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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Academy

[심심해서 해석해보는 RS!!!] Legio I Germanica // The Cohors I Damascenorum Sagittarii

작성자로마시민|작성시간10.12.18|조회수647 목록 댓글 3

텍스트 해석하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제가 역사적 지식도 짧고 영어 지식도 짧은지라 =ㅅ=;

혹시라도 역사 왜곡을 하진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틀린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Legio I Germanica (로마 게르마니카 1군단)

 

 

 

 

Legio I Germanica는 아마도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에 대항한 내전에서 싸우기 위해 줄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징집된 로마 군단일 것이다. (기원후 70년) Batavian 반란 후 1군단의 잔존자는 갈바의 7군단에 합류한다. 이들은 후에 12군단이 된다. 1군단의 상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카이사르에 의해 징집된 모든 군단들이 그렇듯이 황소자리일 가능성이 있다.

 

 

1군단의 형성에 대해선 2가지 가설이 있다. 가장 인기있는 가설은 1군단은 기원전 48년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에 맞서기 위해 줄리어스 카이사르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1군단은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벌어진 결전)에서 싸웠을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1군단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맞서다 기원전 43년 Forum Gallorum 전투에서 죽은 카이사르의 열렬한 지지자 Gaius Vibius Pansa Caetronianus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1군단은 그 연도에 그 군사작전을 위해 모집됐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1군단을 후대황제에게 물려줬고 따라서 셋째이름을 아우구스투스로 지어야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1군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설명하는 한 가설은 이 칭호가 붙지 못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내전 이후에 1군단이 존재 했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1군단이라고 추정되는 군단이 Marcus Agrippa의 지휘 하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해 Cantabrians를 상대로 한 스페인 군사작전에 참여했고 여기서 망신을 당했다. 기원전 16년에서 30년 사이 스페인 동전에 새겨진 글을 보면 1군단은 그들이 Cantabrians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싸웠어야할 Hispania Taraconensis에 주둔하고 있었다. Dio Cassius에 따르면 스페인에서의 군사작전에서 패배한 뒤 한 군단이 Augusta 칭호를 박탈당했다고 한다. 1군단이 초기에 칭호와 군단의 상징을 잃어버렸음을 설명하는 이 언급들은 1군단이 바로 이 군단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세기가 바뀔 즈음에 1군단은 라인강 전선에 배치됐다. Annales of Tacitus는 1군단이 그들의 군기를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받았다고 언급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진술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오직 새로 편성되거나 재편성된 군단들만 군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군단은 스페인에서 군사 작전이 끝난 뒤 재편성 됐을 수도 있지만 독자적 깃발 보다는 aquila (로마 군단의 독수리 깃발 - 군단이 해산될 때만 독수리기가 반납된다.)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군단은 곧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해 'Germanica'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정확히 언제 'Germanica'의 칭호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처음엔 Oppidum Ubiorum(Oppidum는 고대 로마의 요새를 뜻함)에 주둔했다. 한동안 포로빈키아는는 5개의 지역을 포함했고 Publius Quinctilius Varusd가 관리하고 있었다.

 

 

기원후 9년 Varus와 3개 군단은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에서 전멸 당했다. 1군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Varus는 전군을 동원하지 않고 2개 군단을 켐프에 남겨뒀고 1군단은 Varus의 조카 Lucius Asprenas의 휘하에 있었다. 필시 게르마니카 칭호는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 이후 게르만 부족들을 상대로 한 드루수스의 혹독한 복수전에서 인정 받았을 것이다. 드루수스는 굉장히 인기 있었

다. 그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건 영광이었고 그는 그의 부하들이 적절한 영광을 얻도록 확실히 했다.

 

 

69년 네로 황제가 서거하자 4황제 시대가 도래했다. 로마 원로원은 네로 황제의 적절한 후계자를 결정할 수 없었다. 다양한 지원자들이 라인강 전선에서 혼란을 초래하며 자신의 뛰어남을 보이기 위해 싸웠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로 라인강 일대의 켈트족과 게르만족들의 전면적인 이탈(배반)이 발생했다. 그들은 당시 벨가에 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역사가들은 그것을 70년의 Batavian 반란이라고 불린다. 본질적으로 라인강 일대의 부족들은 로마 제국은 망했다고 믿었고 갈리아에 Gaius Julius Civilis가 통치하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4개 군단을 설득하기 위해, 대부분의 갈리아가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하기위해 노력했다. 게르마니카 군단은 회유에 넘어간 집단들 중 하나였고 이결정은 그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충성의 대상을 바꾸기를 거부한 군대는 공격당했다.

 

 

황제 계승을 위한 악명 높은 전쟁의 승자는 Vespasian 황제였다. 그는 Quintus Petillius Cerialis에게 8개 군단을 주며 반란을 진압하기위해 라인강으로 파견했다. Quintus Petillius Cerialis의 군단이 진격해오자 배신했던 4개 군단은 후회했고 라인강의 왼쪽 둑인 Alsace-Lorraine지역으로 후퇴했다. 갈리아 부족들은 Triers의 반란군 정부와 관계를 끊었고 이에 반군은 용서를 바랬다. Cerealis는 관대했고 모든 사람을 용서해줬다. 그러나 1군단은 근무지로 복귀하지 못했다. 로마의 혼란한 상황을 정리한 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직접 라인강으로와서 2개 군단을 해산시켰는데 그중 하나가 게르마니카 1군단이다. 로마군의 열렬한 팬이라면 해산된 2개 군단 출신들이 그 당시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형성된 새 2개 군단에 합류했을 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산은 혹독한 벌이었으므로 해산된 병사들이 곧바로 다른 군단으로 복귀한다는 생각은 그렇게 현실성 있지 않아 보인다. 아마 몇몇 사람들은 개인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군대에 복직하는 것을 허락 받았을 것이다. 재구성된 군단들이 해산된 군단들의 인원들로 가득 채워졌다는 증거는 없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단순히 해산된 군단을 새로 모집한 군단으로 바꾼 것이다.

 

 

 

 

 

 

 

 

 

The Cohors I Damascenorum Sagittarii

 

 

 

 

Cohors I Damascenorum Sagittarii는 수세기 동안 궁수로 유명했던 시리아에서 온 매우 띄어난 궁수들이다. 엄격한 규율과 띄어난 훈련은 전장에서 그들이 원거리에서 활로 적들을 약화 시킬 때 그들의 중요한 힘이 되었다. 이런 기술들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이 어떤 군대라도 지원하고자 하게끔 하는 욕망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비록 이들이 비늘갑옷과 투구를 착용했지만 근접전에서도 잘 싸울 걸로 기대할 수는 없다. 이 병사들은 원거리 전투에 최적화 됐음으로 다른 병종의 엄호를 필요로 할 것이다.

 

 

헬레닉 제국의 몰락 후 시리아 궁수들은 종종 로마 군대에 보조병으로 근무하곤 했다. 그들은 이베리아니 브리타니아와 같이 제국의 가장 동떨어진 곳에서도 근무한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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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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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로마시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2.18 하루 두개가 목표였습니다만 2군단의 설명이 1군단 뺨친다면 오늘은 이만 지지 치겠습니다 ㅎㄷㄷㄷ
  • 답댓글 작성자로마시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2.18 나중에 보조병 설명을 하나 더 추가 하겟습니다 군단병은 도저히 무리 ㅎㄷㄷ
  • 작성자fdsa | 작성시간 10.12.18 오옷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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