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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50. 단도

작성자jager|작성시간10.06.05|조회수2,744 목록 댓글 22

 

 

 

"이번 전쟁에 비하면 지난 전쟁은 산책하는 수준이었다."

- 아슬란 마스하도프

 

 

  2002년 6월 17일, 체첸 남동부 노자이 유르트 마을 인근 숲 속에 체첸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대부분 집결하였다. 러시아군의 소탕과 친러시아 아흐마드 카디로프 정부군의 추적 속에서도 보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체첸군은 이 곳에서 마즈리스 알 슈라 (통합 군사 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체첸군은 이 회의에서 그들이 모두가 복종할 수장을 정하였다. 아슬란 마스하도프였다.

 

 

 

 

마즈리스 알 슈라

 

   이미 2차 침공 이전에 강경파 와하비에 의해 실권을 잃었던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어떻게 이 절박한 상황의 수장이 될 수 있었는가? 첫번째 이유는 바로 그 절박한 상황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체첸은 평화시에는 쉽게 분열되어도 전쟁 중에는 하나의 수장 아래 쉽게 결합하였다. 그들이 하나로 집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군사력 외에도 대의명분이 중요했으며, 체첸 3대 대통령으로 선출됬던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그 명분에 가장 합당하였다. 과거 조하르 두다예프가 전사한 뒤에 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에프 하에 다시 집결했던 것과 비슷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주요 체첸군 지휘관들

 

  두번째 이유는 샤밀 바사예프의 지지였다. 그로즈니를 철수하면서 한쪽 발을 잃었지만 샤밀 바사예프는 여전히 가장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2차 체첸전 이후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체첸군이 하나의 수장 아래 집결할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사예프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마스하도프로 대표되는 온건파가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한것이었다. 1999년에 바사에프와 하타브가 강경파들로 마즈리스 알 슈라를 개최하여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정부를 압박했던 것이 단적인 예였다. 그러던 샤밀 바사예프가 2002년 마즈리스 알 슈라에서는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휘하에서 그의 지휘를 받겠다고 공언하였다.

 

 

 

 

샤밀 바사예프와 아슬란 마스하도프

 

  샤밀 바사예프의 태도가 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제일 유력한 설명은 이븐 알 하타브의 죽음이었다. 자니 베데노 전투에서 러시아 오몬 40명 이상을 사살한 뒤에도 하타브는 계속해서 러시아군을 공격하였고 그때마다 상당한 전과를 얻어냈다. 러시아군은 그를 사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15년이나 전장을 누빈 '체첸의 사자'를 전장에서 죽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러시아 FSB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로즈니 철수 작전 중의 하타브

 

 

  전통적으로 소련 첩보부는 우수한 정보기관이었다. 그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러시아 FSB는 하타브가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는 이브라힘 알라우리라는 다게스탄인으로부터 사우디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타브는 아프간으로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어머니와 서신을 왕래하였다. FSB는 이브라힘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가 하타브에게 보내는 편지에 독을 묻혀서 보낸다.

 

 

 

 

하타브 뒤쪽 화살표로 가리키는 사람이 이브라힘

 

  하타브는 이브라힘으로부터 편지를 전달받고 그걸 읽어본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하타브도 별 생각없이 맨손으로 그 편지지를 들고 읽었다. 약 1시간 반에 걸쳐 편지를 다 읽었을 때, 하타브는 몸에 오한이 들었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대로 의식을 잃은 하타브는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2002년 3월 19일 밤의 일이었다.

 

 

 

 

 

하타브의 죽음. 러시아는 오랜 첩보 끝에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이븐 알 하타브의 죽음은 러시아군의 오랜 숙제를 해결해줬지만, 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진 샤밀 바사에프가 마스하도프에게 협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바사예프로서도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게속해서 러시아군과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마스하도프와 손을 잡기로 결심하였다.

 

 

  물론 바사예프는 하타브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약 1달이 지난 뒤에 이브라힘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샤밀 바사예프가 보낸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리고 2002년 5월 9일, 다게스탄 공화국 키즐레이 도시에서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을 맞아 행진하는 러시아군 대오 한복판에서 미리 매설해둔 대전차 지뢰(MON 90)을 터트렸다. 45명이 죽고 1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죽은 사람 중에는 행렬을 지휘하던 러시아군 대령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직접 수행한 사람은 하타브의 다게스탄 아내의 동생이자 하타브 휘하 지휘관이었던 라파니 카리로프였다. 

 

 

 

 

라파니 카리로프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수장으로서 마즈리스 알 슈라를 주재하였고, 몇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첫번째로 체첸의 각 전선을 형성하고, 휘하 지휘관을 선정하여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현재의 체첸군을 이들을 중심으로 다시 배치하였다. 서부 전선 사령관으로 도쿠 우마로프, 동부 전선 사령관으로 하타브의 후임인 체첸 내 무자헤딘 사령관인 아부 알 왈리드, 북부 전선 사령관으로 셀코브스키 지역 지휘관이었던 레치 에스키에프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샤밀 바사예프를 마즈리스 알 슈라 휘하의 군사 위원회 수장으로 임명하여 이들 사령관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하타브의 후임 아부 알 왈리드.

동부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마스하도프는 군사 위원회 이외에도 홍보, 외교, 언론을 담당하는 공보 위원회도 조직하였고 이 수장으로 그로즈니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유럽에서 요양 중인 아흐마드 자카에프를 임명하였다. 자카에프 휘하에도 명목 상 2명의 선전관이 있었는데 한명은 주요 와하비 이론가인 아부 오마르의 통역관으로 일하던 바시르, 또 한명은 언론 홍보에 잔뼈가 굵은 '체첸의 괴벨스' 모브라디 우두고프였다. 그들은 인터넷에 3개의 웹사이트 (Chechenpress, Chechenorg, Kavkaz Center)를 운영하며 러시아의 선전전에 대항하였고 필요시에 역정보를 흘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서방측 전권대사. 아흐마드 자카예프

 


  이 외에도 외교와 교섭을 중요시했던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아흐마드 자카예프를 자신의 전권대사로서 서유럽 지역에 보내어 국제 사회에 체첸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후 서남부 전선 사령관으로 명성이 높았던 아흐마드 자카예프는 체첸 국내를 떠나 외국, 주로 영국에서 머물면서 러시아의 주장에 반박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다.

 

  자카에프가 서방세계에 대한 체첸군의 대사라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체첸 2대 대통령이었던 젤림한 얀다르비에프가 그 역활을 하였다. 이미 마스하도프 정권 하에서 와하비들의 배후 인물이었던 얀다르비에프는 2차 체첸전 이후로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간으로 떠났다. 아프간에서 탈레반 수장 물라 오마르를 접견하는 데 성공하고 그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이 때 오마르는 "우리가 뭘 도와줘야 합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얀다르비예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지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당신들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정치적인 도움입니다. 이치케리아 체첸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해주기 바랍니다."

 

 

 

 

아프간의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오마르가 체첸 정부를 승인해줬는 지, 그리고 체첸에 얼마나 도움을 줬는 지는 확실치 않다. 2001년 9월 11일의 뉴욕 테러로 인해 탈레반은 미국과의 전쟁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자신들부터가 미국과 전쟁하기에 바쁜 상황에서 체첸인들에게 어느 정도로 도움을 제공했는 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이후 얀다르비예프는 전쟁에 휩쌓인 아프간을 떠나 주로 카타르에서 머물게 된다.

 

 

 

 

회의에 참석한 체첸 지휘관들. 왼쪽 2번째가 수피얀.

2010년 현재 체첸군의 서열 2위 지휘관


  이 외에도 지속적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재무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수장으로 그로즈니 전투를 수행했던 지휘관인 수피얀이 임명되었다. 피난민과 교전 중인 체첸군의 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 복지 위원회도 신설되었는 데 책임자는 체첸 내의 경우 아프티 비술타노프, 체첸 외의 경우는 다우드 우마르가 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샤리아 법에 따른 톧치를 뒷받침하기 위한 샤리아 법정 평의회도 구성한다. 샤리아 법정 위원회는 이슬람 신학 교육을 받은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가 담당하였다.

 

 

 

 

 

오른쪽이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

이 회의에서 마스하도프는 그의 후임으로 사둘라예프를 지정한다.


  마스하도프는 위 회의를 통해 단순한 군사력 통합 외에도 하나의 임시 정부 형태로 각 부처를 조직하고 그에 따른 책임자도 임명한 것이다. 이미 3년의 전투를 치른 체첸군이 계속해서 교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조직이 필요했다. 따라서 군사 부문 외에도 행정면에서 공을 들였고, 대외적인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홍보 부문에도 힘을 들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위험한 조직은 따로 편성되었다. 바사예프가 직접 편성하고 자기 휘하에 둔 리야드 살리힌 부대였다. '정의의 터전' 이라는 뜻의 이 부대는 정찰과 교란, 파괴 공작을 담당하였으며, 필요하다면 자살테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조직으로 일명 '이슬람 순교자 여단'이라고 불렸다. 이 부대는 샤밀 바사예프가 개인적으로 동원 가능한 품 속의 단도와 같은 부대였다.

 

 

 

 

샤밀 바사예프. 그는 리야드 살리힌이라는 특수 임무 부대를 조직한다.

 

  샤밀 바사예프는 이 부대를 동원하여 2차 체첸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또 하나의 부데노프스키 작전을 계획하였다. 대규모 인질극을 통해 러시아 정부를 굴복시키고, 체첸군이 다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기를 원했다. 2002년 10월 23일의 모스크바 두브로브카 극장 인질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출처 : http://www.kavkazcenter.com/eng/content/2006/06/17/4801.shtml
            http://en.wikipedia.org/wiki/Riyad-us_Saliheen_Brigade_of_Martyrs
            http://en.wikipedia.org/wiki/Ibn_Al-Khattab
            http://en.wikipedia.org/wiki/Shamil_Basay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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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6.06 비극이었습니다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10.06.06 아 그 이오시프 코브존이 협상대표로 나왔던 테러로군요. 당시 협상 결과가 나름 궁금했었다능...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6.06 자료를 좀더 찾아보겠습니다
  • 작성자O-di | 작성시간 10.06.06 러시아판 데스노트 무섭네요... 그리고 이에 대한 체첸의 보복도 ..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0.06.07 흠.그 유명한 모스크바 인질극이 샤밀 바사에프에 의해서 시작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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