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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삼국사기의 근본적 왜곡사항(기년 및 계보) 그러나 더 확고해지는 진실 (보강 후 재업)

작성자마법의활|작성시간24.04.12|조회수258 목록 댓글 22

 제가 언젠가 올렸던 글을 몇 군데 보강해서 올립니다. 

실토하자면 제가 당시에 고고학 논문집을 오독한 탓에, 사로국이 고고학적으로 유의미하게 결집되는

시기를 2세기 후반이 아닌 2세기 중반으로 잘못 기재했었습니다. 

 

  저 또한 내심 삼국사기 초기 기년이 조금이라도 맞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지 반성해봅니다.;

 그 외 몇 가지 부분도-삼국사기 초기 기년 오류 부분 근거-을 추가하여 재업합니다. 

 

 이전 글은 제가 나아가는자 님께 답변 드린 몇몇 중요한 댓글이 있어 삭제하진 못하고, 해당 댓글만

제가 추려서 별도의 글을 만들게 되면 그때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

  일단 명심해야 할 기본 사항이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오늘날 대한민국 공문서 DB같은 공문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삼국사기 기년은 곧이곧대로 옳다는 꽤 강박증적

증세로 집착하는, 문해력 부족한 역덕들이 있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이들의 생각이

근거 없는 망상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https://blog.naver.com/hopeater/222859913150

 

 물론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집필진은 왜곡 없이 최대한 곡필 없게 객관적 서술로 일관하였으나,

그가 수집한 자료 자체에 삼국인들 자신의 왜곡이 있어서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1. 신라: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 중반에 서라벌에 낙랑인 집단이 처음 등장하고, 이들이 2세기 후반에 그때까지 서라벌 내에서 서로 팽팽하게 견제 중이던 고조선인 집단 세 부류(=1. 진개의 정벌 당시 남하한 고조선인들, 2. 위만조선 성립 시기에 내려온 부류[[역계경 집단이 유력함]], 3. 위만조선 멸망 후 내려온 유민들)등에 강력한 위계 체제를 관철하여 한 집단으로 규합한 것으로 판명되어 있습니다.

네......바로 낙랑인 집단은 누가 봐도 박혁거세 집단이며, 고조선인 집단 세 부류는 사로 6부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고구려보다 건국 기년이 늦는 걸 참을 수 없었던 신라측이 고구려 건국년도보다 건국 기년을 인위적으로 앞당긴 걸로 보입니다.

1-1. 단, 그럼에도 준왕의 기원전 194년 마한 건마국 건국보다는 연도가 늦습니다. 이는 사로국 진한왕이 적어도 의전적 서열은 보다 높은 마한왕과 교류한 내부 전승이 너무나도 확고했기에,

아무리 올려잡았어도 준왕 마한 건국보다 올려잡을 수는 없었을 개연성이 강합니다.

즉 신라가 인위적으로 기년을 조정했어도 나름대로 내부 기준에 따라 했다는 것으로 이는 오히려 신라본기가 최소한의 양심은 지켰다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신라본기도 일본서기마냥 철두철미하게 왜곡질 했다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그냥 헛소리임을 명심해야 하겠으나, 여하튼 왜곡이 있었다는 그들의 지적이 옳음은 이 대목에서 다시 경청해야 할 사항입니다.

모 아니면 도니까 식민사학자들이 하는 얘긴 다 무시해야 한다고 악 쓰는 바보들 계시는데.....

그냥 무시하고 싶지만 이런 인간들이 있으면 한국인들 전반의 지적 수준이 일본 사학계에게 저평가될 수 있기에 어쩌는 수가 없네요. 때문에 구태여 다시 짚고 넘어갑니다. 

1-2. 여전히 삼국사기 초기 연대에 대한 맹신이 가득한 이상, 여기서 다시 한 번 금관가야를 비롯한 진변한 일대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를 가져와야 겠습니다. 한국 군사사 제1권 송호정 교수님 기고분 121쪽 사항입니다.

 

 김해 양동리, 창원 도계동, 부산 노포동, 울산 하대, 대구 팔달동 등에서는

2세기 후엽에 장검과 대도가 출현하여 3세기 대에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3세기 경 살상력이 보다 높은 유경식 철촉이 등장하여 부장이 급증하며 철모의 부장량은 낙랑보다도 많았던 걸로 드러납니다.

  대체로 무기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군사조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장검, 대도, 화살촉, 철모 등은 2세기 후반~3세기 초에 진변한 일대에서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며, 물론 이는 사로국 건국과 금관가야 건국 등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사항입니다.이는 사로국 일대에 2세기 후반부터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발굴 결과와 또 다시 일치하는 사항이기도 하고요.

이는 김태식 교수님 저서인 4국 시대의 가야사 연구에서도 재확인됩니다.

 

 2세기 중후반에 김해 양동리 일대에 낙랑인들이 나타나며, 3세기 후반에 김해 중심 세력이 양동리로부터 대성동 고분군으로 넘어가는데, 김해 대성동이 변한-가야 일대에서 가장 막강했고 실력차도 분명한 걸로 봐서 이는 다름아닌 금관가야 김수로왕 세력인 걸로 해석이 유력합니다. 김태식 교수는 이 시점에서 가야 일대가 보다 독점적으로 영도되기 시작한다고 지적합니다. 한편 양동리는 금관가야 건국 이전 변한 일대 세력 중 하나로 유력합니다.

 해서 탈해~지마 이사금 삼국사기 기년 77~116년조 기사들은 가야와 신라가 서로의 영역 근처에서 독점적 리더가 되어 다투던 3세기 후반부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탈해-지마 당시 백제와의 충돌 기사들 또한 충청도 일대 백제 고고학적 증거로 봐선 절대로 3세기 중반 이전이 될 수 없는 사항과 또 다시 일맥상통하는 현상입니다.

2. 백제: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 중후반에야 연천 일대에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서울에서 발견되는 고구려계 고분들의 최상한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3세기 중반이고요. 그 이전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은 낙랑, 동북한계(옥저) 주민과 토돈분구묘인들으로서 고구려, 부여와 아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고로 고대국가 백제의 건국은 3세기 중반이며, 온조-비류 집단의 남하로 국가의 시기를 올려잡아도 2세기 중반이 한계가 되겠습니다.

사실 연천 일대 고구려 유민 군집 유적도 이견의 여지가 그나마 없는 건 2세기 후반이며 2세기 중반은 상당한 논란이 있음을 여기서 명심해야 겠습니다.

 

 풍납토성 축조 고고학적 최대 상한은 3세기 4/4분기며, 시료 분석 결과는 294년 중간값으로 +-52년으로서 고고학적 유물 분석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몽촌토성 축조 고고학적 최대 하한은 그나마 3세기 중반이지만 몽촌토성 안 그전 고분군은 토돈분구묘계 세력으로서 백제 건국 사화(비류니 온조니)와 아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전 기원전 1세기 무렵 축조된 3중 환호 목책 구조가 있으나 이는 백제 지배층과 전혀 무관한 중도유형문화계 동북한 옥저계 주민들이 건설한 것으로서 역시 우리가 아는 백제 지배층과 무관함은 물론 고구려, 부여 등과 직접적 관련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또 아직 무덤이 발굴안되었단 말이에욥! 이라고 주장하는

말 안통하는 양반들 계시는데. (하아.....)

https://blog.naver.com/hopeater/222657901011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 출신인 자기네 진실을 숨기기 위해 본인들은 고구려의 뿌리인 부여의 일파라고 억지 주장하였음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몽 집단 직후에 갈라져 나온 걸로 왜곡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제마저 어쨌든 초고-근초고왕 계열 왕가의 선조 온조가 주몽 아들이라는 사실만은 결코 부정하지 못했습니다다. 정말로 올려잡고 싶었으면 주몽의 선대로 올려잡는 게 더 유리했을텐데도내 이 전승만은 부정하지 못했다는 건데요.

초고-근초고왕 계열 왕가가 정말로 주몽 후손들임은 따라서 부정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고고학만 갖고는 역사 해석이 어렵다는 걸 우리는 다시 명심해야 겠고 저도 명심해야겠습니다.

3. 고구려: 신라가 고구려측 기록을 보고 기년을 올려잡았을 정도로 원래는 고구려측 전승이 원조로 보입니다. 그나마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가 연도 불일치 없이 거의 딱딱 잘 들어맞고 있습니다. 한국고대사에서 이렇게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가 연도 불일치 없이 들어맞는 사례는 적어도 익산 마한 건마국 외엔 거의 없지요.

그러나 고구려본기라고 왜곡이 없는 건 아닙니다.

고구려측은 흡사 백제가 고구려에게 그러했듯, 본인들이 부여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본인들은 부여에서 나오지 않았고, 부여의 뿌리인 북부여(=탁리국)에서 나왔다고 주장했으나....

고고학적으로 고구려는 북부여(백금보-망해둔 문명권)과 1도 관계 없는 게 드러납니다.

이는 백제 또한 고고학적으로는 부여와 관계가 1도 없음과 일맥상통합니다.

고구려는 고고학적으로는 그냥 대소와 금와의 그 부여하고만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백제 또한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하고만 관계가 있음과 또 다시 일맥상통합니다.

 

고로 이는 고구려인들 자신의 왜곡입니다.

이러다보니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A.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계보가 정확하지만 5세기 중반 눌지 마립간 전 기사들은 기년(=연도)을 믿을 수 없다.

B.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오히려 3세기 후반 책계왕 이전 기사들까지만 기년이 틀려 있다. 책계왕 이후 기사는 기년을 신뢰할 수 있다. 적어도 기년 자체는 신라보다 상대적으로 정확한 편이다. 단, 계보 자체는 그야말로 기본적 사항들 외엔 엉망이다. https://blog.naver.com/hopeater/222872706331

C.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적어도 모본왕 사후 ~ 태조왕 즉위 때 외엔 기년 오류는 없다. 그러나 계보 자체는 백제 본기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양호하지만 최소한 주몽 ~ 신대왕 이전까진 상당히 뒤죽박죽 엉터리다. 이는 적어도 계보 자체는 모두 사실임이 높음이 논증되고 있는 신라본기만 못한 부분이다.

AB. 고로 백제-신라 관계 기사는 신라측 국왕 기록에 맞춰 신라쪽 수정기년으로 끌어내려 분석해야 한다.

예컨대 백제신라 갈등 기사에서 근초고왕-나물 이사금 기사는 실제로는

침류 혹은 진사왕 - 나물 이사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백제와 신라의 제대로 된 외교적 첫 접촉은 비류왕-흘해로 나와 있으나

이는 실제로는 근초고왕-흘해가 더 자연스럽다고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사 시리즈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와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고로  삼국사기 초기 백제-신라 교전 사항은 일부는 기사를 후대로 끌어내려서 봐야 하겠습니다.

AC. 고구려-신라 관계 기사도 석우로가 맞서 싸운 고구려측 임금은

엉터리인 삼국사기 신라 초기 기년상 해당 임금 동천왕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후대 임금이 되겠습니다.

요약: 계보신뢰도    신라 > 고구려 > 백제

          기년신뢰도    고구려 > 백제 > 신라

           건국 순서     고구려 > 신라 ≥ 백제

 

[건국 순서 보충: 상술했듯 백제 건국 집단이 임진강 일대에 모습을 드러낸 연대 중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2세기 후반입니다. 2세기 중반은 고고학계 내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습니다.

 

 반면 신라는 여하튼 2세기 중반에 사로국을 건국하게 되는 집단 전체가 상하층 모두 빠짐 없이 있었음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의 일원적 집단으로 규합된 게 2세기 후반이었을 뿐이지요. 고로 사로국의 건국은 백제국의 건국보다 무조건 같거나 빠르게 됩니다.

 

 만약 백제국 건국을 일명 미추홀 비류 세력으로 상정되는 해양 세력(=토돈분구묘)과의 연합으로 강제해야 한다면 건국 연대는 무려 3세기 중반으로까지 내려오게 되는데 솔직히 제가 삼국사기 초기 기사 기년 맹신론에 학을

떼긴 합니다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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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마법의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13 _Arondite_ 네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나마 토탈워 카페는 이런 문제에서 클린하여 제가 잘 이용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마저 이런 어려움을 보니 더욱 걱정스런 생각도 있습니다.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24.04.12 고대사는 복잡하군요... ㄷㄷ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우물 | 작성시간 24.04.12 마활님 덕분에 한국고대사에 대한 제식견이 정리되는것 같아요.
  • 작성자노스아스터 | 작성시간 24.04.13 김부식:사료가 부족하다...괴로워...
  • 답댓글 작성자마법의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13 다행히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한국 역사학자들이 고고학과 DB 나노 단위 분해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진실들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지금도 교양서를 내고 있고 박물관 통해 인터넷 공개도 합니다만 어쩐 일인지 잘 읽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DB검색질과 논문 검색질이 더 편해서겠죠. (.....)

    저 같이 읽고도 오독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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