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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60. 전쟁터

작성자jager|작성시간11.10.07|조회수5,371 목록 댓글 21

현대전에 들어선 이후로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서술하였지만, 시기 상으로 서술하기 애매하여 놓치거나 앞으로 서술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따로 장을 마련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체첸 외에도 코카서스의 다른 공화국 내에서 벌어진 전투도 포함되며, 체첸 반군의 수뇌부에서 심혈을 기울인 제2전선 구축에 있어서 나름의 성과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날치크 전투 이후에 언급합니다.

 

 

 

 


- 체첸 아브튜리 전투
  2004년 7월 12일 오후 1시, 체첸 공화국 샬리 지역의 아브튜리 마을에 150명의 체첸 반군들이 남쪽과 남동쪽 3개 방향에서 진입하였다. 체첸 반군들은 마을 주변 도로를 모두 차단한 채 마을 내에 있던 카디로비치(당시 체첸 제1부통령 람잔 카디로프의 사병인 친러시아 체첸인 부대)를 향해 접근하였다.

 

 

 

아브튜리 전투 당시 체첸군의 진입로

 

 

 당시 카디로비치는 마을 내에 있던 제1초등학교, 제2초등학교, 중학교 건물을 부대 막사와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체첸군이 이들 건물들을 에워쌓았다. 제1초등학교 건물은 어렵지 않게 점령되었지만 제2 초등학교 내에 있던 카디로비치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라는 제안을 거절하엿다. 그래서 이 건물을 장악하기 위해 교전이 벌어졌다.

 

 

 

 

아브튜리 제2초등학교에서 전투하는 체첸군

 

 마을 주변의 도로를 봉쇄한 체첸반군은 마을에서 1킬로 떨어진 지역에서 러시아 스페츠나츠를 포함한 정부군 부대와 교전을 벌였고, 전투는 6월 12일 저녁 7시까지 계속되었다. 교전에 참가한 체첸 반군의 발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카디로비치는 20명이 사살되었고 서쪽 샬리 마을과 아브튜리 마을 인근 과수원으로 후퇴하였다.

 

 

 

 

전투 전의 체첸군

 

 

 약 1시간 정도 지난 2004년 7월 12일 저녁 8시, 친러시아 정부군과 러시아군은 샬리 마을과 아브튜리 마을 인근 농장에서 다시 마을로 진격하였고, 아브튜리 외곽에 있던 체첸반군과 다시 교전을 벌였다. 밤 11시, 체첸 반군은 인근 숲 속으로 후퇴하였고, 후퇴하면서 선두에 쫓아오던 카디로비치 부대를 매복하였고 이 공격은 성공하여 러시아군의 추격 기세가 꺽였다.

 

 이렇게 봉쇄된 아브튜리 마을 외곽에서 체첸반군이 전투로 시간을 끄는 동안 날이 밝았다. 2004년 7월 13일 아침, 아브튜리 마을 내에서 제2초등학교 건물에서 농성하던 카디로비치들은 총알이 바닥이 났다. 이들은 학교 주변에서 계속 공격하던 체첸반군에게 항복하였다.

 

 

 

 

 항복한 카디로비치

 

 

  공격을 지휘하던 체첸반군의 지휘관은 아부 하프스였다. 아부 알 왈리드가 전사한 뒤에 체첸 내 이슬람 무자헤딘의 지휘관이 된 아브 하프스는 마을 내에 있던 카디로비치의 막사를 장악한 뒤에 노획품을 챙기고 포로들을 모았다. 포로가 된 카디로비치는 12명이었다. 아부 하프스는 이들을 데리고 노획품과 함께 마을 외곽에서 교전하던 체첸반군과 함께 마을을 빠져나갔다. 학교 건물에 있던 카디로비치들이 사용하던 차량은 모두 불태웠다. 이때가 2004년 7월 13일 오전 11시였다.

 

 

 

차량을 불태운 체첸군

 

 대낮에 체첸 반군이 마을을 빠져나갔지만 러시아 정부군과 카디로비치들은 아브튜리 남쪽과 서전유르트, 아브튜리 마을을 지나던 훌훌로 강가 계곡에 포대를 배치했을 뿐 이들을 공격하거나 차단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 밤 사이에 교전으로 인해 피해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체첸반군은 대낮에 포로들까지 포함한 채 유유히 마을을 빠져나가 남동쪽 산악지대로 들어섰다.

 

 

 

 

아브튜리 마을을 빠져나가는 체첸군

카디로비치들이 지휘관으로 보이는 체첸군 1명을 짊어지고 이동하고 있다.

 

 체첸반군은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카디로비치 50명 가량을 사살했다고 발표한다. 러시아측의 발표에 따르면 최소 22명이 전사하고 12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군 측의 피해는 람잔 카디로프의 발표에 의하면 20명이었지만, 반군 측은 5명 전사, 11명 부상, 2명 실종이라고 발표했다.

 

 

 

 

 

체첸군

 

 

  이 전투가 2004년에 벌어진 '아브튜리 전투'이다. 아브튜리 전투는 체첸반군이 마을을 습격함에 있어서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목표 마을에 여러 방향에서 진입하여 도로를 봉쇄하고 마을 내에 있던 정부군을 고립시킨 뒤에 함락시키고 노획품을 챙긴채 빠져나가는 방식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친러시아 부대를 가장하고 검문소를 설치하여 신분증을 검사한 뒤에 정부측 요인으로 확인되면 사살하는 방식도 사용했다.

 

 

 

 

아브튜리 전투를 지휘한 아브 하프스 알 우르다니

요르단인으로 하타브와 같이 아프간과 타지크 전쟁에 참가했다.

 

   체첸군은 야간이나 오전, 오후 모두 가리지 않고 원하는 장소를 기습하였다. 소규모 차량 행렬을 기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필요하다면 위와 같이 마을 전체를 봉쇄하는 전투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친러시아 진영에 대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기를 원했다.

 

 

 

  


- 다게스탄 김리 봉쇄

 2007년 12월 10일, 다게스탄 운츠쿨스키 지역 내 김리 마을에서 다게스탄 의회의 현직 의원인 가지마고메드 마고메도프가 암살당했다. 일명 '김리의 가지마고메드'라고도 불리던 그는 김리 출신의 다게스탄 내의 정계 유력자였다. 그는 1차 체첸전 때 조하르 두다예프 체첸 대통령의 개인 경호원으로 체첸전에 참전하기도 했으나, 1999년 샤밀 바사예프의 다게스탄 침공 무렵부터는 러시아 측에 협조하였고 FSB 대령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김리 마을

 

 가지마고메드는 코카서스 내의 반군들과 정부군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양쪽 모두에 안면이 있었던 그는 지역 내에서 '와하비'로 불릴 정도로 이슬람교에 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게스탄 내 반군에 대한 정보를 정부 측에 흘리기도 하였다. 다게스탄 정부측에서 종종 반군 체포에 기대이상의 성과를 올릴 때가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그가 제공한 정보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지어 그의 동생인 이브라김 마고메도프는 하타브에게 독편지를 전달해서 암살하였고 2002년에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샤밀 바사예프의 부하에게 사살당했다. 가지마고메드도 다게스탄 반군 내에서 '변절자'라고 결론을 내림에 따라 암살당했다.

 

 

 

화살표가 이브라김 마고메도프

 

  다게스탄 정계에 발이 넓었던 가지마고메드 마고메도프의 암살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다게스탄 내무부 장관인 아딜기레이 마고메타기로프 중장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김리 지역의 다게스탄 반군들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 이미 2006년 1월 2일에 러시아 정부군과 다게스탄 내무군을 포함한 3,000명이란 대부대가 김리 마을 인근에 배치되어 3일 동안 소탕 작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때 헬기와 포대 지원까지 받아서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반군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에 30명 남짓이 거주할 만한 은신처 하나를 남겨놨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군 최소한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다쳤다.

 

 

 

2006년 김리 전투 당시의 러시아군

 

 

  마고메타기로프 중장은 위 작전에 대해 생각만 해도 불쾌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2007년 가을 무렵에 마고메타기로프 중장의 고향인 고노다 마을에서 젊은이 9명이 피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다게스탄 내무부 장관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은 마고메타기로프는 김리 지역의 반군들이 위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딜기레이 마고메타기로프 중장

 

  여러가지 요소가 겹친 상태에서, 이번에 김리 지역의 국회의원이 암살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마고메타기로프는 김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뿌리뽑기를 원했다. 장관이 암살되고 5일이 지난 2007년 12월 15일, 1,500명의 러시아 내무군과 다게스탄 정부군이 김리 마을을 통하는 주요 도로를 봉쇄하였고 마을 주변의 산에 배치되었다. '대테러 작전'을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정부군은 마을 외부의 중요 도로, 특히 4킬로에 달하는 김리 터널을 봉쇄하였다. 이 터널은 다게스탄 중부 산악지대와 서부, 남부 산악지대를 연결하는 핵심 통로였다. 이 터널을 봉쇄한 러시아군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마을 내에 배치되어 집집마다 수색하였다.

 

 

 

 

김리 터널을 봉쇄한 러시아군

 

  김리 지역의 반군 지휘관은 이브라임 가지다다에프였다. 그는 용감하고 거침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고, 중국 무술인 우슈 대회에서 산타(맨손 격투 대련) 부문 세계 챔피언일 정도로 싸움에 능한 사람이었다. 이 작전에서 러시아측이 잡기를 원했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을에 있는 집을 수십차례나 수색해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김리 지역 반군의 다른 핵심 인물들도 발견할 수 없었다. 봉쇄 전에 이미 마을을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브라임 가지다다에프

 

  남은 김리 마을의 3,500명의 주민들은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의 통행 금지 속에서 살았고, 마을 외곽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부군의 허가증을 받아서 터널의 검문을 통과해야 했다. 통행하기 위해서는 터널의 러시아군에게 뇌물로 200-500루블 (8-20달러)를 쥐어줘야 했다. 정부군이 도로 내에 무작위로 사격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었고, 마을 외곽에 있던 살구 과수원에 일하러 가기 힘들었다.

 

 

 

 

다게스탄 오몬

 

  봉쇄 작전이 길어짐에 따라 마을 주변에 배치된 러시아 내무군과 다게스탄 정부군도 지치기 시작했다. 터널에 배치된 부대는 주민들을 상대로 '통행료'를 받아서 돈을 챙겼지만 산악지대에 배치된 부대는 식량조차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 내에 있던 민가를 약탈해서 음식을 챙겼다. 한번 집을 뒤질때마다 안에 있던 돈과 세간살이가 점점 없어졌다. 그리고 다게스탄 고지대에서 야영을 하기 때문에 추위를 이기기 위해 인근 살구 과수원에 있던 나무를 베어서 몸을 녹였다. 김리 마을 사람들의 주 수입원은 살구를 재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택 수색 중인 다게스탄 내무군

 

  결국 이 작전은 2008년 8월 1일에 종료되었다. 수십명의 반군을 잡겠다고 3,500명이 사는 마을 전체를  8개월이 넘게 봉쇄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러시아가 얻은 전과는 마을에 은신하던 인근 부이나스크 반군 지휘관인 바마칸 세이코프를 잡은 것과 반군 의심자 10명 남짓을 체포한 것이 전부였다.  통상적으로 '자키스트카'는 수시간에 걸쳐 기습적으로 이뤄진다. 2008년 9월 17일에 벌어진 다게스탄 술리이만 스탈스키 지역의 '자키스트카'를 예로 들어도 불과 몇시간 만에 반군 10명을 사살했다. 그런데 왜 위 작전은 똑같은 전과를 얻기 위해 8개월이나 시간이 걸린 것일까?

 

 

 

 

자키스트카 (수색) 하는 러시아군

 

   그 답은 아마 작전을 입안한 다게스탄 내무부 장관 마고메타기로프 중장이 갖고 있었다. 작전 초기에 마고메타기로프는 김리 마을의 유력자들을 불러 모아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네놈들이 우리 고향에서 9명을 죽였으니 우리도 너네 마을에서 9명을 죽이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겠다."  

 

   마고메타기로프는 김리 마을에 대한 쌓인 감정도 해소하고, 다게스탄의 다른 마을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위와 같은 봉쇄를 8개월이 넘게 풀지 않았다.  당시 김리 마을은 다게스탄 정부의 공권력보다 샤리아의 영향력이 더 강한 지역이었다. 코카서스 전쟁 당시의 산민들의 수장인 이맘 가지 무하마드와 이맘 샤밀의 고향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 전통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마을 내에 술을 팔지 않았고 심지어 사우나 시설도 없었다. 이런 성향을 갖고 있고 상징성도 강한 김리 마을을 고분고분하게 만들면 향후에도 다게스탄 내 다른 마을 내에서 반군에 대한 동조를 감히 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코카서스 전쟁 당시의 김리 전투


  김리 지역의 반군들은 위와 같은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2009년 6월 5일, 다게스탄 수도 마하칼라의 한 예식장에 내무부 장관 아딜기레이 마고메타기로프가 참석했다. 부하의 딸이 결혼을 하여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오후 1시 5분, 예식장 근처에 있던 9층 건물 창문에서 총성이 들리더니 마고메타기로프의 심장을 철갑탄이 관통하였다. 이어서 다른 건물 9층서 총성이 들리면서 인근에 있던 다게스탄 내무부 지역 책임자인 압둘라자크 아바카로프의 머리를 맞추고 옆에 있던 8명의 경찰들에 부상을 입혔다.

 

 

 

아딜기레이 마고메타기로프가 암살된 현장

 

  9층 건물 위에서 다게스탄 내무부 장관을 암살한 사람은 김리 지역 반군 지휘관인 이바르임 가지다다에프였다. 가지다다에프는 러시아 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빈토레즈 저격총으로 위 예식장에 나타난 마고메타기로프를 자신이 직접 저격하였다. 자기를 잡기 위해 8개월이 넘게 마을을 봉쇄했던 내무부장관에 대해 그런 식으로 복수를 한 것이다.

 

 

 

 

 

 

 

 
- 카바르다 발카리아 캬로프 대령 암살
  2008년 1월 12일 저녁, 카바르다 발카리아 공화국 내무부 산하 조직범죄전담반 (UBOP) 지휘관인 아나톨리 카로프 대령이 본부 건물 근처에서 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가 근무하는 본부 건물은 카바르다 발카리아 공화국 수도 날치크 시내 중심가에 있었고, 인근에 마약전담팀과 기동타격대 막사가 있었고, FSB 본부, 2번 경찰서, 대테러팀 부서가 위치하고 있었다.

 

 

 

 

날치크 시내 카바르다 공화국 정부군

 

  카로프 대령이 지휘하는 조직범죄전담반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카바르다 발카리아 공화국 내의 반군들을 대적하기 위한 내무부 내의 특별부서였다. 독립적인 인원과 예산을 배정받는 그들은 반군 내에 광범위한 첩보망을 갖고 있었고, 정부 내에 암약하는 첩자들에 대한 동향도 파악하였다. 심지어 지역 이슬람 사회 내의 7살 이상의 남자아이들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였다. 장래의 반군이 될 위험요소인지 사전에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조직범죄전담부는 다양한 첩보 외에 생포된 반군에 대한 고문을 통해서도 정보를 얻어냈다. 카로프의 부하들은 고문을 너무나 가혹하게 했기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 고문당하던 사람이 창문으로 뛰어내려 죽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반군을 투항시키는데도 능했다.

 

 

 

 

 

카바르다 공화국 대테러팀

 

  이렇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카로프는 카바르다 발카리아 공화국 내에 반군들에 대한 효과적인 작전을 벌였다. 특히 2005년 10월 13일에 벌어진 날치크 전투에 있어서 사전에 정보를 탐지한 곳이 카로프의 조직범죄전담부였다. 이들은 당시 반군들이 사용하는 암호 체계까지 입수하여 공격에 참여하는 반군 세포조직들을 하나하나 상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조직범죄전담부를 공격하기로 한 반군팀의 은신처를 알아내서 사전에 기습하여 파괴하였다.  날치크 공세에 있어 사전에 정보를 얻어내고 반군들의 위치를 알아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기 때문에, 아나톨리 카로프 대령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무공훈장(Order of Valor)을 수여받았다. 반군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매우 유능한 군인이었다.

 

 

 

 

푸틴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은 아나톨리 캬로프

 

  이무렵 캬로프 대령은 카바르다 발카리아 반군 수장인 안조르 아스테미로프를 죽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조직범죄전담부는 자신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안조르의 소재를 확인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최소 3번의 기회를 잡았고 안조르를 죽이기 위해 시도하였다.

 

 그 중 한번은 2007년 여름 날치크 외곽인 크산야 지역에서 기회가 있었다. 당시 조직범죄전담부는 아스테미로프가 차를 타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조직범죄전담부 소속 타격대는 바로 차량을 에워쌓고 사격을 가했다. 아스테미로프는 불과 몇분 전에 차에서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번에는 날치크 시내 소겐추코프 거리의 번화가에서 아스테미로프가 반군 지휘관인 루슬란 오지에프를 만난다는 정보를 얻었다. 조직범죄전담부는 해당 지점을 기습하였다. 오지에프와 경호원은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아스테미로프는 그 자리에 없었다. 낌새가 이상했는지 모임에 늦게 나타난 것이다.

 

 

 

 

카바르다 반군 수장인 안조르 아스테미로프

 

  차에 타고 있던 캬로프 대령은 몇번의 불운을 생각하며 아쉬움이 울컥 솟았지만 다음에는 운이 좋기를 희망했다. 추격에 점점 성과가 보였고 그의 위치가 금새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아스테미로프를 죽이거나 체포한다면 날치크 전투 이래로 또 한번의 획기적인 승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캬로프는 직장 근처에 차를 세우고 내리려고 하였다.

 

  바로 그때, 캬로프 대령이 탄 차 근처로 2대의 차가 나타났다. 캬로프 대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가 멈춘 뒤, 창문이 열리고 AK소총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캬로프를 향해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들리자마자 캬로프 대령은 차에서 내려서 바닥에 엎드렸다. 옆에 있던 운전사와 경호원은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반군들은 계속해서 사격을 가했고, 이윽고 탄창을 바꾸려는지 총성이 멎었다. 캬로프 대령은 일어나서 차를 향해 권총을 몇발 발사한 뒤 뛰어갔다. 조직범죄전담부 본부로 들어서거나, 적어도 총성을 듣고 다른 사람이 뛰쳐나올때까지 도망쳐서 시간을 끌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암살을 직접 수행한 아스케르 쟈푸에프

 

   그러나 안조르 아스테미로프로부터 직접 암살 명령을 받은 아스케르 쟈푸에프, 일명 압둘라는 캬로프를 살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탄창을 갈자마자 사격을 계속해서 캬로프의 머리를 맞췄다.  압둘라는 캬로프가 쓰러진 뒤에 부하에게 직접 시체를 확인하라고 명령했다. 안조르 아스테미로프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캬로프를 죽이고 그 사실을 확인하라고 명령하였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이미 101발의 총알을 캬로프를 향해 발사된 뒤였지만, 그래도 행여나 죽지 않았을까 우려되어 부하 중 1명이 가서 확인하였다.

 

   캬로프는 즉사하였다. 손에 있던 마카로프 권총에 아직 총알이 몇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반군은 권총을 노획품으로 챙긴 뒤에 차량을 타고 신속하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에 근처에 위치한 다른 러시아군부대와 조직범죄전담부는 반군들을 추적할 수 없었다.

 

 

 

 

아나톨리 캬로프 대령이 암살된 현장

 

   카바르다 발카리아 반군 수장 안조르 아스테미로프는 조직범죄전담부 수장인 아나톨리 캬로프 대령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였다. 서로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첩보전을 벌였고, 상대방의 동선을 파악하여 암살할 기회를 노렸다. 그 과정에서 캬로프가 여러번 아스테미로프를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 대신에 캬로프가 해당 지점에 나타난다는 첩보를 얻은 아스테미로프는 반군 내의 특수팀 지휘관인 압둘라를 2008년 1월 9일부터 대기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약속된 지점에 1월 12일에 캬로프가 나타나자 해당 지점으로 즉시 이동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캬로프를 죽이도록 하였다.

 

 

 

 

카바르다 발카리아 반군

 

  카바르다 발카리아 반군은 이 작전을 위해 실행팀, 엄호팀, 예비팀을 편성하였고, 상대가 방탄복을 입었을 경우에 대비해 모든 반군이 각각 철갑탄을 휴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전이 지연되어 러시아군의 장갑차가 나타날 경우에 상대하도록 RPG와 원격 조종해서 터트리는 폭발물도 준비하였다. 필요하다면 엄호팀이 러시아 증원군과 교전을 벌여 시간을 끄는 동안 실행대나 예비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캬로프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카바르다 발카리아 반군은 자신들에게 가장 압박이 되었던 유능한 적장을 죽이는데 성공한다. 2004년 5월, 아흐마드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로 친러시아 진영 최대 손실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건 이후로 안조르 아스테미로프는 보다 수월하게 작전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안조르 아스테미로프

 

  이후 체첸 반군들의 인터넷 사이트인 '카프카즈센터'에서 안조르 아스테미로프에게 '해당 작전은 러시아 군시설이 밀집된 지역인데, 이 작전은 순교를 전제로 한 작전이었나?'라고 물어보자 아스테미로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실행하는 작전은 가장 쉬운 것이라해도 언제든지 마지막 작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풍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지하드를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작전을 소홀하게 짜지는 않는다. 우린 대원 하나하나의 목숨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에 작전 실행에 있어 성공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작전이 종료된 뒤에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한 여러 경로의 탈출로를 마련한다."

 

 선전에 능한 아스테미로프는 위와 같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전과를 최대한 활용하였고, 카바르다 공화국 내에서 정부군과의 교전에 있어 분위기를 일신하였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2004_Avtury_raid
         http://www.kavkazcenter.com/eng/content/2004/07/14/2989_print.html
         http://english.pravda.ru/hotspots/conflicts/13-07-2004/6158-chechen-0/
         http://en.wikipedia.org/wiki/Gimry_fighting
         http://en.wikipedia.org/wiki/Adilgerei_Magomedtagirov
         http://www.watchdog.cz/?show=000000-000008-000001-000480&lang=1
         http://www.watchdog.cz/index.php?lang=1&show=000000-000008-000001-000490
         http://www.peaceinthecaucasus.org/node/3209
         http://en.sknews.ru/photo/792-felling-of-the-forest.html
         http://www.rferl.org/content/Daghestans_Interior_Minister_Gunned_Down/1747610.html
         http://www.jamestown.org/single/?no_cache=1&tx_ttnews%5Btt_news%5D=33288
         http://www.jamestown.org/single/?no_cache=1&tx_ttnews%5Btt_news%5D=4662
         http://kavkazcenter.com/eng/content/2008/03/05/9389.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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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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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James Lee | 작성시간 11.11.07 처음부터 여기까지 쉬지 않고 읽었네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4.15 저도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 작성자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작성시간 12.02.05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달만에 왔는데 아직 새 편이 안나왔데요. 기다릴게요 ㅋ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4.15 글을 쓰는게 쉽지 않고 다른 까페에서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좀 오래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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