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동양사

[한국사]그놈의 조선까들의 고려 찬송가인 '고려짱은 상업국가였는데 조선은 상업을 천시했네'

작성자masterxxzz|작성시간12.08.21|조회수2,377 목록 댓글 29

 

1. 삼국시대부터 고려조 까지 세계적인 무역국가 였는데 성리학에 찌든 ㅂㅅ 조선이 와서 ㅈㅁ 태그탔다.

 

당시 고대의 무역이란게 말이 무역이지 일반 백성들과 상관이 없는 귀족들 사치품 (페르시아 유리병등에 국제무역 상업국 운운하는데 그당시 일반 백성들과는 하나도 상관없는 유물) 당시 사치품 무역이란 그야말로 국가적인 이익이랑 괴리가 있는 구멍가게 수준의 "우와 바다넘어 것들 엑세서리가 진귀하네? 우왕 굳!'

그리고 그 사치품 운송한 작자들은 중앙아시아나 중동아랍애들인데 이건 조선이 쇄국 정치해서 무역로가 끈긴게 아니라 몽골,명, 청들 중국 역사상 초강대국이 나오고 몽골의 쩔어주는 전력과 중동, 유럽의 꽁기 꽁기한 관계 때문에 국제적으로 이쪽으로 교류하기 힘들어 짐. 그리고 시대가 갈수록 귀족 사치품 무역보단 국가적 규모의 무역으로 발전하는데 사실 중국이랑 일본이 자원적인 면이나 지리적인 면에서 우리보단 훨씬 외국애들에게 매력적이지;;

 ( 님들이 외치는 위대한 무역국 고려는 후기에 가면 갈수록 조선과 비슷한 대외관계가 될까? 이것도 성리학 육성정책?)

  파이날로 동아시아 쪽으로 무역하는 세대 점점 중동에서 유럽으로 체인지 그치들이 조선을 몰라여 ㅋ

 

2. 고려의 상업육성

 

당시 상업육성이란 개념도 없었고 둘다 농본국가인데 농업이나 상업이나 조선이 국가적인 규모가 훨씬 큰;; 대외무역 어쩌고는 위에서 말했고 상업도 인삼등의 작물을 국가적으로 팔아서 국가적 이익일 낸 것이 조선시대임.

 농업수준까지 합쳐서 비교하면 더 이상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중세의 생산력과 비교하는 것도 좀 에러지만;;)

조선군의 무기였던 조총이나 불랑기포 홍이포가 어느나라꺼지? (당연히 모르겠지;;)

 고려때도 활성화되지 못한 화폐가 활성화되고 '문화'라는 것도 철저하게 지배층 중심이었던 (기록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전대와 달리 서민문화가 자리잡았던 것도 조선;; (성리학으로 인한 전체적 질적저하라고 하면 그 ㅄㄹ에 할말이 없다.)

 

3. 일본처럼 빨리 받아들였다면 미국처럼 강해졌을 터인데 성리학에 찌든 ㅄ조선은

 

 현대적 시각으로 (아니 현대적 시각도 재대로 된게 없음) 깔거면 그냥 조선은 민주화를 못했다고 까는게 더 이성적일 듯;; 위대한 개방국 일본은 왜 미국배 대포 몇방에 날라갔을까? (당시 미국의 혼란 상황 아니었으면 여기도 식민지 신세 장담 못하지;; 일본은 운과 로또, 실력이 여러가지 합친 경우)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 둘다 뻐기고 버틴 이유 당시 개방이란 식민지로 이어지는 시대인 것도 무시못한;; 이것도 사실 말이 전략상 승리지 전투 내용은;;  (지금과 같은 무역으로 생각함?  힘을 기르면서 국제상황을 완벽하게 이용하고 신기술을 도입했어야 했는데 조선이 ㅂㅈ 이야라고 말한다면, 그럼 너님이 해봐 )

 

 

 

 

 

ps. 사실 학교의 국사선생님들도 이러한 시각이 있는 분들이 허다해서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요 ;;

ps2. 당시 개방해서 살아남은 나라는 일본말고 태국도 있는데 여긴 국제적 지리적 엄청난 로또, 그냥 조선 ㅂㅈ이라고 보지 말고 제국주의 했던 나라말고 다 ㅂㅈ이라고 하는게 ;; (제국주의를 비난하면서 제국주의가 되고 싶어하는 이상한 논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 치우승천 작성시간 12.08.28 그놈의 사치품 교역 몇 번 했다고 상업국가 드립이라니... 예전에 저 떡밥에 속았다는 생각을 하면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 작성자우쏘 작성시간 12.09.01 고려도 화폐경제가 잇엇다고 아는데요. 현재 우리가 외화를 사용하는것처럼 고려또한 송나라 화폐나 원나라화폐를 사용햇다고 알고잇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우쏘 작성시간 12.09.01 http://dcn.or.kr/e6/15382

    1276년에 지폐의 발행량이 100만 정(錠)을 돌파했다. 고려의 마산에서 출정한 2차에 걸친 일본침공(1274, 1281년)과 그해 남송을 병합하면서 치러야 했던 전비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1281년 일본으로 파병될 고려병사들에게 급료로 모두 3000정, 은으로 환산하면 7만 5000 양(兩)을 주었고, 고려가 동원한 말 값으로 800정(은 2만양) 전함 건조비용으로 3000정(은 7만5000양)을 지불했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에 엄청난 원나라 지폐가 흘러들어왔다.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한 한국에 달러가 유입한 상황을 연상케 한다. 1287년에 원나라 정부는 '지원보초'라는 고액권 화폐를 발행했다
  • 답댓글 작성자masterxxzz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9.01 근데 그 화폐가 활성화 된 것은 아주 한참 뒤인 조선시대 후기입니다. 한반도 왕조 국가 자체가 조선 후기를 제외하면 상업이 국가적으로 육성된 적인 전무함;; 하지만 아는 것도 없는 위대한 고구려의 기상을 받는 조건까들에게는 그저 상업왕국 고려 (물론 근거는 없다.)
  • 답댓글 작성자bookmark 작성시간 12.09.01 송대까지 유지되던 화폐경제를 원나라가 어떻게 망처먹었는가를 생각하면 그런말 안나옵니다. 고액권 남발로 송대에 종이지폐까지 나돌던 걸 인플레이션 일으켜서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는데.

    그리고 '화폐가 들어온 것'하고 '화폐경제가 존재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