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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모토타로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1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3.09.20|조회수190 목록 댓글 2

자유시참변 관련 재업로드 입니다.

시마다 모토타로(島田元太郎,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1

니항사건 일본군 유곽 현황. 가라유키상 90명 이상. 조선인 여성도 다수

생애 요약

1870년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1920년경 러시아 극동 사할린 주의 대표적인 일본인 기업가(Торговый дом Симада П. Н.), 성매매업 종사자(일명 : 위안소 운영, 가라유키상 Караюки-Сан 상인), 니항사건 관련 사진에 맨 먼저 등장하는 무역 회사 <시마다 상회>의 소유자였으며 조선인 노동자와 가라유키상을 활용하기도 했다.

 

시마다의 생애

일본인들의 사할린섬과 연해주 진출을 이끈 사람중 한명.

일제의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침략 시기 시베리아와 몽골 일대의 일본인 밀정 수는 대략 4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것은 일본 군대내의 정보원과 일본인 민간인(상인) 밀정 등을 모두 합한 수로 볼 수 있다.

 

시마다는 일본 해군 고위층의 지원으로 동시베리아 사할린주 일대에서는 일본인중에서 최대 규모의 무역회사와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들을 위한 성매매업에 종사했다.

독립유공자 바실리 박(성명불상?) 선생과도 함께 일했으며,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과 조선인 광산 노동자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 독립유공자 바실리 박 선생은 1921년 6월 28일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발생한 한 사건의 원인 제공자다. 독립군에 의해 민족반역으로 처단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항상 선량한 사람이었고 러시아 백파들에게서도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소리가 있기는 있다.)

1919년경 니항에서 화폐까지 발행했던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가 경영했던

시마다 상회와 일본군의 니항점령 이후 건립된 일본군 병영 건물

 

러시아 적백내전 무렵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맹활약한 배정자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정을 위해 엄청난 맹활약을 하였으며, 조선인 노예 노동자를 적극 활용했던 사람중 한명이다.

 

주로 일본, 사할린섬, 아무르강 하류의 사할린주, 연해주, 조선 평안도, 경남 진해,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시 등에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에는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화폐로 활용된 돈까지 발행했다.

 

1920년 초 발생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일명 : 니항사건)에서 재산을 잃었고, 니콜라예프스크와 일본 본토에 일본군 충혼탑, 니항사건 순난자비(尼港事件 殉難者碑) 건립을 주도하였고

니항사건에서 생환한 생환자들에 대한 보상 소송에도 앞장섰다.

 

1922년 일본군이 점령한 북위 50도 이상 북사할린섬에서 석유 개발업도 하였으나, 1925년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철수 후 조선 평안도 일대에서 광산업을 하였다.

조선 평안도에서의 광산업은 신통치 않았고,

평소 잘하던 성매매업은 만주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 등 일본군의 잦은 전쟁으로 괜찮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1945년 소련군이 평안도 평양에 들어올 무렵 소식이 끊어졌으며, 고령으로 인해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론

시마다 모토타로의 어린 시절

시마다 모토타로는 1870년 8월 5일 일본 나가사키현의 가난한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문구점 보조원으로 일하며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그는 학교를 중퇴했지만 평생 동안 계속해서 공부했다.

 

일본에서 러시아 극동으로 출발하여 표면적으로는 러시아 정교회 교인이 됨

러시아 극동 지역에 큰 기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필요한 서류를 받은 후 시마다 모토타로는 15세였던 1880년에 일본을 떠나 연해주(프리모르스키 크라이)의 블라디보스토크 시로 갔다.

 

시마다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큰 희망을 걸었지만 현지 및 외국인 사업가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1886년 7월 21일경에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일명 : 니항)시로 이주했다.

 

여기에서 그는 정통 러시아 정교회(천주교와 비슷한 종교)를 받아들이고 러시아 정교회식 이름인 표트르 니콜라예비치(Петр Николаевич)를 받았다.

물론 표면적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의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에서의 활동

시마다가 스스로 정한 첫 번째 임무는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 과정에서 시마다는 니프히(Нивхи), 울치(Ульчи), 에벤키(Эве́нки)와 같은 지역 원주민의 방언에 대해 알게 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어장이 있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생선 매매, 염장, 일본 판매, 소액 대출, 위탁 재판매 등의 업무를 주로 시작했다.

 

 

니항사건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시마다 상회>의 설립

1896년에 시마다는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에 시마다 상회(Торговый дом Симада П. Н.)를 설립했다.

 

일본해군의 최고위급 밀정노릇과 일본정부의 지원.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 신자 자처, 러시아식 이름 사용과 후원, 러시아어에 대한 좋은 지식, 비즈니스의 성실성과 신뢰성, 현지 시장 상황에 대한 탁월한 인식 등의 모든 것이 시마다 상회의 번영에 기여했다.

 

시마다의 회사(및 기타 일본 기업가)는 향후 어획량을 위해 현지 러시아인 어장 소유자에게 대출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더욱이 시마다를 비롯한 일본 기업가들의 이자율은 니항의 다른 기업가들보다 낮았으며 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당시 도시(니항 :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던 러시아 신용기관(러중은행, 상호신용협회 등)은 대출금의 상환 이자율을 20~22%로 설정했는데, 일본 기업가(시마다 포함)는 러시아 어업 생산자에게 현금뿐만 아니라 상품(밀가루, 등유, 소금, 그물 등)으로도 빌려주었다.

 

돈을 빌려줄 때 일본인들은 10% 이자율에 만족했고, 어업철에 러시아 어부가 잡은 물고기를 유리한 조건으로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시마다는 결국 도시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금융기관의 예금자이자 회원이 되었다.

금융기관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에 이미 7개(국고, 상호 신용 협회 및 다양한 은행의 4개 지점(국립, 시베리아 무역, 러시아-아시아, 모스크바))가 있었고,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 <상호 신용 협회>가 개설되었을 때. 시마다는 협회 회원이 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 우대 조건으로 10,000루블의 대출을 받았다.

 

(※당시 1만 루블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적백내전 기간중의 인플레이션은 종이 화폐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향후 어획량을 선점하기 위해 이 돈을 러시아인들의 소규모 어업 생산업체 10곳에 빌려주었다.

 

러시아 적백 내전에서 사망한 사람들

 

일본정부의 지원과 밀정 노릇으로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대표적인 회사로 성장

1913년까지 시마다 상회는 아무르강 하류지역의 상위 10개 무역 회사 중 하나가 된다.

1914년에 시마다는 니콜라예프스크 시내 중심가에 두 개의 매장을 열었다.

(하나는 단층, 다른 하나는 2층 : 니항사건 사진에 나오는 2층 건물이 시마다 상회임)

여기서 기성복, 식료품, 담배 제품, 가정용품, 직물 등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시마다는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어업 발전과 많은 것을 연관시켰다.

 

실제로도 시마다의 사업은 수익성이 높았다.

아마 조선인 노동자와 가라유키상을 싼 값에 활용할 수 있는 강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중국인 노동자를 쓰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저렴하였다.

 

시마다는 지역 어장에서 생선을 사서 소금에 절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물고기를 획득하는 어로단을 조직하고 도시 어장을 임대했다.

(예를 들어 1913-1914년에 그는 니항에서 6번째 어장을 임대한다. 아무르강 하류에는 그물이나 어구만 걸어 놓으면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을 수 있다.).

 

시마다는 주로 어획된 생선을 일본에 판매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 시마다는 이미 아무르 하류 수산업의 선도적인 위치 중 하나를 차지한다.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일본인들의 니콜라예프스크 거주지는 시마다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인 디아스포라는 일본 수산업의 비공식 리더가 될 정도였다.

지금도 오호츠크해 어장은 세계최대 규모의 어장이다.

1918년경 일본군의 시베리아와 만주 침략로

 

일부 조선인 노동자들의 내재된 불만

중국인 하층민보다 임금이 훨씬 낮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친일단체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마다와 일본인들의 돈벌이는 그냥 돈을 쓸어 모으는 수준이었다.

시베리아의 강추위, 식량난, 열악한 기후 환경과 살인적인 노동조건의 광산업, 건축, 어업에 동원된 조선인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학살수준이었다고도 한다.

 

이 무렵 조선인들이 니항과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섬에 돈벌이를 위해서는 친일파나 일본인들 통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당연히 친일단체 가입자나 여성 가라유키상을 무조건 친일파로 볼 수 없다.

 

 

한인교사 박의 반일 활동

그러나 일본측 기록과 러시아 측 기록에 따르면 니항 도심 우측의 중국인 마을의 한쪽에 있던 식민지배를 받던 조선인과 조선인 가라유키상들은 일본인들에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불만을 숨기고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반일단체 조직을 선동했던 마가 마을의 한인교사 박이 있었다고 한다.

(※독립유공자 이지택-이 양반은 노선이 다른 사람을 무정부주의 강도떼로 몰아 살해하려고 구라 무지막지하게 침-이 거짓말한 한인교사 박은 바실리 박과는 다른 사람이다. 바실리 박은 조선인 민회의 주무였다. 외국인들은 ‘박’이라면 모두 동일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박씨는 그냥 흔한 박씨다.)

 

1920. 2. 29. 야코프 트리피츤이 니항에 진입할 때 가장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이 조선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니항 해방은 3·1운동과 마찬가지인 민족해방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할린섬 일대는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의 어업이 진출하고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어장이다.

오호츠크 해, 캄차트카, 베링해 어장 등으로 불려진다.)

 

극동 수산업의 유명한 전문가인 V. K. 브라즈니코프(В. К. Бражников)는 1904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니콜라예프스크의 모든 일본 어업은 긴밀하게 결속되고 잘 조직된 사회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넘치는 시마다 모토타로의 회사(Торговый дом Симада П. Н.).”

또한 시마다는 외국 해운 회사의 여러 대리점을 대표하고 도시의 평판이 좋은 무역 및 중개 수수료 사무소의 소유자가 된다.

 

1912~14년에 니항에 거주하던 다른 외국인들인 T.D. Kunst와 Albers의 예를 따라 시마다는 일본에서 아무르 강과 니콜라예프스크 시가 보이는 엽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시마다가 발행한 엽서들

오늘날 이 엽서에는 시마다 상점, 일본 영사관, 아무르 강의 일본 낚시 선박(스쿠너) 등이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다.

 

<시마다 상회>의 최대 번영기는 1913~1916년이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러시아의 식량난, 무기 부족, 인플레이션, 노동자 부족에 따른

조선인 여성 위안부 동원, 조선인 노동자 동원 등등은 시마다를 거부로 만들었다.

 

시마다 회사는 무역, ​​일본으로의 연어 판매, 커미션 및 대리점 업무로 인한 이익 외에도 기계 공장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1911~1912년에 건설된 이 공장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18마력 기관차, 선삭, 대패질, 드릴링, 연마 및 기타 기계, 전단 프레스, 4개 프레스, 주조소, 단조 등 당시 최신 기술을 갖춘 장비가 있었다.

 

(니항에는 발전소, 전력선, 전화, 협궤열차도 설치되어 있었다. 1922년 일본군의 니항 철군시 전선까지 절단해 가지고 갔다고 한다.)

 

가공 작업, 보트 및 각종 기계 제조, 각종 부품 주조, 주철 부품 등에 이르기까지 공장에서는 모든 종류의 금속을 가공했다. 공장에 고용된 근로자 수는 여름에는 12명, 겨울에는 18명 정도였다.

<시마다 상회 기계공장>은 그 당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현대 산업 기업의 모델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일본 본토의 신용 기관의 광범위한 지원이 없었다면 시마다의 성공과 수입을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은 일본 해군부 및 참모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제공되었다.

아무르강의 중국인 노동자들

아무르강 하류의 중국인들과 러시아인

니항사건 추모공원

일본인 가라유키상 여성들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 시마다 모토타로 (1부)

南樺太北部油田調査に関する御報告 島田元太郎

南樺太北部油田調査に関する御報告 島田元太郎

가라유키상 성매매업 외에도 석유개발, 금광업, 광산업도 했던 시마다 모토타로

1918년 9월경 니항을 점령하고 행군하는 일본해군 육전대와 마차를 탄 일본해군 장교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들을 동원해 가라유키상 성매매 위안소를 운영했던 시마다 모토타로의 상회 인근으로 보여진다.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 실패후 집단자살로 불타버린 니항 일본영사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방화하였고 영사관에 머무르던 일본 거류민 상당수도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감행했다고 한다.

니항의 일본인 거류민중 집단 자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에 생환해서도 자살을 강요받고 사회에서 냉대 받았다고 한다.

사할린 섬 및 사할린주 일대의 일본인들. 남성의 상당수가 군사훈련을 받은 의용 자경단원 등이었다.

사할린섬 남부의 일본인

1920년 니항사건 무렵 사할린주 일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파괴된 도심

일부 친일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500여명을 수용할 만한 건물 자체가 당시 니항에 없었다.

사할린섬 일대의 일본인. 일본인 남성의 상당수는 자경단원 등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사할린 섬 일대의 일본인 여성 가라유키상 추정 사진.

가라유키상 여성 상당수는 군사훈련을 받고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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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09.21 돈을 벌기위해 조선인 노동자와 가라유키상을 적극 활용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9.22 맞습니다. 당시 사할린섬이 석유와 석탄의 보물섬으로 세계 각지에서 기업과 노동자가 왔고
    아무르강 하류도 해상교통과 어업의 중심지였기에 조선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이 중국인보다 싼 최하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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