반도를 중립하고 남북 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 한다’고 말 했다. 이 보고서는 또 “임원구성은 의장에 김대중 부의장에 김재화 정재준,김용원 , 상임고문에 배동호, 고문에 양상기 김재술 유석준, 조직국장에 곽동의, 사무국장에 조활준, 국제국장에 김종충 등으로 결정 했다”고 썼다. 이 보고서는 한민통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 했다.“한민통은 표면상으로는 반 민단 투쟁 단체인 양 위장하고 있으나 김대중의 구상에 의하여 결성되어 조총련의 배후 조정을 받고 있음. 한민통을 주도하는 곽동의는 북괴에서 간첩교육을 받은 간첩이고 배동호 역시 곽동의와 사상적으로 밀착한 용공분자로서 조총련과 연대 투쟁체제를 구축하고 북괴의 목적사항 실행을 위해 각종 행사를 공동 개최하는 등 대한민국 전복과 적화통일 위하여 공동투쟁 하고 있음”

 

1.5. 김대중 재심 선고에 대한 오해

 

2004년 1월 29일 서울고등법원 제3형사부(재판부 신영철,판사 김태용,박순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내란 음모 등 사건에 대해서 재심을 청구한 데 대하여 고등법원 재판부는 내란음모, 계엄법 위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 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등에 대해서는 유죄인정을 그대로 인정 했다. 다만 김대중씨는 반국가단체 결성 부분을 포함한 모든 범죄사실에 대한 선고를 실효케 하는 특별사면을 이미 받았으므로 국가보안법 위반 등 부분에서는 면소 즉 공소권이 면제 된 것이다.

이 재심선고로 인해 김대중 피고인에게 내려졌던 국가보안법 위반 죄가 잘못 된 것으로 확정 되었으므로 한민통 가입이 정당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씨가 북한정권이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해 설립 추진한 한민통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은 이번 재심에도 불구 하고 뒤집어 지지 않았다. 2004년 한민통의 주요 간부들이 해외 민주인사로 둔갑 하여 한국에 들어와 김대중씨를 만난 적이 있다.

 

1.6. 안기부의 김대중 파일 비밀자료

 

1988년도 안기부 자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김대중의 연방안은 전제 조건이었던 ‘외군철수’를 은닉 함으로써 북괴의 연방안과 다르다는 인식을 주려 하고 있으나 연방성립의 조건을 볼 때 이는 .남북한 현실을 외면하는 점에서 북괴 연방안과 대동소이한 것이며 더욱이 연방구성 방법에 대한 구체적 방안 제시 없이 ‘작은 범위의 중앙연방기구 우선 설치’ 운운 함으로써 연방제가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 인양 설명하여, 연방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국민들을 현혹케 할 소지가 많은 선전적 제안으로서 결국에는 북괴 주장에 대한 면역 효과까지 초래케 할 것이며 이러한 논리는 경우에 따라서 북괴가 이를 변용 합작전술에 활용 할 가능성도 농후 하므로 경계가 요망됨>

이 마지막 부분은 상당히 예언적이다. 김정일 정권은 6.15 남북정상 회담을 기회로 삼아 고려 연방제 통일방안을 변용 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김대중의 연합제가 공통점이 있다고 하여 남북한이 추구할 통일방안으로 연결 시킴으로써 ‘남북좌익합작음모’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의 통일전선 분위기를 남한 사회에서 형성 하는데 성공 했던 것 이다. 대남 적화 전술인 북한 측 연방제는 김대중씨의 연합제에 편승 함으로써 한국인들의 경계심을 무디게 하여 일종의 면역효과를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1.7. 김정일과 운명을 같이 하려는 사람

 

1997년 9월쯤 정신문화연구원 팔각정에서 고영복 연구원이 객원연구원인 예비역 장성 권모씨 등 4명과 함께 대선과 관련 하여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안기부 문서에 따르면 고 씨는 이 자리에서 “김 대중씨는 공산주의자이다”라고 말 하면서 모 정치인 과 동교 동 자택 지하실에서 단독 면담 시 그 에게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함께 해보자'고 언동 하였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일주일 뒤 연구원내를 산책 하던 중 권모 예비역 장성이 고 씨에게 그 모 정치인이 누구냐고 묻자 고 씨는 “이철 이다”라고 답했다.

권 씨는 이것을 잊고 있다가 고영복씨가 그 해 11월 안기부에 구속 고정간첩으로 발표되자 이것을 당시 권녕해 안기부장에게 알렸다. 그러자 안기부에서는 이를 조사코자 그때 이회창씨 한나라 당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 있던 이철씨를 호텔에서 만났는데 이철씨는 안기부 직원에게 아래와 같은 자필 진술서를 썼다 .

 

진술서

성명 이철

주민등록번호 480318-xxxxxxx(49세)

주거 서울 성북구 안암동 3-135 삼익 아파트 1-203

본적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 17

위 본인은 1997년 12월13일 주소지에서 아래와 같이 임의 진술 합니다.

1. 저는 1948년 3.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망부 이근진(82)과 정경조(74)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1967년 2월 경기고등학교, 1985년 8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제12대,제13대,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 한 후 현재 한나라 당에 입당하여 정당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 제가 고영복 선생을 알게 된 경위와 접촉상황에 대해 말하면 제가 1969년 3월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 했을 때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고영복 선생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그 후 저의 결혼식 때 고영복 선생이 주례를 서준 사실은 있으나 제가 정치 활동을 하면서 바빴던 관계로 거의 만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고영복 선생은 유신정권을 비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옹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나 저의 친구들이 고영복 선생을 “정권의 눈치 보는 사람”으로 생각 했던 이유도 자주 만나지 못했던 이유가 될 것입니다. (중략)

3.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1985년경 김대중 총재로부터 “우리나라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은 들었던 바 있습니다.

4. 제가 1985년 2월12일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1985년 3월경 당시 연금에서 해제된 김대중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그 날 오후 5시경 동교 동 김대중씨 자택을 방문하여 김대중씨의 안내로 지하실로 내려가 단둘이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대중씨는 저를 보고

- 현재 우리나라는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 우리나라는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부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너무나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

-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라는 요지로 한 시간정도 제게 설명 했습니다. 저는 그때 김대중 총재가 “나를 공산주의자로 착각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 했으며 나를 자기의 심정적 동조자, 정치적 계보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까지 말하는 김대중씨는 자신에게 유리하면 레닌도 될 수 있고 히틀러도 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 후 1985년 5월 밤11시 김대중 당시 평민 당 총재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여 식당에서 단둘이 면담 하면서 당시 김대중 총재로부터,

-정치자금 10억원과 부총재 자리를 줄 테니 하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저는 아직 젊은 탓인지 당직이나 정치자금은 별로 뜻이 없습니다. 제게 바라는 야권 통합이 이루어 진다면 군사정권 종식을 위해서 중앙당의 수의라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거절 했습니다.

이상 진술한 내용은 사실과 틀림이 없습니다.

1997년 12월 13일 위 진술인 이 철

대공수사실장은 이 진술서 내용을 국내담당 차장과 권녕해 안기부장에게만 보고 하고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조치 했다고 한다. 추가 수사는 대선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대선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정쟁의 초점이 될 것으로 판단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화내용을 달리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김대중씨가 부인하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취급했던 안기부 대공수사간부는 이런 의견을 밝혔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 국정원이 이 사건을 해명하지 않은 것은 유감 이다. 국군통수권자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하자는 발언을 했다는 진술의 진위를 확인 하지 않은 것은 국가정보수사기관으로서는 직무유기 이다”.

그 후 이철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기자: 1985년 면담 당시 김대중 총재는 “플로레타리아 혁명을 같이 하자”란 말을 과연 썼나, 썼다면 몇 번 썼나.

이철: “여러 번 썼다 서재 책상에 앉아서 거의 한 시간 혼자서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를 보는 자신의 시각을 드러낸 내용 이었다. 한국사회를 ‘가진 자 대 안 가진 자’, ‘군부 대 민중’의 갈등 구조로 보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황당 했다. 나를 공산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정일도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지 않는가. DJ는 기회주의자 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김대중씨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념적인 입장을 고수 하였다. 그는 이념문제에 있어서 만은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라고 본다.

김대중씨가 우익적인 발언을 했다면 그것은 좌파정책을 호도하기 위한 위장용이지 진심은 아니라고 생각 한다.하지만 200 년 1월 호 조선일보에 이철씨의 진술내용이 일부 보도 되자 김대중씨는 그런 말을 한적 이 없다고 부인 했다.상황으로 보아 이철씨가 거짓 증언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 이철씨는 1997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지원하고 있었지만 이것을 선거에 이용하지 않았으며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측근들이 이 문제를 걱정 할 때 “나는 어떤 경우에도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란 증언을 하지 않는다. 그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언이면 몰라도..”라고 말하여 안심 시켰다고 한다.

그것은 김대중씨의 좌익행동대 경험과 한민통조직, 김일성 연방제 통일방안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판정 된 연방제 통일 방안 제창, 대통령이 된 뒤 보여준 친 김정일 정책 등 그의 생애 전체 속에서 판단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8. 국가체제를 대중민주체제로 제창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되어 올 때 남겨두고 온 김대중씨 수첩에 있는 “대중민주체제”라는 말에 주목 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살펴본다 김대중씨가 발간한 그의 어록집인 “조국과 함께 민족과 함께”를 보면

<모순과 갈등,빈곤과 독재 병리로 점철되는 정치적,경제적 사회적 현실을 분석, 진단하고 이것을 치유하고 대중의 자유와 복지를 최대로 증진하여 민족경제를 균형 있게 발전 시킬 수 있는 국가체제의 대안으로 대중민주체제를 제창 한다>

<나는 대중민주체제의 정치체제와 관련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각기 갖는 모순을 대중민주주의와 산업민주주의에 의해서 극복하고 자유경제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나가는 한국형의 혼합경제체제라고 생각하며 이를 대중경제라고 이름 합니다>

그는 대중민주체제라는 말을 자유주의 체제와 구별하여 쓰고 있다. “국가체제의 대안”으로 대중민주체제를 제창한다면 대체하려는 국가체제는 자유주의라는 설명이 된다 비록 그가 다른 곳에서는 대중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인 것처럼 쓰기도 했지만 본질적 의미는 순수한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섞은 “혼합경제체제”라는 것도 지구상에 존재해 본적이 없다.

 

이철씨에게 김대중씨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하자”고 했다면

용어의 혼란을 이용 “프롤레타리아”를 “대중”으로 바꾼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김대중씨는 그가 이철씨에게 말 한대로 한국사회를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권력자와 약자,

농촌과 도시, 근로자,농민.중소계층과 매판재벌 및 특권층과 같이 이분 법으로 사회를 보고 있다.

 

대통령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그가 김정일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 될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자인 김정일에게 호의적으로, 굴욕적으로 대했다고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권력을 세습 받고 식량이 모자라서 충성분자 들에게만 식량을 공급 함으로써 힘 없는 주민들을 수백만 명이나 굶어 죽게 한 김정일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일본 공산당원 하기와라 료씨는 “김정일이야 말로 세계의 진정한 공산주의자의 적이다”라고 말한다.

김대중씨에 대한 평가는 그가 젊었을 때의 좌익 행동대 경험이 그 뒤 김일성-김정일을 대하는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 하는 것과, 반 인류 민족반역 전쟁범죄자 김정일에게 굴종하여 어떻게 국가이익을 희생시켰는가의 여부로 판단 해야 할 것이다.

 

<황장엽 보고서:”김대중과 김정일은 깊은 결탁관계 이다”>

 

황장엽씨는 2001년3월에 쓴 한 미공개 보고서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김정일과 깊이 결탁한 관계”라고 단정 했다.

김정일에 절망하고 탈출 한국에 왔지만 김대중 정부에 의해 자유가 속박 당 한 그는 이 보고서에서 김대중씨를

“김정일에게 발목을 잡힌 사람”, “붕괴에 직면한 김정일 정권을 되살려준 사람”,

”미국 및 우리 민족이 아니라 김정일과 운명을 같이 하려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은 김정일을 잘 아는 또 한 사람 신상옥 감독의 시각과 거의 일치 한다. 그는 월간조선 2001년 10월 호 기고문에서 “북한의 운명은 남한에 달려 있고, 김대중의 운명은 김정일에 달려 있다”는 말을 남겼다. 황씨는 또 DJ는 단순한 부정부패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적과의 결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고 분석 했다.

 

<북한을 강하게 대한민국은 약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총괄하면 이런 큰 흐름이 발견 된다.

주적을 강화하고 내적은 비호하는 것 이다.

 

-주적 강화의 예

군사비로 쓰일 것이 뻔 한데도 금강산관광을 국민세금으로 보조하면서 까지 대북달러 송금을 계속 했다. 6.29 서해 도발 때 북한군의 징후를 사전에 입수 한 첩보부대의 경고를 군 지휘부가 묵살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적의 기습을 가능 캐 했다.

 

-내적비호의 예

2001.8.15 행사에 친북세력의 방북을 허용하여 친김일성 소동을 일으키게 하고 대통령직속의 의문사 위원회는 친북이적단체인 한총련 간부의 활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하고, 총리 직속 위원회는 폭력시위 진압 경찰관 일곱 명을 불타 죽게 했던 방화치사 범들을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하고 보상 했다. 그렇다면 폭도들에게 불타 죽은 경찰관은 무엇인가?

 

-대한민국 수호 세력의 약화기도의 예

보수언론 조선,동아일보에 대한 세무조사는 물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흡수통일 포기선언,태극기.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포기 또는 훼손, 국군이 북한군을 주적으로 보지 않도록 하려는 끈질긴 압력 등 애국세력을 공격하는데 김대중 정권.친북좌익세력.김정일 정권이 한 목소리를 냈다.

 

-미국과의 동맹 약화

친북좌익세력의 반미운동에 대한 미온적 대응, 부시의 북한에 대한 “악의 축”발언에 대한 정부 차원의 반발(그 당시 한 여당 의원은 부시를 ‘악의 화신’으로 불렀다), 9.11 테러 직후 테러집단인 북한정권과 함께 반 테러 선언까지 구상

 

<2002년 6.29 서해도발은 햇볕정책의 결과>

 

5679 정보부대장 한철용 소장의 폭로로 불거진 2002.6.29 서해도발 징후 정보에 대한 국군 지휘부의 축소,은폐 조작 의혹에 대하여 한 소장은 적의 도발 징후와 관련된 결정적 정보를 올렸는데도 중간에서 삭제 된 채로 장관에게 보고 됐고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북한 경비정의 침범의도를 “단순침범”으로 왜곡.조작한 전파 했다는 것이다.

북한 경비정의 침범의도를 평가 할 때는 훈련평가,의도적 침범, 단순침범 세가지가 있는데 “단순침범”으로 일원화 했다는 것이다.

한 소장은 본인이 6월 27일에 단순침범이라고 보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6월13일 보고서를 “단순침범”이라고 수정해 전파 하도록 지시 하는 등 군 수뇌부가 단순침범으로 몰고 가는 상황에서 많은 부하를 둔 지휘관 입장”에서 나 혼자만 독불장군식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해군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먼저 쏘아선 안 된다”는 지침을 받은 상태였다. NLL침범을 계속하는 적에 대하여 최소한 경고 사격을 해야 하는데도 우리 고속 정은 이 지침에 따라 측면을 드러내놓고 경고 방송만 하다가 선제공격을 허용 했던 것이다. 이런 지침은 악당하고 결투 할 때 먼저 쏘지 말라는 지시와 똑 같다.

결국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지침과 햇볕정책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군대의 결정적 도발 정보의 축소 평가가 겹쳐 고속 정 피격 침몰 사건이 일어 났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책임은 김대중 정권의 이상한 행동에 있다.국가에 대한 가장 큰 죄는 국가를 뒤엎는다든지 국가를 적에게 내주거나 이롭게 하는 행위 이다. 대한민국의 안전.정통성.핵심가치.국익을 반 국가 단체인 김정일 정권에게 넘기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란이다.

1.9. “6.15 선언은 반역이자 사기이다”

 

북측의 연방제는 한국내의 좌익세력을 강호하고 애국세력을 제거하려는 통일전략의 핵심이다.

김대중씨가 1980년에 사형선고를 받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김일성의 연방제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남한적화 전략의 핵심인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의 연합제안은 국회의 동의를 받은 노태우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제2단계 남북연합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김대중의 제 1단계 연합제를 가르키는가?

노태우의 남북연합 제는 궁극적으로 자유통일을 목표로 한 과도기적 분단관리 체제를 의미한다.

적화통일이 궁극적 목표인 북측의 연방제와는 공통성이 전혀 없다.

과정상으로도 노태우의 남북연합은 남북간 교류가 충분히 진행 된 후의 결과로서 2단계에 등장 하는 것이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바로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중 제 1단계 연합제와 대응 한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평양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2000.6.16) 국무회의에서 중대한 의미의 술회를 했다

<그 쪽에서 계속 통일을 얘기하면서 연방제를 주장하는데 연방제는 군사와 외교권을 중앙정부가 같고 내정은 지방정부가 갖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남북관계에서는 이것이 불가능 하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구상해 온 세가지 통일방안에 대하여 설명 했다. 1단계는 남북연합, 2단계는 연방, 3단계가 통일인데 1단계는 현재대로 가는 것이다. 현재 대로 가면서 남북양쪽에서 정부대표가 나와서 대표회의,각료회의,국회는 국회회의를 하고 의제를 만장일치로 하는 것이다. 상시적으로 이것을 운영 하는 것이다. (중략) 김정일 위원장이 배석한 김용순 비서와 한참 얘기 끝에 낮은 수준의 연방 얘기가 나왔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연합제와 같은 얘기다. 그래서 접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실제로 이번 합의 중에서 가장 역사적이고 분단 55년의 과제인 통일방안에 의견을 접근한 의미 있는 합의다.>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2단계의 남북연합을 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김대중 자신의 개인적 구상 인 것이다. 우리 국민과 국회는 언제 김대중 개인의 통일방안을 국가의 것으로 인정 해 주었으며 개인의 통일방안을 평양에서 적화통일 방안과 연결 시키도록 위임해 주었는가?

그런데 더욱 더 큰 문제점은 김대중의 연합제안과 김정일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사이에 있다는 공통점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 이다. 김대중씨는 두 통일안 중앙정부보다 지방정부에 권한이 더욱 큰 점이라고 주장 한다. 하지만 이는 회담 전부터 있던 것으로서 하등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역대 우리 정부는 그것은 본질적이 아닌 지엽적인 것으로서 북한의 제안에 대하여 무시 해 왔다. 진정한 공통점이라 하면 남북한이 지향하는 통일조국의 모습(이념.체제)에서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 관점은 자유통일인가? 적화통일 인가? 이 점이 분명치 않은 것이다.

대법원은 1981년 대법원 확정 판결을 통해

김대중씨의 연방제를 북한측 연방제에 동조 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그렇다면 대공전문수사기관이 친 북적이라고 확정하고 국회나 국민이 인정치도 않은 개인적 통일방안을 가지고 김정일과 합의한 것 아닌가?

북한은 6.15선언이 대남적화 전술인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라고 주장했다.

김 전대통령은 김정일이 현재 미군의 주둔을 통일 이후에도 인정한다는 말을 했지만 김정일은 2001년 여름 푸틴을 방문 한 자리에서 주한미군철수가 미룰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으며 푸틴은 이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국가와 국민의 생존권이 달려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김대중정부와 정반대의 언동을 하는 북한정권에 대하여 언론과 야당이 문제를 제기 할 때마다 그것은 북한의 “대내용”이라고 변명 하기에 급급했다.

김대중씨가 국민들에 보고한 “연합제와 낮은 단계연방제의 공통점과 통일방향에 대한 합의의 성격” 그리고 김정일의 “주한미군 계속 주둔관련 발언”은 이제 믿을 수가 없다. 김대중 정부에 몸을 담았던 고위 외교관이 “국가 정체성의 변조”라는 표현을 써 공격해도 반응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언론과 야당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대한민국이 자정 능력이 있는지 의심 스럽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및 한민통 결성 사건 재판 기록에는 김대중씨의 아래와 같은 언동기록이 있다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 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온 남북평화 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 주장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독재와 나의 투쟁: 김대중 저 192p)

-한국이 자유도 빵도 없는데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 해도 빵이 보장 된다.

나의 이러한 입장은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인정 하고 있다(1973.2.23 내외 타임즈 및 뉴욕 타임스 게제)

-괴뢰 괴뢰 하면서 무슨 놈의 괴뢰냐. 공산주의란 기존 사실을 우리는 27년간이나 무시해 왔는데 이북은 공산당으로 안정 되어 있으나 이남은 민주체제도 안정 되지 못했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만 극심 할 뿐이다. 또한 김일성이 주체성을 확립 시킨 것은 잘 한 것 아니냐.(이상 1973.4.24 시애틀 워싱턴 대학 강연 부록)

-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대한원조를 중지, 주한미군을 철수 하는 등으로 한국정부에 개입 해야 한다. (1973.4.30 하버드대 코헨 교수와의 대담)

- 나는 결코 통일하면 공산당을 죽이는 그러한 반공을 하자는 것이 아니 요. 승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공산당의 존립을 보장 해주어야 한다.(1973.3.21 하코네 인관법 연수회 강연. 1973.4.1 민족시보 게재)

-월남파병은 실패했다. 월남에 끌려간 우리의 청년들은 1만200명이나 죽고 부상당하고 그러면서도 월맹이나 월남에서는 미움 받고 세계에서는 마치 사람 죽이는 국민처럼 오해 받고 돈에 팔린 용병이나 전쟁 좋아하는 민족으로 까지 오해를 받으면서 본국으로 돌아 갔다.(5.18 샌프란시스코 국제학생회관강연 6.1자유공화국, 6,15 한민신보 게재)

 

위의 자료를 볼 때 그의 대북관과 연방제의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위 자료는 그가 사형선고를 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3년의 한국에서 과연 빵이 없었는가? 1960년대 말을 경계로 해서 춘궁기란 말이 사라지고 굶어 죽는 사람도 없어졌다. 경공업 국가에서 중공업국가로 도약 하던 대한민국이 과연 “자유도 빵도 없는 북한보다 못한 국가” 였는가? 1960년대 경제력을 초과하는 군사력건설로 인하여 1970년에 들어서 주민들의 수준이 날로 악화 되어가던 북한이 남한보다 더 풍족한 나라 였던가? 그의 이러한 낡은 대북관을 공산권이 붕괴되고 북한에서 3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된 오늘날 그대로 적용 하는 데서 극도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씨는 월남파병을 실패한 것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단정을 했다. 월남파병은 월남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했으며 (우리가 국군을 파병하지 않았으면 미국은 주한미군을 월남전선을 빼 갔을 것이다) 이로 인해 한미동맹을 다졌고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은 성공적 해외 진출이다. 월남파병 없이 중동건설 붐에 참여 할 수 있었을까? 중동달러 없이 한국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1970년대 중동시장에 진출한 건설 기술자는 1960년대 월남에서 양성 되었다.

김대중 씨는 한술 더 떠서 2001년에 베트남 대통령에게 월남파병에 대하여 사실상 사과하는 발언을 하여 참전 군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다. 30년 전 소신이 국가정책으로 나타난 것 이다.

그의 상기 언동에서 볼 때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국가라는 관점과 자부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대한민국을 민족사의 이단이며 반 국가 단체인 김일성 정권과 동격으로 놓거나 북한정권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김일성 정권의 인권말살에 대한 침묵, 한 걸음 더 나가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동조는 매우 대조적 이다.

남북한에 대한 김대중씨의 논법은 형식적으로는 제3자 입장에서 균형을 취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박정희 정권에겐 가혹한 비판을 김일성 정권에겐 호평 또는 지엽적 비판을 하고 있다. 국가발전을 위해 외채를 가장 효과적으로 쓴 나라가 박정희 정권이라는 것은 이미 검증된 진리이다.

가장 놀라운 말은 김대중씨가 한반도에서 외군철수를 거론 하고 “한국이 북한의 연방제를 받아 들여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 북한정권의 대남 적화 전략을 수용하고 자살 하라는 말과 비슷하다. 1970년대 초에 한국이 연방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반 헌법적,반 대한민국적 발언을 한 사람이 권력을 잡은 뒤에 “북한의 낮은 단계연방제와 나의 통일정책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면 이상 할 것이 하나도 없다. 요즘 와서 놀라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 하다 할 것이다.

 

김대중씨의 대북관이 집약된 1973년의 연방제 주장이 김일성의 연방제를 모방 한 것이냐 아닌가 하는 점이 1980년 8월25일 열린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1심 제7차 공판에서 이었다. 다음은 그 당시 검찰과의 문답 내용 이다.

-1960년 8월15일 당시 피고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요.

<민주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이었습니다>

-1960년 8월15일자 동아일보 1면에 보면 김일성이 1960년 8월14일 남북 연합제 구성을 제의한 보도가 있었고, 이에 대해 민주당 대변인 조재천이 반박성명을 발표 했는데 그 당시 민주당 간부로서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중략: 검찰관이 1960년 8월15일자 동아 일보를 읽어 줌)

또한 검찰관은 북괴에서 1962년 12월10일 발간한 “조선중앙년감”이란 책자의 104쪽을 읽어 들려준 다음 (편집자: 104쪽에는 합동통신 1월3일자 보도 내용이 인용 되어 있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정헌주 정부 대변인과 김대중 민주당 대변인이 정당과 같은 민간단체가 북한과 협상을 한다든지 경제교류를 해보겠다고 노력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환영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볼 때 그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피고인이 1963년(1961년 착각)1월3일 그와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여 합동통신에 보도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피고인은 최소한 1961년 1월 3일 까지는 김일성의 남북한 연방제를 알고 있어서 1973년 3월21일 동경 외신구락부에서 남북한 연방제를 주창 한 것이 아닌가요?

<자세한 기억은 없으나 정책에 의한 정당의 대변인으로서 그와 같이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남북관계 특히 통일방안에 관심이 많았던 김대중씨는 1960년에 발표되고 남한측에 제안 되었으며, 그 자신이 그와 관련한 사안에 대하여 여당 대변인으로서 논평 한 것으로 보도 된 김일성의 연방제에 대하여 1973년 3월까지 그 존재를 몰랐다고 주장 하였다.

 

김일성의 측근으로 일하면서 소위 주체사상을 만들었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증언을 통해서

김일성의 본심을 들어 보자.

<김일성은 연방제와 관련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핵심간부 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 하였다.

“연방제는 통일전선 전략을 실현 하기 위한 전술적 방안이다. 연방제를 실시하여 북과 남이 자유롭게 내왕하면서 자기 제도와 자기사상을 선전하게 되면 공화국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된 국가이기 때문에 조금도 영향을 받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남조선은 사상적으로 분열된 자유주의 나라기 때문에 우리가 남조선에 나가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주체사상 선전을 대대적으로 하면 적어도 남조선 주민의 절반은 쟁취 할 수 있다. 지금 인구 비례로 보면

남조선은 우리의 2배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실시하여 우리가 남조선 주민의 절반을 쟁취하는 날에는 공화국의 1과 쟁취한 남조선의 1을 합하여 우리편이 2가 되고 남조선이 1이 된다. 이렇게 되면 총선거를 해도 우리가 이기게 되고 전쟁을 해도 우리가 이기게 된다.

중국에서도 국공 합작이 국민당 지배 지역에 공산당 세력을 확장하는 좋은 기회로 되었다. 군대에서는 격술부대(경보병부대)를 중요한 전략적 부대로 보고 계속 강화 해야 한다. 인민학교 학생 때부터 태권도를 배워주어 태권도 선수를 대대적으로 양성 할 필요가 있다. 연방제를 실시 하여 남조선 정세가 복잡하게 될 때 우리 인민군대가 직접 진격하여 남조선의 진보세력을 지원 해 주면 남침이라고 하면서 외국이 다시 간섭 할 수 있다.

그러나 태권도 부대를 한100만 명 조직하여 권총이나 한 자루씩 채워 남조선에 보내면 같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이남 출신이고 누가 이북 출신인지 분간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침이라는 구실을 주지 않고도 능히 우리가 남조선의 친북 세력과 힘을 합쳐 정권을 잡을 수 있다. 연방제에서는 국가수반을 한 번은 북측에서 담당하고 다음 번에는 남측에서 담당하는 식으로 교대 할 수 있다, 우리 헌법에는 국가수반이 인민군대 총사령관으로서 일체 국가무력을 장악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연방국가 수반이 남측에서 나올 때는 우리의 무력통수권도 남측 출신의 연방국가 수반에게 넘어가게 된다.

연방제를 실시 하여도 그에 대한 통수권은 우리가 장악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필요 할 때는 우리가 무력을 쓸 수 있다. 이번에 국방위원장이 총사령관을 겸하도록 헌법을 고친 것은 그 때문이다. 국방위원장은 노동당 총비서이기 때문에 국가수반과는 관계가 없다>

보는 바와 같이 연방제는 남한의 친북 세력을 확대 강화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정권을 위한 자기들의 정치적 지반을 마련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내란의 형식으로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연방제를 실시하여서는 안 되며

북한의 독재체제가 붕괴된 다음에는 연방제를 할 것인가 또 다른 정치형식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때 실정에 맞게 할 문제 이다.

1980년 7월31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논고문을 통해

<김대중은 민족이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 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 온 남북평화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 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 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는 등 각종 기자회견, 시국강연, 책자 출판 등을 통하여 북괴의 통일전선과 선전 선동에 동조, 찬양하는 주장을 하는 등 반 국가 활동을 하여 오다가 (하략)>

이와 같은 그의 언동은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에 동조하는 주장이란 공소사실은 그 뒤에 법원판결에 의해서도 유죄사유로 유지된 법원의 확정 판결 이다. 또한

<피고인은 김일성의 동(1960년 제안) 연방제 주장을 몰랐다고 하나 피고인은 당시 민주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으로 있었으며 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당시 민주당 조재천이 위 감일성의 연방제 제의를 상투적인 파괴공작이라고 일축 한 점을 보아 피고인의 주장(그를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험칙상 인정 하기 어렵다>고 논고 했다.

 

2000.6.15선언의 제2항 합의야 말로 북한의 대남 전략의 획기적 성과이다.

이후 한국사회의 좌파세력의 약진은 대북지원문제,이념갈등,언론사 세무사찰문제,2002년 대통령 선거, 부시의 ‘악의 축 ’발언,주적 개념논란 등 중대한 국정 갈등을 야기하고 부시의 새 정부가 대북 강경책을 쓰는데도 브레이크 역할을 했었다.

1980년 현재로 김일성과 김대중 연방제의 차이점은 유엔가입 문제였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피의자 심문때 남북한의 유엔 개별 동시 가입을 지지 한다면서도 단서를 달았다.

김대중씨는 한국이 남북한 연방제를 지지 한다고 선언 한 뒤에 남북한이 따로 동시에 가입 하는 것은 지지 하지만 연방제 지지 없이 따로 가입하는 것은 남북한의 분단을 영구화 시키는 것이므로 반대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먼저 북한의 연방제를 지지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 한국이 북한의 연방제를 받아 들인다면 남북한이 단일국호 아래에서 대외적으로는 하나의 국가로 인정 받게 되므로 유엔에 따로따로 동시에 가입 할 필요가 없어 지는 것이다.

북한이 단일국호 하에 유엔가입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것이 이루어지면 통일문제는 국내문제로 되어 무력으로 남한에 개입 하더라도 국제간섭을 받지 않는 구조를 만들 수 있기 때문 이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연장선상에서 6.15 선언 제2항이 탄생 한 것이다.

김대중씨는 1980년에 군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한국에서 유엔군 등 외국군 철수를 주장 한 사실”에 대하여 추궁하자 이렇게 말했다.

<제가 외군 철수를 주장 한 것은 남북간에 전쟁억제협정을 체결하고 미.소.일.중 4대 강국의 지원 협력 결의 후 철수 하라는 것이었지 현시점에서 철수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의 말이 그럴 듯 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주한미군의 주둔 여부는 한국과 미국사이의 쌍무관계에서 결정 될 일이지 국제적인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1948년 말 철수했던 미군을 다시 불러 들인 것은 북한이다.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더라도 주한미군 문제는 북한과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한미 양국의 일관 된 방침이다.

따라서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북한 및 주변국가와 이야기가 잘 되면 미군을 철수 한다는 김대중씨의 생각은 연방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위험천만한 발상 이었다. 냉전시대 6.25남침으로부터 한국을 구한 것은 한미동맹 관계 였다. 냉전이 끝나도 동맹관계는 더욱 중요 한 사항 인 것이다. 적화통일이 궁극적 목표인 북한의 통일방안과는 타협이 불가능한 점을 애써 무시하고 남북의 당국자만의 결단만으로 가능 하다는 김대중식 발상은 놀라운 독단이자 헌법 위반이다.

이는 결국 침몰하는 배에다 서둘러서 밧줄을 묶어 같이 죽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남북문제가 생길 때 김대중 정권과 친북세력 및 김정일정권이 같은 편에 서고 애국세력 및 부시 행정부가 반대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당 규약에서 한국의 적화를 명기 한 것을 한자도 고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정부에게 자신들을 주적이라고 한 것을 취소 하라고 하자 주적이라 표기한 국방백서 발간을 보류하고 장충식 적십자사 총재가 월간조선과 인터뷰 한 말을 꼬투리 잡아 그의 퇴진을 요구 하자 이에 따랐고

- 대한민국을 뒤엎으려 했던 남로당 세력,친북세력,간첩, 그리고 대한민국의 법규정을 무시했던 세력이 김대중 정권 및 친북세력의 방치와 비호 응원 속에서 행동의 자유를 얻거나 민주투사로 둔갑 하고 있다. 김일성으로부터 돈을 받아 간첩죄로 약10년형을 받은 사람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는가 하면 노태우 정부시절 경찰관 7명을 불태워 죽인 방화치사 범을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 해 주었다.

- 이와는 반대로 김정일 추종세력에 대한 비판과 수사는 눈치를 봐야 하는 분위기가 언론.공안기관에 형성 되었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직함을 생략하고 민족반역자이자 민족사의 수구세력 인 김일성에겐 주석, 김정일에겐 꼭 위원장이라 칭 하고 있다.

-

- 김대중정권은 김정일과 그 추종세력을 존중 하면서 탈북자,재북 국군포로를 무시, 냉대함으로써 국민들의 자존심과 국가의 혼을 파괴 한 것이다.

- 김대중 집권이후 한국사회에서 강화된 친북세력은 체제불만 층을 규합하며 눈 덩어리 처럼 불어나고 있다 김정일이 좋은 사람이라는 유권자들이 10-15%(400-600만)이나 된다. 한국은 내전으로 폭발 할 지 모르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것이다.

- 햇볕정책은 김정일 정권의 변화에는 실패 했지만 한국을 변화 시키는 데는 성공 한 것이다. 그런 변화를 가능케 한 김대중의 이념의 뿌리는 좌익행동대원 시절, 연방제 제안과 한 민통 조직 시절까지 거슬러 오르고 김일성-김정일의 2대에 걸친 공 들임은 6.15 선언 제2항으로 결실 된 것이다. 테헤란로의 현란함 뒤에서 번져가고 있는 전근대화, 친북부패세력의 독소를 애국자유세력이 제거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조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

 

1.10. “북에서는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

 

(장혜영 전 북한의 통일전선부 요원의 수기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 부 근무: 현재 탈북상태)

그는 “김일성은 김대중의 집권의 길을 열어 주려고 박대통령 암살명령을 내렸다” 고 말 하면서 이어서 아래 같이 말한다.

<얼마 전 외국순방 길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며 “남북간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 했다. 과연 북한 노동당 적화통일 정책을 제1선에서 실행해오던 통전부(통일전선부)의 한 일원으로서 최근 김용순 계열 숙청과 관련하여 여러 요원들과 탈북한 뒤 지금 제 3국에 머물면서 이 글을 쓴다 나는 노무현의 무식한 말에 “NO”라고 대답 할 수 있다.

김정일은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북한을 절대로 가난한 나라로 생가지 않는 특이한 자아 절대감이 있다. 바로 거기서 세습정치욕도 나오고 적화통일 야망도 계속 되는 것이며, 그래서 수백만이 굶어 죽든 말든 핵 프로그램을 완성 하기 위해 오늘도 억만 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지금 자기의 뜻 대로 좌경화 돼 가고 있는 한국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측근들과의 파티에서 불쑥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도가 몇 개지?”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던 중 아홉 개라는 누군가의 대답에 김정일은 웃으며 소리쳤다.

“왜 아홉 개 만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 도(道)”

순간 좌중에서 박수가 터졌다.

김정일이 비준한 2006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일정에 대한 통전부의 계획서에는 역사적 의미로 볼 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부분이 백지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나란히 순안 비행장에서부터 숙소까지 평양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가게 되어 있는 연도 환영 행사였다.

김일성 사후 공개행사를 극력 피하는 김정일이라 신변보호 차원에서 삭제된 것으로 알았던 준비 요원들은 행사 당일에 마치 사전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김정일의 리무진에 단독으로 오르는 김대중의 행동을 보고서야 계획의 공백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첫 만남에 있다”

그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 나왔다.

“우리 수령님은 확실히 천리안의 예지를 자지고 계시는 분이다.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정상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임동욱,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적국의 괴수를

 “수령님의 전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김대중 그는 과연 누구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북한 독재자의 충복인가?

김대중의 이름은 이미 그가 한국의 민주투사로 인정 받던 1970년대에 통전부의 문건에 올라 있었다.

북한이 인물흡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1960년 4.19 혁명 이었다.

김일성은 그때 통일의 호기를 놓쳤다고 두고두고 후회 하면서 4.19가 붉은혁명으로 승화되지 못한 요인은 그것을 주도할 만한 적색인물과 그 중심에 지하 당이 없었기 때문이니 하루빨리 한국 내에 혁명정당을 구축 할 것에 대한 과업을 주었다.

북한은 급기야 “통일혁명당”을 결성하고 마치 그것이 한국 내에 실존 하는 지하당인 것 처럼 보이기 위해 미국.유럽.일본 동남아 까지 그 지부를 설치하고 요란하게 선전 했다. 밖에서부터 만들어진 이 유령조직을 안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통혁당”이름으로 출간된 각종 격문들과 인쇄물들을 한국에 살포하거나 침투 시키는 것은 물론 인물포섭과 지하 당 결성에 총력을 다했다. 이를 위해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돌격대로 내세웠다. 1950년대 조직된 이 협의회는 조소앙,안재홍과 같은 납북자들과 월북자들로 이루어진 순수한 이남 출신 집단이다. 이 협의회는 한국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함께 편지발송,방송심리전등 온갖 수단을 통해 한국에 남아 있는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여 대남 전선을 형성 하는 것을 주 업무로 삼았다. 지금은 “재북 평화통일촉진위원회”로 격상 시켜 북한의 선전 도구로 활용 되고 있다.

이렇게 대남공작의 제1과제를 반정부 의식이 강한 인물 흡수와 지하 당 구축 좌파단체 확산으로 정한 통전부는 1970년대에는 민주투사로 자처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에게 김일성의 친서와 공작비도 보낼 만큼 혁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통전부 기밀실에는 박정희의 유신독재 반대를 부르짖으며 김대중이 일본에서 맹활약 하던 당시 그 흡수공작에 적지않게 공헌한 조총련 산하 비밀요원 들에 대한 활동내용이 낱낱이 기록 되어 있다.

박정희가 암살된 후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 할 수 있는 정국조정 전술안도 보관 되어 있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은 바로 이 전술 안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작전 이었다. 남북 정상 회담의 준비를 총책임 졌던 송호경에게 김정일은 :”김대중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 하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라고 지시 했다.>

또 다른 북한 통전부 요원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통전부-친북세력-좌파정권이 3위일 체가되면 대한민국을 적화 시킬 자신이 있다고 판단하는데 이에 대한 가장 걸림돌이 조선.동아로 보고 있다. 그래서 김정일은 이를 없애려고 조선 동아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김정일이 명령 했을 때만해도 통전부에서는 한국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곳인데 잘 먹히겠는가 하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우리가 친북세력에게 지령을 내리고 북한 선전 매체를 총 동원하여 조선.동아를 공격 하니 남한에서 친북세력이 들고 일어나고 정권이 합세하여 조선.동아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놀랐다>

 

위의 이야기를 볼 때 한국 내 좌익세력과 김대중.노무현 정권 그리고 김정일과의 관계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또한 <통전부가 약2500명, 작전부가 약 8000명, 여기에다 군의 정찰국 요원들을 합하면 수만 명에 달 할 것이다.

이들이 자나깨나 남한의 적화를 위해 일하는데 국정원은 대북 자유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히려 남한은 경찰 내 전문적 대공수사요원 1000명을 없애고 국정원, 기무사 등 대공수사부서를 축소 하여 한국의 대공 수사력을 대폭적으로 약화 시켰다. 이러고도 한국이 적화되지 않음은 하늘이 보호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는 또한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광판 뉴스방송을 폐지 한 것에 대하여

<요사이 북한 군인들은 군대 생활 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남쪽에서 들려오는 신기한 뉴스를 듣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없어 졌으니까 하는 말이다.. 만일 북한에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북한방송을 통해서 북한군인들이 총부리를 남쪽이 아닌 북쪽 독재자 한 테 돌리도록 해야 하는데 왜 국군이 김정일 한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북한 주민들을 배신하며 한국 국민들을 기만하는 그런 바보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대중은 과연 누구의 편인가? 한국 국민들을 위한 대통령인가? 김정일의 하수인인가?

그는 이어서 <북한은 지금 썩은 사과처럼 매달려 있다. 김정일만 제거 되면 정권은 끝장이다. 한국은 이제 김정일 사후를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그의 운명도 다된 것 아닌가? 나 같은 사람이 탈출 할 정도 이니까> 라고 말 했다.

1970년 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운동권에도 “통혁당” 지하가 심어 지자 여기에 힘입어 김일성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주동적으로 제기하고 남한정부를 압박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50만 명의 탈북자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28만 명의 생명들, 굶어죽은 300만 명의 백성들을 생각해 보라 김정일 정권을 한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생각 한다면 그것은 반민족,반통일 이다.

김대중씨를 기회주의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정책적,전술면에서는 기회적인(또는 유연한)태도를 보이지만 이념적,역사적,전략적 면에서는 초지일관 이다. 대북.통일문제에 있어서 그는 여론에 불리 할 때도 좌파적 또는 친북적 자세를 견지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 했을 때 조문론을 놓고 보인 태도, 사형선고를 받아 가면서도 놓지 않았던 통일방안,북핵문제,서울올림픽공동개최론,남북한 UN가입문제에서 취한 반정부적 자세는 자신의 이념을 딛고서 부정적 세론에 맞선 대담 한 것들이었다.

이회창씨의 한나라 당이 이념형 지도자인 김대중씨를 과소평가하거나 잘못 보고서 그의 햇볕정책을 “정책의 차이”로 해석하여 대을 한 것은 전략적 실수 였다. 김대중씨의 이념에 기초한 대북정책은 그 지향점이 이회창씨나 과거 어느 대통령의 정책과도 다른 것이다.

김 씨는 그들과 사상 즉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다. 이념적 행동에 일관성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진리에 맞아야 한다.

좌익형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정신이 물질의 산물내지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소위 유물사관 이다. 이는 인간의 정신적 측면을 무시한다.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무시하는 사람은 인간 그 자체를 경멸 한다. 우리가 소,닭 같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그것들의 정신적인 면을 무시 하기 때문에 그것을 먹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공산주의 이론의 기둥 가운데 하나인 계급투쟁은 인간사회를 적대관계로 본다.

자본가나 지주를 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이 들을 타도,학살,고문을 하는 것을 “혁명’이나 “해방”이란 말로 미화 찬양 한다. 인간의 증오심을 자극 확대 시키는 기술자들에게서 정의감이나 동정심 그리고 인권의식을 기대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권력을 잡을 때 유리 할 때만 인권을 외친다.

공산주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계급을 국가보다 더 중시한다.

좌익은 본질적으로 반국가적이다. 계급간의 갈등을 증폭 시켜서 국가의 통합성과 정통성을 깨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려고 하겠다는 계급투쟁이 어려울 때는 민족을 들고 나아가 국가를 파괴 하려한다. 이들은 원초적으로 애국심을 미워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도덕관은 간단하다. 그들에게 유리한 것 계급혁명에 도움이 되면 그 어떤 것도 선이다..

유물론,계급투쟁,증오심,전도된 도덕관의 종합은 양심의 마비로 나타난다.

양심이 빠진 인간은 외형은 인간이지만 사실상 인간이 아니다. 한국 내 친북 좌익들의 행태를 보면 정상적인 인간들이 할 수 없는 행동을 태연히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대중은 명백하게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정직 하지 못한 인간이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사기꾼보다 더한 김정일을 상대 했으니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을 발전 시킨 주력은 이승만과 박대통령 이다. 그들은 건국,호국근대화,민주화의 국가 건설 전과정에서 영욕의 세월을 헤쳐가면서 주적과 내부의 적의 도전을 극복해 내면서 국가의 발전을 이룩해 냈다.

우리는 거짓으로 포장된 어둠의 세력과 과감히 싸워 이겨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황장엽씨의 “어둠의 편이 되어 버린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새겨 봐야 한다.

 

선우종원 검사와 보도연맹 강사

 

김대중씨가 보여 준 김정일에 대한 이해 할 수 없는 일방적인 태도는 단순히 굴종적인 말로써 표현 할 성격이 아니다.

그는 2008년 6월 방북을 추진 하다가 김정일로부터 매정하게 거절 당해 국제적인 창피를 당했다.

그는 김정일에 대한 강한 유감을 드러내어야 할 입장인 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핵실험을 예고하자 김대중씨는 거의 매일 공갈치는 김정일을 편들고 미국을 비난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북한의 핵무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6.25 전쟁에도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식의 극좌적 역사관을 피력 했다

“이런 사람이 과연 한국의 대통령이었나” 하는 놀라움은 연속되는 더 놀라운 발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국은 1973년 납치사건 때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두 번이나 살려 주었다.

그런 그가 미국에 대해서 “김정일을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못살게 굴어 핵실험을 하도록 했다”고 공격 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 더구나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 대해서 “악의적”,”못살게”란 표현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라면 김대중씨는 속으로는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고 김정일을 사모 하든지 아니면 북한을 사상적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 한다.

“김대중씨가 드디어 자신의 본색을 드러 내었다”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난 10월 말에 기자는 선우종원 변호사를 찾아갔다. 선우변호사는 광복 직후 좌,우익 대결에서 오제도 검사와 함께 좌익 소탕에 앞장 섰던 공안검사 출신이다. 그는 서울지검에서 근무할 때 “보도연맹”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 수사기관에서 같은 좌익사범을 돌려 가면서 조사하고 무리하게 범인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본 공안검사 들은 한 번 수사를 받고 나온 좌익사범 들에 대해서는 신고를 받아놓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949년 좌익 전력자의 신고를 받기 시작 했는데 전국에서 20만 명 이상의 신고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보도연맹을 조직한 검찰은 경찰과 협조해 교육을 하게 되었다. 보도연맹 설립자인 선우 당시 검사는 “공산주의자들을 전향 시키는 데는 전향한 공산주의자가 강사로 나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 했다. 선우 변호사는 말했다

<서소문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1950년 초로 기억 됩니다. 전국에서 도별로 두 사람의 보도연맹 원을 강사요원으로 추천 받게 되었어요. 나는 전남.북을 맡았는데 이때 전남에서 올라온 강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나 잘 하는지 겁이 날 지경 이었습니다. 눈이 새까맣고 얼굴은 퉁퉁한 사람이 참 똑똑해요. 첫 강의가 끝난 뒤 제가 그를 검사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추궁 했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 할 수 있나? 공산주의 문제점을 그렇게 잘 알았다면 일찍 전향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물었더니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를 하더군요. 그 뒤 이 청년을 강사요원으로 썼는데 아마 6.25 때 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보도연맹 교육에 참여 했을 겁니다. 이 청년이 김대중씨 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김대중씨는 보도연맹에서 단순히 돈만 내는 운영위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남도 전체를 대표 할 강사로 추천될 정도라면 보도연맹의 핵심인물 임을 쉽게 추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 할 점은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교육할 만큼 이론무장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감상적으로 즉흥적으로 좌익에 가담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좌익 전력에 대해선 좀더 구체적인 자료가 있다. 김대중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 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동당 상임위원 급으로 권상식등과 같이 활동 했다고 진술 한 적이 있다.

북한정권이 김대중씨에게 주목하고 그를 포섭대상으로 삼아 접촉을 시도한 최초의 사건은 1967년 이었다.

김대중씨의 목포상고 1년 선배인 정태묵은 김씨가 목포에서 좌익 신민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할 때 남로당원으로 일하다가 구속되어 7년형을 복역 중 6.25를 만나 풀려 났다. 그는 1960년대 북한으로 올라 갔다가 간첩이 되어 내려 왔다.

정 씨는 1967년 총선 때 목포에서 출마한 김대중씨에게 접근해 선거전략을 가르쳐 주고 선거운동원을 소개해 주었다.

정 씨는 임자도 간첩사건의 주범으로서 1968년 구속 사형이 집행 되었다. 정보부는 김대중 의원이 정 씨를 간첩으로 알고 만난 것은 아니라고 하여 기소 하지 않았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 진 김대중씨를 김일성 정권은 공작대상으로 삼았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후 일본과 미국을 무대로 반정부 활동 중이던 김씨에게 접근 한 것은 재일민단 파괴공작에 앞장선 조총련계 북한 공작원들 이었다. 김대중씨가 이들과 합세해 만든 것이 “한민통”이었다. 김대중씨는 이 단체의 의장으로 취임 하기직전에 납치 되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그를 납치하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한민통이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김대중씨를 의장으로 추대해 대남공작에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함 이었다”는 취지로 말 한적이 있다. 대법은 한민통이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대남 적화에 종사하는 반국가단체로 규정 한바 있다. 법원과 검찰은 이 단체의 핵심인물인 조직국장 곽동의를 북한공작원이라고 판단 했고 김대중씨가 1981년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이유는 반국가단체 한민통의 수괴였다는 점 때문이다. 2004년 서울고등법원은 김대중씨에 대한 재심 선고 때 광주사태에 간여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 했으나 한민통 결성부분에 대해선 유죄인정을 파기 하지 않았다.

 

김대중씨가 한민통 결성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북한의 대남적화 노선과 맥을 같이 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을 내놓았다. 이는 반드시 북한정권의 대남공작에 이용 될 소지가 있었다. 그 우려는 2000년 6.15 선언에서 김대중씨가 김정일의 대남적화 노선을 받아들인 반 헌법적인 연합연방제 통일방안에 동의 함으로써 현실이 되었고

한국에서 벌어진 좌익득세와 남북한 좌파정권 공조 현상, 그리고 반미광풍은 여기서부터 시작 된 것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지자 당시 대남공작의 지휘자로 등장한 김정일은 한민통을 중심으로 김대중 구출운동을 벌이고 한민통의 행동부대 한청소속 활동가 문세광을 포섭 하여 박대통령 암살을 지령했다. 전 북한 통전부 요원은 <북한정권이 박대통령 암살을 기획 한 것은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였다>고 증언 했다. 1974년 문세광은 박 대통령 대신 육 영수여사를 사살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당선이 유력시되던 김대중 후보를 상대로 일종의 협박을 하기 시작 했다.

북경 우체국 1997년 11월11일자 소인이 찍혀 있는 편지가 김대중 진영의 김원길의원에게 배달 되었다. 이 편지는 김대중 후보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국민회의 측은 괴 편지가 도착했다고 발표 한 뒤 안기부로 우송 했다. 이 편지의 발송인은 김장수로 되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본인은 다행히도 일본에서 인연이 깊고 지금은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 계시는 김병식 선생님과 상면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 분도 이번 대선에서는 김대중 선생께서 꼭 당선되시기를 믿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여러 이야기를 건네시면서 선생님이 가장 어려운 때인 1971년 가을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선생님과 조용히 만나 우의를 깊이 하여 선생님의 반독재운동에 자금지원을 하고 저 트렁크를 넘겨드리던 그때를 감회 깊이 회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주”와 “통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 오신 선생님과 같으신 분이 대성하면 금후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나라의 통일도 연방제 방식으로 결착을 보리라 확신하시며 선생님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인사와 후원의 뜻을 전해 줄 것을 당부 하셨습니다>

대공수사관계자는 “대통령이 되면 연방제를 받아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폭로할 거리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 했다. 대통령에 취임 한 뒤 김대중씨는 역대 정부가 대남 적화전략으로 규정해 처벌 대상으로 삼았던 연방제 통일안을 6.15선언 2항에서 사실상 수용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위 편지에 등장하는 김병식은 북한의 부주석으로 있다가 199년 7월 사망 했다.

1997년 12월 대선 투표일이 가까워 오자 북측은 김대중 후보측 뿐만 아니라 반 김대중 진영으로도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김병식 명의로 타자로 친 편지 였다. 북측은 김장수 명의로 된 편지가 한국에서 문제가 되지도 않고 보도 되지도 않은데 실망을 한 듯 이번에는 김대중씨에게 건네 주었다는 돈의 액수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을 한 편지를 여기저기 뿌렸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 했습니다. 선생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20만 달라 밖에 보탬 해 드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괴롭게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도 어느 회합에서 말씀 하셨지만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남에서 자주적 민주정권이 서야 하며 북과 남이 민족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라고 간주 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과의 뜻 깊은 상봉을 확약 하면서 옥체만강을 기원 합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주체86(1997)년 1월5일 평양>

 

김대중씨는 1971년 도꾜에서 김재화등 나중에 한민통을 함께 만들게 되는 친북계 인물들과 만났다는 진술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이 사실만으로 그가 김병식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 할 수는 없다. 2003년 대북불법송금사건 특검수사기록을 보면 이것은 민족문제를 다루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흥정 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현대그룹을 창구로 하고 국정원을 시켜 4억5000만 달러를 김정일의 마카오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내준 행위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재수사하여 단죄 되어야 할 세계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희대의 대국민 사기극이다.

그는 김정일의 비자금 계좌로 보내는 돈이 군사비로 전용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불법임을 인식 하고도 지시 했음이 확실 하다.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김대통령께서는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송금을 하라”고 지시 했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다.

퇴임이후 김대중씨의 김정일에 대한 저자세는 더 심해졌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도발행위를 한 김정일을 김대중씨의 “김정일.햇볕정책 감싸기”와 “미국때리기”는 도를 더해 갔다. 그는 2008년 9월 목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 과거 판문점에 총소리만 나도 피란 갈 준비 했는데 이제는 “핵실험을 했다”고 해도 안심하고 산다. 남북교류를 통해 우리가 정치.경제적으로 북한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이 짧은 문장에 거짓말을 이렇게 많이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김정일과 김대중씨뿐일 것이다.

 

첫째, 남북관계를 악화 시킨 책임자가 남북관계를 개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간첩을 보내고 서해상에서 두 차례 도발하고, 한국을 겨냥한 핵실험을 하고 자신의 방북마저 불허한 북한정권을 놓고서 “개선”이라니 김대중씨는 노예근성의 소유자임이 분명 하다. 노예는 주인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죽이지만 않으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좋은 것이라고 한다.

둘째, 과거 판문점에서 총소리만 나도 피란 갈 준비를 했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 1976년 도끼만행 때,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때 국민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일전불사의 정신으로 대응 했다. 도대체 누가 피란 갈 준비를 했단 말인가

셋째, 핵실험을 해도 안심하고 산다는 말은 김대중류의 종김세력에게만 해당 된다. 국제깡패가 핵무기를 만들었는데 한국인 안심하고 산다니? 안심하고 산다는 인간들은 반역자들 정신차려야 할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이 필요한 인간들이지 정상적인 국민들은 아니다. 일부 국민들이 안심하고 사는 이유는 김대중씨 덕분이 아니라 이승만,박정희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구축한 한미동맹과 국군의 대북 억지력 때문이다.

넷째, 북한 즉 김정일이 한국에 대해 감사 하도록 만들었단다. 감사의 표시가 핵실험이고 미사일 발사인가?

 

김정일의 핵실험 이후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노대통령을 압박하여 친김정일 노선으로 몰아간 김대중씨는 여러 번 무시무시한 충고를 했다. 우파정권이 들어서도 돌이 킬 수 없는 정도의 합의를 하라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30도 정도 좌경화 되었다. 이 정도에서 멈추어도 과연 정상적인 사회로 복원 될 것인가 의문인데 더 좌경화를 하도록 요구 하는 것 이다. 또한 국체와 헌법에 돌이 킬 수 없는 불가능한 타격을 주라는 것이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20-30% 정도의 적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골수 좌익은 유권자의 10%이고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친북세력을 합치면 25%이다. 이 들은 정권 핵심에 들어가 있으며 방송.노조.사회단체 등에 포진 해 있다. 정권과 대중조직, 한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결국 이들이 실제로 행사하는 동원력은 40-50%쯤 될 것이다. 요지부동의 대한민국 수호세력은 30%이다. 나머지 50%는 부동 층이다. 정권이 KBS.MBC 등 선동기구를 총동원해 40%의 유동 층을 집중공격하면 뻔한 거짓말도 믿게 만들 수 있다.

청와대. 국회. 정치계에는 전향하지 않은 386 극좌공산주의자 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들은 이념에 대하여 백치 상태인 관료집단을 부려서 반 헌법적인 정책을 밀고 나간다.

여기에 “실내정당”,”웰빙정당”인 한나라당은 대중조직이란 손발이 없는 상태에서 입만으로 싸우고 있다.

일본에서 민단 지휘부의 좌경화에 분노한 민단 구성원이 들고 일어 났다. 이들은 민단의 친 조총련 집행부를 몰아내고 새 집행부를 선출 했다. 순수한 애국심과 정의감으로써 좌익 쿠데타를 진압한 셈이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도 가능 할까?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호남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대한민국”이냐 “김대중”이냐의 결단을 한다면 대한민국의 살길은 거기서부터 열 릴 것이다.

http://cafe.naver.com/redhunters.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5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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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아래 클릭해서 보세요!)

http://nuri.donga.com/Dtalks?bid=11&timeseed=564&#!bid=11&s=writer&query=svtofjc&p=51&m=view&lid=244298

# 전 NYT도쿄 지국장의 김대중의 정체 폭로!

(아래 클릭해서 보세요)

http://nuri.donga.com/Dtalks?bid=11&timeseed=671&#!lid=250071&bid=11&p=1&m=view

# 김대중의 가면을 벗긴다!


(아래 클릭해서 보세요!)

http://nuri.donga.com/Dtalks?bid=11&timeseed=736&#!lid=252358&bid=11&p=1&m=view

 

*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차 안에서 지시한 내용 공개

<이대용 장군(육사 동창회장)이 미국 정보당국이 감청한 극비정보를

입수한 제3자를 통해 들은 것을 공개>

1. 2000년 6월 13일, 순안공항-초대소간 차 안에서의 대화 내용

2. 김정일의 답방을 저지한 내막

1.
"선친(김일성) 생존시 말하기를

오직 동지(김대중) 한 사람만이 끝내 충성하더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북남통일 하자.
첫째 반공법 없애고 지금부터 평화헌법을 극비리에 만들어라.
내년(2001)년 4월 1일 내가 남한 간다. 그때 합의하자.

8월 15일에, 이름은 '조선민주연합'으로 출범시키고
통일 대통령은 동지(김대중)가 먼저 하고 나(김정일)는 부통령하자.

남북이 대통령과 부통령을 번갈아 한다고 하라.

그러나 한달 뒤 동지는 몸이 아프다는 구실로 그만 둬야한다.

내(김정일)가 대통령 될때는 김근태를 부통령 시켜라..."

2.
"우리 군 지도자들이 말하기를,
'김정일이 답방 오면 환영하겠다. 그러나 6.25 사과하고 아웅산 등 도발 사과하라.

성명서 사과하고 오면 환영한다. 그렇지 않으면 체포해서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게 한국에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는데 이북에선 큰 충격을 줬다고 해요.

그래서 김정일이 못오게 된 겁니다"

<아래: 증언 음성 녹취 영상(9분): 링크 클릭해서 들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embed/9eSd3aXhq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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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노무현,문재인 일당의
종북 공산주의 반역 정체
(링크 보세요)
https://t.co/c4RZTbGMZo




 

      문재인, 2012.8.18, 현충원 김대중추도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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