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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주 인용되는 1920년 니항사건 관련 러시아 도서 (자유시참변 관련 재 업로드.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 포함됨)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3.09.02|조회수230 목록 댓글 2

※근래 자주 인용되는 1920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관련 러시아 도서

(※자유시 참변 관련 재 업로드이며 기존 글을 변경하였습니다. 니항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은 2차 대전 이전 일본역사에서 대표적인 국욕 사건으로 다뤄지는 사건입니다.)

https://youtu.be/SFO3iPZtHJ0?si=rOhBufmzqztdjsuM

1922년 12월말은 러시아 극동지역중,

아무르강 하류 일대에서 간섭전쟁이 끝난 날짜로 간주됩니다. (사할린섬 북부에서는 1925년까지 일본군이 주둔하였다.)

이것은 일본, 미국, 영국을 비롯한 간섭주의자들에 대한 소비에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극동지역 주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경직되어 결국에는 망해버린 소련 시대 공산당 역사 문헌들은

남한에서 1920년 3월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사망하고 도시가 불타 없어졌다고 알려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1917년경 제작된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지도에는 일본군 병영건물, 일본군 위안소(유곽), 일본인 집단 거주지 등이 존재하지 않아, 일본인들의 니항 점령과 집단 거주지 건설은 1918년 이후 발생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니항 사건 무렵의 일본인 수 추정자료

니항에서 전사한 독립군, 러시아 유격대원의 장례식 사진. 좌측에 태극기가 보인다.

1920년 니항사건 무렵의 일본인 수, 조선인 수, 중국인 수 추정자료

니항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가 주도해 세웠던 니항에서 전멸한 일본군 충혼탑 (현재 파괴되었다.)

일제와 앞잡이들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추모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 사건) 에 대한 상반된 견해

이 니항사건에 관해서는 크게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남한에서도

독립운동가들, 니콜라예프스크 거주 목격자, 파르티잔, 주민, 일본 밀정측의 회고록과 기록들은 두 진영으로 나뉩니다.

(1) 첫번째 의견 : 1920년 2월의 니콜라예프스크 해방운동은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등이 중심이 되어서 한 것이며,

무정부주의 강도인 야코프 트리피츤 일당이 공격해 오자, 학살 강간 강도질을 막기위해 조선인 부대를 결성해 니항을 해방시켰다.

니항을 무력으로 점령한, 무정부주의 강도단이 학살과 약탈, 강간을 감행해 일본군이 참다 못해 단순 무장해제만을 시키기 위해 궐기하자,

강도들은 인류 역사에 없었던 학살극을 저질렀다.

니항(니콜라예프스크)를 강탈한 무정부주의자 트리피츤과 박일리야, 중국인 진세영 등은

일본군의 보복이 두려워

니항주민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최소 4,000명에서 1만여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반격을 피하기 위해, 살아남은 주민들은 강제로 암군강 상류의 께르비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으며,

트리피츤과 박일리야는 중국으로 약탈한 금화를 가지고 도망칠 궁리를 하던중,

공산주의자인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바라비요프(П. Воробьев), 압친니코프(А.Овчинников), 박병길, 김낙현, 이지택이 합세하여 트리피츤과 강도떼를 처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살아남은 아편중독자인 박일리야가 자유시에 도착하여,

무정부주의 강도단을 구성해 아무르지역에서 약탈, 강간을 일삼던중

자유시의 볼셰비키들을 먼저 기습공격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병력을 동원해 1921. 6. 28. 상오부터 반격해 수백여명을 사살하고, 무정부주의 강도떼 2,000여명을 우수문 수용소 등지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2) 두번째 의견 : 야코프 트리피츤은 사할린주를 주민들의 지지로 평화적으로 해방시켰고,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격퇴하였으며,

연해주, 사할린섬 북부와 교통의 중심지였던 니항으로 일본군 대병력이 공격해오자 어쩔 수 없이 후퇴한 것이며,

도시의 방화는 일본군이 극동에 장기간 머무를 수 없게 하여 러시아 내전 승리에 기여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니콜라예프스크(니항)이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 불탄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니콜라예프스크의 건물 90% 이상은 완공된 지 30년도 되지 않은 것들이었고, 일본인 거주지와 일본군 병영, 위안소 건물은 거의 대부분 10년 미만이었다.

파르티잔에 의해 실제 죽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친일파, 살인자, 일제 밀정, 식량분배에 반대한 자 등 수십여명 밖에 되지 않는다.

기습공격을 했던 일본군과 일본인은 약 850여명 이상 사망한 것이 맞다.

트리피츤은 께르비로 피난을 갔다가,

일제 밀정인 안드레예브와, 한국계 일제 앞잡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트리피츤이 니항을 파괴한 최종 명령자였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으며,

식량난과 외국 간섭군과 전쟁에 지쳐,

러시아 공산당의 괴뢰국가였던 극동공화국까지 세웠던 볼셰비키 정권이 일본 간섭군과 적당히 타협하여 아나키스트인 트리피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결국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은 죽을 만한 잘못이 아니며,

공산당원증과 독립유공자 표창을 노렸던,

일제 앞잡이들의 악선전에 의해 잘못 알려진 것이다.

남한에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박병길은 사실은 일제 협력단체인 '니항 조선인회' 의 서기 혹은 '니항 조선인 민회'의 주무 혹은 회장이었다 는 것입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관련 러시아측 도서들 (반볼셰비키 도서 포함)

<적(Враги) : 소설 이름>

저자 : 라비치(Лович Я.Л.)

출판사 : 베체(Вече), 2007. (백파 군대 소설)- 352쪽

이 책은 백파 군대 편에서 러시아 내전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합한 시리즈로 출판되었습니다.

자유시 참변, 니항사건, 만주의 러시아 백파, 아무르주에서의 백파 활동 등과 관련된 소설입니다.

콜차크 백파 군대의 장교 라비치(Лович Я.Л.)는 볼셰비키 군과 끝까지 싸운 후 만주로 떠났다.

1920년 사할린주의 주도였던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는 작가에게 특별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소설 <적>의 기초는 러시아 내전의 비극에 대한 라비치(Лович Я.Л.) 자신의 조사였습니다.

라비치(Лович Я.Л.)가 우파 사회주의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극동에서 보냈다는 점은 흥미롭다.

라비치는 1922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니콜라예프스크를 방문하여 <도시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또한 과거 페트라파블로프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 법원 구성원이었던 사법 수사관 칸스탄틴 알렉산드라비치 예밀야노프(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мельянов)와 의사 소통을했습니다.

예밀야노프가 작업한 메모들은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체계적인 형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라비치는 이 메모를 편집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외국 이민을 간 예밀야노프(К.А. Емельянов)가 책을 출간했다.

 

예밀야노프 저, <지옥의 사람들>

이 책의 저자 예밀야노프(Емельянов К.А.) 1930년대에 북부 사할린에서 소련 당국에 의해 총살되었다.

Лович Я.Л. <Враги: роман> - М.:Вече, 2007. (Белогвардейский роман). - 352с. Книга вышла в серии, объединяющей произведения авторов, принимавших участие в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е на стороне Белого движения. Яков Лович (Дейч), офицер армии Колчака, воевал против красных до конца, а потом уехал в Манчжурию. Особой темой для писателя стало уничтожение Николаевска в 1920 году. Основой романа «Враги» явилось его собственное расследование этой трагедии во время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Интересно то, что сам Лович родился в семье революционеров и детство провел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куда оба его родителя попали как политкаторжане, за революционную деятельность. Лович побывал в Николаевске в 1922 году и общался с людьми пережившими трагические события гибели города. Ему также удалось пообщаться с членом петропавловского суда в прошлом судебным следователем Константином Александровичем Емельяновым. Перу Емельянова принадлежали записки, изложенные в систематической форме о всех событиях происшедших в Николаевске в 1920 году. Лович смог отредактировать эти записки. Позже в иммиграции вышла книга К.А. Емельянова «Люди в аду». Сам автор этой книги Емельянов К.А. был, был расстрелян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ью на северном Сахалин в 30-х годах

<니콜라예프스크(니항) 의 죽음>

저자 :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A.Y. 구트만 : Anatoly Yakovlevich Gutman) , 일본 등에서 반볼셰비키 운동, 친일파시스트 활동을 하였고, 그의 저서들이 일본과 미국에서 자주 출판됩니다.

영문 번역도서명은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

2009년 이후 남한에서 매우 잘 알려진 책입니다.

독립기념관 도서 등등에서 이 책과 미국 교수 john J. stephan 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려고 하였으나, 일부 제대로 베끼지 못한 점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는 과거 <독립군의 승리>로만 알려졌던 니항 사건이

<독립군의 학살극>으로 변경되어 남한에서 줄기차게 인용되기도 합니다.

남한의 다음백과 사전, 위키백과, 나무위키 등이 A.Y. 구트만의 책을 사실이라고 짜깁기해 인용합니다.

그러나 근래 일본에서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책으로 간주됩니다.

A.Y. 구트만이 주장하는 볼셰비키에 의한 니항 주민 1만여명 학살설은 허위로 보여지나,

조선인 박병길이 일본인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여집니다.​

ГУТМАН А. Я. 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СТРАНИЦЫ ИЗ ИСТОРИИ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Автор: Гутман А. Я.

Место издания: Берлин

Год издания: 1924

Ключевые слова: дальний восток

영어 번역본 : Gutman, Anatoly. Ella Lury Wiswell (trans.); Richard A. Pierce (ed.) Nikolaevsk-on-Amur의 파괴, 극동 러시아 내전의 에피소드. -Limestone Press, 1993.- ISBN 0-919642-35-7 .

(Английский перевод: Gutman, Anatoly. Ella Lury Wiswell (trans.); Richard A. Pierce (ed.)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 Limestone Press, 1993. — ISBN 0-919642-35-7.)

 

구트만의 책 영어 번역본 표지

Destruction of Nikolaevsk on 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 (Russia and Asia, No 2) Hardcover – March 1, 1993

구트만의 책 영어 번역본 표지

​The tragedy of Nikolaevsk-on-Amur in 1920: the death of the "Russian Pompeii"

한국에서 구트만의 책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들은 구트만의 책에서 한국 독립군이 처단한 친일파는 1~2명에 불과하고, 조선인 박병길이 일본인과 일했고, 안드레예브가 자유시 참변을 일으키고 일제로 도주한 사실을 철저히 숨긴다.

 

<황금색 수레국화(Золотой Василек)>

저자 : 루빔 프라예르만(Фраерман Р.И.)이 썼고 줄거리를 이끌어 나갑니다.

-M. «Дет. лит.» 1976년 출판, 400쪽.

과거 1920년대 쯤에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유명 작가인 루빔 프라예르만(Фраерман Р.И.)은 그의 소설 <황금색 수레국화(Золотой Василек)> 에서

트리피츠노브쉬니(тряпицыновщины, 아나키스트였던 트리피츤 지지자)의 예술적 이해를 시도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린 소녀입니다.

소설 12번째 장의 제목은 <도시의 죽음>입니다.

공산주의가 통치하던 시절의 전체주의와 금기들, 사회의 제약들 때문에 작가 프라예르만(Фраерман Р.И.)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주인공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은 소설에서 바이스니츤(Возницын)으로 나타납니다.

니나 레비제바(Нина Лебедева)는 구세바(Гусева)로 나타나며,

볼셰비키 젤레진(Железин)은 메이니츠키(Медницкий)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중략)

Фраерман Р.И. Повести и рассказы. - М., «Дет. лит.»,1976. - 400с.

В далекие 20-е годы была сделана попытка художественного осмысления тряпицыновщины в повести «Золотой Василек», участником николаевских событий, писателем Рувимом Фраерманом. Основное действующее лицо повести молодая девушка. Глава №12 имеет название «Гибель городка». В условиях тоталитарного, табуированного общества Фраерман поменял фамилии главных героев Николаевской трагедии. Тряпицын выступает в повести как Возницын, Нина Лебедева как Гусева, а большевик Железин, как Медницкий.

<골짜기를 지나 언덕을 넘어>

작가 : 드니프로프스키(Днепровский С.П.)의 소설 . 하바로프스크 출판사, 1956. 232쪽

소비에트 시대에 파르티잔 대장이었던 트리피츤에 대해 쓰여진 것들은

먼저 백파와 볼셰비키로 나누어졌고, 트리피츤은 볼셰비키 사회 질서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쓰여졌습니다.

드니프로프스키(Днепровский С.П)의 <골짜기를 건너, 그리고 언덕을 넘어>라는 소설이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저자는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책은 소련 공산당의 관점에서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에 대한 인상을 남긴 첫 번째 소설입니다.

드니프로프스키(Днепровский С.П.)의 공식적인 견해에 따르면,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은 무정부주의인 마흐노프쉬느를 고수하였고,

무정부주의자들의 교리인 아나하-신지칼리즘을 고수했다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마흐노프쉬느 : (махновщиной, 우크라이나 일대의 무정부주의자인 마흐노의 추종자(Нестор Іванович Махно, 1888~1934)

아나코-신디칼리즘 (анархо-синдикализм, 혹은 Anarcho-syndicalism): 무정부주의 노선중 하나)

그러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참가했던 볼셰비키는 인민을 위한 이상적인 투사로 묘사하였습니다.

Днепровский С.П. По долинам и по взгорьям. - Хабаровское книж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1956. - 232 с. Практически все, что писалось о Тряпицине в советские годы было социальным заказом со стороны противоборствующих сторон – белых и красных. Таковой была книга Степана Петровича Днепровского «По долинам и по взгорьям».

Автор не принимал непосредственное участие в николаевских событиях, в тоже время книга написана от первого лица, чтобы создалось такое впечатление. Днепровский клеймит позором анархо-синдикализм – учение, которого по официальной версии якобы придерживался Тряпицын по аналогии с махновщиной. Однако большевики, принимающие участие в николаевских событиях показаны идеальными борцами за благо народа.

<사라진 도시(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저저 : 에치(В. Эч)

– 블라디보스토크, 1920 – 70쪽.

매우 드문 백파측 기자의 책이다.

A.Y.구트만과 함께 한국의 일부 사람들이 줄기차게 인용하는 자료이다.

기자 에치(В. Эч (다른이름 : 바실리 알렉산드라비치 칠리킨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иликин)) 가 쓴 책 <사라진 도시(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니콜라예프스크 시를 불태우고 백파 군대와 일본인을 처형한 볼셰비키 정부를 비방하는 책입니다.

더구나 백파 군대와 일본군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저자의 서문에서

“3개월 반 동안 파르티잔들은 니콜라예프스크 시를 통치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도입했습니다.

석 달 동안 강도질과 폭력이 계속되었으며, 처형과 살인이 있었고,

결국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사망자, 폐허 더미, 지역의 폐허 - 그것이 파르티잔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준 것입니다.”

라고 적었습니다.

책에 각종 학살사진을 올렸는데, 일본군이 찍어온 것이 대부분인지라 조작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Эчь В. 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Владивосток, 1920 – 70 с. Очень редкой является книга белогвардейца - журналиста В. Эча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иликин) «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клеймящий позором советскую власть за сожжение города Николаевска-на Амуре и расстрел белогвардейцев и японцев. Причем белогвардейцы и японцы показаны с положительной, выгодной для автора стороны. Из авторского предисловия к книге: «В течение трех с половиной месяцев в Николаевске н/А царствовали партизаны, вводя там «Диктатуру пролетариата». В течение трех месяцев там шли беспрерывные грабежи и насилия, казни и убийства, закончившиеся уничтожением целого города. Тысячи убитых, груды развалин, разорение края –вот что дали населению партизаны.»

<그랬지만, 현실과 함께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저자 : 리피킨(Левкин Г. Г.)

아무르 지리 학회, 하바로프스크. 1999.

하바로프스크, 하바로프스크 지역 민속 박물관. 그라제코바(Н.И. Гродекова,). 2006. - 160쪽.

우리는 페레스트로이카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서야, 극동 내전 역사에서 망각되었던

야코프 트리피츤을 중요하고 비극적인 인물로 보는 문학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주제를 언급하려는 현대의 작가는,

니항 사건이라는 모호한 사건에 대한 감정적인 인식이 아니라, 분석적 인식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작가 각자는 자신의 감정과 개인적으로,

즉 연구에서 주인공인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트리피츤의 이미지에 대한 낭만적인 해석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설이 없는 발라차예프카(Волочаевка без легенд)>라는 책에서 러시아 극동 내전 역사 연구원인 대령 리프킨(Левкин Г.Г.)은

트리피츤을 일제 노예주의자에 대항하였던, 러시아 민족을 위한 자유의 전사로 묘사합니다.

“그가 불과 23세의 나이에 그가 만든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중요한 역사적 인물만이 그러한 성취를 할 수 있습니다.”

리프킨(Левкин Г.Г.) 의 또 다른 책, <그랬지만, 그 때는 성장하지 못했다>에는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와 께르비(Керби)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트리피츤을 완전히 정당화합니다.

이 책의 페이지인 <역사는 표면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에서는 트리피츤이라는 이름의 완전한 회복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Левкин Г.Г. Было, но быльем не поросло…- Приамурское географ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Хабаровск, 1999. - Хабаровск,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евой краеведческий музей им. Н.И. Гродекова, 2006. - 160 с.

Наше перестроечное и постперестроечное бытование породило из небытия много литературы, которая смотрит на Тряпицына как на фигуру значительную и трагическую. Современные авторы, обратившись к этой теме настаивают на необходимости не эмоционального, а аналитического восприятия этих неоднозначных событий, и тем не менее каждый из них не может сдержать своих эмоций и личностного, то есть субъективного восприятия главного героя – Тряпицына в своих исследованиях. При этом у них в ходу романтическая трактовка образа Тряпицына. Например, у полковника Григория Левкина, исследователя истории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в книге «Волочаевка без легенд», Тряпицын – это борец за свободу рус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против японских поработителей. «Не будем забывать, что всего в 23 года он стал командующим созданной им армии. Объективно говоря, только значительная историческая личность способна на такое свершение». В другой книге Григория Левкина «Было, но быльем не поросло» содержаться сведения о событиях в Николаевске-на-Амуре и в поселке Керби. Автор полностью оправдывает Тряпицына. Глава данной книги «История не терпит верхоглядства» посвящена полной реабилитации имени Тряпицына.

<국제전>, 아무르 하류 비극의 발자취.

(한국어 번역명 : 무적 황군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발? 번역자 : 신룡기2?)

저자 : 스말야크(Смоляк В. Г.),

하바로프스크 : 하바로스프크 지역 전승 박물관. 그라제코바(Гродекова). 2009 - 128쪽.

트리피츤에 대한 성격 평가와 중립적인 해석을 시도하였습니다.

대중적인 역사 수필의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아무르 하류 내전의 비극적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저자의 수년간 연구 작업과 여러 차례에 걸쳐 수집한 원본 문서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Смоляк В.Г. <Межлоусобица.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 Хабаровск: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еведческий музей им. Гродекова, 2009г.- 128с.

Теплеют интонации в оценке личности Тряпицына и в книге Смоляка «Междоусобица». Однако ценность этой книге, повествующей о трагических событиях периода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на Нижнем Амуре, написанной в жанре научно- популярного очерка, в том, что в ее основе лежат подлинные документы, собранные автором в течении многих лет 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ой работы.

<니콜라예프스크에서 20일간. 유격대원의 회고록>

저자 : 세르게이 프치츤(Птицын С.)

- 하바로프스크 지역 인쇄소, 2013. - 208쪽

“시간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습니다.”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실제 역사에 대한 증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책은 파르티잔 출신의 손자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출간한 책입니다.

세르게예프카(Сергеевка) 마을 출신인 프치츤(Сергей Птицын)은 사무원이자 회계사였습니다.

1920년에 그는 트리피츤 부대의 파르티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참여했으며 1920년 7월에는 트리피츤에게 사형을 선고한 인민 법원의 서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1934년에 회고록을 썼다.

그는 그것을 스크바르초프(Скворцов)라는 가명으로 달파르티즈다트(Дальпартиздат, 지역이름 추정)에 보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자신의 회고록이 인쇄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인쇄본으로 출판하지 않으려면,

미래를 위해 보관해 달라고 편집자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회고록은 2013년에야 빛을 보았습니다.

프치츤은 자신이 본부에서 일했고 모든 사건들에 참여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사실대로 작성하였습니다.

Птицын С. Николаевск в 20-м. Воспоминания партизана.

– Хабаровская краевая типография, 2013. – 208 с.: ил.

Время все расставляет на свои места. Появляются свидетельства подлинной истории «Николаевского инцидента». Эта книга издана внуком бывшего партизана в память о деде и бабушке. Сергей Птицын уроженец села Сергеевка по профессии был конторщиком, счетоводом. В 1920 году стал партизаном отряда Тряпицына, участвовал в Николаевском инциденте, а в июле 1920 года был секретарем народного суда, приговорившего Тряпицына к расстрелу. Свои воспоминания он написал еще в 1934 году. Отправил их в «Дальпартиздат» под псевдонимом Скворцов. При этом он осознавал, что его записи не будут напечатаны и обратился к редакции с просьбой, что в случае если они не выпустят их в печать, сохранить их для будущего». Но свет они увидели только в 2013 году. Написаны они объективно правдиво, поскольку сам Птицын работал при штабе, был участником всех событий, происходивших в Николаевске в 20-м году.

<레비제바와 트리피츤>

Н.Лебедева и Я.Тряпицын (Партиз. движение в низовьях Амура) Материалы и документы

저자 : 주코프스키-주크 ( Жуковский-Жук И.И. )

101 с.

발행년도 Количество страниц : 1922

발행처 : 시베리아 치타 Год издания : Чита

Место издания : О произведении

Издательство : Левое народничество

Язык : Русский

Общее примечание

Подлинное имя авт.: Плястен, Ян Степанович

Библиотека

Российская национальная библиотека (РНБ)

저자 주코프스키-주크는

니항사건의 레비제바와 트리피츤을 죽음을 두려워 한 적 없는 진정한 자유의 투사로 묘사하며,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 슬픈 아무르의 날들.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시의 역사 연구>

Ю. Жекотов. «Те печальные амурские дни». Историческое исследование. 2016 г.

총 104쪽~108쪽 분량. 2016~2017년경 출판

오늘날 동시베리아 일대에서 출판활동을 자주하는

저자 유리 제코타프( Юрий Жекотов)는 동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 주의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시의 역사에서 몇 가지 논쟁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많은 판단은 버전과 가정으로 표현되지만

동시에 오늘날 심각한 반론이 없는 러시아어로 작성된 도서입니다.

독자는 중요하고 유용한 많은 발견을 할 수 있습니다.​

1905년 일제가 러일전쟁 때 사할린섬을 공격해 최소 수천여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사할린섬 북위 50도 이남을 할양받은 후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을 강제노동의 노예로 동원하였다. <미국의 유명 친일학자 '존 스테판' 등이 주장하는 1920년 6~7월경 사할린 섬 북위 51도 이북지역에 대한 1920년 니항사건 배상을 위한 보장 점령설은 명백한 조작극이다.>

1918년경 당시 행정구역상 사할린주 주도였던 니항의 일본인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는 심지어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의 '평양기생'까지 니항일대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했다.

1905년 사할린섬 남부에서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중 일부가 1920년 5월 24일경 니항사건 당시 일본군 포로와 거류민 처형에 관계된 것은 사실로 보여지며,

러일전쟁 무렵인 1905년 일제가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남부에서도 러시아 민간인 수천여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추측된다.

1905년 일제가 북위 50도 이하 사할린섬 남부를 할양받은 후부터 척박한 기후 환경에서 엄청난 인력과 자금을 필요로 하는

석유, 석탄, 삼림, 어장, 물고기 양식장을 개발하기 위해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들을 값싼 노동력 공급과 유흥시설(유곽, 공창, 위안소)에 강제 동원했다는 부분에서 전적으로 공감하며,

또 이 과정에서 적극 협조한 자(포주, 앞잡이, 주구)도 있기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과 1921년 자유시 참변과의 관계

1921년 자유시 참변은

러시아, 만주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군 간의 비극으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까지 등재되었습니다.

그 원인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러시아 내전, 일제의 만주-시베리아 침략, 니항사건중

니항사건과 관련되었으나, 과거 공산권의 자료인 관계로 과거 남한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20년 니항사건(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문헌들을 살펴보고

파르티잔 사령관이었던

야코프 트리피츤이 "위대한 인본주의자이며 혁명가"인지

아니면 "무정부주의자이며 강도단의 우두머리로, 인류역사에 없었던 과대망상증이 있는 테러리스트"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1920년 당시 사할린주의 주도였던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 의 비극으로 이어졌고

니항의 주민들은 항상 그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 한국에서는

1921년 아무르주 자유시 참변을 다룬다면 관련된 사건으로 한번쯤 접해보는 사건일 것입니다.

1920년 니항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추모비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이 지휘하던 유격대 본부 터에 세워져 있다.

Николаевск Инцидент памятник на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1917-1922 гг. Вечная Слава гером-партизанам павшим в боях за установление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на Нижнем Амуре. 러시아 극동지방 내전사에서 1920년 4월 참변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는 니항사건

니항의 유격대원 묘. 오늘날 니항(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 있는 반일 열사들의 묘.

독립군 리흥진 선생이 여기 잠들어 있다.

Памятник борцам за победу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на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니항사건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사람들의 추모비

 

시베리아 침략에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

세르게이 치마피예프 의 자료에서 참고함.

Сергей Тимофеев,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Нижнеамурская голгофа. Поиски истины» )

1918년경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의 여성 가라유키상 은 최소 90명 이상이었으며

1920년 니항사건 무렵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수가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이었다.

 

1918년 9월경 니항을 점령하고 행군하는 일본해군 육전대와 마차를 탄 일본해군 장교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들을 동원해 가라유키상 성매매 위안소를 운영했던 시마다 모토타로의 상회 인근으로 보여진다.

1919년경 니항에서 화폐까지 발행했던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가 경영했던

시마다 상회와 일본군의 니항점령 이후 건립된 일본군 병영 건물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 실패후 집단자살로 불타버린 니항 일본영사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방화하였고 영사관에 머무르던 일본 거류민 상당수도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감행했다고 한다.

니항의 일본인 거류민중 집단 자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에 생환해서도 자살을 강요받고 사회에서 냉대 받았다고 한다.​

사할린 섬 및 사할린주 일대의 일본인들. 남성의 상당수가 군사훈련을 받은 의용 자경단원 등이었다.

사할린섬 남부의 일본인

1920년 니항사건 무렵 사할린주 일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파괴된 도심.

일부 몰지각한 친일학자의 주장과 달리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나 감옥 자체가 없었다. 1500여명을 수감해 3일동안 3천여명 이상을 살해할 만한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할린섬 일대의 일본인. 일본인 남성의 상당수는 자경단원 등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사할린 섬 일대의 일본인 여성 가라유키상 추정 사진.

가라유키상 여성 상당수는 군사훈련을 받고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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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09.02 시베리아 침략에도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9.02 예.
    상당히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러시아적백내전기 만주와 시베리아를 침략할 때에....
    조선인 노예노동자도 상당히 동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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