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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18. 훈련장

작성자jager|작성시간08.11.28|조회수2,997 목록 댓글 23

 

 

 

 

     " ..... 우리는 세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갔고 그루지아군 일부를 포로로 잡았다. 다음 날 아침에 도시 외곽의 그루지아군 중앙을 돌파하여 분쇄하였고 고속 도로를 장악하였다. 거기서 가그라 도심으로 진격하자 그루지아군은 포위된 채 공황에 빠졌다. 오후가 지나자 우리는 도심을 장악하고 도시의 나머지 영역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   1997년, 샤밀 바사예프의 가그라 전투 회고

 

 


   체첸의 독립선언에 이은 두다예프의 단호한 자세는 러시아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이제 막 소련의 붕괴로 인한 엄청난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안간힘을 쓰던 옐친으로서는 대규모 유혈사태를 불러 올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또한 극한의 경제난 속에서 속으로부터 곪아버린 러시아군의 상황이 그런 전쟁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우선 급한 것은 구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은 수많은 소수민족들과의 관계를 다시 정하는 것이었다.

 

  1992년 3월, 러시아 대통령 옐친과 하원의장인 루슬란 하스블라토프 - 그 역시 체첸인이었다. - 는 러시아 연방 내의 88개의 자치 공화국 중 86개의 공화국과 '연방 협정'을 체결하였다.  각 자치공화국은 분리 독립을 포기하고 러시아 연방에 잔류하는 대신, 광범위한 자치권과 조세 특권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으로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러나 2개 공화국이 이 협정에 체결하지 않았다. 체첸과 타타르스탄이었다. 옐친은 각고의 노력 끝에 1994년 봄에 타타르스탄 대통령에게 더 많은 자치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연방 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러시아 연방의 88개의 자치주 중에서 체첸 만이 러시아 연방에 잔류 의사를 밝히지 않은 유일한 자치주가 되었다.  두다예프와 옐친, 특히 두다예프는 이에 대한 진지한 협상을 하려는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코카서스 지역은 수많은 민족들이 실타래처럼 엉킨 곳으로, 거기에 호전적인 산악민족의 특성상 언제든지 분쟁의 소지가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특히 스탈린의 통치 하에 몇몇 민족을 강제 이주시키고 남은 민족들로 다시 국경선을 긋게 하는 식의 조치는 이에 기름을 끼얹었다. 강력한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민족주의의 욕구를 억누를 수 있었지만, 소련의 붕괴는 이들 사이의 오랜 감정을 폭발시키게 하였다. 각종 분쟁이 코카서스 지역 곳곳에서 시작되었다.

 

   체첸인들에게 이런 분쟁의 현장은 그들이 실전 경험을 얻을 수 있는 훈련장이었다. 그들은 러시아가 곧 체첸을 침공할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우수한 전사를 양성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코카서스 각지의 분쟁지로 자원하여 떠났다.

 

 

 

 

 

나고르노 - 카라바흐 분쟁

 

    첫번째 전장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었다.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내의 아르메니아인 다수 거주지였던 나고르노 - 카라바흐 지역은 스탈린 시절에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아제르바이젠은 자신의 공화국 안의 영역이라며 소유권을,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인이 다수라는 이유로 역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이 다툼은 1992년부터 전면적인 분쟁으로 비화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우수한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각지에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특히 이슬람교가 다수였던 아제르바이잔은, 자신들의 상대인 아르메니아가 그리스정교라는 점을 부각시켜서 이슬람교를 믿는 우수한 전투 병력인 '아프간 무자헤딘'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하였다. 내무부 장관을 특사로 보내서 병사 개개인 당 한달에 미화 수백 달러를 주겠다는 약속을 통해 1993년부터 천명에서 3천명 사이로 추정되는 아프간 무자헤딘의 증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무자헤딘' 중에는 1992년에 이미 개인적인 노력으로 나고르노 - 카라바흐 지역에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소련의 아프간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자원해서 참전하고 오른손의 4개 손가락을 잃은 사우디 출신의 전설적인 게릴라 지휘관이 있었다. 본명은 사미르 살레 압둘라 알 수웨일렘. 일명 이븐 알 하타브였다.

 

 

 

 

이븐 알 하타브

 

   또한 독립선언 이후에 새로운 전장을 찾아 떠난 체첸인들도 이곳에 자원해서 왔는 데, 정확한 인원은 파악되지 않지만 역시 수백명이 넘었다. 아제르군 대령인 루스타모프는 2005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들 중에 샤밀 바사예프와 살만 라두예프가 있었으며, 그들의 부대는 우수했으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샤밀 바사예프가 언제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나타나서 언제 사라졌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992년 5월에 있었던 중요한 전투인 '슈사 전투'에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 전투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수도인 스테파나케르트를 포격할 수 있는 슈사 요새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공세로, 향후 이 분쟁에 있어서 아르메니아의 우세를 확실하게 만든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1992년 4월, 아제르바이잔 군은 슈사의 거점에  BM-21 그라드 다연장 로켓포 포대를 구축하고 스테파나케르트로 일제 포격을 가했다. 인구 7만의 도시에 대해 157발의 로켓을 하루 동안 날린 이 포격으로 2천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다. 아르메니아군은 슈사를 장악하여 두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작전을 구상했다.

 

 

 

 

슈사 고지로 가는 능선

 

  작전은 강력한 요새였던 슈사 고지를 우회하여 주변 마을을 점거하고, 수비군이 동요하여 주변으로 흩어지면 즉시 주공을 투입하여 슈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5월 8일에 대규모 포격 이후에 아르메니아군 1천명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공세의 핵심은 '다슈나흐 (아르메니아 혁명 연합) 전투단' 이었다.

 

   슈사에 있던 아제르바이잔군은 이 공세에 대처할 병력도 부족하였고, 그들의 훈련도도 떨어져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공세가 시작되어 포위 조짐이 보이자 전방의 거점을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양군이 각각 보유하던  T-72 전차 사이의 유명한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날 저녁 쯤 되자 아르메니아군은 슈사를 거의 장악하였다. 수비군은 남쪽을 향해 도주하였다.  

 

  체첸 의용군은 이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교전하였고, 가능한 진지를 고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불과 수백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1천명의 아르메니아군 공세를 버틸 수는 없었고 결국 슈사를 버리고 퇴각하였다. 샤밀 바사예프는 포로가 되기 직전까지 버티다가 마지막으로 슈사를 빠져나왔다고 전한다.

 

 

 

 

 

슈사를 점령한 아르메니아 다슈나흐 전투단

 

  훗날 2000년의 인터뷰에서 샤밀 바사예프는 "슈사는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충분한 비축 무기와 훌륭한 방어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아르메니아군의 공세가 1천에 달했지만 허세에 불과했으며, 만약에 1백명의 우수한 병사가 적절하게 지휘를 받고 사수했으면 1년도 버틸 수 있었다. 슈사는 포기된 거점이며 누구도 이에 책임지지 않았다.." 고 하였다.

 

   샤밀 바사예프는 이 전투 이후로는 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데, 아마 얼마되지 않아서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바사예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교도에 대한 이슬람 저항이 아니라 단순히 민족간의 분쟁인 것을 깨닫고 굳이 자신이 싸울 이유를 잃고 체첸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샤밀 바사예프는 이 전장에서 아프간 무자헤딘인 이븐 알 하타브를 알게 됬으며, 그에게서 국제적 지하드 이념과 풍부한 전투 경험을 교육받게 되었다고도 한다.

 

 

 

 

살만 라두예프. 훗날 바사예프에 비견되는 체첸군 지휘관이 되는 그도 여기서 첫 실전경험을 쌓는다.

  
    체첸인들이 슈사의 전투에서 아르메니아군에게 패배한 기억을 잊어버릴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또 다른 전장이 코카서스 산맥 서쪽 끝의 압하지아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1991년에 그루지아는 소련의 붕괴 이후에 독립을 선언하고 이를 얻어냈지만, 그 다음해에 자신의 공화국 내의 남 오세티야와 압하지아도 그루지아로부터 독립하겠다고 하자 이를 러시아의 책동으로 보고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압하지아와 그루지아의 대립은 계속 격화되다가 1992년 8월에 그루지아 군이 압하지아를 침공하면서 분쟁으로 번졌다.

 

 

 

 

압하지아 분쟁

 

   그루지아군은 압하지아 수도인 수쿠미를 점령하고 북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압하지아 서북쪽 끝인 가그라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압하지아 반군들의 마지막 거점인 구다우타를 향해 공세를 벌이기 직전에, 러시아 정부의 중재로 양측은 협상에 들어갔다. 9월 3일, 압하지아 대부분에 대한 그루지아의 통치권 인정과 북쪽 가그라 지역의 그루지아군 퇴각을 약속하고 양측은 휴전에 합의하였다. 이를 통해 압하지아 측은 숨통을 틀 수가 있었고, 그루지아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압하지아는 그루지아의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각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한 것은 물론, '코카서스 산악 민족 연합' 에도 도움을 요청하였다. 코카서스 산악 민족 연합은 1989년에 압하지아 수쿠미에서 결성된 조직으로 1918년에 조직되고 백군에게 분쇄되었던 '북 코카서스 공화국'의 후예를 자처하였다. 이 연합은 체첸, 잉구쉬, 아디게, 카바르다, 체르케시, 압하지아, 아바르 족 등 산악 민족들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 코사크 족과 압하지아 지역의 아르메니아 인까지도 포괄하는 광범위한 조직체였다.

 

 

 

 

코카서스 산악 민족 연합 의용군

 

  '코카서스 산악 민족 연합'은 그루지아의 압하지아 침공을 산악 민족에 대한 침공으로 규정, 이에 맞서기 위한 의용군을 편성한다. 병력은 5백명에서 1천 5백명 선으로 추정되며, 그 중의 절반이 체첸인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정부의 묵인 내지는 지원 속에서 코카서스 전역에서 압하지아로 이동한다. 당시 러시아 국경 수비대의 증언에 의하면, 샤밀 바사예프와 수십명의 체첸인들이 압하지아 국경 근처에서 검문에 걸렸는 데, 러시아 군 정보총국인 GRU의 높은 선에서 압력이 들어와서 그들을 통과시켜줬다고 한다. 의용군에 자원한 체첸인 중에는 훗날 '검은 천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지는 루슬란 겔라예프도 있었다.

 

 

 

 

'검은 천사' 겔라예프. 바사예프와 함께 압하지아 전장에 참전한다.

 

   러시아는 이들의 참전을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GRU의 장교들을 통해 그들을 우수한 정예 병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훈련까지 시켰다. 이 중 게릴라 전술과 지휘 교육까지 받은 체첸인 중에 샤밀 바사예프가 있었다. 이 때문에 바사예프가 실은 러시아 GRU의 요원이라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었다. 그러나 바사예프가 러시아 정보국 요원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많으며, 단지 러시아 정부의 생각은 일석이조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즉 그루지아의 압하지아 점령을 저지하고 그루지아의 군 전력에 타격을 주며, 동시에 코카서스 지역의 잠재적 분리독립 요소들을 그루지아의 손으로 소모시키기를 바란 것 같다.
 
   압하지아와 '코카서스 연합'의 반격은 1992년 10월에 가그라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9월 3일의 휴전 합의를 충실히 이행한 그루지아군은 가그라 지역에 불과 수백명 만이 남은 상태였다. 먼저 그루지아군이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압하지아의 항의에 이어, 10월 1일에 압하지아 반군과 '코카서스 연합'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T-72 전차, BM-21 그라드 다연장 로켓포를 장비한 3천 - 4천 병력으로 기습을 가했다. 여기에 수호이 전폭기와 하인드 헬기의 증원까지 받으며 그루지아군을 박살내고 다음날 가그라를 점령하였다.

 

 

 

 

가그라 전선의 파괴된 그루지아군 군용 버스

 

   이 공세의 주축은 '코카서스 연합'의 지원군들이었으며, 가그라 전선 사령관인 샤밀 바사예프가 지휘하였다. 우수한 지휘 능력을 발휘한 바사예프는 여세를 몰아서 서부 압하지아 전역을 석권하였는 데, 이 전공으로 인해 바사예프는 '코카서스 연합' 파견군 사령관이 된다. 연합 전병력을 지휘하게 된 바사예프는 대담한 작전을 구상한다.

 

  가그라 전투에서 예봉이 꺾인 그루지아군은 수세에 몰리는 데, 1993년 3월이 되자 압하지아 수도 수쿠미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바사예프는 '코카서스 연합' 지원군 중에 오세티아인과 카바르다인 출신 부대를 추려내서, 압하지아 남쪽의 오참치라 지역에 상륙시켜 양동작전을 벌이게 하였다. 상륙한 부대의 절반이 전사하고 파괴되는 동안, 압하지아 군과 바사예프가 지휘하는 체첸인들은 구미스틴 전선을 돌파하고 수쿠미 주변의 산악 고지를 점령한다. 즉 오세티야인과 카바르다인이 그루지아군에게 죽어가는 동안에 나머지 부대로 중요한 전략 요충지를 점령한 것이다.

 

 

 

 

코카서스 의용군

 

  궁지에 몰린 그루지아는 7월에 압하지아와 다시 휴전협정을 맺지만, 압하지아군은 9월 말에 다시 공세를 벌여서 12일의 치열한 전투끝에 결국 수쿠미를 함락시킨다. 이 공세에 코카서스 연합의 체첸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전한 것은 물론이다. 그루지아는 압하지아 거의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코도리 계곡의 스바네티야 마을 만이 마지막 그루지아 거점으로 남게 된다.

 

   이 전쟁에서 바사예프는  압하지아 내무부 장관과 군사고문 직을 얻게 되고 '공화국의 영웅' 훈장도 수여받게 된다. 또한 구다우타에 있는 대조국 전쟁 기념관에 그의 사진이 걸리게 된다. - 베슬란 학교 테러 사건 이후로 이 사진은 떼어진다. - 마치 아제르바이잔에서의 하타브가 그런 위치에 있는 것처럼, 바사예프도 압하지아에서 영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압하지아 전쟁의 체첸 의용군

 

   그러나 민족 분쟁이 대개 그러한 것처럼 압하지아 분쟁도 처참한 인종 청소가 병행되었다. 특히 압하지아 인에 의한 그루지아인의 숙청과 추방, 학살이 많이 발생하였다. 압하지아인 3천명이 그루지아 공세 초기에 학살되어고, 이어진 압하지아의 공세에 의해 1만 3천에서 2만에 달하는 그루지아인이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특히 샤밀 바사예프가 지휘하는 체첸인 부대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고, 가그라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에 체첸인들은 그루지아군 포로 100여명을 체육관에 몰아넣은 뒤에 한명한명 목을 베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벤 목을 갖고 축구를 했다는 끔찍한 증언도 있다. 그루지아군에게 이 사실이 널리 퍼지면서 그들은 경악하게 되었고, 심지어 체첸인들이 전장에 나타났을 뿐인데도 그루지아인들이 도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루지아인들은 압하지아 전쟁을 회상하며 "샤밀 바사예프와 체첸인들이 그루지아인의 피를 들이키며 악마같이 웃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분쟁지를 누비면서 샤밀 바사예프는 충분한 전투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그와 같이 동행하며 여러 전장에 참전했던 체첸인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휘하에 모여들게 되었고, 그 규모는 2백에서 5백명 선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압하지아 병단'을 구성하며, 체첸군 중에서 가장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가장 우수한 병력으로 인정받으며, 훗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주축을 형성한다.

 

 


출처 :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s
            Yossef Bodansky의 Chechen Jihad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Shamil_Basayev
            http://en.wikipedia.org/wiki/Georgian-Abkhaz_conflict
            http://en.wikipedia.org/wiki/War_in_Abkhazia
            http://en.wikipedia.org/wiki/Confederation_of_Mountain_Peoples_of_the_Caucasus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Gagra
            http://en.wikipedia.org/wiki/Nagorno-Karabakh_War
            http://www.realinstitutoelcano.org/wps/portal/rielcano_eng/Content?WCM_GLOBAL_CONTEXT=/Elcano_in/Zonas_in/International+Terrorism/DT20-2008
           http://www.watchdog.cz/?show=000000-000005-000004-000151&lang=1
           http://kr.youtube.com/watch?v=zNlwYe4B6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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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08.12.02 오랜만에 와서 쭉 읽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작성자TheKing | 작성시간 08.12.02 요청한지 얼마 안되서 바로 만들어주시는 관리자님 최고 -_-b
  •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2.09 부족한 글을 위해 새로 게시판을 만들어주신 운영자님께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08.28 체첸 전사들이 정말 무시무시하군요... 잉구세티아는 오세티아에게 영토를 반환받아야 하고...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의 반환요구를 지켜야하고... 압하스와 남오세티아는 그루지아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하고... (기독교국가 :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기억해야할게 참 많네요^^ 코카서스 산악민족연합 연합 : 체첸, 잉구쉬, 아디게, 카바르다, 체르케시, 압하지아, 아바르족, 코사크족, 오세티아, 압하지아의 아르메니아인까지 포괄... 음~ 발칸지역보다 훨씬 복잡하네요... 녹슨화약고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어쨌든 그루지아나 산악민족이나 불행한 역사의 후손들이네요... 더군다나 그루지아는 삼분될 처지군요...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1.30 허걱!!!..용맹하면서도 무척 잔인한 체첸인들이네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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