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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옛 '전자 팔뚝시계' 값 95만원(현시세)

작성자신비아|작성시간24.04.27|조회수0 목록 댓글 0
옛 '전자 팔뚝시계' 값 95만원(현시세)… 부유함 과시 수단 취급받기도


'손목시계의 혁명! 바늘이 없습니다. 글자판도 없습니다, 구미 선진국에서 선풍적인 인기….'

완전 국산화에 처음 성공했다는 전자 손목시계가 1976년 봄 광고를 시작했다. 삼성전자공업이 내놓은 이 '혁명적' 시계는 '버튼 하나를 조작해 가며 6가지 기능을 발휘한다'고 자랑했다. 그 '6가지 기능'이란 '시, 분, 초, 월, 일, 요일을 표시한다'는 것이었다(조선일보 1976년 5월 2일자). 초보적인 디지털 시계였지만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모델별로 4만3000~5만8000원. 금값 기준으로 따져 보니 오늘의 약 70만~95만원이나 된다. 그래도 미국·일본제의 3분의 1 값이었다.



국산 전자 손목시계의 첫 시판을 알린 광고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선일보 1976년 5월 2일자, 12월 14일자, 6월 11일자).


초기의 디지털 손목시계는 귀한 물건이었다. 최근 국내 전시회에서도 선보이고 있는 '007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1973년 작)' 속 제임스 본드의 디지털 시계 '펄서(Pulsar) P3'는 세계인들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자 손목시계는 청량음료 회사의 대규모 경품 행사에서 최고상 상품으로 채택됐다(조선일보 1976년 10월 15일자).
1978년 3월 서울에서 열린 '미주(美洲) 공관장 회의'에서 최각규(崔珏圭) 당시 상공부장관이 주미대사 등 20명의 공관장에게 딱 1개씩 나눠준 특별한 선물도 국산 전자 손목시계였다.
최 장관은 '여러분들이 대사이기 때문에 진상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세일즈맨 대표로 보고 더 훌륭한 세일즈를 부탁하는 뜻에서 드리는 것'이라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경향신문 1978년 3월 27일자).
어느 주부는 이웃 초등학생 팔목의 전자시계를 보고는 '부모가 부유함을 과시하려고 채워준 것이
아닐까'라며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동아일보 1981년 8월 6일자).

1980년이 되자 전자시계는 전체 시계 판매량의 45%가 됐다. 한 해 140만개쯤 팔렸다. 1984년 '시계 수입 자유화' 조치 이후 홍콩·대만 등에서 개당 1달러짜리 싸구려 전자시계 80만개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값은 폭락하기 시작했다(매일경제 1984년 8월 24일자). 전자시계가 대중용이 되면서 엉뚱한 부작용들도 고개를 들었다. '전자 커닝'이었다. 각급 학교 시험 때도 팔목을 들여다보며 커닝하는 얌체들이 생겼고, 1992년에는 전자시계를 이용한 운전면허 시험 부정이 적발돼 2명이 구속됐다. 첫 대입학력고사를 앞두고 1981년 11월 교육 당국은 '날짜·요일 표시 이외의 기능이 있는 전자 손목시계의 휴대를 금한다'고 발표했다. 올해 수능 시험장에서도 논란이 된 '디지털 시계 반입 금지'의 역사는 짧지 않다.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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